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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 제3권. 중세와 르네상스, Moyen Age et Renaissance 463-
# 들뢰즈의 특이성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둔스 스코투스를 읽어보세요. 벩송(1859-1941)-브레이어(1876—1952)-들뢰즈(1925-1995)의 계열의 연결성이 보일 것이다.
제6장, 14세기 Le XIVe siècle 630-658.
1절, 둔스 스코투스 Duns Scot 630-636
이런 분열상의 초기 징후는 섬세의 박사,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5경-1308)의 의해 창시되었던 관념들의 운동에서 있었다. 그는 짧은 생애를 마쳤다. 1265년경에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러 대학에서 예학들과 신학을 공부했는데, 그 중에는 캠브리지 대학과 파리대학도 속한다. 그는 1300년 이전에 캠브리지 대학에서 평결문들(Sentences)에 주석을 달았다. 그리고 옥스퍼드 대학을 거쳐 파리 대학에서 1306[마흔하나]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308년[마흔셋]에 퀠른에서 세상을 떴다. 평결문들에 대한 그의 주석의 진지한 원문은 질서(Ordinatio, 통치)에 있다(이 책은 출판 중에 있다). 강연(reportatio)들 중에서 최상의 것은 옥스포트에서 강연이다. 그의 덕분에 사람들은 포르피리오스의 질문들(Questions),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논리학 작품들, 또한 형이상학에 관하여, 또한 [저술들로서] 제1원리에 대하여(De primo principio)와 정리(Theoremata)와 Quodlibets를 읽을 수 있다. 와딩-비에브(Wadding-Vivès)의 편집으로 나온[26권] Gramatica sepculativa과 De rerum principio은 각 저자들이 토마스 에르푸르트(Thoma Erfurt, 14세기초 활동)와 비탈 드 푸르(Vital du Four, 1260-1327)이다. (630)
둔스 스코투스는 우리가 따라왔던 어떠한 흐름[사조]들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런 흐름들에서 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를 만든 자들에게, 사람들은, 그가 그 학파에게 가장 값진 이론들을 가지고 만든 매우 생생한 비판에 반박하게 해야만 했다. 이론들이란, 마치 계시와 같은 지적 인식의 이론, 물질 속에 포함되어 있는 씨앗의 이법들의 이론, 영혼 속에 포함된 타고난[태생적] 인식들의 이론 이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토마스주의자가 아니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학설들, 즉 물질의 현실적 현존, 형상에 의한 개체화, 즉 핵세이테(haeccéité), 의지의 우선성 등은 성토마스의 이론과는 의지적이고 의식적인 대립 속에 있다. (630)
이것을 구별하고 따로떼내는 본질적인 특징들 중의 하나, 그것은 사람들이 우주에 대한 크리스트교적 전망(la vision)의 역사적 성격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해 망설이지 않고 주장하는 것이다. 창조, 육화[물체화], 크리스트의 장점들에 대한 충당(imputation), 이것들은 신의 부분으로서, 단어들 가운데 가장 충만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작동들이다. 말하자면 이 작동들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고 또한 신의 고유한 의지와 다르지 않은 이법인 신의 주도권[창도력]에 의존한다. 성 안셀무스의 “나는 믿는다, 이로서 이해할 것이다(Credo ut intelligam)”와 신의 동기들을 탐색하는 노력은 이런 새로운 정신에 대해 직접적인 반대에 있다. 따라서 그는 특이하게 신상의 순수 대상들의 목록을, 즉 크레디빌리타(credibilita,신앙가능성 목록)를 길게 나열했다. 크레디빌리타는 “카톨릭신자들에게서는 그 만큼 많은 보다 확실한 것들이다. 그들이 우리들의 맹목적이고 자주 흔들리는 오성에 지지를 받지 않고, 오히려 진리들 중에서 가장 견고한 진리 속에서 확고한 지지를 발견한다.” 전능, 통약불가능성, 무한성, 생명, 의지, 완전 현전, 진리, 정의, 섭리, 말하자면 거의 모든 신적 속성들, 이것들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치 세계의 원인과 같은 신의 용어로부터 연역했다. 이 속성들은 둔스 스코투스에게서는 신앙의 대상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그는 신의 현존의 추리적 증거를, ‘세계의 우연성으로부터 논증’(argumentum a contingentia mundi)을 인정했을 것이다. ‘세계의 우연성으로부터 논증’은 우리가 경험하는 변화하는 존재로부터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가변성(mutabilité)으로부터 존재 속에 존재근거를 갖는 필연적 존재로 우리를 이행하도록 강요한다. 이런 증거는, 마치 안셀무스가 그렇게 원했던 대로, “사람들이 사유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존재”라는 용어로부터 출발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단순하고 타고난 관념이 아닌 이런 용어는 유한한 존재들에서 출발하면서 우리들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선 이용어가 모순이 아닌지를 제시해야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631)
사람들은 이런 관점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플라톤주의 정신의 모든 흔적, 다시 말하면 실재적인 것의 형상들 사이에서 연속성과 위계질서의 주장의 흔적은 둔스 스코투스에서 거의 사라졌다. 만일 아우구스티누스주의가 존재 속에서 연속성을 따라서(donc) 인식 속에서 연속성을 주장했다면, 그리고 토마스주의가 존재 속의 연속성을 그러나(mais) 인식 속에서 불연속성을 주장했다면, 스코투스주의는 다음을 정식으로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존재 속에 불연속성 과(et) 인식 속에서 불연속성이다. 이런 이유로 둔스 스코투스는 모든 개념들은 사용했으며, 우리가 보기에 그것들은 13세기에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 개념들이란 가능적 예지와 능동적 예지, 질료와 형상, 보편과 개별, 의지와 오성 등이다. 반면에 앞선 사상가들에게서 이런 개념들은 서로 불려지고, 서로 연결되고, 서로 위계를 지니고, 서로 조직화되는데, 둔스 스코투스는 거기에서 독립적인 항들을 보게 하는 것 같다. 독립적 항들의 각각은 따로 충만하고 자족적인 실재성을 갖는데, 그 실재성은 아마도 서로 요청하지 않고서도 서로 보태진다. (632)
게다가 둔스 스코투스는 보편적 유비의 원리를 포기한 것 같다. 그 원리는 보나벤트라에게서 심지어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도 연속성의 큰 동인이었다. 존재(l’être)는 신과 피조물들에 비추어서는 모호하지 않고 일의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선언하면서(말하자면 존재는 동일한 사물을 의미한다), 그는, 한 항(피조물)에서, 즉 파생적 의미에서 존재에서 다른 항으로, 즉 보다 고상한 의미에서 존재인 신으로 이행을 허용하는 유비적 연관에서 모든 토대를 걷어낸다. 왜냐하면 피조물과 신은 동일한 자격으로 존재라는 용어에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 존재는 이들[신과 피조물]을 연관시키면서도 이들을 구별하는 어떠한 수단도 부여자지 못한다. (632)
이 불연속주의는 우선 물질의 이론에 의해 표시된다. 물질은 아우구스티누스주의와 동시에 토마스주의에도 적대적이다. 아우구스티누스주의에 적대적이란, 왜냐하면 둔스 스코투스는 물질 가운데 있다는 씨앗 이법의 현존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토마스주의에 적대적이란, 왜냐하면 그는 어떠한 잠재성도 물질에게 형상 없이 존재하기를 허락하지 않는 소요학파의 원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스코투스는 한마디로 두 이론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데, 두 이론은 게다가 매우 반대이기 때문이다. 또한 즉 질료와 형상 사이에 연결이 있다는 것도 부정한다. 전자의 이론에서, 질료는 내적 원리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내적 원리는 질료를 형상에 열망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자에서는 질료는, 그것[질료]을 현실화하는 형상에 상대적인 현존일 뿐이다.둔스 스코투스는 (앙리 드 강(1217경-1293)처럼) 질료가 자체적으로 현실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질료는 분명한 관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대에 머물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사정이 그러하다면, 질료와 형상의 혼성물(le composant)은 현실태에서 두 존재로 이루어졌고, 두 존재는 서로 보태진다고 하고, 혼성물은 통일성을 더 이상 갖지 않는다고 한다. (632)
아비센(980-1037)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보편자와 개별자에 자체적으로 “무차별적” 실체의 이론은 토마스주의도 아우구스티누스주의도 아니다. [한편] 사람들이 알다시피, 류들과 종들의 목록은 하등 종들에게까지, 또는 개별주의[종차구별]에게까지 그려졌기에, 소요학파주의는 종차의 형태가 분배되는 개체 속에 가지적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를 거부했는데, 종차의 형식에 우발적사건들을 부과하는 것에 따라서 순수하게 수적인 분할을 물질에게 속하게 하면서도 말이다. 다른 한편 사람들은 다음을 상기한다: 아우구스티누스주의는 개체적 영혼 속에 초자연적인 숙명의 주어를 보면서도, 게다가 영혼에게 자기에 의한 자기의 인식을 수여 한다. 자기에 의한 자기인식은 영혼이, 아무리 특이자라고하고 할지라도, 그 자체에게 가지적이게 하면서도, 신앙의 이름으로 물질에 의한 개체화의 이론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래도 역시 프란체스코파인 둔스 스코투스는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정신의 어떤 것이 남아있다. 토마스주의 주제를 인정하는 것, 자연이 또는 종적 형상이 동일한 종의 모든 개체들 속에 동일한 것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은 “아베로스(1126-1198)의 저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본성)이, 불가분이 그 자체이지만, 마치 동질적인 물을 사람들이 다른 항아리에 분배할 수 있는 것처럼, 양에 의해서 분할된다. 그러나 둔스 스코투스의 이론은 훨씬 더 일반적인 결과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는 있는 그대로로서 개체[불가분자]에게, 소요학파가 종에게 부여한 가지성과 같은 유비적 가지성을 부여하고자 원했다. 말하자면 규정성을 실증적이고 본질적인 성격[특징]들에 의한, 부정적이고 우발적인 성격들에 의해서가 더 이상 아닌, 규정성을 부여하고자 원했다. 소크라테스성(性, la scratité)은 긍정적 어떤 것이며, 심지어 소크라테스의 현존이 물질 속에 들어있기 앞서 있으며, 그리고 그 소크라테스성은 영속한다. 그 양과 우발사건들의 변화들이 실재적인 소크라테스 속에 있을 수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것이 개체의 통일성이며, 모든 이들에게 인정받는 통일성이며, 이 통일성은 둔스 스코투스에게서는 헥세이떼(haeccéité)라는 규정된 본징(une entité)을 요구한다. 종별의 형상(la forme spécifique: équinité)은 이런 본징을 포함하지 않고, 그런 형상이 연결되는 물질도(말들의 모든 몸체에 공통하는 물체적 구조) 더 이상 본징을 포함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을 형상 밖에서, 물질 밖에서, 따라서 이들의 혼성 밖에서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주의해야만 한다: 종에서 개체들로 이행은 류에서 종들로 이행처럼 조작되지 않는다.류에서 종들로 이행에서, 류와 차이의 관계는 마치 잠재적 존재가 자기를 규정하는 형상의 관계와 같다.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류와 차이는 유일한 실재성으로 통합된다. 반대로 최상위 종별화(spécialissime)의 종은 전적으로 정의된다. 이 종은 스스로 충만하기 위하여 개체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 결과로 유일하고 동일한 개체적 존재(이 말, ce cheval) 속에서는, “특이한 본징(이 말의 이것임, haeccéité de ce cheval)과 종별 본징은 형식적으로 구별된 실재성들로 남아있다.” 말하자면 개체성은 사실로서 단순하게 종에 보태어지는데,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가지적 연속성의 어떠한 연결 없이도 말이다. 둔스 스코투스가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라서 천사적 인식을 행한 비판 속에서 표출되는 중요한 특성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플라톤주의의 전통에 따라서, 천사들은 우리와 공통이 아닌 특이한 사물들을 인식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왜냐하면 천사들이 우리의 예지보다 상위인 예지를 소유했기 때문이다. 천사의 예지에서 특이자들에 대한 인식은 보편자들의 인식에 포함되어 있다. 둔스 스코투스에서 연속성은 언제까지나[영원히] 불가능하다. (634)
마치 그가 질료를 가지고 형상 없이도 현실적 실재성 자체를 만드는 것처럼, 또한 개체를 가지고 종으로부터 구별된 실증적 실재성을 만들 듯이, 둔스 스코투스는 어느 정도로는 능동적 예지에 마주하여 자치적이라는 활동성을 가능적 예지에게 부여한다. 능동적 예지의 고유한 역할은 종적인 형상을 감각적 이미지로부터 따로 떼어 놓는 것이다. 감각적 이미지에서 종적인 형상은 잠재적이다. 그러나 가능적 예지의 역할은 이해하는 작동이며, 이 작동으로부터 그 역할은 전체적 원인이다. 가지적인 종은 추상화작업에서 생산된 것으로, 가능적 예지로부터만 도출되는 이해 작동을 생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 작동을 이런 저런 대상에게 규정하기 위해서 이다.또한 그는 이 작동들의 구별이 단지 대상들의 구별에 의해서 표출된다고 믿으며, 구별 그 자체에서 구별은 전적으로 오직 지적인 권능[잠세력]으로부터 흘러나온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사람들은 또한 어떤 점에서 이런 이론이 둔스 스코투스를 아우구스티누스의 계시주의로부터 갈라놓는지를 안다. 그는 앙리 드 강(1217경-1293)의 주제에 응답하는데, 드 강은 감각적 대상들은 영혼을 밝힐 수 없다고 하고 또는 대상에게는 신적 광선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비해, 둔스 스코투스는 명백하게 이해되었던 제일 원리들의 확실성을 인용하고, 이 항들이 이해되면서부터 경험의 확실성도 인용하며, 결국에는 직접적이고 자치적인 확실성의 예들만큼이나 의식적 사실들의 내부적 확실성도 인용하면서 응답했다. (634)
그가 토마주의자들에 반대하여 오성에 대한 의지의 우선(primat)을 주장하는 것은 동일한 정신에서이다. 또한 의지는 올바른 이치의 [양심의] 명령(dictamen)을 조금도 경멸하지 않을 지라도, 의지는 오성을 이런 저런 대상의 고려에로 인도하면서, “오성에게 권고[명령]할” 수 있다. “오성이 의욕(la volition)의 원인이라면, 따라서 오성은 의지에 복종하는 원인이다” 둔스 스코투스가 목표로 삼는 것, 그것은 토마스주의를 아우구스티누스적 견해로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는 인식으로보다 오히려 사랑으로 사물들의 최종 목표를 만든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의지를 오성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며, 마치 물질을 형상으로부터, 종으로부터 개체를, 신적 계시로부터 예지를 해방시키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이러한 고찰작업들은 무엇보다 의지가 전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을 선언하기에 이르기 때문이다. “의지 이외에 어떠한 것도 의지 속에서 의욕의 전체적 원인이 되지 못한다.”
이것들은 둔스 스코투스가 신학 속에 옮겨 놓은 심리학적 견해들이다. 신에게서도 아니듯이, 그의 오성에 의해 생각된 선에로 그의 의지의 어떠한 노예상태도 없다. 아마도 신이 그의 오성에 의해 생각한 가능성들은 자기의 의지력의 임의 결단들이 아니다. 그리고 둔스 스코투스는 데카르트적 의미에서 영원한 관념들의 창조도 결코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신적인 의지가 항상 추론적(raisonable)이라는 것을 유지했다. 그러나 본질들은, 마치 무조건적인 규칙들처럼 의지력에 선현존하지 않는다. “그의 의지가 그러한 사물들을 원했다는 사실로부터, 그 의지가 그 의지가 아닐지라도 거기에 어떠한 원인도 없다.” 그리고 “규칙이 신적 원칙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어떠한 규칙도 똑바르지 않다.” (635)
스코투스의 도덕적 정신에 관하여 중요한 귀결들을 갖는 주제이다. 우리에게 선을 인식하게 하는 도덕적 지각들(les perceptes)은 신적인 법칙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 선은, 지각들이 신에 의해 원했었던 것으로부터 처음에 온다. 마치 신적 전능(la tout-puissance divine, potentia absoluta)이 - 그것은 신앙의 자료 이지만 – 무모순 이외 다른 한계가 없는 것처럼, 십계명의 첫 부분들의 명령들만이 자체적으로 필수적(그리고 모든 처분[dispensatio, 분배]으로부터 배타적이다). 다른 것들은, 우연적 피조물들을 향한 의무들에 관한 것으로, 차이들을 가질 수 있고, 이것들의 명백한 고지(la notification)에 의해서만 가치가 있다. 조건화된 권능(potentia conditonata)이라는 강요들(Obligatoires)은 보다 큰 선의 관점에서 신적인 결심에 의해 변경될 수도 있고, 또한 변경 할 수도 있을 것이다. (635)
둔스 스코투스가 신적인 실재성에까지 도입한 이런 철저한 불연속성은 그의 정치적 개념작업에도 지배한다. 오직 가정만이 그에게서 “자연적 권리”의 사회이다. 다른 인간적 단체들은 자유로운 계약에 즉 선거와합의(electioet consensus)에 근거한다. 공동재산의 기원적 공동체는 죄진 이후에 폐기되었고, 사회적 조약에 의해 구성된 권리가관들은, 불변을 가정한 “자연 법”을 참조함이 없이, 공통의 이익 속에서 소유제와 교환 법칙을 규제할 수 있다. 이런 학설은 인간의 자유와 생산업(l’industria)에 넓은 지위를 부여하고, 여러 방식으로 근대 민주적 이론들을 예고한다. (635)
둔스 스코투스의 의지주의는, 14세기에 한 옥스퍼드학자에게서 보다 급진적 형식을 취할 것이다. 그 학자는 브래드워딘(Thomas Bradwardine, 1300경–1349)인데, 그는 1290년 보다 앞서 태어났으며, 1349년에 칸터베리 주교로서 죽었다. 그는 수학자이며, 신의 현존 증명에서 안셀무스의 증명과 같은 취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최고로 완전한 존재 개념은 모순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증명하면서, 신의 현존 증명이 완성되기를 바랐다. 특히 그는 이것으로부터 신적 원인성과는 다른 모든 원인성을 거의 부정하게 이르는 반(反)펠라기우스파였다. 그에게서는 “이법도 의지에 앞서는 신 속에 필연적 법칙도”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신적 의지는, 원인이 어떤 것일지라도 모든 사물의 효과이며, 모든 운동의 운동인다.” 그리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작동, 그것은 그 작동을 필연적이게 하는 신이다. (636)
이런 자의적 농노(le serf arbitre, 예속의지)의 이론은 매우 건조하고, 신비주의와도 매우 멀고, 성찰과 사랑에 의한 인간과 신의 통합과도 거리가 멀다. 그는 외적인 방식으로, 마치 농노가 자기 주인에게 의존하는 것처럼(“인간의 신의 농노이며, 자발적 농노이며 내가 말하건데, 구속받은 것은 아니다”) 인간을 신에 의존하게 했다. 그 이론은 14세기에 널리 퍼져 있었다.이 이론은 시토파의 쟝 드 미르꾸르(Jean de Mirecourt, 1300-1349)에 의해 파리 대학에 재현되었다. 미르꾸르는 1347년에 자신의 마흔 주제들이 단죄되는 것을 보았다. 이 주제들 가운데 “신은 어떤 이가 죄 짓고, 그가 죄인이 되기를 바란다. 신은 자기의 선을 원하면서도 그가 죄인이기를, 그가 마치 죄처럼 죄의 원인이기를, 마치 짝의 잘못처럼 짝의 잘못의 원인이기를, 즉 마치 죄처럼 죄의 주인이기를 바란다.”이 신학적 결정론은 영국인 위클리프(John Wyclif, 1330경-1384)를 거쳐서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에게 영향을 주었다. 14세기와 15세기에 스코투스주의에는 수많은 주석가들을 있었고, 심지어는 유럽의 중요한 대학들에서 이를 가르치게 맡겨진 교수직도 많았다. 스코투스주의는 이렇게 여러 방식들로 새로운 정신의 창조에 기여했다. (636) (56TMB)
7절, 오캄주의, 스코투스주의, 토마스주의 Ockhamiste, scotisme, et thomisme 647-648.
14세기 대학들의 역사는 특히 고대인과 근대인들의 투쟁의 역사였다. 오캄주의는 특히 독일에서 퍼져나갔다. 거기서 오캄주의는 독창성은 없으나 인격면에서 가브리엘 비엘(Gabriel Biel, 1420/1425-1495)에 충실한 한 대중화하는 자(vulgarisateur)를 발견했다. 비엘은 1484년에 튀빙겐 대학에서 가르쳤고 1495년에 세상을 떴다. 가브리엘주의자 즉 비엘의 제자들 중에 스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 1465-1524)가 있다. 스타우피츠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속해 있으면서 루터(1483-1546)를 유명론의 신학으로 인도했다. 그 신학의 신은 오성에 의해 생각된 명령과 선의 법칙에 의지를 종속시키는 신에게보다 오히려 변덕스럽고 자의적인 여호와에 닮았다. (648) [15세기 이야기 인데,]
옛사람들(les antiqui)[고대인]은 대학들 속에서 재현되어 남아 있었다. 그들은 특히 주석가들이었다: 파리와 툴루즈에서 쟝 캎레올루스(Jean Capreolus, 1380-1444); 피렌체에서 앙토냉(Antonin de Florence, 1389-1459); 특히 퀠른에서 알베르투스-토마스주의가 남아있었는데, 거기에서 드니 샤르트뢰(Denys le Chartreux, 1402-1471)가 나온다. 16세기 초에 까제땅(Cajétan, 1469-1534)은 1505년에서 1522에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 주석을 달고, 프란체스코 실베스트리(Francesco Silvestri, 1474경–1528)는 1516년에 이방종교 대전에 주석을 단다. 14세기 전반기에 한 프란체스코파인 쟝 드 리빠(Jean de Ripa, 1325경-?)는 거대함(immence)과 무한(infini) 사이에 섬세한 구별을 한다. 그의 제자들 중의 하나인 루이 드 파두(Louis de Padoue)는 1362년에 파리에서, 신의 ‘원하다’ 속에서 변화와 우연에 관한 명제들로 단죄 당한다. 그는 명제를 그의 스승의 교육으로부터 끌어냈다. (648) (56TMF)
(7:11, 56UK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