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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한편의 대하드라마와 같다. 수많은 집념어린 인물들이 등장하고, 여러가지 쟁점을 놓고 격론과 공방이 오간다. 그리고 무대 위에는 주인공인 韓·日 兩國 뿐아니라 심판 격인 美國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사회가 있다. 1945년 日帝 敗亡 이후 본격화된 〈독도 문제〉의 역사와 현황을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을 포함하여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매주 일요일 연재한다 / 편집자 조선일보 2020/05/03 10:52 | 수정 2020/05/10 12:26 [이선민의 독도이야기] 그해 여름, 「독도 수호」의 위대한 첫걸음을 내딛다 [1] 1947년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 (上) 광복후 첫 대규모 조사 … 각계 전문가 등 80여명 참가 독도에 영토 표목 설치, 〈심흥택 보고서〉 발견 등 성과 독도 부근에서 일본 어선이 한국 어선을 공격한 사실을 보도한 〈대구시보〉 1947.6.20日字 1947.8.18일 오전 7시, 조선산악회(한국산악회의 전신)가 조직한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가 경상북도 포항항을 출발했다. 해안경비대 소속 경비정 〈대전호〉에 탑승한 학술조사대는 대장을 맡은 조선산악회장 송석하(민속학자)를 비롯해서 국어학자 방종현, 고고학자 김원용, 한학자 임창순, 언론인 홍종인 등 〈사회과학반〉, 「나비박사」로 유명한 곤충학자 석주명, 식물학자 이영로 등 〈동식물학반〉, 〈농림반〉 〈지질광물반〉 〈의학반〉 〈보도반〉 〈전기통신반〉 등 63명으로 구성됐다. 여기에 남조선 과도정부에서 파견한 국사관장 신석호, 외무처 추인봉 일본과장, 문교부 이봉수 편수사, 수산국 한기준 기술사 등 공무원 4명이 합류했다. 그리고 도중에 들른 대구와 포항에서 경상북도와 경찰 직원들이 추가돼 총 80여명으로 불어났다. 울릉도와 독도에 광복후 처음으로 대규모 학술조사대가 파견된 것은 그해 4월 독도 근해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한국 어선이 일본 어선의 공격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1947.6.20일 대구에서 발행되는 〈대구시보〉(大邱時報)에 『왜적일인(倭賊日人)의 얼빠진 수작』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이 사실이 보도되고, 이어 7월 하순 중앙일간지들도 관련기사를 싣기 시작하면서 독도 문제는 국가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마침 일본에서도 독도 문제에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후 패전국 일본에 대한 관리를 맡은 극동위원회(Far Eastern Commission, 13개국으로 구성)는 1947.7.11일 『일본의 주권은 혼슈(本州)·북해도(北海島)·큐슈(九州)·시코쿠(四國)의 제도(諸島)와 금후 결정될수있는 주위의 제소도(諸小島)에 한정될것』이라는 〈대일(對日)기본정책〉을 발표했다. 이는 일본에 점령군으로 진주한 미군이 1945.9.5일 〈對日方針〉을 통해 『일본의 주권은 혼슈·북해도·큐슈·시코쿠의 사대도(四大島)에 한(限)한다』고 밝혔던 것과 달랐다. 「주위의 제소도」에 독도를 포함시키고 싶었던 일본에서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주장이 일어났다. 당시 38도선 이남 지역의 행정 책임자였던 남조선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은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으로서 한·일간의 갈등요인인 독도 문제가 중요한 고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는 전문가들과의 회의를 거쳐 독도에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하지만 美군정 아래서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기 위해 〈조선산악회〉가 조사대를 보내는 형식을 취하기로 했다. 일제 시기에 활동하던 조선인 산악인들이 중심이 돼 광복 직후인 1945.9.15일 발족한 〈조선산악회〉는 단순한 등산 동호인 조직이 아니라 국토조사와 탐험을 통해 되찾은 나라와 민족사랑을 실천하는 단체였다. 이들은 창립후 첫 과제로 일제가 유린(蹂躪)한 국토를 탐사하는 〈국토구명사업 國土究明事業〉을 시작해 한라산(漢拏山), 오대산(五臺山), 소백산(小白山)을 차례로 찾았다. 울릉도·독도 조사대 파견은 이들이 벌인 4번째 국토구명사업이었다. 8월 18일 오후 6시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한 학술조사대는 하루를 쉬며 강연회와 환담회 등을 가졌다. 그리고 다음날인 8월 20일 새벽 다시 대전호를 타고 독도로 향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독도 상륙 가능 여부는 날씨에 좌우된다. 바람이 세거나 파도가 일면 가까이 가기 어렵다. 더구나 당시는 접안시설도 없던 때라서 더욱 독도에 접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다행히도 이 날은 날씨가 맑고 바람이나 파도가 강하지 않았다. 천행(天幸)이었다. 1947.8.18일 울릉도에 도착한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 (한국산악회) 오전 9시가 조금 지나 독도 부근에 도착한 학술조사대는 동도(東島)와 서도(西島) 사이에 대전호를 멈춘 후 작은 배로 갈아타고 東島에 상륙했다. 東島의 서쪽 해변에 짐을 풀고 동식물 표본 채집, 목측 측량, 지형 파악, 사진 촬영 등 조사활동을 벌인 뒤 다시 작은 배를 타고 西島로 향했다. 이들은 西島에서 바다사자 새끼 3마리를 잡았다. 울릉도 주민들이 「가제」라고 부르는 바다사자는 독도 주변에 무리를 지어 살고있었다. 조선산악회가 1947년 8월 독도에 처음 설치한 한국 영토 표목(標木) 기본과제인 독도 조사를 마친 학술조사대는 8월 21일부터 25일까지 울릉도에서 성인봉 답사, 의료 진료, 특별강연회 등을 벌였다. 이 기간 동안 남조선 과도정부에서 파견한 인사들은 훗날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역사학자인 국사관장 신석호가 울릉군청에서 발견한 〈심흥택 보고서〉와 외무처 추인봉 일본과장의 울릉도 노인 〈홍재현의 독도 관련 증언 채록〉이었다. 〈심흥택 보고서〉는 1905년 일본의 독도 침탈때 울릉도 군수가 이 사실을 알자마자 정부에 보낸 보고서다. 앞서 언급한 〈대구시보〉 기사에는 『한말 당시 국정이 극도로 피폐한 틈을 타서 광무10년 음력 3월 4일 日人들이 이 도서를 삼키려고 도근현(島根縣)으로부터 대표단이 울릉도에 교섭온 일이 있었는데 당시 동도사(同島司)는 도(道)당국에 이 전말을 보고하는 동시 선처를 청탁해온 문서가 아직도 남아있다』는 구절이 있었다. 일본은 1905.1.28일 내각회의에서 일방적으로 독도를 시마네현(島根縣)에 편입시키는 결정을 했다. 이어 2월22일 〈죽도(竹島) 편입에 대한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 고시는 시마네현 〈현보(縣報)〉와 지방신문 〈산음신문(山陰新聞)〉에 조그맣게 게재됐을뿐 중앙정부가 발행하는 〈官報〉에는 公示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에는 조선 정부가 이를 알지 못했다. 조선 정부가 일본의 독도 침탈 사실을 알게된것은 1906.3.28일 시마네현 관리 일행이 독도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울릉도에 들러 『일본이 독도를 영토로 편입했고, 관리책임자가 시찰했다』고 통보했을 때였다. 이 사실을 들은 울도군수(鬱島郡守) 심흥택(沈興澤)은 바로 다음날 직속상사인 강원도관찰사에게 『「본군(本郡) 소속 독도」를 일본이 영지(領地)로 편입했다고 한다』는 긴급보고서를 올렸다. 〈대구시보〉 기사에 따르면, 이 보고서가 40년이 지난 그때까지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울릉군청을 찾은 신석호는 옛날문서 더미 속에서 〈심흥택 보고서〉의 부본(副本)을 찾아냈다. 1950년대 이후 본격화되는 한·일간의 독도 분쟁에서 우리 쪽의 유력한 증거로 사용되는 〈심흥택 보고서〉가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듬해 1948년 12월 학술지 《사해 史海》 창간호에 실린 〈독도 소속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그 내용을 공개했다. 하지만 신석호가 확인한 이 보고서의 부본(副本)은 그후 언제인가 사라져 연구자들이 애를 태웠다. 그러다가 1978년 8월 서울대 규장각에서 독도 관련 자료를 조사하던 송병기 단국대 교수가 심흥택의 보고를 받은 강원도관찰사가 다시 의정부(議政府) 참정대신(參政大臣)에게 보낸 보고서를 발견했다. 그 안에 〈심흥택 보고서〉의 내용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렇게 해서 〈심흥택 보고서〉는 다시 우리 손으로 돌아왔다. 1906년 3월 강원도관찰사가 議政府에 올린 독도 관련 보고서. 울도군수 심흥택이 일본의 독도 침탈을 보고한 내용이 그대로 들어있다 당시 85세이던 홍재현의 독도 관련 증언은 한국 외무부가 1955년 간행한 자료집 《독도문제개론》에 수록돼 있다. 홍재현은 오랫동안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쓰던 울릉도에 다시 주민 이주가 재개된 1880년대 중반에 아버지를 따라 일가족이 강릉에서 건너왔다. 이주 당시 20대 초반이던 그는 울릉도와 독도의 역사를 지켜본 산 증인이었다. 그의 증언내용 가운데 독도와 관련된 것은 다음과 같았다. ▲ 독도가 울릉도의 속도(屬島)라는 것은 울릉도 개척 당시부터 도민(島民)이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 나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1903년부터 4~5 차례 미역 채취나 바다사자(가제) 사냥을 위해 독도에 갔다 왔다. ▲ 독도는 날씨가 맑으면 울릉도에서 볼수있고, 동해에서 표류하는 어선은 독도에 표착하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독도에 대한 울릉도민의 관심은 매우 크다. ▲ 광무 10년에 일본관리 일행이 울릉도에 와서 독도를 「일본 소유」라고 무리하게 주장한 사실은 나도 안다. (…) 당시 이를 전해들은 도민이나 어업자들은 크게 분개했다. 〈홍재현의 증언〉은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것이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 사이에 독도 분쟁이 시작될 무렵 독도에 대한 울릉도 주민들의 인식을 보여주어 증언으로서 가치가 높았다. 울릉도에서 9박10일의 일정을 보내면서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큰 성과를 거둔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는 1947.8.26일 아침 도동항을 떠나 그날 밤 포항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날 포항을 출발해 대구를 거쳐 8월 28일 서울로 돌아왔다. 〈계속〉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03/2020050300295.html 조선일보 2020/05/10 11:05 | 수정 2020/05/10 12:30 [이선민의 독도이야기] 「독도는 한국땅」 큰자취 남긴 지식인 3인방 [2] 1947년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 (下) 言論人 홍종인, 史學者 신석호, 國語學者 방종현 독도 관한 국민인식 높이고 학술연구 초석(礎石) 놓아 1953년 10월 〈제3차 울릉도·독도조사대〉 대장으로 독도에 화강암 표석을 설치한 뒤 살펴보는 홍종인 / 한국산악회 서울로 돌아온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는 조사결과를 알리는 활동에 들어갔다. 먼저 1947.9.2일 국립과학박물관에서 강연회가 열렸다. 홍종인·방종현·김원용·석주명 등이 발표를 맡았다. 그리고 11.10일부터 11.18일까지 동화백화점(現신세계백화점)에서 전람회가 개최됐다. 울릉도·독도 사진, 동식물·광물 표본, 고고학·민속학 자료 등이 전시됐고 85,000명이 관람했다. 서울(11.10~11.18)에 이어 부산(11.30~12.4), 대구(12.6~12.10)에서도 전람회가 열렸다. 학술조사대에 참가한 인사들의 활동도 활발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언론인 홍종인, 역사학자 신석호, 국어학자 방종현 등 3명의 지식인이 두드러졌다. 1948년 6월 조선일보에 실린 홍종인의 1년전 〈독도 조사 회고〉 기사 조선산악회 부회장이자 학술조사대 부대장 홍종인(洪鍾仁 1903~98)은 〈한성일보〉에 1947년 9월 21일자부터 26일자까지 4차례에 걸쳐 〈울릉도 학술조사대 보고기〉를 실었다. 조사대의 임무·편성·일정·사업·결론·보호시책 등을 담은 이 보고서는 『울릉도에서 동남향으로 해상 46해리에 있는 무인도로 그 귀속이 문제되리라고 전해지는 독도行은 실행 前까지는 외부 발표를 시종 보류하고 있었으나, 이는 우리가 당초부터 계획해온 기습적인 여정이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홍종인은 석달전까지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맡았던 중진 언론인이었다. 당시도 조선일보에서 일하던 그가 다른 신문에 보고기를 실은 것은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 파견이 남조선 과도정부의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광복후 창간된 〈한성일보〉는 과도정부 민정장관 안재홍(安在鴻 1891~1965)이 사장이어서 美군정의 기관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사대의 공식보고서」라고할 홍종인의 글이 이 신문에 실린 것이었다. 홍종인은 〈보고기〉 外에도 독도에 관한 많은 글을 써서 국민의 인식을 높였다. 그는 이듬해인 1948.6.17일자 조선일보에 〈동해의 내 국토 / 슬프다 유혈의 기록-답사 회고〉라는 글을 실었다. 주일 美공군機가 독도를 연습폭격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직후였다. 독도 사진이 붙은 이 글은 『내 민족을 사랑한다는 정신은 국토를 사랑한다는 정신을 떠나서 있을수 없다. 지금도 독도 동편 섬에서는 우리 산악회와 과도정부 조사대가 세운 뚜렷한 푯말이 서있을것』이라고 했다. 홍종인은 여러 차례 더 독도를 찾았다. 1952.9.17~28일 한국산악회가 〈제2차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를 파견했을때는 단장을 맡았다. 당시 그의 직책은 「조선일보 주필」이었다. 이번에도 정부 부처들이 총동원돼 후원한 국가적 차원의 조사였다. 하지만 조사대가 독도 부근에 접근했을때 美공군기들이 독도에 폭탄을 투하하는 바람에 상륙을 포기해야 했다. 한국산악회는 1953.10.11~17일 3번째로 〈제3차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를 파견했다. 이번에도 단장은 「조선일보 주필 홍종인」이었다. 조사대는 10월 13일 독도에 도착했지만 날씨가 급변하는 바람에 철수했다. 10월 15일 다시 독도를 찾은 조사대는 하루밤을 야영하면서 일본이 세워놓은 「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라는 표목(標木)을 뽑아내고 그 전 해에 만들었다가 설치하지 못한 화강암 표석(標石)을 세웠다. 표석은 앞면에 〈독도 獨島 LIANCOURT〉, 뒷면에 〈한국산악회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 Alpine Association〉이라고 새겼다. 그리고 처음으로 독도에 대한 측량작업을 벌였다. 독도의 동도(東島)는 높이 99.4m, 둘레 800m, 면적 50,000㎡, 서도(西島)는 높이 174m, 둘레 1㎞, 면적 65,000㎡였다. 홍종인은 이번에는 조선일보에 1953.10.22~27일자까지 4차례 〈독도에 다녀와서〉라는 답사기(踏査記)를 연재했다. 그는 또 1956년 7월 고등학교 산악부 학생 197명을 이끌고 독도를 찾은 뒤 1956.8.22~30일자 조선일보에 〈항해 1,000마일/ 학도해양훈련기〉를 8차례 연재했다. 10월 24일자 조선일보에는 학생해양훈련보고전이 열리는 것을 계기로 〈울릉도와 독도〉라는 칼럼을 실었다. 신석호(申奭鎬)가 1948년 12월 발표한 〈독도 소속에 대하여〉 논문에 첨부된 지도. 독도가 맥아더라인에서 한국 구역에 포함된것을 표시했다 국사관장인 역사학자 신석호(申奭鎬 1904~81)는 한해 뒤인 1948년 12월 학술지 〈사해 史海〉 창간호에 〈독도 소속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광복후 독도 문제를 처음 학술적으로 다룬 이 글의 머리말은 『필자는 1947.8.16일부터 약 2주일간 민정장관 안재홍 선생의 명령을 받고 독도를 실지(實地) 답사한 일이 있으므로 이 일문(一文)을 초(草)하여 독도가 본래 우리나라에 속한 섬이었던 것을 명백히 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이어 〈독도의 地勢와 産物〉 〈독도의 명칭〉 〈三峰島와 독도〉 〈울릉도 소속문제와 독도〉 〈울릉도 개척과 독도〉 〈일본의 독도 강탈〉 〈일본 영유 이후의 독도〉 등의 항목으로 나누어 독도를 역사적·자료적·연구사적으로 고찰했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 독도는 (조선시대) 成宗 때의 삼봉도(三峯島)와 동일한 섬으로 15세기부터 우리나라의 영토가 됐다 ▲ 肅宗 때 일본은 울릉도를 조선 영토로 승인했으니 그 屬島인 독도도 조선 영토로 승인한 것이다 ▲ 일본이 1905년 독도를 강탈(强奪)한 後에도 일본정부 및 準정부기관의 기록과 일본 학자들은 「독도를 조선의 속도로 인정」했다 ▲ 현재 연합군사령부가 그은 〈맥아더 라인〉도 독도는 한국 어구(漁區)에 속해있다 신석호(申奭鎬)가 이 논문에서 고증(考證)하고 주장한 내용은 1950년대 한국과 일본의 독도 분쟁이 발생했을때 한국측 논리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는 저서 〈독도 1947〉(2010년·돌베개)에서 『신석호의 글은 1947~1948년 시점에 작성된 독도영유권 관련 자료·근거의 집대성 이었으며, 독도 연구의 시원(始原)을 연 기념비적인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이후 신석호는 고려대 교수로 독도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일본측 주장을 반박하는 논거로 외교부에 제공했다. 그는 독도 문제가 한일회담에서 중요 의제로 떠오르자 〈思想界〉 1960년 8월호에 〈독도의 내력〉이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은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한 조치에 대해 「강도(强盜)행위가 아니면 사기(詐欺)행위」라고 질타(叱咤)했다. 국어학자 방종현. 「독도」라는 명칭이 한자어 「石島」와 관련있는 사실을 밝혔다(조선DB) 또하나 〈울릉도·독도 조사대원〉이 쓴 중요한 글은 서울대 교수였던 국어학자 방종현(方鍾鉉 1905~52)이 1947년 〈경성대학 예과신문〉 제13호에 실은 〈독도의 하루〉이다. 그 전해 여름 독도(獨島)를 찾은날 쓴 일기였다. 일제 시기 〈조선일보〉에 근무하며 국어학 관련 논설을 많이 발표했던 그는 당시 함께 일했던 홍종인과의 인연으로 조사대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문제의 독도! 궁금한 독도! 우리는 울릉도를 돌아보기 전에 먼저 독도부터 탐사하기로 했다』로 시작하는 글에서 독도 조사의 全과정을 실감나게 그렸다. 학술적인 성격이 아닌 이 글이 훗날 큰의미를 지니게 되는것은 「독도」라는 이름이 한자어 「석도(石島)」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방언(方言) 전문가였던 방종현(方鍾鉉)은 전라남도 해안 지방에서는 「석(石)」을 「독」으로 발음한다며 「독도」라는 명칭이 「독섬」 「돌섬」 「석도(石島)」와 관련있을 것으로 보았다. 당시에는 추정(推定)이었던 이런 해석은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대한제국 칙령(勅令) 제41호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다시 주목받게 됐다. 1900년 10월 반포된 이 칙령은 울릉도의 관할구역을 『울릉 전도(全島)와 죽도(竹島)·석도(石島)』로 규정했다. 「독도가 석도(石島)로도 표기됐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울릉도와 독도 연구에 평생을 바친 송병기 단국대 교수는 『칙령 제41호를 보지 못하고도 이런 추정을 한 방종현의 해석을 「卓見」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방종현의 해석은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된다. 울릉도에 주민 이주가 재개된 1880년대 중반 이전 그곳을 드나들던 사람의 많은 수는 「전라남도 출신」이었다. 17세기 말 이래 울릉도를 왕래하며 어업·채취 활동을 하던 그들은 돌이 많은 독도를 「독섬」이라고 불렀고, 그것이 「독도」 「석도」로 표기됐다. 언론인·역사학자·국어학자로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해 독도 탐구와 인식 확산에 앞장선 지식인들이 「1947년 8월 첫 독도조사대」에 포함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다음 회에 살펴보는 것처럼 이 무렵 일본이 제국주의 시절에 키운 막강한 외교역량을 투입해서 독도를 넘보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랬다. / 이선민 선임기자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10/2020051000399.html
● 안재홍(安在鴻 1891~1965) 정치가,사학자. 호는 民世.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졸업. 독립운동을 하다 수차례 服役했다. 광복후 평택군에서 무소속으로 제2대 국회의원 당선. 저서: 〈조선상고사감〉 〈新민족주의와 新민주주의〉 〈한민족의 기본노선〉 등 ● 홍종인(洪鍾仁 1903~1998) 언론인, 산악인, 평남 평양 출생 ● 신석호(申奭鎬 1904~1981) 한국사학자. 본관 아주(鵝洲). 호는 치암(痴蓭). 경북 봉화 출생 ● 방종현(方鍾鉉 1905~1952) 국어학자. 호는 일사(一蓑). 평북 정주(定州) 출생 ● 《독도1947》 http://www.yes24.com/Product/Goods/4096512
● 국사관(國史館)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국편(國編)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306687&code=11171211&cp=du ● 학술지 사해(史海) 창간호 [정의] 1948년 12월 獨島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학술 논문이 실린 잡지 [창간경위] 조선사연구회(朝鮮史硏究會)에서는 〈사해(史海)〉의 창간을 통해 「억조조선(億兆祖先)의 정신탑(精神塔)」을 담아내고자 「사학계 일류 필진을 편성」하여 「조선사 연구논문 발표」를 표방하였다. 1948.8.15일은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해였기 때문에 조선사연구회는 그러한 분위기에 고무되어 〈史海〉의 창간에 나섰다고 볼 수 있다. [구성/내용] 〈史海〉 창간호에는 독도전경 사진과 신석호(申碩鎬)의 〈독도소속(獨島所屬)에 대하여〉란 논문이 특집으로 실려있다. 창간 몇 달 전인 1948.6.8.일 美 공군의 독도 폭격으로 어로활동을 하던 어민이 사망하고 어선이 침몰되는 일이 있었다. 1948.8.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일본의 독도 침탈은 대한민국의 침탈」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여 창간호에 독도 사진과 독도에 관한 논문이 실리게 되었다고 볼수있다. 그밖에 〈신라문화의 특징〉과 김상기의 〈한예맥이동고(韓濊貊移動考)〉 등 논문이 실려 있다. [의의와 평가] 해방후 최초의 독도 사진과 독도에 관한 본격적 학술논문을 실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http://ulleung.grandculture.net/Contents?local=ulleung&dataType=01&contents_id=GC01501022 [독도이야기] [1] 그해 여름, 「독도 수호」의 위대한 첫걸음을 내딛다 (bit.ly/2WG6vLQ) [독도이야기] [2] 「독도는 한국땅」 큰자취 남긴 지식인 3인방 (bit.ly/2yWvx1w) [독도이야기] [3] 허위 선전물 만든 日本 정부, 이를 퍼뜨린 美國 외교관 (bit.ly/2TuKKOf) [독도이야기] [4] 日本 배려한 평화조약, 독도분쟁 불씨 남겨 (bit.ly/3grauou) [독도이야기] [5] 일본 쪽으로 기울다 마지막에 중립 선회한 미국 (bit.l [독도이야기] [6] 對日 평화조약 발효 앞두고 「실효적 지배」결단 내리다 (bit.ly/3h0fn8x) [독도이야기] [7] 日本, 「독도 미군폭격장 지정으로 맞불」 술책 (bit.ly/3ddQF1g) [독도이야기] [8] 일본 관리들 몰려와 「독도는 일본영토」 표지판 설치 (bit.ly/37XV4UQ)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