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전리
조선 단종때 세조대왕에게 살해당한 지봉 황보 인 의 후손들이 피난하여
이 산중 골짜기에 정착하게 되었으니 약 500여년전 부터 정착했었다고 추정된다.
그 후 높은 산의 나무와 흙과 돌로 집을 짓고 땅을 파 우물을 만들며 들의 풀과 나무를 벌목 하여 높은 곳은 밭으로
낮은 곳은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지었으며 소를 먹여 경작 하고 닭을 길렀으며,
서당을 지어 아이들이 배울 수 있도록 학문의 기틀을 만들어 앞서 가는 마을을 형성하였으니,
예부터 별곡 황보씨(別谷 皇甫氏)라고 인근에서 추앙을 받던 마을이다.
귀호리
마을 입구에 가로 세로의 큰돌이 밭에 있는데 마치 거북이 모양이라하여 구일(龜逸)이라고 하며 바위를 구암이라 한다.
아래에 오천천(五泉川)이 흐르며 원래 단양 우씨(丹陽 禹氏)가 개척했다고 전한다.
창녕 조씨가 그 후 살면서 구일(龜日)이라고 했다 한다.
우목골(牛牧谷)은 귀애 조극승(龜厓 曺克承)선생의 귀애정이 있다.
새못터는 창녕 조씨 중시조이신 이조참판 임계(林溪) 조경온(1548-1592)선생을 모신
회계서원(晦溪書院) 동서재 인근에 생긴 마을이다.
평지마(平地)가 있으며, 안귀일은 약 500년 가까이 추계 추씨(秋溪 秋氏)가 개척하여 살아온 마을이다.
다라골(多羅谷)은 500년전 청주 양씨가 개척한 마을이다. 고부터(古皐基)는 제주 고씨가 처음 집을 지었다고 전한다.
금호리
금호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 중리(中里)이다.
이 마을은 약 400년전에 안동 권씨와 창녕 조씨가 들 가운데 거주하였기에 중리라 했으며,
복성(復城)한 권응수(權應銖)장군이 의병을 모아 말을 달리면서 훈련을 시켰다 해서
근처의 삼변(三邊)을 구마강변(驅馬江邊)이라 칭하고 있다.
내지(內旨)는 앞에 있는 내(川)가 감돌아 마을이 안전하게 보존된다는 뜻에서 생긴 이름인 듯 싶으며,
질구지는 옛날부터 천연자원인 점토를 이용하여 질그릇을 구워내게 되므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금도 도기를 구워내는 옹기굴이 2개 있다.
대천리
강당(講堂)은 월성 이씨가 정착하여 조선 중엽에 학천서당(鶴川書堂)을 건립하여 지방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대리(大里)는 정광성(丁光成)이란 선비가 약 400여년전에 처음 개척하여 생천(生川)이라 해오다가
정씨(丁氏) 조상이 중국 대천(大川)서 왔기에 대리(大里)라고 했다.
나주 정씨의 世居地이고, 생천은 한내라 했으며 지금부터 약 400여년전 성송국(成松國)이라는 선비가 처음 정착하였다.
앞내의 물이 맑고 차가웠기에 생천(生川)이라 칭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리(大里)의 "大"자와 생천의 "川"을 따서 "大川里"라 칭하게 되었으며
생천(生川)은 창녕 성씨의 世居地이다.
사천리
사라골(沙羅谷) 또는 효자문(孝子門)이라고 하며
처음 이 곳에 정착한 분은 약 400여년전 오천 정씨 차순(次淳)이라는 분과 양산 이씨 득정(得禎), 득록(得祿)이라는 형제,
그리고 밀양 박씨가 이 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마을 앞에 금빛나는 고운 모래가 많이 있기에 사라골(沙羅谷)이라고 칭하여 왔으며
정의 정잠(鄭岑) 형제는 효성이 지극하였기에 효자문이라 한다.
현재는 양산 이씨가 주를 이루며 살아오고 있는 곳이다.
안노방, 늘노방, 상노방은 백연(白淵)이라는 선비가 약400여년전에 이 곳을 처음 개척하여 마을을 형성했다.
얼마 후 김치해(金致海)라는 분이 노방(老方)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삼창리
현고(賢皐)는 조선 영조때의 조사언(曺士彦)이라는 학자가 정착한 후 그 자손이 현재까지 살고 있으며,
고현장터는 조선시대 부터 신녕현 동면소재지였으며 사람들의 왕래와 각종 물품들의 거래가 잘 되는 곳이기에
장터가 생겼고 "한마"는 원래 큰 마을이 있었으며 "진동골"은 골짜기의 입구라는 뜻이며,
한천(漢川)은 조선 중종때 김응시(金應時)라는 분이 자양면 노항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처음 살게 되었으며 당시에는 한골(漢谷)이라 했으나 마을 앞에 내(川)가 있기에 한천(漢川)이라 했다.
신호리
대내실, 다내실은 임진왜란때 김순부(金順富)의 처 현풍 곽씨(玄風郭氏)가 두 아들을 데리고
이곳에 피난와서 마을을 개척했다 한다.
"사라들"은 들에 쌀생산이 많으며 또 들이 금빛나는 모래흙으로 되어 있어 예부터 인류가 정착했다한다.
야수골은 야수골(也水谷) 또는 신흥(新興)이라고 하며, 최헌(崔憲)이란 선비가 약 400여년전에 이 곳을 처음 개척했다 한다.
그 후 약 240여년전 이씨가 이 마을을 다시 이루었기에 신흥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안천리
능계(陵溪)는 능산(陵山)으로 부터 흐르는 계곡이라는 뜻에서 지명이 생겼고
또 이산에 임금님이 아들의 태(胎)를 묻었다 하여 태봉산(胎峯山)이라고도 부르는데
산꼭대기에 지금도 적석총(積石塚)의 흔적이 보인다.
인류가 본격적으로 정착하여 살기에는 지금부터 약 400-500여년전 이라고 추측된다.
"중터" 라는 곳에 가보면 옛날에 사찰이 있었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기와 조각, 깨어진 고토기와 파편등이 있다.
서원은 조선 선조대왕때 신녕 현감 황준량(黃俊良)이라는 사람이 현 대천리 앞 양각연(羊角淵) 위에
백학서원을 건립하여 지방교육에 힘썼으나,
지역이 좁고 물이 없기에 조선 말기에 이 곳으로 이건하여 서원의 이름을 따서 서원마을이라고 불렀다.
신안은 신라후손이 400여년전에 능계에 거주 했는데 박시양(朴時亮)이라는 선비가 이곳 신안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했고 능계 음양지(陰陽地)는 곧 자연이 일광을 받는 형편에 의거해서 생긴듯하다.
온천 또는 신안천은 겨울이 따뜻하고 지형이 좋아서 300-400여년전부터 인류가 정착한 듯 하다.
또 신녕땅이 안천이라는 뜻에서 신안천이 생겼다.
온천리
경주 최씨(慶州 崔氏)의 중시조이신 최씨가 처음 정착했다고들 전해 오고 있으니 약 300여년전부터 거주한듯 하다.
궁근다리 궁교(弓橋)는 조선시대 신녕현의 소재지가 신녕에 있었기에
동면지대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현에 갈려면 이 지역을 지나야 한다.
이 곳에 활처럼 굽은 다리가 있었다 하여 궁근다리 즉 궁교라 했다 한다.
신온천(新溫川) - 지형적으로 온천은 영천군에 속해 있었는데, 이 곳만은 신녕현에 속해 있었기에
신녕땅의 온천이라는 뜻에서 신온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용계리
달산(達山), 용계(龍溪), 목리(木里)로 되었다.
만취정(晩翠亭) : 상주목 진주목 진영 개령등의 수령(首領)을 역임한 만취 강종손 선생의 정자. 목리(木里)는
방가산 중턱에 위치하며 매우 아늑하다. 암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감나무만 무성하다.
퉁재이는 암석에서 퉁쇠 즉 구리를 채광했던 곳이며, 현재는 흔적을 볼 수 없다.
파계(巴溪)는 상류계곡에 용이 났다고 하여 지은 이름이다. 이기재는 방가산중턱에 위치한다.
질매재는 논 한 두락의 크기가 너무나 작아서 소의 길마를 놓으면 다 덮어 버린다는 말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월곡리
논골(論谷), 논실은 월성 박씨가 지금으로 부터 약 300여년전부터 정착해 살고 있었으며,
그 위에 큰 못이 있고 이 못에 몽리(蒙利)를 담당하는 3개 부락이 있다.
못에 대한 논의를 하는 골짜기라는 뜻에서 논곡이라 했다 한다.
월령은 약 300여년전에 월성 이씨가 임진왜란 후 정착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으며,
점촌(店村)은 1950년대까지 점토를 이용하여 옹기를 구웠으며 현재 농가 5세대가 살고 있다.
죽곡리
죽곡(竹谷), 월천(月川), 하죽곡(下竹谷)으로 되었으며 죽곡은 약170여년전 나씨성을 가진 선비가 이 곳을 개척했다 한다.
예부터 대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땅을 파면 썩은 대나무가 나온다고 한다.
건너골은 약 200년전에 정주선이라는 선비가 처음 개척했다 하며 골짜기라 내를 건너야되는 위치이다.
절골은 약 200년전에 성명미상의 스님이 절을 짓고 불법을 전파하면서 마을이 생기고 사람이 살았다.
그 후 절은 소실되고 마을도 없어지고 이름만 절골로 남아 있다.
윗대내실은 조선조 성종시 黃仲信이라는 선비가 이곳으로 피난와 살았다. 지금도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