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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1926-1932)[3권 합본 1938]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 제3권. 중세와 르네상스(Moyen Age et Renaissance) 463-702
제4장 동방에서 철학 La philosophie en Orient 543-
[개요]
중세 동안에 서방의 운명들은 부분적으로 아랍인의 정복에 의해 규정되었다. 아랍인의 정복은 인도에서 스페인까지 넓혀갔으면, 이탈리아 남부와 그리스 섬들에까지 진격했다. 그리고 아랍인들은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거대한] 장막을 형성했다. 사람들은 한 세기만(635년부터)에 어떻게 아랍인들의 지배영향이 천둥 번개처럼 펼쳐졌는지를 한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732년에 쁘와띠에에서, 동쪽으로는 751년에는 중국의 튀르키스탄에서 진격의 과정이 멈추었다는 것도 안다. 아랍인들은 그들 스스로 하나의 입말과 하나의 종교에 기여했다. 그 입말과 종교는 그 당시부터 거대한 영토들의 입말과 종교로 남아있었다. 코란과 그것의 주해석들이 옛 그리스문화의 나라들에게, 즉 시리아, 이집트, 페르샤에게 강요하였다. 이 나라들에서 우리는 6세기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을 다는데 전념했던 철학자들을 또한 보았다. 그러한 사건은 관념들의 역사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데, 이것을 우리가 이 장에서 매우 요약해서 평가하고자 한다. (543)
역사가들은, 아랍출신 사람들이 이 광활한 영토들 속에서 숫적으로 얼마나 적은 사람들이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들은 군사적으로 광활한 영토들을 점령했고, 점령된 나라들의 행정적이고 사회적인 틀들을 간직했다. 나중에 독립적인 절대권들로 되어 있던 제국이 참여했던 해체과정에서, 예를 들어 바그다드의 칼리프들은 페르샤의 옛 주권들의 재정적이고 정치적인 모든 조직화들을 자기들의(칼리프들의) 행사에 비추어 보았다. 아마도 사람들은 지적인 영역에서와 유비적 사실을 관찰할 것 같다. 이슬람교로 개종과 아랍어로 글 쓰는 이슬람교 “철학자들”은 - 이 철학자들 중의 많은 이들이 셈계 출신이 아니었다 – 그 자신들의 방법들과 그 자신들의 명상의 주제들의 일부를 발견한다. 한편으로 그리스 작품들에서 발견하는데, 소아시아와 페르샤에서 살아가던 네스토리아스파의 크리스트교인들은 6세기부터 시리아어와 아랍어로 번역했다. 다른 한편으로 페르샤에 살아있는 마즈다교의 전통들에서 발견하는데, 이 전통들에 인도의 사유(수피즘의 신비주의)가 내밀하게 뒤섞여 있다. (544)
1절 무슬림의 신학자들 Les théologiens musulmans 544.
그럼에도 무슬림 신학자들은 이슬람교에 속하는 것이 기본적이 사실이다. 사람들이 아시다 시피, 코란은 유럽을 지배했던 독단적 신학과 어떠한 비슷한 독단적 신학도 생겨나게 하지 않는다. 우선 한편 대부분의 신학적 쟁의들은 코란의 학설이 암묵적으로 멀리했던 문제들로부터 생겨난다. 삼신격과 크리스트론의 쟁의들도 은총의 쟁의들만큼이나 신의 근본적 단일성을 인정하는 학설 속에서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한다. 신과 그의 예언자 마호멧은 두 예언자들인 아브라함과 예수의 작품을 완수했으며, 이처럼 이슬람의 종교로 요약된다. 그 종교는 사막의 풍경처럼 간결하고 깔끔하며, 신적 실재성의 자연에 관한 복잡한 사변들을 위한 그리스적 취향은 없다. 다른 한편 이슬람 속에는 독단을 말하도록 짐을 진 어떠한 정신적 권력도 없다. 코란은 강제적인 힘을 갖는 어떠한 부가물도 과중하게 부과되지 않는다. 이슬람교도는 예언자들을, 즉 신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인간들을 알지만, 이슬람교도는 코란의 문자에 덧붙일 수 있는 그런 인간은 아니다. (544)
성스런 책은, 이론적이라기보다 훨씬 더 실천적이고 법률적이며 유일한 독단만은 포함하고 있다. 이런 교리의 관념을 마호멧은 유대의 유일신앙에 빌려왔다. 유일신의 교리는 자연 상으로 절대적으로 단순하며, 그 신의 의지는 전능이며 예견불가능하다. 이런 독단은 우주에 대한 표상작업을 함축하고 있고, 아랍에 의해 정복된 나라들에서 지배하는 신플라톤주의의 표상작업에 가능한 만큼 반대적인 표상작업을 함축하고 있다. 한편, 교리는 가장 충만한 신적인 전횡이다; 다른 한편, 그것은 그리스사유가 세계 속에 도입했던 발전의 합리적 질서의 관념이다. 이런 대립은 소위 말하는 무슬림 신학의 유일한 주제였으며, 모테칼레민(Motekallemin, 1861–1908)의 신학의 주제였다. 그는 반대자들에 대항하여 코란에 따른 세계의 정합적 이미지를 세우고자 한 인물이다. (544)
모든 반성은 순수 신학적 두 가지 문제들 주위에 집중되어 있는데: 신의 다양성에 대한 부정이고, 신의 권력과는 다른 모든 권력에 대한 부정이다. 첫째에 관해서 만일 신이 하나였다면, 어떻게 사람들은 그가 선하고 지식있고 정의롭고 등등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자문한다. 어떤 이들은 신에 대해 이 모든 소유권들을 부정하기까지 이른다. 다른 어떤 이들은 이 소유권들을 완전하게 부정하지 않고서 소유권들을 존재의 양태들 또는 방식들처럼 생각한다. 이런 양태들 아래에서 신적 본질이 나타지만, 그러나 양태들은 신에게 아무것도 더 보태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성질들이 결코 아니며, “신의 편에서 하나의 영원한 성질을 주장하는 자는 두 신들을 주장하는 것이다” 결국 다른 이들은 이것들을 마치 신의 본질에의 의해 존속하는 영원한 성질들처럼 주장한다. (545)
둘째에 관해서, 신학자들은 한편으로 임의적 자유에 의해 다른 한편 자연적 필연성의 관념을 받아들이는 결정론의 의해 제한된 신의 권능을 보기를 두려워한다. 임의적 자유의 부정은, 그 반작용에 의해, 8세기 초에 모타찔리트(motazilites, les séparés) 학파를 생겨나게 한다. 이 학파는 아타(ʿAtāʾ)의 아들인 바질(Wāṣil, 700–748)의 충격 하에서, 신의 선성(善性)을 보존하기 위하여 인간에게 자유를 일치시킨다. 신은 나쁜 행동을 선언할 수 없을 것이고, 그 때 신은 선을 명령할 것이다. 이 분파의 창설자인 바질이 정의로운 신자와 경건하지 못한 자 사이에 죄지은 신자의 매개적 상태를 인정했던 것은 화해하는 동일한 정신 안에서이다. 이런 생각은, 스토아학파의 수단들이 도덕적 진보의 문제에게 부여했던 온건한 해결책을 상기하게 한다. (545)
자연적 결정론에 관하여, 그 결정론이 그리스 전통에 의해 순환론적 진화에 맞는 영원한 세계의 이미지에, 그리고 자연적 힘의 방식에서 작동하는 신의 이미지에, 굳건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고려되어야만 한다. 반대로 창조의 주제는, 창조와 더불어 첫 찰나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이어지는 시간들에서도 사물들의 생산 작업에서 근본적인 비결정론에 이른다. 이로부터 아샤리(Abou al-Hassan al-ʾAshʿarī, 873경–935경) 학파가 지지하는 원자론이 나온다. 실체의 연속성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신은 다른 것들 없이 한 부분을 창조하는 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체들은 빈 것 속에 떠다니는 너비없는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일련의 볼 수 없는 순간들로 형성된 시간 속에서 연속성은 없으며, 따로 떨어져 있으며 분할불가분성인 도약들로 이루어진 운동 속에서도 연속성은 더군다나 없다. 더군다나 원자에 내속하는 소유권들(les propriétés) 속에서도 어떠한 필연성도 없다. 그리고 원자들의 소유권들, 색깔, 생명 등은 덧붙여진 우발사고들(des accidents)이다. 결국 주어진 찰나에 실체들 속에서 현존하는 우발사고들이, 뒤따르는 순간에 그 실체들 속에 현존한다는 어떠한 필연성도 없다. 우발사고들은 매 순간에 신의 직접적인 창조작업의 효과이다. 무엇으로 있다는, 그 무엇의 현존 또는 비현존을 필연이라고 하는 자연 법칙은 없다. 알라의 영광에 속하는 원자론에서,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는 것을 헛되이 찾으려 했을 것인데, 그 없는 것을 에피쿠로스의 합리론이라 부른다. (546)
2절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L‘influence d’Aristote et du néo-platonisme 546.
그리스 영향은, 이런 신학과 반대로, 특히 네스토리아파 크리스트교인들에 의해 그리스어로부터 시리아어로 번역 덕분에 널리 퍼졌다. 이 네스토리아파들은 처음에는 [터키 동남부의] 에데스의 신학적 학파에서(431-489), 그리고 시리아의 수도원들에서, 나중에 7세기에는 유프라테스강 좌안 지방의 케네스레(Kennesre)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이외에도, 거짓-아리스토텔레스 논저인 세계론과 갈레노스(129경-201)의 저술들을 번역했다. 9세기에 바그다드가 건설된 후에, 사람들은 시리아어로부터든지 그리스어로부터든지 아랍어로 많이 번역했다. 알아문 칼리프는 832년에 자신의 수도에 일종의 번역자들의 사무실을 설립했다. 9세기 말에 아랍인은 자신의 입말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거의 전 저작을 소유했으며(정치학을 제외하고), 더불어 알렉산드로스(150경-215), 포르피리오스(232경-305경), 테미스티오스(317-388), 암모니오스(440-517), 필로포노스(490-568)의 주석서들도 소유했다. 아랍인은 게다가 플라톤의 몇몇 대화편들을, 티마이오스편, 폴리테이아편, 소피스트들편을 알 수 있었다. 아랍인은 거짓 엠페도클레스와 거짓 퓌타고라스의 작품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플루타르코스(Plutarque, 46-125)의 철학자들의 견해들의 번역 덕분에, 그리스의 학설사에 접근할 수 있었다. 아랍인들에게 갈레노스와 더불어 의학도, 프톨레마이오스(90경-168경)의 알마게스트와 더불어 천문학도 알려졌다. (546)
어떻게 그들은 이 재료들을 이용하였는가? 그들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은 두 논저들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그 논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거짓으로 부여되었다. 840년 경에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이란 이름 하에 아랍어로 번역했다. 이것은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 마지막 3부분 중에서 7편을 선택 발췌한 것이었다. 이 번역은 서문으로 시작되는데, 서문은 위격들에 대한 신플라톤주의 이론의 요약된 진술이었다. 신, 온지성[누스], 영혼(여기에서 각 항목은 앞선 것[온지성]으로부터 흘러나온다)의 3원성에다가, 진술은 넷째 항목인 자연을 보태었다. 자연은 영혼으로부터 도출된다. 진술은 네 항목들 각각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들에, 즉 목적인, 형상인, 운동인[효과인], 질료인들의 항목들을 대응하게 했다. 이 발췌본들 가운데서, 엔네아데스 5권의 둘째 논제가 완전히 들어있다. 이 5권은 플로티노스 학설 전체를 요약하여 포함하고 있다. 거짓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부여되었던 그 둘째 논제는 원인들의 책이다. 그 책은 프로클로스의 신학 원론들의 발췌들을 포함하고 있다. (547)
이런 영향 하에서 아랍 철학은 그리스인들을 따라가는 정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 저술에 대해 신플라톤주의의 해석에 의해 본질적으로 구성되었다. 거기에서 우리가 좀 전에 막 상기했던 두 논저들과 더불어 첫 도식으로, 형이상학의 람다편과 자연학의 8권이 나타난다. 이 두 편은 천체들의 운동하는 온지성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색들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마찬가지로 영혼론의 3권이 나타난다. 이 책은 지적 인식의 자연에 대해 다룬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과 신플라톤주의의 정신을 어떤 점에서는 더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한편으로 합리적 경험론, 기술적인 논리학, 실증적 방향정립이 있다. 다른 한편, 정신적 힘들의 일종의 신화학이 있다. (547)
3절 알 킨디 Al Kindi 547
아랍 철학자들의 특징이라는 것, 그것은 편안함이다. 그들은 넉넉하게 한 정신에서 다른 정신으로 넘어갈 줄 알았다. 알려진 아랍의 소요학파학자들 중의 첫째 학자는 알 킨디(al-Kindī, lat. Alkindus, 801–873)였다. 그는 실증적 인식에 매우 고심하는 수학자였다. 그가 말하기를 “논리적 증명 작업들을 원하는 자는 오랫동안 기하학적 증명작업에 지체해야만 하고, 그리고 그것들의 규칙들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 만큼 증명작업들이 보다 더 쉽게 이해하게 된다. 왜냐하면 규칙들이 감각적 예들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증명작업은 그에게 있어서 일종의 척도이다. 그 척도를 위하여, “우선 정확한 자(척尺)을 가져야 하고, 그러고 나서 그 자를 잘 적용해야 한다.” 따라서 증명은 앞서 있으며 증명할 수 없는 [선전제 미해결의] 인식들을 가정한다. 이 인식들에 3가지 종류가 있다. 우선 대상의 현존에 대한 인식이다. 사람들은 그 대상의 속성들을 증명하고자 원했다. 둘째로 자체적으로 알려진 보편적 공리들에 대한 인식이 있다. 그러한 것으로 유클리드의 9공리들이 있다. 이런 것은 성찰도 반성도 요구하지 않는 공통인식이다. 마지막으로 본질(즉 무엇임, la quiddité)의 인식 또는 대상의 정의가 있다. 이런 인식은 공리를 수단으로 속성들을 증명하게 해 줄 것이다. (548)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정의와 이것임에 대한 이론을 생겨나게 했었던 모든 난점들을 소환했다. 알 킨디는 동일한 난점들의 앞에 있었다. 존재의 이것임(la quiddité)은 현존에 도달하는 감관들에 의해 알려지지도 않고, 소유들에 도달하는 귀납에 의해서도 알려지지 않는다. 따라서 감각적 자료들로부터 이것임을 분간하기 위하여 특별한 조작을 해야만 한다. 이런 조작은 습관지성과 능동지성의 논저 속에서 묘사되어 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근본적 공리에 맞추어져 있다: 존재는 이미 작동 중인(en acte) 존재의 영향 없이는 잠세태에서 현실태로 이행하기 할 수 없으며, 항상 이것임들을 사유하는 “항상 작동중인 예지(intellect)”가 현존해야 한다. 이리하여 영혼(말하자면 이것임들을 사유할 수 있는 능력) 속에 있는 “잠재 중인 예지”가 “잠세태에서 현실태로 이해하는 예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설명되고, 그리고 증명할 수 있는 “획득된 예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설명된다. 이리하여 이것임의 인식은, 항상 작동 중인 제1지성 덕분에 그 인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영혼 속에서만 일어난다. 이 제1지성은 사물들의 보편적 형식(신)이며 또한 사물들에게 사물들의 이것임들 또는 형상을 부여하기에, 또한 이 형상들을 잠재 중인 지성에게 일치 시킨다. (548)
4절 알파라비 Al Farabi 547
따라서 지적 조작의 관점들은 신학전체를 씨앗으로 함축하고 있다. 우리는 알파라비(Al-Fârâbî, 872-951)에게서 전개된 신학을 발견한다. 이 견해들 속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과 플라톤의 영향이 교차되고 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천체의 신학을 빌려오고, 아랍 천문학에 의해 단순화하였다. 최고신은 세계들의 그 위에 있으며, 천구[하늘]들은 동심원으로 겹쳐져 있는 8개의 구들로 구성되어 있다. 고정된 것들의 구들과 7행성들의 각각을 지니고 있는 구들이 있다. 구들의 각각은 지성에 의해 인도된 자기의 고유한 원운동을 한다. 결국 그 아래에 달의 구가 있다. 플로티노스에게서(아리스토텔레스의 위작-신학에 의해서), 그는 존재들의 생산의 일반 이미지를 빌려온다. 온일자에서 온다자로, 영원에서 시간과 변화로 이어 가는 일종의 진화의 법칙에 의한 일반 이미지를 빌려온다. 시작에서 최고의 원리인 신은 자기 본질을 인식하면서, 따라서 심지어는 모든 사물들을 인식한다. 신은 사물들을 우선 자기의 고유한 본질에 동일한 통일성, 즉 사물들의 절대적 통일성 속에서 인식한다. 그리고 거기에 제1학문이 있다. 이어서 신은 이것들의 다양성의 무한한 세부사항 속에서 사물들을 인식한다. 거기에 제2학문이 있고, 이는 근본적으로 제1학문에 환원할 수 있다. 어떻게 이 절대적 통일성으로부터 다양성을 도출할 것인가? 사람들은 플로티노스에게서 어떻게 일자가 온지성을 생겨나게 하는지를 회상한다. 비규정적인 어떤 사물[영혼?]이 온일자로부터 퍼져 나오고, 온일자로 되돌아간다. 이런 사물이 일자를 관조하면서 지성이 되고, 자기 스스로를 인식한다. 이것이 다음의 알 파라비의 묘사 그 자체이다; 즉 영원한 일자로부터 예지라고 하는 영원하며 유일한 존재만이 나올 수 있다. 이렇게 도출되었기에 그 존재[예지]는 조성된다. 왜냐하면 그 유일한 존재는 그 자체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 그 유일 존재 속에서 예지가 온원리로부터 갖는 인식을, 마치 자기 현존의 토대처럼, 구별해야만 한다. [둘] 마치 가능성처럼 자기 현존의 인식이, 말하자면 자기 질료에 대해(질료는 권능 상으로만 존재이기에) 인식이 있다. [셋] 유일 존재가 자신으로부터 갖는 인식, 즉 자기 형상 또는 자기 본질이라는 인식이 있다. 이 세 가지 인식으로부터 세 가지 존재들이 생겨난다. [하나] 그[예지]가 원리로부터 갖는 인식으로부터 둘째 예지가 태어난다. 둘째 예지와 그[첫째 예지]의 관계는 마치 [첫째] 예지와 원리의 관계와 같다. [둘] 그것의 질료로부터 제1 구의 질료가 생겨난다(이 변증적 질료는 원운동의 단순한 가능성이다). [셋] 그것의 형상으로부터 이 구(球)의 운동하는 영혼이 태어난다. 이리하여 예지들과 천체의 구들의 과정이 이것들의 영혼과 더불어 시작한다. 각 예지는 자기 차례에 맞추어 하부 예지, 구, 운동하는 영혼을 그리고 구들의 마지막인 달의 구까지 생산한다. 그 달은 예지들의 마지막 예지에 의해, 즉 “능동적 예지”에 의해 지배된다. (549)
각각의 예지는 구의 운동법칙과 같다. “예지는 자신으로부터 유출하는 선의 질서를 인식하고, 그 질서를 인식하면서 그것을 생산한다.” 다른 한편 또한 예지는 자기 구를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하는 운동을 상상한다. 이런 이미지[상상]는 이번에는 창조적이다. 이미지는 달 아래 영역에서 요소들의 변환들에서 질서있는 것을 창조한다. (549)
예지들은 특히 마지막 예지인 능동적 예지는 분할 불가능할 정도로 감각적 사물들의 모든 이것임[무엇임]들 또는 형상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무엇임들은 달아래 영역들에서는 서로 서로 따로 떨어진다. 이 달아래 영역에서 각 존재는 다른 존재들로부터 떨어져 나온 한 존재일 뿐이다. 이런 떨어져 나온 상태로부터 인간 영혼 속에 지적인 인식이 시작한다. 이 인식은 정확하게 분할의 운동을 역행하는 재통합의 운동이다. “능동적 예지는 인간의 자연[본성]이 일부를 이루게 된 획득된 예지가 분할하여 창조되었던 것을 가장 가능하게 재통합하기를 바란다.” 인간 영혼 속에 알 파라비가 구별한 여러 예지들은 분할에서 통일성으로 이행 속에서 중요한 찰나들일 것이다. 가장 낮은 정도에서 잠세태로서 예지는 물질의 형상들 추상할 수 있는 포용량이고, 그리고 형상들을 재통합하고 분류하는 포용량이다. 그 위에 현실태로서 예지는 이런 포용량의 효과적인 현실화이다. 가지적인 것, 우선 이미지와 섞여있고 분가분의 개성들을 동반하는 가지적인 것은 조금 조금씩 순수화되고, 감관에서 공통감관으로 또한 상식에서 이미지 작용으로 이행하면서 분간된다. 이행과정에서 잠세태로서 예지는 자기의 추상적인 활동성의 질료를 취한다. 현실태로서 예지 그 위에 획득된 예지가 있으며, 그 예지는 직관적 관점으로써 형상들의 원리의 통일성 안에서 형상들을 발견한다. 결국 그 위에 능동적 예지, 즉 달(월, 月)의 예지는 모든 다른 것들을 앞서가며, 잠세태로서 지성을 현실태로 이행하게 하면서 그것들의 활동성을 이미 촉발했다. 알 킨디의 이론과 매우 다른 예지들의 이론은 프로클로스의 정신이 완전히 스며들어 있었으며, 능동적 예로부터 각각은, 마치 형상이 물질에 속하는 것처럼, 그 예지를 뒤따른 것에 속하는 방식으로 예지들을 위계화 한다. (550)
적어도 알파라비에게서 지적인 인식의 이론은 인간영혼과 최고실재성과 연결의 아주 다른 양태를 배제한다고 믿지 않아야 했을 것이다. 플로티노스에서처럼 때로는 신은 일련의 유출 작용들의 제1항목이며, 유출작용들 가운데 인간 지성은 정해진 배열과 장소를 발견한다. 때로는 신은 모든 계열의 바깥에 있는 단순한 존재이며, 그 존재의 영혼은 감각적 세계로부터 멀어져 있으며, 직접적으로 향유할 수 있다. “모든 것 그 위에 있으면서, 신은 어떠한 너울도 없이 있다. 신에게 어떠한 우발사고도 없으며, 우발사고 그 아래에 신은 숨어 있다. 신은 가까이 있지도 멀리 있지도 않다. 신과 우리 사이에 어떠한 매개도 없다.” (550)
5절 아비센 Avicenne 550
아비센(Avicenne, Avicenna, Ibn Sina, 980-1037)은 알파라비의 형이상학에 거의 보탠 것이 없다. 아비센은 알파라비처럼 순수 지성인 신으로부터 출발한다. 신은 자기 본질을 인식하면서 모든 사물들을, 심지어는 사물들의 근본적 이법들과 사물들의 순수 이것임 속에서 개별적 사물들을 인식한다. 신은 동일한 방식으로 예지들과 운동하는 영혼들의 유출을 묘사한다. 이것들은, 예지들로부터 구(球)들이 파생되었는데, 가능한 만큼 예지들의 변질불가능성을 모방하기 위하여, 등속도 운동으로 여러 층계의 구(球)들을 돌게 한다. (551)
알파라비에게서처럼, 인식은 작동하는 예지가, 또는 달의 구에서 예지가, 달 아래 구를 감당하도록 배치된 예지들에게 행사하는 영향에 기인한다. 감각적 사물에게 사물들의 형상들 또는 이것임(la quiddité)을 부여하는 것은 예지이다. 그 만큼이나 물질은 형상들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리고 예지들 속에서 인식을 생산하는 것도 예지이다. 그러나 아비센은 인식의 여러 질서들을 구별한다. 우선 제1원리들 또는 공기들에 대한 인식이 있다. 그리고 추상관념들의 인식이 있고, 마지막으로 미래의 인식과 같은 계시에 의한 인식이 있다. 첫째 인식은 “배치되거나 또는 준비된 예지”에 상응한다. 이렇게 이름이 불리어지는 데, 그 이유는 그 잠세태가 첫째인식에서 현실태에 가깝기 때문이다. 둘째 인식은 작동 중인 예지에 상응하며, 이 예지는 현실적으로 가지적인 형상들을 지각하며, 물질적 또는 가능적 예지가 가지적 형상들을 잠세태로 지각한다. 셋째 인식은 발산하는 예지, 또는 “밖으로부터 오는” 불어넣는 예지에 상응한다. (551)
아비센은 이 예지들 중의 둘째 예지의 메카니즘을 풍부하게 서술했다. 사람들은 느린 진보에 의해 추상용어를 감각적 사물들로부터 분간했다. 조작작업은 감각작용과 더불어 시작하는데, 감각작용은 대상으로부터 형상만 받아들이지만(영혼 속에 있는 것은 돌이 아니라, 돌의 형상이다), 그러나 그 감각작용은 형상의 “물질적 의존성”으로부터, 말하자면 물질에 기인하는 특성들로부터, 아직은 박탈당하지 않고 있다. 이런 특성들이 물질을 가지고 개별자도 우발사고들도 만들지 못하다. 우발사고들은 실체들과는 다른 범주들 아래로, 즉 양, 상황 등 아래로 떨어진다. “환상적인 또는 형성적인” 것은 두뇌의 좌측 부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또한 환상적인 것의 개별성을 이미지로 간직하지만, 그 환상적인 것이 현존했던 장소와 시간의 조건들로부터 환상적인 것을 분리하기 시작한다. 그러고 나서 “인지적, 상상적, 집단적”인 것, 즉 이것을 비슷한 다른 이미지들과 연합하는 것은 일종의 조잡한 용어를 생산한다. 이 용어는 아직 개별적인 특성들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으면서 보편자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이미지들은 “견해”를 가능하게 한다. 그 견해에 의해 어떠한 반성 없이도, 예를 들어 암양들은 늑대를 다른 동물들로부터 구별한다. 이렇게 준비된 이미지들 속에서, 추론할 수 있는 영혼은 작용자인 예지의 영향 하에서 추상적인 형상들을 발견한다. 이 형상들로부터 논리적이고 반성적인 조작 작업들이 가능하게 된다. (551)
그러나 아비센은 인간에게서 이런 지적 인식의 협소한 한계들은 인정했다. “인간은 사물들의 본질을 인식할 수 없지만, 그러나 사물들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것, 사물들에 고유한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체로부터, 인간은 신체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신체가 3차원이라는 것을 안다. 본질들은 고유한 것들부터 결론에 이를 뿐이다. 그럼에도 영혼은 보다 완전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신체로부터 이탈된 수면의 상태에서 영혼은 작동하는 예지의 영향을 받아들이는데 더 잘 처신한다. 이 작동하는 예지는 상상하는 능력에 쏟아내어서 예언적 몽상들을 생산한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영혼은 훨씬 더 완전한 인식에 도달할 것이다. 라틴계 서방이 전혀 알지 못했던 그의 저술의 한 부분 전체를 통하여 보면, 아비센은 이란 수피교도들의 전통에 결부되어 있다. (552)
그의 동시대인들 중의 한 사람인 알하젠(Alhazen, 965-1038)이 쓴 시각에 관한 연구인 원근법은 12세기 라틴 서방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시각적 지각의 분석의 작가이다. 그의 분석은 오늘날까지도 고전으로 남아있고, 우리는 그것을 빗텔로 (Witelo, 1230–1314)에게서 재발견할 것이다. (552)
6절 알가잘리 Al Gazali 552
다마스와 예루살렘에서 가르쳤던 알가잘리(Al-Ghazali, 1058-1111)의 저술은 우리에게, 이슬람 속에서 소요학파이론의 확산이 일으키는 불안의 한 증거이다. 그의 저서 철학자들의 붕괴(1093)는 소요학파이론을 제시하고,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는데 전념하고 있다. 세계의 영원성의 주제에게 그가 대꾸하기를, 그 주제가, 신에게 규정된 질서의 선택을 영원히 부여하면서, 사람들이 신에게 부여해야만 하는 무차별적 의지에 상처를 주었다고 한다. 과거 시간의 무한성은 원인들의 무한 퇴행을 함축한다. 그런데 무한퇴행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무한 수는 짝수도 아니고 홀수도 아니기에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신의 통일성도 증명할 수 없으며. 게다가 영혼의 정신성도, 원인의 연결의 필연성도 더 이상 증명할 수 없다. (552)
게다가 알가잘리의 고유한 태도를 정의하는 것은 어렵다. 아베로에스(Averroes, Ibn Roschd, 1126-1198)에 따르면, “알가잘리는 어떠한 종파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아샤리파들과 함께 할 때는 아샤리파, 수피파들과 함께 할 때는 수피파, 철학자들과 함께 할 때는 철학자이다.” 그의 철학자들의 붕괴를 통해서, “그는 신학자들의 증오에 대항하여 스스로 성장하기를 원했다. 그 신학자들은 항상 철학자들의 적들을 갖는다.” 그가 회의주의자이든 아니든 간에 사람들은 그에게서 인식에 대한 일종의 회의적인 비판을 발견한다. 그 비판은 이 시대에 이슬람에서 충분히 일반적으로 나타났던 하나의 조류에 상응한다. 감관들의 불확실성이 있다. 감관들은 서로 모순되고, 이법에 의해 모순을 말한다. 이법의 불확실성도 있다. 이법의 원리들은, 심지어 원리들이 감관들을 판단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체 남아있는 원리들에 의해 판단될 수 있다. 여기, 그리스 회의주의자들의 옛 논증작업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아랍의 다른 사상가들에게서도 재발견한다. (553)
7절 스페인에서 아랍인들: 아베로에스 Les Arabes en Espagne: Averroes 553
우리가 말할게 남아있는 철학자들은 12세기에 번창한 스페인에서 나타났다. 스페인 사라고사의 아벰파스(Avempace, Ibn Bajja 1089-1139)는 자신의 저술 고독자의 체제에서 다양한 정도차를 묘사고자 애썼다. 정도 차들에 의해 인간만이 사회적 영향 바깥에서 능동적 예지에 스스로 동일시하기에, 사람들이 정의도 의학도 알지 못하는 완전한 국가의 구성원이 되기에, 악들에 대해 투쟁해야 했던 불완전한 우리 국가들의 몫(할당)들이 되기에 이르렀다. 철학자들이 묘사했던 물질의 추상적 관념들 그 위에, 인간에게 가지적 형상들에 도달해야만 한다. 이 형상들은 지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형상들 자체에 의해 물질로부터 분리되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통일성에 환원되어야 한다. (553)
스페인 카디즈 출신인 아부바세(Abubacer, Ibn Tofaïl, 1105-1185)는 그의 철학적 소설 각성자의 살아있는 아들에서, 만일 그가 지구에서 거주할지 않는 섬에서 태어났다면, 아벰파스의 고독이 무엇일 수 있는지를 상상한다. 그러면 사람들을 그를 보았을 때, 감각적 인식에서부터 출발하여 신체들의 추상적 형상들로 고양하고, 그러고 나서 신체들의 일반적 원인들로, 영원한 천체들과 이것들의 운동자들로, 결국에는 감관들과 완전히 분리되면서 신에까지 올라간다. (553)
코르도바 출신인 아베로에스(Averroes, Ibn Roschd, 1126-1198)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자들의 왜곡들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실한 의미를 규정할 임무를 스스로 맡고 있었다. 특히 두 가지가 밝혀져야만 했다. 실체적 형상들의 생산 작업에 대한 그의 이론과 가능한 예지에 대한 그의 이론이다. 첫째 이론은 아비세나와 반대로 나갔다. 사람들은 자발적 일반화 속에서 실체적 형상들이, 마치 물질 속에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절대적 새로움처럼, 자연 속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아비센에 따르면 모든 생성에도 마찬가지 였을 것이다. 자연은 그 자체에 의해, 차거움과 더움, 건조함과 습함이라는 네 가지 초기의 또는 능동적 성질들의 상호 작용으로부터 오는, 조합작업들만을 생산한다. 실체적 형상은 이런 저런 존재로 만들어진 주어진 조합작업으로, 자연의 외부에 상위적인 지성처럼 생각된 “형상의 수여자(dator formarum)”로부터, 오게 될 것이다. 아베로에스는 아비센을 비난하는데, 이렇게 자연적 존재를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구별된 두 요인들에 의해 생산되어 접합된 두 존재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의 견해 상으로 실체적인 새로운 형상은, 이미 다른 질료 속에서 현존하는 다른 형상에 의해 질료에 도입된다는 것인데(이것은 일의적 생성작용이며, 즉 인간이 인간을 생성한다), 사람들은 물질에게 외적인 “형상의 수여자”의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체적 형상을 소유하는 신체는, 질료가 형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있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우선 능동적 성질들에 의해 물질을 변형할 수 있으며, 그러고 나서 신체는 형상을 이렇게 변형된 질료로 생장하게 할 수 있다. (554)
그의 예지 이론은 알렉산드로스 아프로디지에우스(150경-215)의 해석에 반대로 나아갔다. 사람들은 작동중인 예지에서는 지성은, 그 지성이 사유하는 가지적인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가지적인 것은 영원하고, 따라서 지성은 그것처럼 영원하다. 그러나 만일 가지적인 것들을 사유하는 주체가 영원하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붕괴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그럼에도 그것들을 사유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알렉산드로스는 물질적 예지를 만들었는데, 그 물질적 예지가 우리들 속에 자체적으로 있으면서 생겨나고 소멸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따라서 어떻게 우리가 그것들을 생각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적 예지는, 그것이 사유할 수 있는 것이라면, 생장하지 않아야 하고 소멸하지 않아야 하고 모든 인간들에게 동일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에 난점은 거꾸로 이다. 즉 어떻게 우리에게 고유한 지적 활동성이, 시간의 어떤 찰나에 시작하는 지적 활동성이 설명되는가? 가능한 유일 해석은, 이런 지적 작동이 새로운 지적작업이 아니라는 것을, 즉 우리를 이 찰나에 작동하는 예지에 통합하게 하는 작동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로부터 오는 것, 그리고 우리와 더불어 나타나는 것, 이것은 수동적 예지라 불리는 단순한 조치이며, 이 조치는 우리의 이미지 상태가 우리에게 능동적 예지의 영원한 유출을 받아들이게 허락하는 사실에 있다. (554)
사람들은 라틴계들에서 아베로에스주의의 발전을 곧 볼 것이다. 여기서는 다음처럼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베로에스에 따르면, 종교와 철학은 서로 서로 대립시키는 것이라기보다 사유의 두 단계를 대표한다. 그런데 종교는 너울[장막] 아래 감추어져 있는데, 그 철학자가 발견한 진리들을 세속인에게 접근가능하게 하기 위해서이고, 진리들에 대한 인식은 철학자가 신에게 숭배하는 것과 동일한 숭배이다. (555)
8절. 12세기까지 유대 철학 La philosophie juive jusqu’au XIIe siècle 555
동일한 세기에 히브리 철학이 발전되었던 것은 아랍 세계에서이다. 카발라는 특별한 학설이라기보다, 신플라톤주의 신비학의 유대계 형식이다. 율법의 법률적이고 문학적인 주석인 탈무드의 맞은편에 카발라가 있으며, 카발라는 우리가 보았듯이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전20경–후45)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정신 상태와 비슷한 정신 상태를 대변한다. 기호들인 철자들과 숫자들에 대한 신비적 의미가 있다. 기호들에 의해서 지혜는 인간에게, 세계의 조성 작업들과 이 철자들의 불가사의한 상응관계, 일년의 분할 방식들, 인간의 입체적 배치 등을 이해되도록 해준다. 알레고리적 방법의 사용은 율법의 단어 각각 속에 고차적 의미, 궁극적 불가사의, 권능들과 천사들의 신화학, 신과 피조물들 사이에 매개들을 다수로 만드는 신화학 등을 알게 해 준다. 이러한 모든 것의 어느 것도 매우 새로이 나타난 것은 아니다. (555)
이집트의 유대인인 이사악 이스라엘리(Isaac Israeli, 845-940)는 특히 갈망하는 신플라톤주의로 사유했다. 그는 형이상학 또는 인식이론에 대해 위계질서를 재발견했다고 말했다. 그 위계질서에서, 하부적인 것이 상부적인 것으로부터 진행하고, 하부적인 것은 상부적인 것의 그림자와 같다고 한다. 지성, 추론할 수 있는 영혼, 동물 영혼, 식물 영혼 등이 있다. 지성 안에는 작동하는 지성, 잠세적인 지성, 상상작용, 감관 등이 있으며, 거기에는 우리가 인식하는 분류 방식들이 있다. 그의 편집 작업들은 유용하고, 그렇다고 역사적으로 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13세기의 라틴계 학자들은 그의 작품 정의들을 다룬 책에서 진리의 유명한 정의를, 사물과 예지의 정합(adaequatio rei et intellectus)을 발견한다. (555)
사디아(Saadia ben Joseph Gaon, 882-942)는 또 다른 이집트 유대인인데 바빌론에 살았다. 그는 그의 신앙과 지식의 책(932)에서 율법 속에서 이법의 몫과 계시의 몫을 규정하려고 시도했다. 이법에 대해, 신에 봉사하는 질서와 신을 경멸하기를 금지하는 것과 같은 계율들, 잘못 행하는 것에 대한 금지, 이러한 것들은 서로 서로 추리적이다. 신앙에 대해, 그것은 이것들과 다른 것들인데, 이 다른 것이라는 대상은 자체적으로 무차별적이고, 신의 의지에 의해 율법이 되고, 이 다른 것은 계시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둘째 계율들은 첫째 계율들의 집행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하다. 첫째 계율들은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그것들의 적용의 환경들을 규정할 수 없다. 만일 사람들이 소유를 정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도둑을 방어하는가? (556)
스페인에서 그리고 모로코에서도 유대 철학이 발전되었다. 스페인 남부 말라가 출신인 아비스브롱(Avicebron, 1021경-1058경)은 생명의 샘를 썼다. 이 책의 역사적 중요성은 크다. 이 책은 13세기 라틴어로 번역되었으며, 신플라톤주의의 중요한 근원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실재성들의 위계적인 분류작업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모든 것 위에 고양된 신이 있다. 그리고 의지가, 그 다음으로 형상이 있는데, 형상을 규정하는 질료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형상이 있다. 생명의 샘의 고유한 목적은 형상과 질료에 대한 연구이다. 이 연구의 일반적 생각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기원으로부터 유출하는 모든 사물들은, 그 사물들이 기원의 가까이 있을 때는 모여져 있고, 그것들이 기원으로부터 멀리 있을 때는 흩어져 있다.” 가장 높은 수준에서 보편적 형상은 그 자체적으로 통일되어 있어서 모든 형상들을 포함한다. 가장 낮은 정도의 수준에서 감각적 사물들은 또한 모든 형상들을 포함하지만 형상들 서로서로 떨어져 있고 흩어져 있다. 이 둘 사이에 실재성들이 있는데, 지성은 이처럼 모든 사물들을 포함하는데 통일하지만 그럼에도 구별되어 있다. 아비스브롱의 둘째 원리는 질료없는 형상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성의 각 수준에는 질료가 상응하는데, 그 질료가 수준이 보다 높으면 높을수록 그만큼 더 완전한 질료[물질]이다. 왜냐하면 물질의 완전성은 가능한 한 가장 큰 통일성의 상태로 형상을 받아들이는데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생명의 샘의 질서가 나온다. 그 책은 가장 낮은 수준에서, 즉 물체적 실체들의 수준에서 시작한다. 그 책은 계속해서 감각적 성질을 지탱하는 형체적 질료를, 그리고 물체의 실체적인 형상을 지탱하는 정신적 질료를, 나아가 매개적인 정신적 실체들(영혼들)의 질료를, 단순한 실체들(지성들)의 질료를, 결국에는 보편적 형상을 지탱하는 보편적 질료를 연구한다. (556)
사람들은 이런 위계질서에서 지적 인식이 유지하는 자리를 본다. 형상들은 지성 속에서 이 모두들이 일체이며, 본질적이고 정신적인 통합의 지성에 통일되어 있으며, 형상들을 물체에 결합시키는 우발적 통합은 아니다. 신플라톤주의의 본질적 특징은 인식에 실재성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은 그 자체가 마치 일자와 다자 사이에 층계로 되어있는 실재성의 수준들 중의 하나처럼 간주한다. (556)
11세기에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 신비적 경건 운동이 자리를 차지한다. 그 신비 운동은 이븐 파쿠다(Ibn Paquda, 1050-1120)의 저술 심성들의 의무들에 대한 입문이 최근에 번역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556)
모이즈 마이모니데스(Moïse Maimonide, 1135-1204)는 1135년에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1204년에 카이로에서 세상을 떴다. 그는 길 잃은 자들의 안내서(1190)라는 저술 속에서 무엇보다 한 랍비이다. 랍비는 율법을 설명하고, 단지 경전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만 철학적 주제들에, 즉 분리된 지성들의 문제들, 천구의 운동들, 형상과 질료의 운동에 접근한다. 그의 철학적 사색은 자치적이다(그를 성 토마스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색은 경전의 진리들을 확정하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마이모니데스의 사유에 어떤 애매성을 부여하거나, 또는 적어도 서로 잘못 화해 조정되는 다양한 측면들을 제공한다. 예들 들어 신의 통일성의 현존을 철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중요한가(2권)? 마이모니데스는 소요학파학자들에게서 우주의 영원성에 근거한, 또한 그들에게서만 인정된, 증명작업을 빌려온다. 왜냐하면, 신이라는 무한한 운동자를 참조하기에 이르는 것은 천체의 구들의 시작도 끝도 없는 운동의 고찰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증명작업이 가능하기 위하여 가설적 자격으로가 아니라면, 세계의 영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세계에 대한 그의 체계는 총체적인데, 그것은 마치 아랍의 모든 철학자들의 체계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온 동심원적 구(球)들의 체계이다. 그러나 거기에도 이런 표상작용의 정확성에 관하여 매우 회의적인 것이 남아있는데, 그는 그 정확성을 증명된 것으로 허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지는 않았다. (557)
마이모니데스의 고민들의 중심은 아마도 예언자의 지적이고 사회적인 역할이었다. “예언는 신의 유출이며, 신의 유출은 능동적 예지를 매개로 해서 우선 추리적 능력(la faculté) 위에 그리고 상상적 능력 위에 스스로 펼친다. 추론적 능력 위에서만 펼쳐진, 신의 유출은 인간들을 완전한 사회에 재통하기 위하여, 인간적인 개별자들의 행동들을 규칙화하기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소위 말하는 예언자들을 만든다. 행동들의 다양성과 이어지는 그것들의 가능한 충돌들은 사람들이 다른 종에서 보는 모든 것을 넘어선다.” (557)
9절. 비잔틴 철학 La philosophie byzantine 558
콘스탄티노플이란 도시는 중세에서 그리스 철학적 전통을 연속하기 위해 모든 재원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법률가들의 도시, 사업가들의 도시, 신학자들의 도시인 그 도시는 그리스 철학적 취향을 갖지 못했다. 콘스탄티노플 대학에서 철학의 자리는 수는 논증술(la sophistique)과 법판례학(la jurisprudence)의 자리에 비해서 미미했다. 또한 사람들은 박학다식자들과 주석가들만 본다. 그들에게서는 유일하며 생생한 문제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 충돌의 문제였다. 박식한 포티오스(Φώτιος, 820경-897)는 자신의 저서 서가(書架)(843경)에서 우리에게 그리스 철학자들의 많은 발췌본들 또는 요약본들을 남겨놓았다. 반대로 프셀로스(Μιχαὴλ Ψελλός, 1018-1078)는 플라톤의 방어자를 자처했다. 플라톤은 진실한 신학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주 자주 너무나 인간적인 방식으로 신학적 독단을 다루었다.” 프셀로스의 작품은 굉장하며, 그의 출발점은 플라톤 철학의 흐름으로부터이다. 그 철학적 흐름은 플레톤(Πλήθων, 1355경-1452)과 베사리온(Βησσαρίων, 1403-1472)을 거쳐서 르네상스 이탈리아에, 그리고 서방의 나머지 나라에 퍼졌다. 또한 그의 플라톤주의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정의하는 것이 관념들의 역사에 중요하다. 그에게 영감을 준 자는 특히 프로클로스(410-485)이다. “높은 자연을 지닌 이 인간은 철학 속에 아주 깊이 파고 들었다.” 그가 또한 이야기하듯이, “나는 플라톤, 포르피리오스(232?-305?), 쟝블리코스(242년경-325)에게로 인도되었고, 마치 거대한 항구에 도달하듯이 찬탄할 만한 프로클로스에게 멈추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과학과 정당한 관념들을 제공했다” 이런 학설이 마치 프셀로스의 학력형성처럼 법률적 학력형성의 정신에게 다른 모든 것보다 더 마음에 들었다. 이방 철학을 재건하기 위하여 행해야 것이 매우 많았다. 예로서 호교론자 성 쟝 다마센(Jean Damascène, 675-749)은 “이방 현자들의 사탄 같은 오류들”을 고발했다. 다마센이 올림푸스 산의 수도사들에게 플라톤을 찬미하게 하기를 바랐는데, 그 수도사들은 아테네 철학자들을 “그리스적 사탄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자기의 친구 크시필노스(Xiphilin, Ξιφιλίνος)에 대한 비난에 응답하면서, 그가 그렇게 말하듯이, 크리스트교의 독단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플라톤을 이용하면서, 그는 카파도키아 공동체의 교부들의 전통을 계속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행하는가? “정의와 영혼의 불멸에 관한 플라톤의 학설들이 우리자신들의 학설을 위해서 비슷한 학설들의 출발점들이 아닌가?” 동로마 황제 모노마코스(Μονομάχος, 1000경-1055)에 의해 재건된 비잔틴 대학에서 프셀로스는, 플라톤의 폴리테이아편 6권에 열거된 과학들을 기초로 하는 신플라톤주의 교육의 전통을 되살리려고 애썼다. 사람들은 그것을 가르치는데 수학을 위해서는 게라세노스(Γερασηνός, 50-120), 유클리드, 디오판토스(Διόφαντος, 2세기경)의 개론서들을, 천문학을 위해서는 프톨레마이오스(Πτολεμαῖος, 90경-168경)와 프로클로스(410-485)의 개론서를, 음악을 위해서는 아리트톡세노스(Ἀριστόξενος, 전360-300)의 개론서를 이용했다. 그 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의해 시작하여 프로클로스의 주석에 의해 마감하는 철학을 가르쳤다. 또한 그보다 더 위에는 오르페우스의 시들과 메소포타미아의 칼데아인들의 신탁들과 같은 것에게 영감을 받은 원전에 따른 알레고리적 설명을 보탰다. 이러한 모든 것에 독창성의 요구는 없었다. 그가 말하기를 “나의 유일한 장점은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는 샘에서 길어 올렸던 몇몇 철학적 학설들을 내가 수집했던 것에 있다.” 그것들로부터 매우 단호한 합리주의가 나왔다. 그는 그 당시의 미신들을, 그리고 특히 다이몬들의 신앙을 합리주의로 공격하는 데 이용했다(마치 플로티노스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는 그런 신앙을 믿는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인] 케룰라이오스(Michel Ier Cérulaire, 1005-1059)를 비난했다. 프셀로스는 사색적 형이상학으로 남는다고 이해했으며, 요술로 향해 빗나가지 않았다. (559)
프셀로스에 의해 다시 다루게 된 전통은 그의 제자들 미카엘 에페시오스(Michel d'Éphèse, 1070-1129)와 이탈로스(Jean Italos, 1025-1085)와 함께 계속되었다. 제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에 대한 신플라톤주의의 주석들을 지칠 줄 모르고 전사했다. 이탈로스의 제자인 유스트라티오스(Eustrate de Nicée, 1050-1120)는 니스의 주교였는데, 아벨라르가 나중에 파리에서 약간 가르쳤던 것과 같은 위격들에 대한 플로티노스의 학설을 가르친다고 비난받았다. 프로클로스의 신플라톤주의는 신학자들에 의해 심한 공격을 받았다(예를 들어 우리는 12세기에 미콜라스 드 모돈(Nicholas de Modon, ?-1166경)에 의한 프로클로스의 신학원론들에 대한 반박을 보았다). 그럼에도 프로클로스의 신플라톤주의는 12세기에 미셀 이탈리코스(Michel Italikos, 1090경-1157)와 니케포로스 블레뮈데스(Nicéphore Blemmydès, 1197-1269경)와 더불어, 13세기와 14세기에는 아크로폴리테스(Georges Acropolite, 1217-1282), 조셉 1세 (Joseph I Galesiotes, ?–1283), 메톡시테스(Μετοχίτης, 1270-1332),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Nicéphore Grégoras, 1295-1360)와 더불어, 15세기에는 데메트리오스 퀴도네스(Démétrios Kydones, 1320-1398)와 게미스토스 플레톤(Georges Gémiste, Γεώργιος Γεμιστὸς Πλήθων, 1355—1452)과 더불어 지속되었다. 플레톤은 플라톤주의를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 도입했으며,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반대하여 플라톤을 종종 방어했다. (559)
아마도 플라톤주의 속에 보편적 종교의 지지점을 보는 것에 매우 신중했던 것 같다. 트라페준티오스(Τραπεζούντιος, 1396-1472)가 쓰기를, “나는 그가 말한 것을 이해하건데, 우리가 피렌체에 몇 해 동안 있었을 때, 모든 사람들은 전지구를 통하여, 공통적인 동의로 또한 동일한 정신을 가지고 하나의 유일한 종교를 포옹하고 있었을 것인데… 내가 그것이 예수-크리스트 종교인지 또는 마호멧 종교일 것인지를 그에게 물었던 것에 관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고 그는 나에게 대답했다. 그러나 이방종교주의와 다르지 않은 제3의 종교가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한 것이 프셀로스에 의해 창립된 운동의 출구이다. (560)
플레톤(1355—1452)과 반대로, 가자(Théodore Gaza, 1400경-1478경)는 15세기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 일치의 옛 전통을 대변한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서들이 이 시대 전체 동안에 비잔틴에서 추구되었다. 프셀로스(1018-1078)의 동일한 제자들 가운데, 미카엘 에페시오스(1070-1129)는 오르가논의 일부와 니코마코스 윤리학 10권에 주석을 달고, 이탈로스(1025-1085)는 해석론에, 유스트라티오스(1050-1120)는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분석론 후편에 주석을 달았다. 니케포로스 블레뮈데스(1197-1269경), 파퀴메레스(1242-1310), 소포니아스(13세기-14세기 활동), 페디아시모스(1250경–14세기초), 마겐티노스(14세기 중반) 등은 14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심리학의 저술들을 길게 설명하기도 하고 요약도 하며, 심플리키오스(490-560)와 암모니오스(세기초-66이후)의 주석들을 베끼기도 한다. (560)
결국 적어도 공식적이고 대학의 철학자들 이외에도, 수도원들 속에서 추구되었던 신비적인 관념의 흐름을 지적해야 한다. 이런 흐름의 초기 표출들 중의 하나는 생 쟝 클리마코스(Saint Jean Climaque, 579-649)의 천국의 계단이다. 클리마코스는 7세기 초에 시나이 산의 수도원의 원장이었다. 이 작품은 유명해졌으며, 특히 제르송(Gerson, 1363-1429)에 의해 서방에 알려졌다. 이 작품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유보다 더 민중적인 철학적 사유에 영향을 감당했다. 사람들은 여기서 스토아학파와 퀴니코스학파의 사유의 반향을 발견한다. 이런 이유에서 생 쟝 끌리마코스는 그 계단에서 계속적인 서른등급들을 지적했다. 그리고 스물아홉째 등급은 무감동(ἀπάθεια)이다. 무감동 할 수 있다는 것은 “자기 살을 소멸할 수 없게 했던 자이며, 자기의 사유를 창조 그 위로 고양하는 자이며, 그 자는 자기에게 자기의 모든 감각작용을 종속시켰던 자이다.” 생 쟝 클리마코스는 이집트 사막의 교부들에게서 이런 무감동의 유명한 예들을 보았는데, [종교 작가이며 주교인 팔라디오스(Pallade d'Hélénopolis, Παλλάδιος, 363-431)의 작품인] 라오소스의 역사(Λαυσιακὴ ἱστορία, 420)가 우리에게 그 교부들의 삶을 이야기 해주었다. 클리마코스의 작품은 크리스트교 신비학과 퓌론주의자들과 디오게네스주의자들에 연결하는 고리들 중의 하나를 형성한다. (560)
사색적 신비주의의 흐름은 위 드니(490년 경활동)와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드니의 제자인 막심(Maxime 580-662)의 네오플라토니즘의 영감을 받아서 솔로몬의 책들에 주석을 단 익명의 작가들(8세기)과 더불어, 또한 시메옹(Siméon, 1025-1092)과 더불어, 그리스 수도원들에서 연속되었다. 시메옹은 신비적 직관이 세속적 삶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단지 수도자들에게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지지했다. 팔라마스(Grégoire Palamas, 1296-1359)와 그의 제자 카바실라스(Kabasilas, Καβάσιλας, 1319-1392)는 14세기 중반에 차례로 테살로니카의 총주교가 되었는데, 이들은 묵언주의자들로서 처신했다. 이들은 삼위격 바깥에 창조되지 않은 빛이 현존한다는 것을 지지했다. 그 빛이 그 자체로 발하며(유출하며), 신비가를 신과 소통하게 한다고, 즉 크리스트교 가운데서 신플라톤주의 유출론의 최고 표출작용과 소통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561)
(16:06, 56SMB) (14:11, 58MK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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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X.
- 비잔틴 철학에 관해서는 보론으로 된 낱권을 참조하시오.
[Fascicule supplémentaire. — La philosophie en Orient, par Paul Masson-Oursel]
[Paul Masson-Oursel, 1882-1956] 프랑스 동방학자. 철학자] (56SMD)
(옮20:01, 58MKE) (18:06, 58MKJ)
첫댓글 <권리 침해 신고 접수에 의해 임시 조치된 글입니다.>
오늘(250324) 이 글이 게시판에 떴다.
다음의 담당자는 "마실에서 천하루밤"의 카페지기에게
누가, 무엇이 문제인지,
즉 에밀 브레이어 '번역'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
신고자의 일방적인 견해를 받아들여,
100여년 전의 저술의 번역에 대해 내리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 메일로 누가, 무엇을 문제 삼고 있는지를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마실에서 천하루밤" 천야
아직 시간이(스무아흐레나) 남아있으니,
{3권4장. 동방에서 철학(젊)}, 이 글에 대해,
신고자님에게,
반론 또는 지적사항이 있으시면,
님의 글을 그대로 올려드리겠습니다.
꼭 연락 주십시요.
"마실에서 천하루밤" 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