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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월 하순(11수)
하루시조 202
07 21
일호주로 송군봉래산하니
무명씨(無名氏) 지음
일호주(一壺酒)로 송군봉래산(送君蓬萊山)하니 봉래선자소상영(蓬萊仙子笑相迎)을
소상영(笑相迎) 탄금가일곡(彈琴歌一曲)하니 만이천봉(萬二千峰)이 옥층층(玉層層)이로다
아마도 해동풍경(海東風景)은 이뿐인가 하노라
봉래산(蓬萊山) - 금강산(金剛山)의 여름철 별칭(別稱).
선자(仙子) - 신선(神仙).
봉래선자소상영(蓬萊仙子笑相迎) - 봉래산 신선이 웃으면서 서로 맞이함.
해동(海東) - 발해(渤海)의 동쪽이라는 뜻으로 옛 우리 강토를 지칭하는 말.
해동풍경(海東風景) - 해동국의 제일 승경(勝景).
한자투성이인데도 한반도 제일경치라는 금강산을 노래한 작품이라 그런대로 느낌이 있습니다. 송군(送君)은 벗이나 지인을 어디로 떠나보낸다는 표현인데, 여기서는 봉래산으로 보냈군요. 사시사철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명산 금강산인데 여름 별칭으로 보아 이별 시기가 여름철이라 여겨집니다. 여기서는 한 병 술로 보냈거늘 그대가 간 거기에는 당연히 신선이 살고 있었고, 서로 웃으며 맞이하고 탄금에 가일곡이군요. 그 노래가 울려 퍼지는 일만이천 봉우리가 옥층층으로 빛난다니 문학적 표현은 참 잘 드러났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03
07 22
잊자 하니 정 아니요
무명씨(無名氏) 지음
잊자 하니 정(情) 아니요 못 잊으니 병(病)이로다
장탄식(長歎息) 한 소리에 속 썩은 물 눈에 가득
정녕(丁寧)이 나 혼자 이럴진대 썩여 무삼 하리오
장탄식(長歎息) - 긴 한숨을 지으며 깊이 탄식하는 일.
정녕(丁寧)이 – 정녕히. 조금도 틀림없이 꼭. 또는 더 이를 데 없이 정말로.
초장 네 구절이 ‘짝사랑’에 대한 딜레마의 정의(定義)라는 생각입니다. 잊자니, 못 잊자니. 사랑은 본래 짝사랑이 진면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장의 속 썩은 물이 곧 눈물이라는 표현에 솔직한 감정이 드러납니다. 종장에서는 그 딜레마로부터 쉽게 벗어나는 방법을 깨닫습니다. 저 혼자 속 썩이는 일 그만 해도 되리라. 그러나 다시 초장의 딜레마로 빠져들 것이라는 짐작이 듭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04
07 23
자 남은 보라매를
무명씨(無名氏) 지음
자 남은 보라매를 구름 밖에 띄워 두고
닫는 말 채쳐서 큰길에 놓았으니
아마도 장부(丈夫)의 쾌사(快事)는 이뿐인가 하노라
보라매 - 난 지 1년이 안 된 새끼를 잡아 길들여서 사냥에 쓰는 매.
장부(丈夫) - 건장하고 씩씩한 사내.
쾌사(快事) - 통쾌하고 기쁜 일.
보라매와 말, 매사냥에 나선 풍광을 노래했습니다. 한 자면 30센티 정도이니 길들인 사냥매의 겉모양이 건장하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 매를 구름 밖에다 띄워 놓았군요. 닫는 말도 사냥에 동원된 듯하나 채찍질하여 큰길에 놓았답니다. 이제 보니 사냥은 시늉이고 자연에 묻혀서 세사를 잊은 것을 즐기는 모양새로군요. 꿩이야 잡히든 말든 사냥매 데리고 말 닫게 하였으니 이만하면 상쾌하기 그지없다, 낚시터에서 곧은 바늘로 세월을 낚았다는 강태공(姜太公)과 비견되는 그림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05
07 24
자다가 깨어보니
무명씨(無名氏) 지음
자다가 깨어보니 님에게서 편지 왔네
백(百) 번(番) 남아 펴보고 가슴 위에 얹어 두니
하 그리 무겁든 아니 하되 가슴 답답하여라
님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그런데 자다가 깨어서 그 편지를 받았군요. 불쑥, 난데없이, 기대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그래서인지 백 번이나 읽고 또 읽고 했습니다. 그립고 아쉬움에 마음을 달래듯이 가슴 위에 얹어 두었습니다. 님의 손길을 어루만지는 기분이었겠지요. 그런데 그 편지 외형상 그다지 무겁지는 않은데도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편지의 내용에 알 수 없는 구절이 있었을까요, 아니면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이 적혀 있을까요. 그 속내가 감춰져 있으니 저 또한 답답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06
07 25
재 위에 섰는 솔이
무명씨(無名氏) 지음
재 위에 섰는 솔이 본디 높아 높지 아녀
선 곳이 높음으로 높은 듯 하거니와
개울에 낙락장송(落落長松)이야 진적(眞的) 높은 솔이라
높음으로 – 높으므로. 높아서.
낙락장송(落落長松) - 가지가 길게 축축 늘어진 키가 큰 소나무.
진적(眞的) - 진적하다. 참되고 틀림없다.
너무나 쉬운 얘기를 시조에 담아 놓으니 별반 문학성도 없고 읽는 재미도 없다고 할는지요. 그래도 요즘 유행하는 ‘금수저’니 ‘아빠 찬스’니 하는 말이 생각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선자(選者)의 눈에 들었습니다. 키 큰 소나무가 재 위에 있을 때 더욱 커 보임을 먼저 깔아 놓고, 개울에 있는 비슷한 소나무는 눈에 띄지는 않을망정 진짜로 높은 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수긍하지 않을 수 없지만 세태(世態)가 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07
07 26
저 가는 저 사람아
무명씨(無名氏) 지음
저 가는 저 사람아 네 집이 어디메오
나는 정처(定處) 없이 간 데마다 집이로다
옷 벗어 술 받은 집은 다 내집인가 하노라
정처(定處) - 정한 곳. 일정한 처소.
‘어디메오’라는 의문문이 아주 정겹게 들립니다. 초장이 질문이고, 중장은 대답입니다. 정해진 거처가 없다는군요. 종장은 부연설명입니다. 이 작품의 주제가 녹아 있기도 하고요. 옷 벗어두고 편안한 마음으로 술까지 대접을 받는 곳, 집보다 더 좋은 곳 아닐까요. 도처에 이런 좋은 곳을 두거나 만들 수 있는 인물이라면 대단한 능력자임이 틀림없습니다. 가령 아이를 독선생으로 가르칠 수 있다거나, 한 소리 잘하는 가객(歌客) 정도는 될 것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08
07 27
저 건너 거머무투루한 바위
무명씨(無名氏) 지음
저 건너 거머무투루한 바위 정(釘) 대어 깨두드려 내어
털 돋히고 뿔 박아서 흥성드뭇 걸어가게 맹글리라 검은 암소
뒀다가 우리 님 날 이별(離別)하고 가실 제 거꾸로 태워 보내리라
맹글리라 – 만들리라.
음수율에는 처음부터 지키겠다는 의지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무명씨의 작품이니 오히려 호기심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거머무투루한, 흥성드뭇 두 단어는 느낌은 오는데 사전에 오르지 않아 적확한 해석이 불가하네요. 거무튀튀하다는 뜻에 가까울 듯하고, 소걸음처럼 뚜벅뚜벅 걷는다는 의미일 것 같습니다만. 중장 끝구인 ‘맹글리라 검은 암소’는 도치법이 리듬감을 살리고 있고요, 이별의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뜻에서 액막이처럼 바위를 정질하여 검은 암소를 만들어 두겠다는 속셈이 무섭기도 합니다. 문제는 거꾸로 타는 소는 얼마나 어지러울까 지레 멀미가 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09
07 28
저 건너 광창 높은 집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저 건너 광창(廣窓) 높은 집에 머리 좋은 각씨(閣氏)님
초생(初生) 반달 같이 비치지나 말으려문
가뜩에 썩은 간장(肝腸)이 봄눈스듯 하여라
광창(廣窓) - 넓은 창.
초생(初生) - 갓 생겨남.
창 넓은 찻집에서 어쩌고 하는 유행가 생각이 납니다. 높다란 누각에 사는 각씨님을 사모하는데, 갓 생겨난 반달 곧 상현달처럼 비치기까지 한다는군요. 저자는 상사(相思)로 애간장이 문드러졌는데, 그나마 먼 모습이라도 보고나니 눈 녹듯 사그라든다고, 애절한 기쁨을 노래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10
07 29
저 건너 일편석이
무명씨(無名氏) 지음
저 건너 일편석(一片石)이 강태공(姜太公)의 조대(釣臺)로다
문왕(文王)은 어디 가고 빈 대(臺)만 남았는고
석양(夕陽)에 물찬 제비만 오락가락 하더라
일편석(一片石) - 한 조걱의 돌. 낚시하기에 맞춤한 평평한 바위 정도 되겠네요.
강태공(姜太公) - 중국 주나라 초엽의 조신(朝臣)인 ‘태공망’을 그의 성(姓)인 강(姜)과 함께 이르는 말. 곧은 낚시로 세월을 낚았거늘 문왕(文王)을 도와 역사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조대(釣臺) - 낚시터.
문왕(文王) - 중국 주나라 무왕의 아버지(?~?). 이름은 창(昌). 기원전 12세기경에 활동한 사람으로 은나라 말기에 태공망 등 어진 선비들을 모아 국정을 바로잡고 융적(戎狄)을 토벌하여 아들 무왕이 주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아 주었다. 고대의 이상적인 성인 군주의 전형으로 꼽힌다.
석양의 제비 나는 강변 풍광을 보고 중국의 고대사를 끌어와 무심한 세월을 노래했습니다. 등장시킨 인물은 너무나 유명하고 동국(東國) 식자(識者)들은 모두 아는 이야기인지라 우리의 역사만큼이나 친숙하게 읊고 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11
07 30
저 잔에 술이 곯았으니
무명씨(無名氏) 지음
저 잔(盞)에 술이 곯았으니 유영(劉怜)이 와 마시도다
두렷한 달이 이지렀으니 이백(李白)이 와 깨치도다
남은 술 남은 달 가지고 완월(玩月) 장취(長醉) 하오리라
곯다 - 담긴 것이 그릇에 가득 차지 아니하고 조금 비다.
유영(劉怜) - 중국 서진(西晉)의 사상가(225?~280?). 자는 백륜(伯倫).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장자의 사상을 실천하였으며, 신체를 토목(土木)으로 간주하여 의욕의 자유를 추구하고 술을 즐겼다. 작품에 <주덕송(酒德頌)> 등이 있다.
이지렀으니 – 이지러졌으니. 달 따위가 한쪽이 차지 않다.
이백(李白) - 중국 당나라의 시인(701~762).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 젊어서 여러 나라에 만유(漫遊)하고, 뒤에 출사(出仕)하였으나 안녹산의 난으로 유배되는 등 불우한 만년을 보냈다. 칠언 절구에 특히 뛰어났으며, 이별과 자연을 제재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현종과 양귀비의 모란연(牧丹宴)에서 취중에 <청평조(淸平調)> 3수를 지은 이야기가 유명하다. 시성(詩聖) 두보(杜甫)에 대하여 시선(詩仙)으로 칭하여진다. 시문집에 ≪이태백시집≫ 30권이 있다.
완월(玩月) - 달을 구경하며 즐김.
장취(長醉) - 술에 늘 취해 있음.
하고 싶은 말은 ‘달을 즐기며 취해서 살리라’일 것 같습니다. 술잔이 비었고, 달은 이지러졌지만 그런대로 안분(安分) 자족(自足)하면서 살아가는 여유가 닮아봄직 합니다. 백륜과 태백을 쉽게 끌어올 수 있었으니 식견을 갖춘 선비 정도 될 터인데, 이름을 잃은 사연은 무엇일까요. 주제가 선비답지 않다고 여겼겠지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12
07 31
무진년 유월일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무진년(戊辰年) 유월일(六月日)에 단을 무워 분향(焚香)하여
삼백명(三百名) 기녀(妓女)들이 정성(精誠)으로 기제(妓祭)하니
논낭자(論娘子) 충혼의백(忠魂義魄)이 내리실까 하노라
무진년(戊辰年) - 논개 의거(義擧) 후의 무진년은 1748(영조24)년, 1808(순조8)년, 1868(고종5)년 중의 하나일 텐데, 외세의 침입이 잦아지던 때인 고종 연간이 아닌가 한다.
유월일(六月日) - 유월의 날에. 적확(的確)한 날짜를 생략하는 예에 따른 것으로 보임.
무워 – 뭇어. 뭇다 - 여러 사람이 한데 모여서 조직, 짝 따위를 만들다.
기제(妓祭) - 기생들의 제사. 여기서는 제삿날 지내는 제사 ‘기제(忌祭)’의 오기(誤記)로 볼 수도 있을 듯.
논낭자(論娘子) - 논개(論介)가 비록 기녀(妓女)였으나 낭자라고 불러 위로하는 뜻을 담았다.
충혼의백(忠魂義魄) - 나라에 충성스런 혼과 의로운 백.
내리실까 - 제삿상을 잡수려고 혼백이 오신다고 믿었습니다.
논개(論介)의 충혼의백(忠魂義魄)을 기려 기녀(妓女) 삼백 명이 모여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입니다. 국난의 시대에 기생들도 팔을 걷어 부치고 나라 걱정을 했다고 합니다. 진주성 촉석루 곁의 의기사(義妓祠) 사당의 건립을 비롯하여 남원 광한루 안의 춘향사(春香祠) 건립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첫댓글 고려 속요를 '남여상열지사'라 하여 천시하던 조선의 양반 관료사회가 숨막히는 일상이었을진대 무명씨 시조로 뚫어낸 민중의 해학이 울림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