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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월 20일 월요일. 종일 비가 내리지만 가끔 파란 하늘도 보인다.
숙소에서 아침을 먹었다. 아메리칸 스타일이란다. 어제 먹었던 음식에 햄이 추가되었다. 매일 같은 음식이 나오는 줄 알았는데 조금씩 다르구나. 체크아웃을 했다. 걸어서 한 블록 건너편에 있는 앰버시 호텔(Embassy Hotel)로 가서 체크인을 했다. 이른 아침인데도 방을 준다. 102호다. 붉은색 낡은 침대보가 눈에 들어오는 허름한 방이다. 이곳은 요금을 달러로 주란다. 26달러를 주고 결재를 했다. 오늘의 목적지 시돈(Sidon)을 가기위해 가방을 침대 위에 던져놓고 숙소를 나섰다.
콜라에서 버스를 타야한다. 콜라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함라 지역에서 남동 방향으로 걸어가면 될 것 같았다. 지도에서 표시된 방문지를 체크하며 걸어간다. 먼저 파괴된 건물 만나기다. 전쟁과 내전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채 방치된 것인지, 보관하는 것인지 모르는 건물을 찾았다. 깨진 유리창에 구멍 난 벽, 무너진 지붕에, 건물 틈새에 자라고 있는 잡초들이 비가 내리는 아침에 스산함으로 다가온다.
그 다음 찾은 곳이 도심 속에 보석처럼 박혀있는 아담하고 아름다운 공원Sanayeh Garden(Rene Mouawad Garden)이다. 바닥이 대리석으로 깔려있어 빛이 나고 미끄러워 보이는 잘 가꾸어진 공원이다. 특히 중앙에 만들어진 둥근 연못을 감싸고 있는 둥근 나무숲은 너무 멋지다. 어떻게 이렇게 동그랗게 나무를 가꾸어 놓았을까. 기둥들만 규칙적으로 구분이 되고 어디서 어디까지 구분이 없는 가지들은 모두 이어져 하나의 원을 그리고 있다. 이런 모습이 가운데 연못에 비쳐 대칭을 이루는데 정말 멋지다.
사각형의 알찬 공원을 베이루트의 초록 심장이라고 표현해 놓았다. 하얀색 대리석 기념비도 잘 어울린다. 줄을 세워 심어놓은 핫도그 모양의 초록 나무들은 근위병 같다. 공원을 둘러보고 나와서 걷다가 폐허가 된 담장이 있는 가옥을 지난다. 주변에 주차된 승용차들이 가득하다. 직선으로 이어지는 베이루트의 도심을 걸어간다. 비가 그친다. 바람이 분다. 구름을 몰아내고 파란 하늘을 보여준다. 기분이 좋다. 커다란 도로가 나온다. 사거리 구석에 커다란 조형물이 만들어져 있다.
원을 갖고서 하늘을 향해 솟구친 모양이다. 힘들게 큰 길을 건넌다. Cola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반가웠다. 이름도 참 재미있다. 음료수 콜라와 같아서 발음하기도 기억하기도 쉽다. 40분 정도 걸어온 것 같다. 약 4km 정도 거리인 것 같다. 고가도로 밑으로 텅 빈 대형버스들이 주차해 있는데 무슨 용도인지 모르겠다. 좀 더 걸어간다. 많은 미니버스들이 주차해 있다. 사람들도 많다. 콜라 터미널이다. 시돈과 바알벡이 있는 동쪽으로 가는 버스가 많다. 시돈이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사이다라고 외친다.
시돈이 여기서는 사이다란다. 작은 미니버스에 우리도 탔다. 사람들이 금방 가득 찬다. 정해진 시간도 없이 사람들이 차면 버스는 바로 출발한다. 어제까지는 북쪽으로 달려갔는데 이제는 레바논 남쪽으로 달려간다. 해안가를 달리는 것은 같은데, 북쪽에 비해 산악지형이 적고 언덕과 평지가 많다. 40분 정도를 달려간다. 비가 또 내리기 시작한다. 오래된 낡은 도심 가운데 작은 정류장에 도착했다. 여기가 시돈(Sidon)이란다.
지금은 알자누브(남 레바논) 주의 행정중심지이자 어업과 교역 및 주변 농촌지역을 위한 시장 중심지이며, 사우디아라비아에서부터 연결된 길이 1,720㎞의 트란스아라비아 송유관의 지중해 쪽 종점이자 대형 저유 탱크들의 저장소 구실을 하고 있다. 페니키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로, BC 3000년대에 건립되어 그 후 1,000년 동안 번영했다.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의 작품과 〈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한다.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알렉산더 대왕,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로마 제국 등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으며 자주색 염료와 유리제품으로 유명했다.
헤로데 1세가 이 도시를 아름답게 꾸몄고, 예수님께서 방문하기도 했다. 십자군시대에 지배세력이 여러 차례 바뀌면서 파괴되었다가 후에 다시 재건되었다. 오스만 투르크 밑에서 1517년 이후 거의 400년 동안 번창했으며, 특히 17세기 준 독립국인 드루즈의 수장(amῑr) 파흐르 앗 딘 2세의 지배 아래에서 가장 번영했다. 프랑스는 이곳을 다마스쿠스의 외항으로 발전시켰으나 1791년 오스만 투르크의 레바논 총독 아흐마드 알 자자르가 프랑스 상인들을 성 밖으로 쫓아냄으로써 무역이 크게 쇠퇴했다.
1837년 지진으로 파괴되었다가 복구되었다. 대규모의 공동묘지에서 수많은 석관이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현재 이스탄불에 보관되어 있는 페니키아 시대의 두 왕 에슈무나자르와 텐네스의 석관, 알렉산더 대왕의 전투와 사냥 장면이 묘사된 유명한 석관들이 있다. 그 밖의 유적으로는 십자군이 지은 성채와 페니키아 시대의 에슈문 사원이 손꼽힌다. 고속도로와 철도로 25㎞ 북쪽에 있는 베이루트와 연결된다. 시내에는 상당한 규모의 마론파 그리스도교도 공동체가 있다.
주민 가운데 상당수가 팔레스타인 난민들이다. 시돈 역시 성경에서 들어보던 지명이다. 여기에서는 아랍어로 사이다(Saida)라고 부르기도 한다. 콜라와 사이다, 재미있다. 레바논은 마자윤, 빈 주베일, 베카, 바알벡 같은 내륙 일부도시를 제외하면 트리폴리, 베이루트 티르, 시돈 등 항구도시들이 주요 도시로 꼽히는데 시돈도 티르처럼 레바논 주요 도시(항구 도시)들 중 하나다. 터미널에서 내려 우리는 발걸음을 바다 쪽으로 향했다. 검은색 대리석 보도블럭이 반들반들 거린다. 미끄럽다.
비가 내려 도시가 온통 젖어있다. 탁 트인 바다를 만나니 반갑다. 방파제로 만들어 놓은 긴 해안도로는 제법 높은 빌딩들을 갖고 있다. 예쁘다. 고개를 돌리니 바다로 뻗은 성채가 보인다. 베이루트에서 티르로 내려가는 해안도로를 따라 남으로 내려가다 보면 우측 지중해 해변에 멋진 십자군 성채가 나타나는데, 이게 바로 시돈의 해안 성채이다. 성을 항구 근처에 바짝 붙여서 지은 이유는 지금처럼 장비나 배가 좋지 않아 아무데나 접안할 수 없었기에 기존 접안시설에 근접해서 지어 두면 상륙군의 상륙 자체가 상당히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기 지중해 바다는 지금도 파도가 굉장히 거칠고 레바논 해안은 모래사장으로 되어 있는 게 아니고 단단한 돌로 되어 있고 암초가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바람의 힘이나 사람이 젓는 노의 힘으로 가는 배로 사람이 상륙하려면 접안시설 옆에 정박하지 않는 이상 상륙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항구 바로 옆에 저렇게 큰 성이 버티고 있으면 성 안의 사람을 죽이거나 무력화시키지 않는 이상 바다에서 오는 적은 상륙하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십자군이 쌓아올린 이 성은 자세히 보면 로마시대 건축물을 파괴해서 만든 것들이 보인다. 로마 건축물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둥근 기둥을 잘라서(혹은 깨서) 성 쌓는데 일부로 사용했다. 벽돌이나 아치도 로마시대 건축물에서 가져온 석재들이 가끔 보이기도 한다. 성문 앞 둥근 기둥이 로마시대 건축물을 파괴하고 가져온 것이다. 지금이야 문화재 파괴지 그 때는 그냥 쓸모없는 건물 무너뜨려 건축자재 재활용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성은 예루살렘 왕국 시대에는 십자군이, 십자군 원정 후에는 아이유브 왕조가, 이후에는 오스만 투르크가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원 성채에 증축 흔적도 보이고, 우리나라 같았으면 박물관에 가 있어야 할 대포들도 유적 내에 그냥 깔려 있다. 원래 시돈은 모든 레바논의 도시 중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곳이었으나 19세기 보물 사냥꾼들과 아마추어 고고학자들에 의해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길 가던 영감님들이 함께 사진을 찍잔다. 편안하게 생긴 분들이다. 멀리 바위섬에는 작은 등대가 보인다.
솜사탕을 팔고 있는 작은 수레가 손님을 기다린다. 길 건너편에는 오래되 보이지만 커다란 식당, Zawat 레스토랑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길을 건넜다. 바로 골목으로 이어지는 데 여기가 오래된 시장, 시돈 수크다. 제일 재미있는 곳이다. 과일과 채소를 팔고 있는 노점상은 풍성하고 화려해 보인다. 붉은색은 순무와 양배추, 석류가 자리 잡고 있다. 주황색은 홍당무와 토마토, 오렌지와 귤이다. 보라색 가지도 보이고 초록색 브로콜리와 고추, 오이, 배추, 상추, 콩 등 엄청 종류도 많다.
올드 수크의 골목으로 들어서니 지붕이 있는 수크다. 젊은이들도 많다. 금은방도 보인다. 비가 내리는데 종종 비가 샌다. 화장품과 향수 가게와 과일가게와 여러 가지 사탕 종류를 파는 가게도 있다. 좀 더 들어가니 옷을 수선하는 곳도 보이고 비누를 잔뜩 쌓아 놓은 가게도 있다. 시장 골목은 약간 어둡지 만 아주 활기차다. 점점 들어갈수록 수수하고 조용하고 인적이 드물다. 칸 사이시(Khan sacy)유적 방향이 나온다. 입장료가 있다. 살아있는, 지금도 활동하는 유적이 바로 우리가 걷고 있는 수크 골목이라고 생각이 든다.
새로이 지은 것 같은 교회가 나온다. St. Nicholas Church가 나온다. 이 교회가 유명한 것은 사도 바울이 묵었던 곳이다. 따로 입구가 있어 들어가 보았다. 성자들의 숙소(The Shrihe of Saints: Peter & Paul)라고 기록되어있다. 지하 감옥 같이 철근으로 천장을 열어 놓았다. 머물렀던 숙소 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 같다. 사도바울이 로마로 압송되기 전 제자들과 하루를 머물렀다는 곳에 세워진 작은 교회다.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시돈은 우상숭배를 해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선지자들은 시돈의 멸망을 예언했으며 오래전에 성취 되었다(사23:12, 렘27:36, 겔28:21,욜3:4), 구약성서에 나오는 가나안 정복 후 땅 분배시기에 시돈은 스블론(창49:13)과 아셀 지파(수19:28)의 북쪽 경계지역이다. 시돈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으로 함의 자손이 시돈을 건설하였고, 예루살렘 성전 건축 시 벌목공으로 고용 하였으며(왕상5:6), 시돈 왕 히람의 딸 이세벨이 아합 왕에게 시집올 때 바알 신을 가지고와 하나님의 진노가 아합 왕에게 내렸고, 엘리야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알 선지자들을 징벌하였다(왕상16:31).
헤로데(헤롯) 1세가 이 도시를 아름답게 꾸몄고, 예수님이 이곳에 전도 여행을 하였다.(막 7:31) 지금은 학교로 사용되고 있는 알리 함맘 궁전(Ali Hammoud Palace,18세기)을 만났다. 긴 수크는 미로 같이 끝이 없다. 비를 피할 수 있고 햇빛도 차단되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도 추위를 막아주는 것 같다. 역사적인 장소 10개가 간판에 씌어 있다. 바다 성채를 비롯해 박물관, 학교, 교회, 궁전들이다. 여기에 비누 박물관도 알려져 있다. 수크에도 투박한 상자에 담겨진 투박한 비누들이 가득 쌓여있다.
이름 모를 모스크들로 나온다. 사라이 광장과 오마리 모스크를 찾아가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우리는 높은 성채를 자랑하는 Khan al-Franj를 찾아갔다. 키 큰 낙타들이 짐을 싣고 다니도록 시원시원한 높이의 2층으로 사각형 아치형구조의 카라반 사라이(Caravan Serai)다. 17세기에 세워졌는데 대상들이 머물던 장소로 오늘날 호텔이다. 잘 보존되어있다.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상선(배) 모양이 있다. 올드 수크를 중심으로 주변의 유적들을 둘러보았다.
시돈은 아랍어로 사이다(Saida)라고도 불리는데 대표적인 레바논 항구도시들 중 하나다. 십자군이 전에 것을 무너뜨리고 지은 도시라 유럽 성곽도시와 비슷한 구조가 되어 있다. 유럽 성곽도시에도 가장 중요한 곳이 바로 종교시설인 성당이나 교회인데, 여기도 당연히 정교회 성당, 마론파 성당, 그리고 무슬림 모스크가 다양하게 공존하고 있다. 지금도 대부분 무슬림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도시이다. 주거지역 및 상업지역 개선사업의 일환으로 UN HABITAT가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역시나 레바논 정부에서 주도해서 자체적으로 개선을 하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도시에는 종교시설이 중요한 곳에 있다. 그런데 여기는 아무래도 무슬림이 많아지고 있는 추세라 크리스트교 종교시설들이 불안해 보인다. 레바논은 유럽과 가까워서 사람들이 많이 구경하러 온다. 예전에는 크리스트교도가 많았지만 지금은 팔레스타인 난민, 시리아 난민 등 100만 명이 넘는 난민(다수가 무슬림)이 유입되었다. 시돈까지 온 김에 가까이에 있는 수르(티레)도 둘러보기로 했다.
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으로 간다. 비가 엄청 내린다. 신발이 다 젖은 것 같다. 티레 행 미니 버스를 발견했다. 뚱뚱한 아주머니가 운전사다. 여성이 운전하는 것은 처음 본다. 시돈에서 티레로 가는 길의 주변은 평야지대와 언덕이 펼쳐지는데 과수원이 많다. 주로 바나나 농장과 귤 농장이 연이어 펼쳐진다. 어렸을 때에 고전영화 '벤허'를 보면서 전차경기장 장면이 참 인상 깊게 남았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전차 경기장을 찾아보았는데 그 멋진 광경은 없고, 바나나 밭이 가득했던 허무한 기억이 난다. 40분 정도를 달려서 티레에 도착했다.
로마 유적을 찾아간다고 하니 해안가 도로에 우리를 내려준다. 드디어 티레에 왔구나. 위험지역이라 여행금지 구역으로 지정해 둔 도시다. 우리나라 군인들이 파병되어 주둔하고 있는 도시다. 이스라엘과 가장 가까운 도시란다. 티레(Tyre), 지금의 수르는 BC 2000년경부터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페니키아의 주요 항구도시였다. 섬과 근처의 육지에 걸쳐 자리 잡은 티레는 원래 북쪽에 있는 시돈(지금의 사이다)의 식민지로 세워진 듯하며, BC 14세기 이집트 기록에는 이집트의 속국으로 나타나 있다.
페니키아에 대한 이집트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독립한 티레는 곧 모든 지중해 지역과 교역 관계를 맺음으로써 시돈을 누르고 교역 중심지로 부상했다. BC 9세기에 이곳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북아프리카에 카르타고 시를 세웠으며, 카르타고는 그 후 서방에서 로마의 주요 경쟁상대가 되었다. 티레는 성서에 이스라엘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으로 자주 언급되어 있다. 한 예로 티레 왕 히람은 예루살렘의 다윗 궁과 솔로몬 성전 건축을 위해 나무와 석재 그리고 금속기술자를 보내기도 했다(BC 10세기).
악명 높은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은 '티레와 시돈의 왕' 에트바알의 딸이었다. BC 10, 9세기에는 상인 과두제로 권력이 제한되었던 왕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페니키아의 도시에서 가장 큰 번영을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두로는 여호수아가 점령하지 못한 지역으로 아셀지파에게 분배한 땅(수19:29)이다. 바울이 7일간 있을 때에 필립 집사 딸 4명이 예루살렘에 가면은 체포된다고 만류하였다(행21:2-7). 아구스도로부터 헤롯이 하사받아 레바논남부(두로, 시돈) 및 요르단 왕국의 일부지역, 시리아를 포함하여 헤롯가문이 다스리고 있었다.
예수님이 이곳 수로보니게의 여인 딸이 귀신들린 것을 고쳐주고, 그의 믿음을 칭찬하였는데(막7:26), '수로(수르)보니게'는 베니게(카르타고)와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7장 31절, 마태복음 15장 21절 예수님이 이곳을 방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알아보면 BC 8, 7세기 대부분을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은 티레 시는 BC 585~573년에 바빌로니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오랜 포위공격을 이겨내는 데 성공했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던 BC 538~332년 페니키아의 패권도시라는 지위를 잃었으나 계속 번영을 누렸다. 마케도니아의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과 티레의 저항은 역사적으로 유명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BC 332년 섬에 접근하기 위해 부유포대(浮遊砲臺)를 사용하고 둑길을 건설하면서 7개월 동안 포위공격을 한 끝에 티레를 점령했다. 티레가 점령된 후 1만 명의 주민이 처형되었으며, 3만 명이 노예로 팔려갔다.
한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건설한 둑길은 무너지지 않고 남아 티레가 위치한 섬을 반도로 만들어 놓았다. 그후 티레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를 받았으며, BC 200년에는 그리스 문화에 속한 셀레우코스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가 BC 68년 마침내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신약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로마 시대의 티레는 견직물과 뼈 고둥류에서 추출한 자줏빛 염료로 유명했다. 2세기에는 상당한 규모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그리스도교 신학자 오리게네스가 이곳에 묻혔다.
638~1124년 이슬람 지배 시대에는 예루살렘 왕국의 일부로서 12, 13세기에는 십자군 국가로서 번창했다. 제3차 십자군원정에서 죽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붉은 수염 왕 프리드리히 1세가 1190년 이곳 성당에 묻혔다. 1291년 이슬람교도 맘루크인들에게 점령되면서 파괴된 후에는 예전의 지위를 되찾지 못했다. 반도 남쪽에서 퇴적물로 덮인 항구가 프랑스 베이루트 고고학연구소의 탐사로 발굴되었으나 페니키아 시대 유물의 대부분은 현재 매장된 상태로 남아 있다.
야자수가 줄 세워 심겨진 해안 도로는 아주 길게 이어진다. I LOVE SOUR라는 조형물이 해안가 광장에 만들어져 있다. 인증샷! 그 뒤로 티레 항구(Tyre Port)가 보인다. 섬을 반도로 만들어 놓은 그 위치에 우리가 서 있는 것 같다. 뒤편 바다로 가려고 길을 건넜다. 넘어가니 바다에 인점한 묘지가 나온다. 묘지 입구의 문이 꼭 개선문 같다. 그 앞에 있는 건물이 Islamic university of Lebanon이란다. 오른쪽으로 걸어가니 로마 유적이 눈에 들어온다. Tyre World Heritage Site다.
길 하나 건너로 유적(Ruins of Tyre) 이집트 항구 유적(The Egyptian Port)이란다. 잘 관리되고 있지 않았다. 입구를 찾지 못해 열려있는 군인 초소 입구로 들어갔다. 군인이 나오더니 입장료를 내란다. 깎아서 두 명이니 2달러를 내란다. 현금으로 2달러를 주고 들어갔다. 정식으로 들어가지 않아 구경하는 내내 맘이 조렸다. 구경하는 사람도 한 명 보이지 않고 우리 만 활보했다. 바다를 향해 세워진 대리석 기둥들이 대충 규모를 짐작케 한다. 모자이크로 만들어진 바닥도 보인다.
화려하고 견고했을 건축물을 상상해 본다. 다양한 시대별로 유적이 보여지는 것 같다. 커다란 석관 하나가 높은 곳에 올려져 있다. 구경하는 우리를 보고 작은 유적물을 팔려고 나타난 사람이 있다. 시리아에서 만났던 사람이 생각난다. 시리아에서 로마 시대에 사용하던 도장을 산 기억이 있다. 이 사람도 우리에게 오래된 동전과 작은 유물들을 보여주면서 사란다. 구경만 하고 나왔다. 걸어서 정식 입구로 가 보았다. 입장권을 팔고 있는 작은 사무실이 보인다. 밖에서도 유적들이 한 눈에 다 들어온다.
현대식 모스크가 보인다. 또 하나의, 여기보다 더 유명한 유적지를 찾아가기로 했다.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간다. 비가 내리는데 바다의 파도도 제법 거칠다. 이스라엘이 바다 건너에 있다고 생각하니 느낌이 이상하다. Tyre Beach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에는 각종 레스토랑과 카페 등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비가 너무 내려 동서남북 구분을 못해 좀 헤맸다. 다시 위치를 잘 잡아 걸어간다. 좀 멀어보인다. 유적이 있는 울타리가 보인다. 들어가는 입구가 멀다.
들어가는 작은 구멍이 있다. 풀과 나무가 수북이 자라고 있는 들판에 오솔길이 나 있다. 비가 내려 젖었고 물이 고인 곳도 있다. 우산을 쓰고 길따라 들어간다. 신발을 이미 다 젖어 질퍽거린다. 아내도 다 젖었다고 투덜댄다.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찾았다. 들어가 조심스럽게 걸어가니 초록색 광장에 건축물이 나온다. 우리는 고대 유적지(Ruins of Tyre – Necropolis)에 들어와 있었다. 묘지 같이 사람이 없는 거리에 무너져 일부만 보이는 수로와 무너진 건축물과, 커다란 개선문이 보인다.
오른쪽에는 말 경주장(Tyre Hippodrome)나타난다. 티레는 선사시대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왔던 유서깊은 도시이다. 도시 일부에 아직도 고대 로마 유적들이 남아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유적이 비로 티레 전차 경기장이다. 여기는 UNESCO 세계 문화유산(World Heritage)으로 지정되었다. 입장료를 징수하고 있는데 우리는 담 넘어 들어온 셈이다. 이런 멋진 로마 유적을 보는데 정식으로 입장료를 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한 참을 걸어야 입구를 만날 수 있다.
입구쪽에는 가족묘지들이 잔뜩 있었다. 이런 거대한 돌들을 어떻게 어디서 구했을까? 이 궁금증은 5분정도 더 걸어들어가니 풀렸다. 언제 만들었는지에 따라 석관에 조각된 모양이 다르다. 로마 시대에는 로마 신들이, 십자군 시대에는 십자가나 크리스트교 표식이, 오스만 때는 이슬람 양식이 조각되어 있다. 우리는 멋있는 개선문을 만나게 된다. 멀리에서 찍었을 때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겠지만 실제 가까이에서 보면 정말 멋지고 웅장하다. 안타깝게도 보존이 덜 된 상태이지만 2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많은 픙파를 견디고 서 있다.
때로는 사람으로부터, 때로는 자연으로부터 위협을 받았겠지만, 지금도 인간의 손으로 이룩한 이 멋진 개선문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넓은 곳이 예전에는 전차경기장으로 쓰였던 곳이다. 원래는 석조건물들과 경기장 좌석이 돌로 만들어져 더욱 웅장했겠지만 본래의 기능을 잃으면서 여기는 채석장이 되어따. 여기 있던 돌들을 죄다 옮겨다가 다른 건물을 짓거나 석관 짜는 데에 썼다고 한다. 앞에서 소개한 집이며 석관이며 다 여기서 갖다 쓴 돌이다. 전차경기장 뒤에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석재가 집중적으로 털려서 남은게 없이 공터다. 하지만 지금도 경기장 일부는 남아 그때의 위용을 자랑한다. 원래는 저기도 관람석이었는데 석재는 몽땅 다른 곳으로 옮겨져 집 짓는데, 석관 만드는 데, 모스크 만드는 데, 성벽 짓는데 써서 지금은 뼈대뿐이다. 오벨리스크도 하나 보인다. 2천년이 넘는 시간을 견딘 게 신기하다. 오벨리스크 위에 삼각뿔은 없어졌지만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맙게도 비가 그쳐서 구경하는데 불편하지는 않았다. 정문으로 나가려고 하다가 입장료가 아갑다고 생각이 들었다.
구경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냥 나갈 수 있는데 주변에 사람들이 하나도 없다. 우리는 왔던 쥐구멍으로 다시 나가기로 했다. 풀밭 오솔길을 한참 걸었다. 낯선 마을로 들어서서 입구 방향으로 걸었다. 평화로운 마을 골목길이다. 길을 물어 겨우 마을을 빠져 나왔는데 군인 초소가 있고 우리를 부른다. 이 마을에 어떻게 들어갔느냐는 것이다. 영어를 잘해야 설명을 하지. 대충 얼버무린다. 이 마을은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난민 구역이라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단다. 그래서 자기들이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관광객임을 알고 유적지 입구를 알려주었다. 유적지 정식 입구도 허름했다. 담장을 들어서서 막 유적을 구경하려는데, 멀리서 사람이 부른다. 입장료를 내야 들어갈 수 있단다. 이미 다 둘러본 곳이라 조용히 나왔다. 비가 내려서인지 오후 늦은 시간이라서인지 춥다. 신발이 다 젖어서 질퍽거리니 더 춥다. 이제 베이루트로 돌아가기로 했다. 유적 입구 앞에 티레 시돈 하이웨이 큰 길가에 작은 미니버스들이 정차해있다. 베이루트라고 외치니 타란다.
손님이 채워지기를 잠시 기다린 후 버스는 바로 풀발한다. 이름모를 마을로 갔다가 바나나 과수원을 지난다. 먹구름 가득한 해안을 보면서 시돈도 지나간다. 베이루트 공항을 왼편에 끼고 조금 가더니 오벨리스크가 세워진 곳에서 모두 내린다. 아직도 콜라 터미널이 아닌데, 티레에서 오는 미니 버스는 여기가 종점이란다. 걸어서 콜라 터미널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두 달 전 우리나라와 레바논이 올림픽 예선 경기를 했던(2019년) 종합 운동장이 나타난다.
사진을 찍으려니 군이이 나타나더니 사진을 찍지 말란다. 날은 저물어가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차들만 큰 도로에 싱싱 달려간다. 한참을 걸어 콜라 터미널에 도착했다. 고가도로 밑으로 좀더 걸어가 큰 길을 건넌다. 작은 캐밥집에서 캐밥을 사서 먹었다. 엄청 맛있게 먹었다. 저녁이다. 그러고보니 점심도 굶은 날이다. 15번 버스를 탔다. 숙소를 향해 걸어올라가던 길에서 슈퍼로 들어가 소고기와 버터를 샀다. 토마토도 샀다. 호텔에 도착했다. 수도에서 물을 받아 끓여서 먹으려하니 물이 짜다,
우리는 깜짝 놀랐다. 아니 호텔에 짠 물이 나오다니, 말이 안된다. 카운터로 내려가서 물이 짜다고 하니 태연하게 여기는 그렇다고 한다. 파키스탄 훈자 마을 숙소에 흙탕물이 나오던 일이 생각난다. 끓인 물을 버리고 나가서 물 두 통을 사왔다. 생수를 사서 세면도 대충하고 누룽지를 넣고 끓였다. 소고기를 버터에 구워 먹었다. 숙소는 짠물에 지저분하고 낡았지만 모기는 없었고 히터도 잘 들어와 따듯했다. 히터가 잘 들어오니 비에 젖은 운동화가 밤새 잘 말랐다. 밤새 비가 내리는 것 같다.
1월 20일 경비- 시돈행 버스비 4,000, 티레행 버스비 4,000,
베이루트행 버스비 10,000, 캐밥 2개 11,000, 15번 버스비 2,000,
토마토 2,000, 소고기, 버터 8,500, 물 1,000
(숙박비 26달러, 유적지 입장료 2달러= 33,600원).
42,500*0.6=25,500원
계 59,100원
누계2,6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