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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헬링작품
세계 낙서화의 선구자
키스 헤링 ( Keith Haring )_ DDP 전시
11월 24일부터 3월 17일까지 DDP 배움터 지하 2층 디자인 전시관
키스 헤링은 (본명 : Keith Allen Haring)은 앤디워홀이 많은 관심을 갖고 후견자 역할을 했을 정도로 재능을 가진 천부적 소질을 유감없이 펼치다 짧은 생을 마감한 글로벌 적인 기각예술가로 저속한 하위문화로 낙인찍힌 낙서화 (그래피티 )형식을 빌려 새로운 회화 양식을 창조하며 장-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와와 함께 미국현대미술의 한 영역의 굵직한 장르를 열었다.
1958 년 5 월 4 일 펜실베니아 리딩( born in Reading, Pennsylvania)에서 출생하여 1990년 2월 16일 욕에서 사망하기까지 31년의 짧은 세월동안 남긴 수많은 작품들은 키스 헬링의 대명사가 되어 그를 기억하는 데는 어렵지 않게 되었다.
아이비 예술학교 ( The Ivy School of Professional Art School of Visual Arts)을 졸업 한 다음 New York에서 시각 예술을 전공했다. Keith Haring은 자본주의, 도그마, 매스 미디어, 에이즈, 마약,인종 차별주의, 개인에 대한 국가의 권력 등 우리 사회의 일부 측면을 비난하는 데 매우 깊이 관여했었다.
Keith Haring은 31 세의 나이로 에이즈로 사망하기 까지 팝 아트, 거리 미술 , 조형물 작가로 활동하며 주목할 만한 작품들을 남겼는데 그 중 "균열은 괴짜 야. Crack is Wack" 대표작으로 알려졌다.
키스 헬링 (Haring)은 1980 년대 뉴욕의 거리 문화에서 팝 아트와 그래피티와 같은 작품이 탄생 한 미국미술가로서 뉴욕시의 지하철에서 자발적인 행위로 남긴 드로잉들이 인기를 얻었다.
빈 검은 색 광고판 공간 배경에 “빛나는 아기”, “날으는 접시” , “신성한 강아지” 등을 묘사하면 대중적인 친근감을 주며 도시 속의 삭막함을 중화시켜주며 차츰차츰 대중의 인정을 받아오며 역량을 키웠다.
키스 헬링은 날이 갈수록 대규모 사이즈의 작품들을 대부분 의뢰를 받아 제작하였다. 그가 제작한 드로잉은 대중들이 집결되어 활동하는 공공 공간애서 빛을 발하며 사회전반적인 층이 수용하며 널리 알려지며 인정받은 시각적 언어가 되었다.
그의 후기 작품은 좀 더 폭넓은 인문학적 세계에 대한 미학과 철학적 관념으로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며 정치적, 사회적 주제 들을 풀어냈는데 특히 동성애와 에이즈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키스헬링의 유년기와 청년기 환경
펜실베니아 주 커츠 타운에서 어머니 조안 헤링 (Joan Haring)과 아버지 엔지니어이자 아마추어 만화가 인 앨런 헤링 (Allen Haring)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연합 교회에 참석했습니다. 키스 헤링 ( Keith Haring )은 3 명의 여동생, Kay, Karen과 Kristen이라는 동생들과 함께 성장하는 어린 나이 때부터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아버지와 창의적인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며 월트 디즈니 만화, 수스 박사, 찰스 슐츠, 벅스 버니 쇼의 루니 툰스 캐릭터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십대 초기에, 헤링은 기독교 운동에 참여했었던 일을 접고 전국에 걸쳐 히치 하이킹을 시작했으며 그레이트 풀 데드 (Grateful Dead)와 반 닉슨 티셔츠를 판매하고 약간의 마약을 경험했다.
1976 년부터 1978 년까지 피츠버그의 Ivy School of Professional Art에서 상업미술을 전공했지만 결국에는 관심을 잃었습니다. 그는 로버트 앙리 (Robert Henri)의 <아트 스피릿 The Art Spirit> (1923)을 읽은 계기로 공공미술에 대한 눈을 뜨기 시작했다.
Haring은 피츠버그 예술 센터에서 유지 보수 업무를 수행했으며 Jean Dubuffet, Jackson Pollock 및 Mark Tobey의 예술을 탐색 할 수 있었으며 Pierre Alechinsky의 작품에 대한 1977 년 회고전과 1978 년 조각가 크리스토 (Christo)의 강의로부터 가장 중요하게 영향을 받았다.
Alechinsky의 작업은 국제 표현주의 단체 코브라 (CoBrA)와 연결되어 자신에게 더 큰 칼리그래픽 이미지의 그림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의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Christo는 그의 작품으로 대중의 인터렉티브 영역의 가능성을 제시해 줬다.
1978 년 피츠버그 예술 센터에서 키스 헤링의 첫 번째 개인전을 가지며 시각 예술 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하기 위해 1978 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댄스테리아 (Danceteria)라는 나이트 클럽에서이 시간 동안 버스 보이 (busboy)로 일을 하며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불태웠다.
Bill Beckley와 함께 기호학을 공부하고 비디오 및 퍼포먼스 아트의 창의적 가능성을 모색하며 윌리엄 버로우즈 (William Burroughs)의 저서로 깊은 영향을 받아 상호참조 및 이미지 상호연결 (The cross-referencing and interconnection of images)에 대한 실험 작에 몰입하기도 했다.
창작초기 활동
키스 헤링 ( Keith Haring )은 지하철에서 자신의 공공 예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먼저 받았고 방송국에서 사용되지 않는 검은 색 광고 판에 흰색 분필 도면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지하철을 창작실로 삼아 작품을 실험하고 만들 수 있는 장소 인 것으로 간주하는 아주 특별한 개방적인 사고를 가졌다.
1980 년부터 사진작가 Tseng Kwong Chi가 촬영 한 Club 57 에서 전시회를 주최했으며 이 무렵, "빛나는 아기"는 대담한 선과 생생한 색채, 활발한 인물들은 삶과 단합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으므로 그의 상징적 이미지가 되었다.
그는 타임 스퀘어 전시회에 참가하여 동물과 인간의 얼굴을 처음으로 그려 발표했는데 그 해 동네에서 뉴욕 포스트의 헤드라인을 재구성한 도발적인 콜라주를 복사하여 붙였다. 1981 년에 그는 검은 종이에 그의 초크 드로잉을 스케치하고 플라스틱, 금속 및 발견 된 물체를 그려 넣기도 하며 다양한 실험적인 창작을 전개했다.
1982 년 Haring은 동료 신진기각예술가 Futura 2000, Kenny Scharf, Madonna 및 Jean-Michel Basquiat와 우정을 돈독하게 쌓으며 교류에도 활발하며 1982 년부터 1989 년까지 전 세계 수십 개 도시에서 50 개 이상의 공공 저작물을 창작하며 활발한 활동의 행복감을 강조하기 위해 종종 에너지영역도 등장시키며 표현했다.
1982 년 그의 초기 작품 중 한 작품은 동성연애와 대담한 문화적 진술로 비평가들이 대담하다고 해석 한 “ 빛나는 하트” 러브 모티브의 두 인물을 묘사하기도 하였으며 , "Crack is Wack" 벽화는 1986 년에 만들어졌으며 뉴욕의 FDR 드라이브에서 볼 수 있다. 1989 년 그는 "악의를 듣지 말고 악을 말하지 말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많은 원인을 가진 반란"이라는 곡을 통해 에이즈와 같은 사회적 문제의 회피를 비판하며 사회현실참여 시각예술가로서의 활동에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Andy Mouse"를 포함한 Haring의 주제로 한 작품을 계기로 Andy Warhol을 교류하며 우정은 결국 그의 성공에 결정적 요소가 작용되었으며 , 2007 년 12 월, 뉴욕시의 TriBeCa 지역에 있는 American Textile Building 지역은 1979 년부터 Haring 's 그림이 발견되었습니다.
국제활동
독일 도르트문트에 있는 Haring의 조각품
1984 년에 Haring은 호주를 방문하여 멜버른에서 벽화 벽화 (1984 년 Victoria 'Collingwood College의 Detail-Mural)와 시드니를 그린 후 빅토리아 국립 미술관과 오스트레일리아 현대 미술 센터에서 위임을 받았다.
국립 화랑 (National Gallery)에서 물막이를 일시적으로 교체 한 벽화. 리오 데 자네이로, 파리 현대 미술관, 미니애폴리스 및 맨해튼을 방문하여 페인팅을 했다.
키스 헬링 ( Keith Haring )의 정치적 활동은 1985 년에 자유로운 남아프리카 공화국 포스터를 디자인에 참여했으며, 1986 년 봄,암스테르담의 Stedelijk Museum에서 최초의 개인전 박물관 전시회를 열며 저장 시설에 벽화를 그렸다.
1986 년 10 월 23 일에 키스는 체크 포인트 찰리 박물관에 의해 베를린 장벽에 벽화를 만들 것을 요청 받았다. 벽화는 300 미터 길이로 빨간색과 검은 색 연동 인물이 노란색 배경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색상은 독일 국기의 표기이며 동서독 화합의 희망을 상징합니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일하는 데 관심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Citykids Speak on Liberty에 영감을 얻었습니다. Liberty는 자유의 여신상 100 주년 기념 프로젝트에 공동으로 참여한 1,000 명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했다.
1986 년 4 월, Pop Shop은 Soho에 개설되어 Keith의 작품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쉽게 구매하여 소장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으며, Haring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상업주의에 대해 물었을 때 "나는 몇 가지 그림을 그렸고 가격을 올리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아트 샵은 지하철역에서 했던 일의 연장선 일뿐, 대중과의 장벽을 무너뜨렸다. 에이즈 인식, 균열, 코카인 유행과 같은 사회 정치적 주제가 반영되기 시작했다.
Absolut Vodka, Lucky Strike 담배, Coca-Cola와 같은 다른 팝 아트 작품의 영향을 받았으며, 1987 년 헬싱키, 앤트워프 및 다른 지역에서 자신의 전시회를 개최하며 앨범 A Madonna가 포함 된 아주 특별한 크리스마스를 위한 덮개를 디자인했다. 1988 년 샤또 무통 로스 차일드 (Chateau Mouton Rothschild) 와인 레이블에 작품을 발표 한 일부 예술가 그룹에 합류했다.
Haring은 또한 브루클린 플러싱 애비뉴 (Flushing Avenue)의 Woodhull Medical and Mental Health Center 로비 및 외래 진료과에서 공공 벽화를 제작했다.
Haring의 희귀 한 비디오는 그의 활기찬 스타일을 보여주며 "운동에 대한 인식이 점점 더 커지면서 그림이 공연이 될 때 운동의 중요성이 더욱 강화되고 결과물 (그림의 행위)은 결과물만큼이나 중요해 진다"고 표명했다.
키스 헬링 ( Keith Haring )은 친구 장 미셸 바스키아 (Julian Michel Basquiat)가 1988 년 뉴욕에서 마약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을 때 그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키스 헬링의 대표적인 전시
1981 년과 1982 년 New New Wave 전시에 기고 한 Haring은 Tony Shafrazi Gallery에서 첫 독점 전시회를 가졌다. 같은 해, 그는 카셀, 독일뿐만 아니라 그가 타임 스퀘어 (Times Square)에서 Spectacolor 보드에 대한 작업을 생성하는 공공 미술 기금의 "대중에게 메시지"에 도큐멘타 7에 참여했다.
그는 휘트니에 작업을 기여 1983 년 휘트니 비엔날레에 참여했으며,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이어 1985 년 보르도의 CAPC는 그의 작품 전시회를 열고 파리 비엔날레에 참여했다.
그의 죽음 이후 < 헤링 >은 여러 차례의 국제 회고 전 주제였습니다. 그의 미술은 Elisabeth Sussman이 큐레이팅 한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 (Whitney Museum)에서 1997 년 회고전의 주제가 되었다.
1996 년 호주 현대 미술관 (Museum of Contemporary Art)에서의 회고전은 호주에서의 그의 첫 작품전이었고. 2008 년에는 프랑스 리옹 (Lyon)의 MAC에서 회고전이 열렸으며, 2010 년 2 월, Haring의 사망 20 주년을 기념하여 Tony Shafrazi Gallery는 Haring의 모든 활동 단계에서 창작한 수십 점의 작품을 전시했다. 2012 년 3 월에는 뉴욕의 브루클린 박물관 (Brooklyn Museum)에서 열린 그의 작품 <키스 해링 (Keith Haring : 1978-1982)>의 회고전이 열렸다. 2013 년 4 월 키스 헤링 (Keith Haring) : 2014 년 11 월에 Musee d' 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와 Le Cent Quatre, 샌프란시스코의 De Young Museum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대대적인 개인전이 2018년 동대문 디자인 프라자 DDP 에서 < 예술은 삶, 삶은 곧 예술"..."키스 해링" >展 이 11월 24일부터 3월 17일까지 DDP 배움터 지하 2층 디자인 전시관에서 열리고 있다.
"예술은 이른바 예술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어디에서나 예술을 경험할 수 있다.예술은 보편적이며 모든 이들의 삶에 다가갈 수 있다.
예술은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다."
- 키스 해링 저널 1978년 12월-
2010년 <팝아트 슈퍼스타, 키스 해링전> 으로 올림픽조각공원 내 소마미술관에서 가진바 있어 우리나리에서 무척 친근감이 가는 작가이기도 하다.
키이스 헤링 파운데이션 ( Keith Haring Foundation )
1989 년에는 AIDS 단체 및 아동 프로그램에 자금 및 이미지를 제공하고 전시, 출판 및 이미지 라이선스를 통해 관객을 확대하기 위해 키스 헤링 재단 (Keith Haring Foundation)을 설립했습니다. 재단의 목표는 불우한 청년들을 교육시키고 개인들에게 HIV와 에이즈에 대해 알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비영리 단체에 보조금과 기금을 제공함으로써 Keith Haring의 소원을 지키고 유산, 공예품, 예술 및 목표를 확장하는 것.
전시회, 교육 프로그램 및 출판물에 기금을 지원하여 예술 및 교육 기관을 지원하며, Haring은 또한 ...연구를 통해 자신의 유산을 유지하고 삶에 관한 저작물을 공유하도록 재단에 위탁했다
글 : 이명환 ( Visual Artist, 한국조형예술연구소 대표)
키스 헤링 ( Keith Haring ) 작품들
1. KEITH HARING
Growing, 1988 #5
hand-signed trial proof hand-signed silkscreen
30 x 40 inches
2. KEITH HARING
Untitled, 1988 (Pop Shop II-C)
hand-signed silkscreen
10.5 x 13.25 inches
3. Keith Haring journals. New York: Viking,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