평등과 차별
중국 당나라의 명승 ‘투자 화상
投子 和尙’의 처소에, 어느
수행승이 찾아왔다.
“모든 소리는 부처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정말입니까?”라고 묻는다.
투자 화상은, 답한다.
“그렇다. 일체의 음성은 부처의 소리다”
“그렇다면 방귀도 부처의
소리(佛聲)입니까?”
투자 화상은, 아주 호되게
그 스님을 때려눕혔다.
그런데 이 스님은 다시,
“경전에서는 조악하고 난폭한 말이라도,
또한, 정말 부드러운 말이라도 다
‘부처의 최상의 소리(佛聲第一義)를
설하고 있다’고 있습니다.
이것도 진실입니까?”라고 묻는다.
투자 화상은 “그렇다”라고 답한다.
“그렇다면 화상을 천하의
대선지식이라고 부르는 대신,
한 마리 ‘당나귀’라고 불러도 됩니까?”
투자 화상은, 이 스님을 큰소리로 호통친다.
너무나 그 태도가 무례했기 때문이다.
『碧巖錄』 79則
운동선수는, 프로선수와 아마선수로 나뉜다.
프로는, 돈을 받고 하는 것이고,
아마추어는, 돈을 주고 배우고 있는 것이다.
물론, 프로중에도 실력이 떨어지는 사람도 있고,
아마추어 중에도 실력이 출중한 사람도 있다.
불교인에게도, 프로가 있고 아마추어가 있다.
인간은 다 평등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지위와 역할에 따라
짊어지는 책임은 다소 다르다.
책임의 중함이나 사회에서 맡고 있는,
역할이 다른 인간이 현실적으로
평등일 리가 없는 것이다.
스님과 신도는, 인간적으로는 평등하지만,
살아가는 방식과 역할은 다르다.
어느 신도가 그런다.
“스님도 우리도 다 같은 인간인데,
평등하게 합시다.”라고.
“그래요!? 그럼 서로 자리를 바꾸어
역할 해볼까요.”라고 나는 말한다.
눈은 두 개, 코는 하나로, 누구나 평등하지만,
그 눈과 코가 하는 역할과 작용은, 아무리
평등한 인간이라도 전혀 다르다.
감사하는 눈/째려보는 눈.
살리는 코/죽이는 코.
같은 감각기관인데도 불구하고
어찌 이리 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