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 고백 -
달구 아버지와 노인회장님
우리 시골 달구 아버지는 태평농법의 권위자
논 다섯 마지기에 벼보다 피가 더 많아
마을 어른들 모두 혀를 차고 지나가도 눈도 꿈쩍 안 하고
태평으로 농사지어도 내 묵을 건 나오요
그러면 우리 노인회장님은
그는 팔순에도
바지런하기로 소문났지
열 두마지기 논에 피 하나 없이 농사지으며
고추 농사 깨 농사 안 하시는 게 없지
일만 하시고
잠은 언제 주무시나
태풍, 하이선이 지나가고 난 뒤
달구 아버지 논에는
피하고 벼하고 어깨동무한 채 잘 서 있고
노인회장님네 벼들 하나 같이 바람결로 누워있네
이일을 우야노, 아직 알곡도 안 여물었는데
담배만 빨아대는
회장님 입술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
* 김해경 : ‘시의 나라’시 등단(2004), 부산 시인협회 사무국장 역임. 시집 ‘내가 살아온 안녕들’등 다수. 경호문학회 회원
그날, 유희의 친구 미란으로부터 충고 아닌 충고를 들은 나는 새삼스럽게 우리의 사랑이 처음으로 후회되었다. 그녀의 충고는 단지 충고가 아니라 나를 부정하는 모멸이요,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사랑에 대한 멸시요, 나라는 인격체의 훼손이었다. 나는 사랑한다고 했으나 그녀의 표현에 의하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유희에 대한, 이미 암컷을 거느린 수컷의 또 다른 유혹인 셈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 유희의 수많은 문자와 통화를 거절한 채, 이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그녀의 친구, 미란은 이런 점을 노린 듯했다. 이런 식으로 당사자인 내가 지금의 사랑에 환멸을 느껴,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것. 나는 일주일을 굉장한 혼란과 번민으로 밤을 새우고 또 새웠다.
나는 그 일주일 동안 유희뿐만 아니라, 사무실의 연희 그리고 K 관세사 한수마저 멀리한 채, 따로 만들어놓은 나만의 방에서 배회했다. 그 방에는 당연히 고독과 지독한 외로움, 어둠과 상처 그리고 연민과 눈물만이 돌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이번엔 그녀가 애가 탄 모양이었다. 그녀는 나를 만나기 위해 놀랍게도 내 친구인 K 관세사 한수를 이용했다. 일주일이 거의 끝나가는 일요일 밤, 한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급한 일이라며 내가 사는 아파트 근처에 있으니 잠시 나오라고 했다. 마침 아침에 라면 하나 먹은 게 전부여서 나는 그와 함께 요기나 할겸, 아무렇게나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 앞 포장마차였다. 밖에서 보니 단 두 명의 그림자만 보였는데 왼쪽에 남자, 오른쪽에 여자가 앉아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남녀가 따로따로 왔다면 그 둘은 나란히 붙어 앉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 손님들과 별개로 한수가 잠시 화장실을 갔는가 싶었다. 그런데 비닐문을 통과하여 들어가니 한수가 맞았다. 그리고 옆에는 그녀, 유희가 앉아 있었다. 나는 순간 기분이 묘하여 그만 뒤돌아서서 나가려 했지만, 그가 내 팔을 휘어잡았다.
“뭐야. 여기까지 와선. 왜 가려고?”
“내가 묻고 싶은 말이네. 왜 네 사무실 여자랑 같이 왔어?”
“일단, 앉아 봐. 설명해 줄 테니.”
언뜻 보니 그녀는 이 상황이 난감한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대로 이 상황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싶어 못 이기는 체하고 그의 옆에 앉았다.
“뭐 먹을래?”
그들의 앞에는 순대와 먹다 만 냄비 우동 그리고 소주 한 병이 놓여있었다.
“술이나 줘.”
그때 그녀가 날 빤히 보더니 말을 붙였다.
“과장님. 우동 한 그릇 드세요. 그런 후에 술을 마셔야죠. 종일 아무것도 못 먹은 사람처럼 보여요. 아줌마! 우동 하나 추가요.”
나는 갑자기 날 위해주는 척하는 그녀가 고맙기도 했지만, 약간 얄밉게 생각이 들었다.
“웬일이야? 이 늦은 밤에 우리 집까지 다 오고.”
그제야 나는 한수의 얼굴을 보았는데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얼굴은 흙빛이었고 목 주위는 붉은 반점이 여럿 있었다. 이미 전주가 있은 모양이었다. 그는 내게 술을 따라주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A 업체 대표 그놈이 고의로 부도내고 튀었다. 그것 때문에 어제, 오늘 유희 씨랑 사무실에서 피해액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고 오는 길이야.”
A 업체는 얼마 전 세번번호때문에 사장실에서 행패부리다 내게 당한 그 업체였다. 평소 말썽이 많았던 대표란 놈이 결국 한수에게 피해를 준 모양이었다.
“피해액이 얼만데?”
“그동안 차일피일 미루던 통관비랑 투자목적으로 투자했던 돈 다 합치면 5억원 야.”
나는 그가 따라준 술을 단번에 마셔버리곤 내가 잔을 따르려 하자, 그녀가 중간에서 가로채어 내게 따라주었다.
“투자도 했냐?”
“할 수 없었어. 계속 우리와 통관을 위해서도 그렇고 내 노후를 생각해서. 그놈이 필리핀 쪽에 사업체를 하나 세운다 하기에.”
“그래서 내가 어떻게 도와줄까?”
“모아둔 돈 있으면 급한 대로 2~3억만 해줘. 당장 직원들 월급날이 코앞이야. 그것부터 해결하고 투자목적으로 이리저리 빌려 쓴 돈을 갚아야겠어. 오늘 고맙게도 옆에 있는 유희 씨가 선뜻 5천만 원을 빌려주었어.”
“뭐? 유희가?”
“그래.”
나는 그제야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내 눈과 마주치자 잔을 들어 건배하자는 시늉을 했다.
“그대가 무슨 돈이 있어서 그래?”
“시집가려고 모은 돈이 좀 있었어요. 왜요? 그러면 안 되나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에게 솔직히 별 할 말은 없었다. 오히려 내 친구에게 선뜻 자신의 돈을 빌려주는 그녀가 고맙기까지 했다. 나는 한수의 어깨를 두드렸다.
“알았어. 내 최대한대로 마련해 볼게. 너무 걱정하지 마.”
“정말이냐? 와! 이제 살았네. 역시 자넨 내 절친이야. 만약에 네가 거절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술이 넘어가질 않더라고. 자! 이제 한번 마셔보자. 술을 내가 살 테니까 걱정말고.”
단순한 그였다. 급한 불을 껐다고 생각하는지 그의 얼굴은 금방 밝아졌다. 옆에 있던 그녀도 덩달아 표정이 좋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소주 4병을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사이에 그녀와 난 업무적인 이야기 외에 그간의 사적인 이야기는 좀처럼 하지 않았다. 포장마차를 나오자 그는 내게 또 다른 부탁을 하나 했다.
“자네가 유희 씨 집까지 좀 바래다줘. 난 나머지 돈을 융통해야 하거든. 이 근처에서 아는 거래처 대표를 만나기로 했어. 부탁해.”
그는 그 말만 해놓고선, 저만치 서 오는 택시를 잡아탔다. 잘 나가던 회사 대표가 거래업체의 부도와 사기로 이 밤에 돈을 꾸러 또 다른 곳으로 간다생각하니 친구로서 마음이 아팠다.
“전 그냥 여기서 택시 타고 갈게요.”
그가 떠나자 뒤에 서 있던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시계를 보니 밤 11시였다. 나는 어떡해야 하나 고민했다. 아무리 그녀가 미워도 이 늦은 시간에 그녀 홀로 집에 보내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여기는 내가 사는 동네였다. 한수의 부탁도 있었지만, 그녀가 이곳까지 온 이유는 나와 만나 이야기를 할 목적도 있었다. 나 역시 비록 한수와 함께온 그녀에게 마음은 조금 풀어진 상태였다. 나는 그녀가 혼자 가겠다고 말한건 그냥 한 소리였다고 생각했다.
“아냐. 같이 택시 타고 가자. 내가 바래다줄게.”
마침 멀지 않은 곳에서 택시가 오고 있었다.
그녀의 집까지는 대략 삼사 십 분이 걸렸다. 나는 그녀가 차 안에서 저번 일을 먼저 사과하길 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우습게도 택시에 타자마자, 내게 기대더니 곧바로 잠이 들고 말았다. 몹시 피곤한 모양이었다. 나는 곤히 자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그녀가 너무 안쓰러웠다. 휴일 날 서울 집에 가지 못하고 대표와 함께 사무실에서 일을 본 뒤,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함께 한 그녀였다. 나는 헝크러진 그녀의 머릿결을 손가락으로 펴줄 심산으로 쓰다듬었는데, 그녀는 설핏 잠이 깼는지 실눈을 뜨며 날 바라보다 이내 깊은 잠에 들고 말았다. 나는 아이처럼 새근새근 자고 있는 그녀를 보고 여러 가지 상념이 들었다.
택시는 그녀가 사는 원룸 앞에 정확히 도착했다. 그때 그녀는 곧바로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예요?”
“이제 깼어? 집에 다 왔어. 이제 내리면 돼.”
나는 이 택시를 타고 바로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옷매무시를 가다듬더니 지갑에서 돈을 꺼내 택시비를 냈다. 나는 이게 아닌데 싶었지만, 기습적인 그녀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택시에서 내렸다.
“죄송해요. 제가 그만 잠이 들었나 봐요.”
“많이 피곤했나 봐.”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는 날 빤히 쳐다보더니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오셨는데 어떻게 그냥 보내요? 들어가서 커피 한 잔만 하고 가세요. 아저씨 술도 깰 겸. 대신, 집이 엉망이라고 욕만 안 하시면 돼요.”
그녀의 방에 들어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그녀의 방에 들어갔다. 원룸인 줄만 알았던 방은 투룸 형태였다. 싱크대와 조그만 소파가 있는 첫 번째 방은 거실이었고 그 안쪽은 그녀의 침실이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옷 좀 갈아입고 커피 준비할게요.”
그녀는 침실 쪽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늦은 밤 그녀가 사는 방에 들어온 나는 기분이 묘했다.
잠시 후 그녀는 커피를 들고 내가 앉아 있는 소파 옆에 앉았다. 그녀가 건네준 뜨거운 커피를 마시니 한결 속도 훈훈하고 술이 깨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날 일은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어요. 많이, 속상했죠?”
그녀의 말에 그날 불쾌했던 기억이 되 살아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않았다.
“미란이 걔가 좀 그래요. 오지랖이 넓어서 무슨 일이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구 참견하거든요.”
그녀는 커피를 마시고 있는 내 옆에 바짝 붙어 애교까지 부렸다.
“뭘? 그대의 친구는 바른말을 한 거지.”
“그 애가 무슨 바른말을 했다 그래요?”
“나와 그대가 불륜관계니 나더러 빨리 헤어지라더군.”
그러자 그녀는 과장되게 음성을 높였다.
“세상에!”
그러나 나는 짐짓 화를 냈다.
“왜 그렇게 놀라는척 해? 그대가 친구에게 그런 말을 하도록, 시킨 것 아냐?”
그녀는 내 말에 펄쩍 뛰었다.
“아니에요. 제가 왜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꾸몄겠어요. 그건 오해예요. 정말 오해라구요!”
그녀가 극구 부인하는 바람에 나는 행여, 나 혼자 괜히 의심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 정말, 미란이가 아저씨를 밖으로 불러낼 줄 몰랐어요. 아저씨가 그렇게 간 뒤에 제가 얼마나 화가 났던지 그얘랑 대판 싸웠거든요. 그날 미란이도 그런 나 때문에 화가 나서 그길로 서울로 올라가버렸어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나는 그녀의 무수한 문자와 통화 자체를 거부했는데, 그 시간 그녀는 나 때문에 친구와 싸웠다는 말이었다.
“정말이야?”
“네.”
그녀는 자신의 말을 자꾸 의심하는 나 때문에 계속 울먹울먹했다.
“알았어. 그러니까 울지 마.”
커피잔을 내려놓은 내게 그녀는 팔짱을 꼈다.
“그럼, 이제 화 풀린 거죠? 맞죠?”
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와우. 이제야 내 맘이 개운하네. 그런데 아저씬 그깟 일로 왜 그리 잘 삐져요? 그동안 답답해서 내가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알긴 알아요? 하여간 감당하기 어려운 남자야.”
그 말을 하고 그녀는 내 품에 기대었다. 따뜻한 그녀의 온기와 향이 내 몸을 자극하자 그새 품었던 그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일시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내 얼굴을 파묻었다. 마음속에 격정적인 사랑이 꿈틀될 때 나는 호흡이 가빠졌고 그녀를 품고 싶어졌다. 사랑은 이렇게 유치한 것이었다. 가슴 속에 미움이 가득하다가도 나는 어느새 그녀의, 사랑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