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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씨의 고민 / 손성훈
코리언 타운이라 불리는 캠시에서 가까운 어느 공원, 한국의 날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교포 말고도 구경 나온 각종 인종들로 공원은 장터처럼 붐볐다. 그중 한국에서 입양한 아이를 데리고 나온 호주인들, 한국전쟁에서 싸웠던 퇴역군인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더운 날씨였다. 빌리 씨는 나무그늘 아래서 땀을 식히며 태권도 시범이 벌어지고 있는 장면, 늘어서 있는 음식코너, 할인판매대의 군중들을 휘둘러보고 있었다.
‘한국인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50여 년 전에 바로 그들을 위해 싸웠던 것이다. 장교로서 참전했고 혁혁한 무공을 세워 훈장도 여러 개 받았다. 그러나 다른 참전용사와 달리 그는 단 한 개의 훈장도 달고 나오지 않았다. 곁에 누군가 다가섰다.
“소대장님, 안녕하십니까.”
상병으로 참전했던 오코너 씨였다. 그는 가슴 위에 번쩍번쩍 빛나는 수훈십자훈장(DSO: Distinguished Service Order)을 달고 있었다. 빌리 씨는 그와 악수를 나누며 짐짓 미소를 지었다.
“훈장이 잘 어울리는군요.”
“고맙습니다. 정말 제게 잘 어울립니까? 덕분에 오늘 하루는 으쓱해질 것 같군요.”
웃으며 말하는 오코너 씨의 얼굴엔 왠지 한 가닥 쓸쓸한 빛이 비쳤다. 그때 사고만 나지 않았어도 정말 이런 훈장을 받고도 남았을 텐데……, 오코너 씨는 불운했던 그 당시를 떠올렸다.
그가 3연대 소속으로 부산지역에 배속된 때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UN연합군이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남침을 개시한 이래 불과 며칠 만에 서울을 함락한 북한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반도의 조금 남은 땅을 곧 핥아버릴 듯한 맹렬한 기세로 덤벼들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달라졌고 낙동강전선은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한 싸움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는 얼른 전투에 참가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많은 전과를 올려 수많은 훈장을 가슴에 달고 고향에 영웅처럼 개선하고 싶었다. 용감하게 지원한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의 밝은 햇살이 막사의 창을 뚫고 들어왔을 때 그는 잠자리에서 눈을 떴고, 동료를 통해 이름도 생소한 한국이란 나라에서 전쟁이 벌어졌음을 알았다. 그는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먼 나라의 전쟁과 자신이 무관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7월 26일, 호주수상은 한국전에 육군을 투입한다고 발표했다. 그 전에 소수의 공군과 거기에 따른 약간의 보병대대를 파견한데 이은 본격적인 참전이었다.
그에겐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다. 같은 부대에 근무하는 고향친구도 또한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친구가 전쟁에 지원했을 때 오코너 씨는 빠질 수가 없었다. 빛나는 전과를 세워 라이벌인 친구를 누르고 애인의 환심을 살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낙동강전선에 투입되기 며칠 전 일이었다. 친구와 함께 부대 일로 지프차를 몰고 시내로 나갔다가 우연찮게 술을 마시게 되었다. 둘은 여자에 대해 얘기하며 깨끗한 승부를 벌이기로 합의했다. 누가 더 용감히 싸워 일급무공훈장을 받느냐 여부에 따라 애인을 차지하기로 약속했다.
부대로 가는 길엔 오코너 씨가 운전대를 잡았다. 술에 취해 가로등도 없는 시커먼 길을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아차 하는 사이 휘어진 길에서 미끄러지며 그만 논두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 사고로 친구는 가볍게 다친 정도에 그쳤으나 그는 중상을 입고 야전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치료가 오래 걸릴 것 같다는 군의관의 진단으로 몇 주 뒤에 그의 청원에도 아랑곳없이 본국으로 후송되었다. 그의 친구는 후에 낙동강, 사리원, 가평전투 등에서 뛰어난 공을 세워 많은 훈장을 받았다. 결국 사내대장부의 약속대로 친구는 여자를 차지했고 그녀와 결혼했다.
지나간 오랜 세월을 오코너 씨는 마음 한구석에 늘 커다란 응어리를 간직하고 살아왔다. 차라리 전투에 참가해서 장렬히 전사했으면 이보다는 나았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생각도 들었다. 술 취해 사고를 저질러 후송된 것은 영원히 잊지 못할 치욕이었다.
가슴에 사무친 훈장에 대한 한은 칠십 고개를 넘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호주의 현충일인 안작 데이(Anzac Day)나 무슨 재향군인회 모임 같은 데서 훈장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사람들을 볼라치면 쓰라린 옛 추억이 자꾸 되살아나며 괜히 왔구나 싶었다.
훈장에 대한 열등감으로 그는 사회에서도 늘 실패자란 생각이 들어 매사에 자신이 없었다. 우울한 삶이었다. 행복할 때가 있다면 훈장에 대한 환상에 잠길 때였다. 포화 속에서 영웅처럼 싸워 가슴이 쳐지도록 찬란한 훈장을 다는 환상이었다.
오코너 씨는 어느 한국교포단체가 주최한 한국전 참전용사를 위한 만찬회에 큰맘 먹고 나갔다가 소대장이었던 빌리 씨를 만나게 되었다. 그 곳에서 그는 자신의 억울하고도 답답한 심정을 술김에 모두 빌리 씨에게 털어놓았다.
다음날, 빌리 씨는 오코너 씨의 집을 방문했다. 빌리 씨는 전쟁에 참가한 군인이라면 한번쯤 받고 싶은 그 유명한 수훈십자훈장을 내밀었다.
“자, 이것을 선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목숨을 걸고 싸워 얻은 것이 아닙니까. 그 명예로운 훈장을 왜 제게 주시는 겁니까?”
“그때 그런 사고만 안 났어도 당신은 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더 훌륭한 훈장을 받았을 겁니다.”
“그것은 전투도 아닌 술을 먹고……”
“전쟁터에서 술을 먹지 말라는 군법은 없습니다. 싸움을 앞두고 용사가 술을 마심은 잘못된 게 아니지요. 단지 운이 없었던 관계로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겁니다. 당신은 충분히 영웅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정말일까요? 그렇게 됐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물론입니다. 그러기에 이 훈장을 아낌없이 드리는 게 아닙니까.”
“그래도……”
“나는 달만큼 달았습니다. 또 다른 훈장도 있고요.”
그래서 오코너 씨는 외투에 붙은 초라한 참전메달을 떼어내고 빌리 씨가 준 훈장을 달고 나왔던 것이다.
그가 집을 나서기 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았을 때 훈장으로 인해서인지 평소와는 다르게 보였다. 거울 속에서 당당히 버티고 서 있는 역전의 용사를 발견하자, 그간의 가슴 아픈 회한이 모조리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사고가 나지 않아 실제로 이런 훈장을 받았다면 직업군인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참으로 그는 오랜만에 자부심을 느꼈다.
빌리 씨는 흐뭇한 표정의 오코너 씨를 따스한 눈으로 보며 치열했던 전투를 되새겨보았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전투였었다. 냉전(Cold War)이라 불린 3년간의 전쟁에 호주군인 281명이 죽었고 1,257명이 부상당했다. 수만 명을 잃은 미군과 오십만을 잃은 한국군에 비하면 얼마 안 되어 보이지만 참전 군인수로 따져볼 때 그것은 엄청난 피해였다. 그들 개개인이 어떤 명분으로 죽어갔던지 간에 죽은 자의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특히 부상당한 자들 중 일생을 휠체어나 목발에 의지해서 보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 않은가. 한국정부나 교포단체에서 격전지 기념방문초청이나 만찬회 따위로 그들이 걸어온 고통스러웠던 일생을 다 보상해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것이다.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자 허리를 잘린 적은 보급로의 차단과 양면공격의 두려움으로 낙동강전선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교착상태에 빠졌던 전선이 아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적의 저항은 그런 중에도 완강했다. 빌리 씨는 공산군을 퇴치해 한국에 자유를 심어주겠다는 일념으로 생사를 돌보지 않고 싸웠다. 그는 소대원을 이끌고 적의 참호에서 마구 퍼부어대는 소련제 쉬파긴 중기관총의 탄화를 뚫고 돌진했다. 그리고 그들의 참호를 하나하나 점령해나갔다.
마침내 태백산맥 쪽으로 북한군이 퇴각했을 때 그들의 진지 사방엔 엄청난 수의 시체가 땅바닥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야말로 시체가 산을 이뤘고 낙동강물이 피로 물들었다는 표현이 과장만은 아니었다. 아군의 피해도 만만찮았으니 말이다.
승세를 굳힌 연합군은 9월 26일엔 서울을 탈환했고 그 기세를 몰아 10월 19일에 평양까지 점령했다. 빌리 씨의 부대도 대구에서 출발 서울을 거쳐 평양, 압록강까지 진격하게 되었다.
사리원 근처였다. 을씨년스럽게 내리던 비가 멎자 금천과 사리원 사이의 비포장도로는 수렁으로 변했다. 북진하던 그의 부대가 질척거리는 진흙탕의 좁은 길을 빠져나가려 애쓰고 있을 때 승승장구로 진격하던 제5기병대 소속의 미군도 마침 그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자 그 근방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트럭과 지프차는 깊은 수렁 속에서 허우적거렸고 탱크들은 우왕좌왕했다.
북쪽의 겨울은 빨리도 다가왔다. 해가 진다 싶었을 때쯤 갑자기 추위가 몰려오며 진흙탕이 꽝꽝 얼어붙었다. 그러니 이동에 더욱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빌리 씨는 차에서 내려 교통정리를 했다. 그의 부대가 그 마의 길에서 막 벗어났을 즈음 바닥에 미끄러진 어느 병사를 부축하려고 허리를 굽혔을 때였다. 핑, 하고 총탄이 그의 머리 위로 스쳐지나갔다. 어디엔가 숨어있던 저격병의 총질이었던 것이다. 그는 병사와 함께 언 땅 위에 엎드려 응사했다. 적의 사격은 곧 중지되었다. 저만치 가던 미군탱크가 주춤하더니 몇 발의 포탄을 날렸던 것이다.
이런 경우는 죽을 뻔했다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다가올 전투는 끔찍하고도 위험스러웠다. 갑작스런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던 것이다. 51년 1월 4일 서울이 적에게 함락되어 연합군은 청주까지 후퇴했다가 다시 3월 14일에 서울을 수복하여 휴전선까지 밀고 올라가는 식으로 싸움은 누가 이기고 지는지 모르게 전개되었다. 빌리 씨는 가장 추운 달인 1월을 ‘동상고지(Frostbite Ridge)'라 불린 장호원리 전투 등의 크고 작은 싸움에 참가했으나 특별한 부상을 입거나 하지는 않았다. 기가 막히게도 중공군은 쓰러진 연합군측 군인들의 소지품은 물론 구두에 양말까지 벗겨갔다. 하기야 그들은 헝겊으로 발을 가린 정도였으니 탐이 날만도 했을 것이다.
51년 4월 가평, 안작 데이를 며칠 앞둔 날이었다. 날씨는 쾌청했다. 봄날의 밝은 태양빛이 산과 들을 밝게 물들이고 있었다. 빌리 씨의 3연대는 한국군 6사단과 뉴질랜드 16야전연대 그리고 미 105미리 야포대와 합류하고 있었다.
호주 참전 중 ‘가장 치열한 전투’로 기록될 싸움이 바야흐로 벌어질 참이었다. 제3야전군 60사단의 중공군 대병력이 임진강 쪽에서 가평을 향해 진격해오고 있었다. 그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빌리 씨의 부대는 연합군이 일단 저지선(UN Line)으로 철수할 동안 시간을 벌기 위해 적의 공격을 지연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연어와 정어리언덕(Hills Salmon & Sardin)의 호주군을 향해 공격하는 중공군은 바다의 밀물처럼 산야를 덮었다. 반대편 가평계곡의 좁은 길엔 급히 철수하는 연합군의 차량과 군인들로 뒤범벅이 된데다 언덕을 넘어 날아온 포탄에 탱크가 화염에 싸이며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다.
빌리 씨와 부대원들은 이틀간을 버티었다. 그 덕분에 연합군은 무사히 철수작전을 완료했지만 지프차를 타고 작전지휘 하던 빌리 씨의 대대장이 박격포탄에 맞아 즉사했고 많은 부대원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빌리 씨도 어깨와 허벅지에 총상을 입은 채 남은 부대원과 함께 야음을 틈타 후퇴해야 했다.
그 뒤 후송된 빌리 씨는 일 계급 특진에 수훈십자훈장을 받았다.
빌리 씨는 감회가 새로웠다. 그 치열했던 전투에서 살아남았던 것은 기적이었다. 그때 부상을 안 입었으면 다른 전투에서 죽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수많은 인명이 희생당해 얻은 명분과 이익은 무엇인가. 한국은 아직 두 동강이로 중간엔 철책 선에 가로막혀 있고 얼마 전까지 독재정권, 두 번의 쿠데타에 의한 군사정치로 몸살을 앓아왔다.
다행히 문민정부가 들어섰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빌리 씨의 전쟁참여에 대한 회의감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의 고민이 빌리 씨에게 있었는데, 다름 아닌 통일이 되어 민족이 다시 합쳐졌을 때 연합군편에 서서 싸웠던 군인들은 어찌되었건 죽은 북한군 가족이나 친척 또는 친구의 원수로 주목 받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일전에 호주에서 벌어졌던 어떤 경기에서 한국교포들은 다른 나라와 겨루는 북한 팀을 응원했다. 남한 팀과 경기를 벌일 땐 거의 동등하게, 어떤 면에선 북한선수들에게 더 많은 박수를 보내주지 않았던가.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같은 민족은 어쩔 수 없이 독일처럼 언제든지 통일이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인 것이다.
남북한엔 천만의 이산가족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신에 의해 목숨을 앗긴 북한군의 가족이나 친척이 남한에 몇 명이나 되는지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때 만약 연합군이 참전 안 했다면 서로간의 피해도 훨씬 덜 입었을 것이다. 공산주의라고는 하지만 통일이 되어 있을 것이고 소련과 동구가 무너졌듯 언젠가는 민주주의로 바뀔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폐쇄된 북한사회를 생각한다면…….
빌리 씨는 혼란스러워졌다. 무엇이 정의고 무엇이 불의란 말인가. 열강의 싸움터로 변했던 한국 땅, 확실한 것은 단순한 이념의 차이로 크나큰 살상이 벌어졌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슬픔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이다. 빌리 씨는 생각할수록 깊은 탄식만이 나왔다.
사진기를 둘러맨 한국교포가 오코너 씨를 향해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한국전 참전용사신가 보죠?”
“예, 그렇습니다만…….”
“전 이곳 교포신문의 기잡니다. 이번에 특별기획으로 한국전쟁과 호주 참전 군인에 대한 기사를 쓸 예정인데 협조해주시겠습니까?”
“아니, 나보다도…….”
오코너 씨는 빌리 씨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빌리 씨는 오코너 씨를 가리키며 기자에게 말했다.
“이 분은 한국전에서 용감하게 싸웠던 진짜 군인입니다.”
“그럴 것 같아서 제가 이리 온 것 아닙니까. 좀처럼 보기 드문 훈장을 달고 계시니 얼마나 많은 전공을 세웠겠으며 또 무용담이 있겠습니까. 하하하.”
한국인 기자가 껄껄거리자 오코너씨도 허허, 하고 따라 웃었다.
“우선 저쪽 한국 사람들이 많은 곳을 배경으로 사진부터 하나 찍읍시다.”
오코너 씨는 다시 빌리 씨를 보았다. 빌리 씨는 그에게 얼른 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제야 마지못한 듯 오코너 씨는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에선 뜨거운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빌리 씨는 짐작할 수 있었다.
빌리 씨는 씁쓰레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들었다. 호주가 중국과 맺은 관계는 벌써 오래되었고 북한과도 왕래를 하며 교역을 한다. 한국도 중국과 그리고 구 소련과 수교를 했다. 게다가 북한과는 UN가입도 동시에 했으니 역사는 많이도 변했다. 이차대전에 참전했다가 일본군에 의해 전사한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 그 일본인의 회사에서 일하다 자신은 얼마 전에 은퇴하지 않았던가.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아니면 단순한 합리주의의 지향인가. 정치가들이 흔히 말하듯,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이다, 라는……. 그렇다면 자신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의미는 무엇인가. 진정한 적은 누구이고 또 아군은 누구인가? 빌리 씨는 한국교포들 보기가 왠지 부끄러웠다. 언젠가 그의 손에 희생된 북한군인의 묘 앞에서 저들 중의 누군가가 흐느낄지도 모를 일이었다.
빌리 씨는 그 자리를 떠나며 나직이 뇌까렸다.
‘내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인가? 그렇지만…….’
빌리 씨의 고민이 또 시작되려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