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안
부자와 나사로 (누가 죄인이 지옥에 가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가?)
성경: 누가복음 1619~31
서론
누구나 지옥을 싫어합니다.
듣는 것 조차도 싫어합니다.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은 망각이라는 아주 특별한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잊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작품이 아주 유명합니다. 원래 이 작품은 단독 조각품이 아니고 1880년 프랑스정부가 박물관 앞에 세울 부조물로 만든 것입니다. 이 “지옥의 문”이라는 작품에는 180여명의 인물이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문 위에 이 “생각하는 사람”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후에 사람들이 따로 떼어내어 크게 만든 것입니다.
이 작품은 1321년 쓰여진 단테의 신곡(The divine comedy)에서 영감을 받아 완성된 작품입니다. 디바인 코메디는 신성한 희극이라고 번역되는데 구성이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으로 되어 있습니다. 코메디는 희극입니다. 지옥에서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르는 여정을 가리키기 때문에 희극입니다. 결말이 좋지 않은 것은 비극 Tragedy이라고 합니다. 비 성경적이지요. 당시는 성경이 넓게 일혀지는 시대가 아니었고, 11세기에 로마 카톨릭이 자신들만 읽으려고 성경을 금서로 지정했던 시기와 맞물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1880년 로댕이 작품을 만들 때 이것은 메인 컨셉으로 잡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세를 지배했던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옥이었습니다. 연옥에서 열심히 하면 천국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옥은 한 번 들어가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영원한 곳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옥에 관해 54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 3년 반 동안 8번에 걸쳐 지옥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공생애가 무엇이지요? 성경에 안 나옵니다. 영어로 the public ministry of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인 사역을 말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때부터 신성, 즉 하나님으로서의 그 정체성이 드러내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시작을 요한에게 침례를 받은 시점으로 봅니다. 4복음서 모두 요한의 침례 후 광야에서 시험 받으시고 그 후에 제자들을 부르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때부터 기적과 가르침을 시작하셨고,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신성을 완전하게 드러내 주신 것입니다. 보통 인간이 할 수 없는 기적들, 하나님으로서 하실 수 있는 기적을 행하시어 보여주신 것이며, 이를 통해서 예수님을 하나님이심을 믿으라고 증명해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30에서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아들로써 제시하셔서 사람들을 혼동에 빠지게 하셨을까요?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셨고, 또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표현들이 당시 사람들에겐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신성모독이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님의 독특한 관계를 드러내시고, 동시에 사람들이 믿음으로 그 의미를 깨닫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직접 오셨다면 제 생각에는 심판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민족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자 모세에게 “나로 그들을 진멸하게 하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하신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실 수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미리 쓰여진 역사책인 성경을 이루려면 그렇게 하면 성경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다 이루었도다”를 통해서 성경의 예언을 이룬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엄청 파격적으로 들렸고, 그래서 오히려 갈등과 오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이후 사도들의 가르침이나 초기 교회 안에서 그 의미가 점점 명확해졌고, 믿음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의 관계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이라는 관계를 통해서 제시하신 이유는, 인간의 언어와 경험으로는 완전하게 이해하기 힘든 신비를, 조금씩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통해 드러내시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시는 대신, 자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그분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주시고, 그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모두 나타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변개된 성경의 가장 큰 특징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린다는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4대 성인 정도로 말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드러내놓고 삭제하고, 어떤 곳에서는 살짝 바꾸어 놓습니다. 지옥이라는 단어가 한글킹제임스성경에서 57번 나오는데, 개역개정 성경에는 44번밖에 없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요셉과 그의 모친”이라고 하는데 “그의 부모”라고 해 놓습니다.
(추가설명)
여러분 성경이 왜 변개되었을까요? 영어 표현으로 Currupt 부패하다, 오염되다가 본 뜻입니다. 성경의 변개는 당시 로마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오리겐(185~253)에서 가장 강력하게 변개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변개는 성경을 믿음으로 읽지 못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믿음이 없으니 자기가 이해되는 방향으로 즉 이성적으로 짜 맞추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오리라.”하시고 승천하셨는데, 오리겐 입장에서는 200년이나 지났는데도 안 오시니 더욱 믿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이해되는 수준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는 사상은 “신 플라톤주의”로 평가됩니다. 철학을 신학의 범주로 넣으려 한 것입니다. 여러분 철학이 언제 생겼는지 아세요?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인 BC 625년경 탈레스가 창시자입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한 시기가 오리겐은 성경 해석분야에서 단순한 문자적 이해를 넘어서 도덕적, 영적 의미까지 찾아내는 삼중적 해석방법을 제시하여, 이후 교회의 성경 해석 전통에서 깊은 악영향을 준 것입니다.
그의 성경 해석의 핵심은 성경 본문을 단순히 문자 그대로만 보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와 교훈을 더 깊이 탐구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나 법규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는 지를 보여주는 영적이고 상징적인 이야기로 이해한 것입니다. 즉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회복, 그리고 믿음 안에서 삶의 변화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문자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때부터 소설이 되는 것입니다. 머리글자만 따와서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적 설교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 시점부터 설교자가 성경보다 더 높은 위치에 앉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최종권위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또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바르고 온전한 믿음이 형성될 수 없습니다. 이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성경, 즉 영적 해석이 침투된 그 성경이 로마 카톨릭에 의해 받아들여져서 세상에서 주류가 되었고, 이 오류가 세상을 지배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의 마음을 어둡게 해서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사람의 길과 하나님의 길은 종류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식당을 찾을 때는 사람들이 가는 곳을 찾아가면 실수가 없지만, 하나님의 길은 그렇게 하면 망합니다. “하나님 생각은 이럴 것이다”라고 결론을 짓고 자기 생각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가 말하노라.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이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이 너희 생각보다 높음이라.”(이사야 55:8,9)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소하여 그것을 찾는 자가 적음이니라.”(마태복음 7:14)라고 하신 말씀이 진리인 것입니다.
그들의 성경은 요셉을 그의 부모(his parents)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보존된 성경은 요셉과 그의 어머니(Joseph and his mother)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거 같지만 이들은 동정녀 탄생을 믿지 못하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네 번이나 언급되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