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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le temps) 철학 일반에서
H. Barreau, Les Notions philosophique, Dictionnaire, PUF, 1992, pp. 2567-2569 (P.3299)
- 바로(Hervé Barreau. 1929-2014), 국립과학연구원장(Directeur de recherche au CNRS)
시간이 공간과 다르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설명하기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데 시간은 눈으로 그려서(figurer)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의식 내부에서 일어나는 흐름을 까뒤집어서 보여줄 수 없을 때, 윤똑똑의 변론가들이 설명하거나 반박하는 언설들이 마치 사실 또는 진실인 것처럼 행사한다. 언론은 윤똑똑의 언설을 또 한번 자기 방식으로 인수분해 하듯이 뒤바꾸어 놓는다. 수학에서 인수분해가 생물학, 사회학, 심리학에서 교환도 환원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요즘 떠들고 있는 이들은 사건들은 유리한 결과 또는 유리한 방향을 공간적으로 배열하려고 들 한다. 환원할 수 없는 관계들을 언제, 누가,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서, 즉 어떤 여러 과정들의 가지치기들을 거쳐서(경과)를 필요로 한다. 가지들 사이의 만남은 운이며 우연이며, 필연성도 인과성도 없지만, 더 긴 과정에서 보면 그 층들의 밑층에서 공통기반을 가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데, 빨강이와 파랑이는 서로 기반이 다르다. 하나는 실재하는 인민으로서 아페이론이고 스스로 문제 제기하고 새로운 생성을 통해 문제를 풀려고 한다. 다른 하나는 공상에 더하여 망상에 젖은 페라스를 설정하면서, 기표(상징)들에게 의미를 두는 것을 선가정으로 삼고 있다. 선가정이란, 사실들의 여럿을 가정으로 삼는 경험론보다 더 심하게, 사실들이 이전에 먼저 있어야 했다고 또는 있어야만 했다는 망상을 보탠 것을 선가정이라 한다. 하늘에서 영혼이 내려왔다는 것은 망상의 선가정인 것이다. 지구 또는 토지에 충실하여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노력을 하는 이는 드물지만, 그 노력이 아무리 작더라도 해 나가자. (54NMB)
# 시간(le temps) 철학 일반에서 *******
[개요]
시간의 용어는 인간 경험의 특별한 측면의 요약이다. 이 측면에는 우선 계속이라는 관계들을 모을 수 있다 – 참조: 선행성(l‘Antériorité). 그리고 지속이라는 관계들을 – 참조: 지속(la Durée) - 그 다음으로 사건들 사이의 동시성의 관계를 – 참조: 사건(l‘ Evenement) 모을 수 있다. 이 관계들은 그 관계들 사이에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계속(la succession)이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 반면에, 동시성(la simultanéité)은 다른 사건들 사이에서 계속의 부재로서 정의되고, 지속(la durée)은 계속적이고 다른 사건들의 경과에서 현존이라는 동일한 기체(un même substrat)의 정체성(l‘identité)을 지시한다.
[내용]
계속이라는 관계들은 시간의 방향이라는 관념을 생겨나게 했으며, 지속이라는 관계들은 시간의 연속성(continuité)이라는 관념을, 동시성이라는 관계들은 시간의 일차원성이라는 관념을 낳았다. 시간의 1차원적 특성(이것은 공간의 3차원으로부터 구별된다)은 측정가능성의 특성이 보태지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주기적인 진행과정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표현되는, 동등하고 계속적인 지속들에 관하여 주의하게 된다. 이런 측면은 사실상 적어도 시간 일체의 표상에 대한 첫 단계들에서 인간 정신에게 가장 많이 인상 깊게 한다. 또한 이런 측면은 시간을 지시하는 인도-유럽 항들(termes, 용어들)의 어원학에서 반영되었다. 그 어원학에서 절단의 – 따라서 척도의 – 관념은 근본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시간은 생성하는 중인 모든 사건들을 위하여 이렇게 마치 일종의 보편적 내용처럼 나타났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양한 문화에 따라서 직선으로 또는 원으로 시간을 표상(재현)했다. 이런 이유로, 모든 시간적 관계들은 선(線, la ligne)으로 그려지게 되는데, 사람들은 그 선에게 공간의 차원에 유사한 정태적인 특성이든지, 또는 생성의 흐름에 유사한 동태적인 특성이든지를 부여한다.
시간적 관계들을 다른 더 근본적인 것에 환원하는 것의 불가능성(l’impossibilité)은 –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에 영향을 입은 몇몇 저자들이 원인성에 환원 - 이런 관계들의 매우 원초적 특성을 드러낸다. 인간 의식은 이러한 원초적 특성의 증거인데, 왜냐하면 그 의식은 계속적인 사건들을 계속적으로 배워나갈 수 있다. 사실상 의식은 과거라고 부르는 몇몇 사건들의 기억을 간직하고, 또 그 의식은 미래라고 부르는 다른 사건들의 경과에 예참하면서, 따라서 사물들의 경과와 연관하여 일종의 초월을 표시한다. 그런 이유에서, 하이데거(Heidegger, 1889-1976))를 이어가는 몇몇 작가들은, 자신들이 시간성 또는 역사성이라 부르는 의식적 생성으로부터. 의식이 마치 일련의 사건들처럼 시간에 대한 인식을 획득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식에게는 밝혀질 수 없는 방식으로 부과하는 사건들의 계속[이어짐]을 의식이 따르도록 강요하면서, 만일 각각의 현재가 다른 현재를 계속한다면, 사건들은 미래로부터 출발하여 과거로 될 뿐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제시할 수 있다.
시간적 순서를 변형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무능(l’impuissance)이 틀림없이 이유인데, 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자주 시간을 가지고 자율적인[독립적인] 실재성(une réalité)으로, - 그것이 마치 어떤 신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 만들었다. 즉, 그 신화는 시간을 전능한 신성과 동일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고전물리학에서 동일한 경우이다. 이 물리학에서, 뉴턴(Newton, 1642–1727)의 표현에 따르면, 유명한 보편적 흐름은 모든 외부적 경과과정과 독립적으로 획일적(uniforme) 방식으로 흐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의 혁명은 보편적 시간은 없으며, 이 보편적 시간에 모든 사건들이 일의적 방식으로 참조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제시했다. 왜냐하면 빛의 속도는, 이 속도 덕분에 우리가 동시성들을 규정하는데, 보편 상수이기 때문이고, 게다가 모든 좌표 체계에서 한계-속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리학의 발견은 인식론에게 시간의 관계적이고 상대적인 특성을 깊숙이 탐구하도록 강요했다. 민코프스키(Minkowski, 1864-1909)와 같은 몇몇 학자들에게, 이 발견은 그에게[인식론에게] 예전에는 분리되어 있었던 공간과 시간에게 부여한 실재성이란 특성을 시-공간(참조: 시간-공간)에 위에 도로 갖다 놓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공간은 물리학적 시간 자체만큼이나 관계적이고 상대적이다. 따라서 3+1의 차원에 속하는 연속체는 물리학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수학적 표상처럼 간주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런 표상의 객관적 가치는[값은] 부인할 수 없으나, 완전히 권리 상으로 실재성과 같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실재성 가운데 물질을 이어야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력의 상대성의 이론과 같은 일반화된 상대성에서, 시-공간의 미터화[측정]은 중력장에 의존하기 때문에 게다가 유사-유클리드 기학학적으로 되는 것을 그만 두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시간에 대한 물리학적 개념의 역사로부터 확신을 끌어내도록 허가 받았다. 그 확신이란, 우리가 기나긴 경험들로부터 친숙하게 여겨왔던 시간의 성질들(les propriétés du temps)이 현대 물리학에서 계속해서 검증되고 있다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그 성질들이 현대물리학으로부터 새로이 밝혀짐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성질들을 계속해서 검토해 나갈 것이다.
A. 시간의 방향(La direction du temps)
이로써 사람들은 사건들이, 우리에게서 보면,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방향에서 재생산된다고, 그리고 그와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고 이해한다. 인간 심리학은 옛적부터 시간의 두 부분을 구별했다. 우리가 기억을 간직하는 것은 과거로부터 인데 반해, 욕망과 걱정은 미래로 향해 있다. 우리의 삶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행하게 펼쳐진다. 물질적 작용의 가장 기본적인 평면[도면]에서 사람들은, 몇몇 사건들의 경과를 전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또한 예를 들어 새로운 에너지의 보탬 없이는 서로서로 작용하는 구성물들로 되어 있는 혼합물에 대한 분리를 조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확정한다.
근대 과학이 시간의 방향에 정확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열역학이론과 더불어19세기였다. [이에 비해] 고전 역학에서는 시간의 방향이 무차별적이었다. 이런 방향을 증가하는 안트로피의 용어[개념]가 특징지웠다. 이를 통해서, 에너지 교환들 과정에서 교환들의 일부가, 무한정하게 회복할 있는 것이 아닌 열량에너지(l’énergie calorifique)의 형식으로 흩어지게 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에너지 총량 보존법칙과 쌍을 이루는[대등하다고 여기는] 이런 이용 가능한 에너지의 손실은, 엔트로피가 최대치가 되는 균형 상황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상 정역학은 다음을 제시했다. 즉 이런 등락들(des fluctuations, 유동들)은 균형의 주변에서 정상적으로 생산된다. 고립된 체계들은 이런 균형 맞추기에 되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는데, 개연성[확률 계산]의 법칙에 따른다.
그러나 현대 열역학은 고립된 체계들의 아주 인위적 특성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 현대 열역학은, 체계의 환경과 더불어 에너지로도 물질로 교환하는 열린 체계들의 연구에 응용되었다. 이 마지막 조건들[열린 체계]에서, 부정적 에너지, 즉 역에너지(la néguentropie)의 국지적 증가(사람들은 “정보화”의 작업에도 또한 말한다)는, 최소한의 어떤 정도[측정]에서도, 어떤 국지적 증가를 보상할 수 있다. 이때에 시간적 불가역성은, 고립된 체계에서 평형상태로 향하는 일반적 경향보다 더 풍부한 의미를 갖는다. 이 불가역성은 지구 위에서 생명의 지나간 과거의 진화를 마치 하나의 계속적 단계들로서 생각하게 해준다. 이 단계들의 경과에서 점점 더 유기체화 된 형상들이 나타날 수 있었고, 이 형상들은 [초기의, 원시의] 초보적인 형태들을 능가할 수 있었다. 이런 조건들에서 생명의 역사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과장된 것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전부터 인간 사회들의 역사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으며, 이 사회들은 스스로 발전하는 조건에 종속되기도 하고, 서로들 간에 경쟁하기고 하고 또 우발적으로 몰락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이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역사에 대해서도 말하는데, 그것은 최초의 폭발, 즉 빅뱅(Big Bang)으로 솟아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폭발이 끝났는지 끝나지 않았는지를, 다시 말하면 폭발이 압축의 시기로 이어지는지 않는지를 아직도 모른다. [정확하지 않은 빅뱅설에 대해 결정론과 비결정론을 논하지 말자. 인간의 인간다운 활동이 자유로운 지를, 지구역사 45억년으로부터 시작할 것도 없이, 구석기에서부터 논의해도 개연성이 더 클 것이다. (54NMB)]
B. 시간의 연속성(La continuité du temps)
기하학적 선에 의한 시간의 도형화(la figuration)는 그 자체로 시간의 연속성을 요청[가정]한다. 이 도형화는 내적 경험에 근거하며, 내적 경험은 빈칸을 주지 않고 걸터앉은 듯 이어지는 사건들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적어도 사람들은, 증가하기는 하지만 관심의 유일한 선(線)은 아닌, 마치 바슐라르(Bachelard, 1884-1962)가 그렇게 했듯이, 생성들의 다양성을 고려한다. 몇몇 순간들의 의미화가 더욱 놀랍지만(참조: 순간), 그 순간들은 마치 불연속처럼 나타나는데, 무의식의 심적 현존은 마치 순간들의 기반(le soubassement)처럼 나타난다. 그런데 그 기반의 영속성은 의심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운동의 친숙한 경험은 우리에게, 경험의 편에서, 공간적 차원의 구조와 동일한 구조를 시간에게 부여하게 한다. 이것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Ἀριστοτέλης, 전384-322)가 엘레아학파인 제논(Zénon d'Élée, 전490경-430경)의 유명한 역설들에 대해 행한 응답이었다. 제논은 운동의 실재성을 부정했는데, 즉 운동이 유한하면서도 동시에 무한하다는 다수성을 가정한다는 구실로, 그리고 어째거나 점들, 순간들, 지속들을 모순적인 양으로 가정한다는 구실로 운동의 실재성을 부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응답하기를, 공간과 시간은 연속적인 양들이고 이 양들은 무한히 나누어질 수 있지만, 이 무한성은 그에게 있어서는 잠재적이지 현실적이 아니라고 한다.
이 점에서 근대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을 이어갔다. 그 과학은 시간은 순간들로 구성된 것처럼 생각했고, 그 순간들은 수적으로 무한할 뿐만 아니라, 나열할 수 없는 무한성이라고 한다. 또한 몇몇 저술가들에게서는 순간들에게 지속의 무한소적인 양을 부여했다. 이러한 도형화(la figuration)는 운동의 새로운 분석에 연결되었으며, 갈릴레이(Galilei, 1564-1642)가 처음 사용하였다. 적어도 얻어진 성공에 관한 한, 시간은 마치 독립적인 변수로 서 생각되었으며, 이 변수로부터 순간적인 속도와 가속도의 용어들이 정의 되었다. 이 용어들에 무한소의 계산이 적합한 수학적 기호(la representation, 재현)에 기여할 것이다. 미분방정식들의 사용에 의해서, 근대 물리학은, 상대성 이론들을 포함하여, 물리적 시간의 연속성을 요청[가정] 하였다(postuler).
사람들은, 양자 물리학(la physique quantique)이 시간의 불연속성의 패러다임을 이용하여 연속성에 대한 옛 패러다임을 뒤집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는데, 양자 물리학은 파동모델에 호소할 뿐만아니라 입자 모델에도 적잖이 호소하며, 그리고 양자물리학의 다양한 또는 하나의 체계로 진화를 묘사한 것은 파동모델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시간의 양자들(des quanta)의 도입 시도는 작용과 에너지의 양자들의 모델 위에서 인데, 어떠한 결정적인 결과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 시도는 순간적인 상호관계의 요구들(les exigences)과 화해할 수 있는 것 같지 않으며, 이 요구들은 겉보기로는 미시물리학이 지배하는 도처에서 상대성의 요건들[필요조건들]을 반박하고 있다. 따라서 양자 이론들에게 깊은 물리학적 실재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하더라도, 이 양자 이론들로부터 시간과 공간의 틀들을 재해석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진행과정드릐 세부는 이론들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C. 시간의 측정가능성 (La mensurabilité du temps)
시간을 날들로 달들로 년들로 할당(la répartition, 분포도)은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책력의 제도는 오랜 옛 문명들을 특징짓는다. 이 문명들은 실용적이고도 종교적인 기원에서 시간을 측정할 경향을 표출하였다. 고대 과학은 천문학을 창안하면서 경험적 변동(le comput)을 완성시켰다. 한편으로는 천문학이 별들의 규칙적인 운동을 믿는데서 기초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시계와 물시계(la clepsydre)와 같이 시간 측정의 원초적인 도구들을 기초로 하였다.
오늘날 시간의 측정은 매우 완전하게 되었는데, 호이겐스(Huygens, 1629-1695)에 의해 17세기에 발명된 시계의 모델은 갈릴레이에 의해 발견되었던 진자의 진동[왕복운동] 법칙위에 기초하였으며, 또는 호이겐스 덕분에 태엽 추의 원리 위에 기초하였다. 이 모델은 이미 수정 시계들에 의해 그리고 원자시계들에 의해 대체되었다. 그러한 결과로 초(秒) 단위를 정의하는데 변화를 가져왔다. 초(秒)는 평균 태양일이나 년회귀의 분수(分數)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기방사(電磁氣放射)의 진동 계산에 근거한다. 이리하여 초 단위는 이제 방사의 9,192,631,770[약 91억]번 주기의 지속으로써 정의된다. [여기서 방사의 진동은] 세슘(césium) 133번 원자의 근본 상태로부터 두 가지 초미세 수준들 사이에 전이에 의해 생산된 횟수이다. [일초에 91억번 진동하는 세슘을 기준으로 하며, 반감기 30년에 1초정도 오차가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알다시피, 시간에 대한 물리학적 측정은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정확하며, 그리고 1981년 이래로 그 측정은 길이의 단위를 정의하는데 사용한다. 그러한 것은 상대성의 보편적 등가에 대한 도량형학(la métrologie)의 귀결이다: 즉 L = cT(여기에서 c는 빛의 속도와 동일시되는 제한 속도이다).
시간의 표상에 연결되어 있는 이 모든 문제들로부터 사람들은 칸트(Kant, 1724-1804)의 비판론에서 가장 철학적인 문제로 나타나는 문제를, 즉 시간의 유한 또는 무한성과 같은 문제를 등한시 한다. 칸트는 공간의 이상성과 마찬가지로 시간의 이상성을 자기 비판론의 출발점으로 제시했기 때문에, 그가 그 문제를 과거 속에 시간의 확장에로 충분히 임의적으로 제한했다고 할지라도, 그는 문제를 딱 잘라 해결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이성이 안티노미에 부딪히면서 그것을 해소할 수 없을 지라도, 이성이 필연적으로 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제시하는데 만족했다. 사람들이 시간을 생각하는데 이끌려 졌을 때, 그 문제는 달리 제기된다. 자연의 한 측면처럼 또는 물질적 실재성의 한 측면처럼, 문제의 성질들이 보다 높게 진술되었으며, 여기서 실재성은 우리 감성의 형식과 우리 오성의 범주들에 대해 시간의 현존 속에서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러 우주발생론적 이론들이 이 주제에 서로 대결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떠한 답변도 아직 결정적이지도 더군다나 그럴듯하지도 못하다는 것을 저 위에서 보았다. 획득된 것, 그것은 성운들의 점진적인 상호이완에 의해 표출된 “우주적 시간”이란 용어, 켈빈(Kelvin, 1824-1907) 절대온도 3도의 잔류 광선이란 용어, 태양계의 원자들의 나이란 용어 등이 우주의 불가사의한 생성에 그리고 우주의 지속에 관계있는 모든 가설들에 필수불가결하다. (H. Barre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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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명록 ***
490 제논(Zénon d'Élée, Ζήνων, 전490경-430경) 엘레아 학파 철학자. 무와 운동부정. 제논의 파라독스(아킬레스와 거북이, 이분법, 나르는 화살, 스타디움)
384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Ἀριστοτέλης/Aristotélēs, 전384-322: 62살) 스타지르(Stagire)에서 탄생. (플라톤 나이 43세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367년(17살)에 플라톤의 나이 예순 살에 아카데미아 입학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을 창안하면서 앞 시대(이오니아)의 아페이론을 무시하는 누스((le νοῦς 지성)의 영광을 노래한 첫 철학자일 것이다.]
O
1564 갈릴레이(Galilée, en it. Galileo Galilei, 1564-1642) 이탈리아 수학자, 기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1629 호이겐스(Christian Huygens, 1629-1695) 네델란드 수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1642 뉴턴(Isaac Newton, 1642–1727) 영국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연금술사, 천문학자, 신학자.
1646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 독일 철학자, 수학자, 논리학자, 외교관, 문헌학자. 박학다식(Esprit polymathe).
1724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 프러시아 철학자. 비판주의와 선험적 관념론을 창안하였다.
1824 켈빈 경(William Thomson, Lord Kelvin, 1824-1907)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물리학자, 열역학이 작업으로 유명하다.
1864 헤르만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 1864-1909) 독일 수학자, 이론물리학자. [천문학자, 신성연구자인 루돌프 민코프스키(Rudolph Minkowski, 1895-1976)는 헤르만 민코프스키의 조카이다.]
1879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독일-미국 이론 물리학자. 1921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1884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 프랑스 과학 철학자, 시의 철학자. 프랑스 역사적 인식론의 대표자들 중의 하사람이다.
[1885 닐스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 1885-1962) 덴마크 물리학자. 1922년 노벨 물리학 수상. 아인슈타인: “신은 (우주를 가지고)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God does not play dice)” - 보어가 "아인슈타인 씨, 신에게 그만 좀 이래라저래라 하시오(Einstein, stop telling God what to do)." ] [주사위 놀이는 니체의 말씀이 아닌가?] 1889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독일 철학자.
1929 바로(Hervé Barreau. 1929-2014) 신학과 철학 공부 후, 1959년 철학교수자격 통과. 국립과학연구센터 탐구원장(Directeur de recherche au CNRS) L'épistémologie(QSJ, n° 1475, 1992), 벩송, 생명과 행동(Bergson, la vie et l'action: Suivi de La pensée religieuse d'Henri Bergson, 2007(Jean-Louis Vieillard-Baron, Hervé Barreau, Jean-François Marquet, Francis Kaplan),
(7:23, 54N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