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삶으로 성경쓰기3-이름들과의 싸움>의 줄거리:
만족과 기쁨으로 귀결 되는 하나님 사랑을 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찾기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열리게 되는 전제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동일한 전제가 삶을 향하여서도 고스란히 적용 되어야 하기 때문에 삶은 곧 성경 쓰기라 했습니다. 그러면 삶으로 성경쓰기를 할 때 실제로 실천 되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바로 이름들과의 싸움입니다. 가정 직장 시장 학교 등 모든 삶의 현장에서 이름들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우리는 삶으로 성경을 쓰게 됩니다.
삶으로 성경 쓰기 III-이름들과의 싸움
(골로새서 3:1~3)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삶으로 성경쓰기 III-이름들과의 싸움>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삶으로 성경쓰기 III-이름들과의 싸움’
오늘 본문을 들여다보면 ‘위의 것을 찾으라.’라는 말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는 이상적인 상태를 말하거나 이 땅에서 이루어질 하늘나라인 모든 사람이 화평해지고 사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뒹구는 이상적인 사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천국을 말합니다. 우리가 죽은 다음에 간다고 생각하는 천국과 보좌에 앉아계시는 하나님까지 다 포함해서 위의 것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께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었기 때문이고,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위의 것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라고 하시는데 ‘생명’은 바로 내가 만족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입니다. 그것만 가지면 만족하고 그것만 가지면 기쁠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인데 ‘이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졌다’는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하고,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는 내 기쁨과 만족의 이유를 찾으려면 그리스도가 계신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죽음 다음에 하나님께로 가는 것은 이해가 되겠는데, 살아서 땅에 있는 동안에 위의 것을 생각하고 위의 것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생각하고 찾으라.’고 하신 것은 ‘추구하라’는 것인데, 이것이 어제 “대칭이론”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본 대로 우리의 삶이 성경 쓰기가 되기 위해 실천적으로 행해야 할 것들입니다.
‘대칭이론’은 글자로 기록된 성경이 단순히 문자가 아닌 지금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게 전달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에 두 가지 전제 조건이 구비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을 펼치면서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을 찾으려 하고 하나님을 많이 갖고 하나님으로 부자가 되려는 목적이 있어야 하고, 그 목적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모든 구절에서 찾아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이 사랑은 만족과 기쁨과 행복으로 귀결되는 사랑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사랑을 위한 십자가의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문자로 기록된 성경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서, 그 문자 밑에 숨어 계시던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시고, 그러한 마음과 똑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삶이 성경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삶이 성경이 되어야 하는 원리이고 이론인데 이론이 우리의 삶을 규정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 사랑과 예수님의 십자가에 연합하는 것을 삶에서 실천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이름과의 싸움이고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 사랑과 예수님의 십자가에 연합하는 것이 이루어지면서 하나님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어려운 이유는 ‘땅에 있는데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늘을 찾고 생각하라’는 두 단어가 나오는데 ‘추구하라’는 것이고 ‘지속적으로 생각을 몰입하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조용한 골방이나 기도원에 들어가서 금식하며 위의 것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히 그럴 수 있겠습니다만, 오늘 본문은 특정한 시간대와 장소도 정하지 않고 모든 시간에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라는 말씀인데 이것이 가능합니까?
금광을 찾는 자들은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찾습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들은 사업 아이템을 찾든지 직장을 찾아다니면서 돈을 추구합니다. 돈은 돈이 될 만한 아이템에 있고 월급을 주는 직장에 있고 금광은 산에 있고 냇가에 있는데 위의 것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집에 있든지 직장에 있든지 시장에 있든지 위의 것은 언제나 위에 있습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직장이 땅의 것이므로 직장 일을 생각하지 말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땅인 가정에 있어도 하늘을 생각하는 것인데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자 하는 바가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직장과 가정과 시장과 사업장과 사람을 만날 때에도 많은 문제들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해답을 추구하지 말고 위에 계신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삶에서 성경쓰기가 되지 않습니다. 삶에서 성경쓰기가 되지 못한다면 선민의 삶이 아니고 신앙의 삶이 아닙니다. 신앙으로 산다면 직장에서 승진이나 월급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냐는 생각이 들지만 좀 더 속을 들여다보면 이렇게 못하는 것이 이상합니다. 수도원이나 기도원에서만 위의 것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삶이 어떻게 세상을 이기는 삶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을 찾아가서 기도하실 때에만 위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셨다면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직장에 있으면서 직장을 생각하지 않아야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고 세상을 이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가정에서 가정을 생각하지 않고 하늘을 생각하기에 ‘세상을 이겼다’는 말이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이것은 전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과 익숙하게 맞아 들어가는 움직임의 형태와 움직임의 스타일인데 상황을 좀 더 면밀하게 들여다봅니다.
직장 상사에게 굽실거려야 하는 이유는 월급을 받아야 되기 때문이고 월급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가족 부양을 위해서입니다. 승진하려는 이유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이고 돈을 많이 벌면 많은 것을 살 수 있고 명품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직장에서 모욕도 참고 직장생활을 해나가는데, 가족부양을 목적으로 돈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직장생활 내내 웃으며 일을 하지만 마음의 더 깊은 곳에는 가족 부양과 돈에 대한 추구가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데, 결국 그 밑바닥에 흐르는 것들을 위해 직장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애인이 있습니다. 늘 그 모습과 이름이 마음 안에 머뭅니다. 이럴 때의 마음은 두 개의 지층으로 이루어지는데 마음의 깊은 곳에는 애인의 모습과 이름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고 그 위에서 직장 생활을 하게 됩니다. 어제 데이트가 너무 행복했다면 오늘 기쁜 마음으로 거래처 직원도 만나고 직장 생활을 하게 됩니다. 또한 직장 생활에서 버는 돈도 애인과 함께 쓸 데이트 비용을 위해 버는 것이 됩니다. 그 애인과 결혼하게 된다면 함께 살아갈 돈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가 하는 행동은 그 자체가 일차적 목적이 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키워도 그 밑바닥에 흐르는 심층적인 추구와 생각이 있습니다. 자식을 키울 때에 옆집 엄마와 우리 엄마가 말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 이유는 엄마의 마음속에서 추구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인데, 어떤 엄마는 아이에게 어떻게 하든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고 사람의 마음을 얻는 삶을 살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어떤 엄마는 아이에게 어떻게 하든지 돈을 벌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아이를 가리키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엄마의 마음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 있으면서 하늘을 추구한다.’는 것은 마치 ‘직장에 있으면서 가족부양을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형식으로 얼마든지 가능한데 이렇게 해야만 삶에서 성경 쓰기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실제로 해보려고 하면 직장 생활을 하는 중에 하늘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십자가를 거치지 않으면 우리는 직장과 가정에서 하나님을 추구하고 생각할 수가 없고 그것은 죄 때문인데 여기에서 이름과의 싸움이 나오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권력을 추구하는데, 오늘 본문에서 찾고 생각하고 추구하는 마음이 왜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름과 존재의 관계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무엇인가와 관계할 때에 관계하는 대상의 존재를 마음에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그 존재를 이름으로 환산해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마치 카지노에 가서 시설을 이용할 때에 현금을 칩으로 바꿔야만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과 관계를 갖는다면 그 대상의 존재를 고스란히 마음에 들여놓을 수는 없고, 그 존재를 이름으로 바꾸어서 집어넣습니다. 그럴 때에 이름과 존재와의 간격이 생기는데 이름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가리키는 것뿐입니다.
쉽게 말하면 돈을 벌고 싶은 생각은 돈이 기쁨과 만족을 준다고 믿기 때문이고, 돈을 벌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돈’이라는 존재의 이름을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쥐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찾고 생각하고 추구하게 됩니다. 어떤 여자가 마음에 들면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를 나의 애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생각하고 추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이름이 마음에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제일 먼저 붙잡는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를 추구하게 됩니다. 먼저 ‘돈’이라는 이름을 붙잡았으면 실제 그 돈을 내 손에 쥐기 위해 사람도 만나고 직장 생활도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돈 대신에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에 담으면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을 추구하게 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제일 먼저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전 죄가 모든 인간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안겨준 성향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이름을 붙잡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장이나 가정이나 시장이나 사업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을 붙잡고 움직이게 됩니다. ‘승진’이라는 이름을 붙잡고 움직이면서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첫 번째로 우리 마음에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첫 번째로 들어왔다면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를 추구하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첫 번째로 들어와 계신다면 직장 생활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어떻게 하는 것을 좋아 하실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사장님이 좋아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내가 어떻게 승진해야 할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자꾸 세상 것을 붙잡게 되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로 인해 추구하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첫 번째로 마음으로 붙잡은 것의 이름이 있으면 나머지는 그것을 추구하기 위한 과정 중에 필요한 수단으로 사용되거나 버려지게 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라고 하십니다. 직장에서 내가 실적을 걱정하고 있다면 승진 때문이고, 승진을 걱정하는 이유는 돈 때문인데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어야 될 나입니다. 끊임없이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내 마음이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첫 번째로 붙잡지 않은 것입니다. 그럴 때에 주님께서 주기도문으로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지 못하는 상태이고, 십계명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게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내 마음에서 언제나 첫 번째가 되어야 하는데, 다른 이름을 붙잡고 그것을 생각하고 추구하고 이루어지기를 바라므로, 이러한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위의 것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죄를 해결해주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존재로 바꾸어줍니다. 그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는 마음(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않는 이유는 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지은 죄를 생각할 때에 율법과 계명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그것에 어긋난 것들을 죄라고 생각하는데 그것들은 죄가 아닌 죄의 열매입니다. 마치 기침과 목 아픔이 감기의 증상이지 감기 자체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죄는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이 땅의 다른 존재를 가리키는 이름을 붙잡는 것인데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씩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명품 백을 보면서 갖고 싶다는 생각할 때에 순간적으로 그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좋은 차를 보면서 부러워하는 순간에 그 이름을 집어넣게 되고 바라게 되는데, 이렇듯 마음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있을 때마다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를 붙잡고 소원하게 됩니다. 그것이 순간적으로 바랐다가 끝나는 소원이거나 그것을 지속적으로 추구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이름이 첫 번째가 아니라서 위에 계신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므로, 그 모든 생각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이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직장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직장에서 해야 될 모든 업무에 대해서 시간을 내서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먼저 십자가를 붙잡고 직장의 일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면 평강과 만족과 기쁨이 생기게 되고, 내가 하나님으로 부자가 되면 이제 직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내 직장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라도 나는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게 만족과 기쁨이 되는 근원인 생명은 하늘의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곳은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가야만 하는 곳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않는 이유는 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인데,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을 붙잡는 것이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를 소원하고 생각하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 죄가 끊임없이 발생하기 때문에 십자가 생활화가 필요한 것이고, 십자가 생활화는 결국 이름들과의 전쟁입니다. 내 마음이 자꾸 유전 죄의 경향을 따라서 하나님 이외의 다른 이름을 붙잡으려고 하는 나와 싸우는 것입니다. ‘다른 이름을 붙잡았다’는 증거는 찾고 생각합니다. 내가 있는 가정과 직장과 시장에서 내 소원이나 내 뜻이 아닌 무조건 하나님의 다스림과 뜻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죽어서 하나님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직장에서의 승진이나 월급이 내 몫이 아니고 시장에서의 많은 이익이 내 몫이 아니고 건강이나 명예나 권력이 내 몫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쓰실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오직 내 완전한 기업인 하늘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이름들이 가리키는 존재를 마음에서 십자가로 계속해서 죽일 때에, 그 이름을 담고 있는 내가 죽는 것입니다. 이 이름들과의 싸움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성경이 될 수 없습니다. 이름을 붙잡고 있는 증거가 염려하며 두려워하며 생각하든, 소원하며 생각하든 그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존재를 붙잡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서 하나님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내 마음이 다른 존재를 가리키는 이름을 붙잡은 내가 죽는 것인데 이것이 이름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름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우리의 삶이 풍부한 내용을 담은 성경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