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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기행 1박 2일(덕진호-경기전-한옥마을-전주향교-한벽당) 2-1
◈ 일시 : 2026. 05.07(수). 둘째날.
풍패지관-풍남문-부채문학관-한옥마을-오목대.이목대-전주향교-한벽당-청연루
◈ 지도.
한옥마을.경기전 세밀도. 누르면 확대됩니다.
◈ 트랙.
◈ 일정정리.
08 : 34. 전주 빈센트호텔에서 제공하는 우유와 시리얼. 죽으로 아침을 먹고 출발.
08 : 46. 풍패지관. 객사.
09 ; 06. PNB빵집에서 빵을 한 보따리 사서 걸머지고
09 : 23. 다시 돌아와서 빈센트호텔과 전라감영 앞을 지나
09 : 32. 풍남문.보물 308호.
09 ; 40. 남부시장.
09 ; 50. 전동성당 앞을 지나고
09 ; 52. 경기전 앞을 지난다.
09 ; 56. 좌측길로 들어-2분 후 우측길로
10 ; 01. 최명희 문학관.
10 : 04. 부채문화관.
10 ; 18. 교동미술관.
10 ; 26. 좌측으로 꺾어간다.
10 : 30. 동학기념관. 앞엔 600년 은행나무. 되돌아 나간다.
10 ; 53. 한옥마을 역사관.
11 : 05. 골목 안에 승광재. 되돌아 나가 사거리에서 좌측으로.
11 : 19. 태조로에서 좌측으로.
11 : 36. 공예품 전시관.
11 : 46. 우측 산밑길로 들어갔는데 여기서 도로 따라 올라가 언덕 위 도로에서 오목대로 오르면 편하다.
11 : 52. 갈림길. 좌측 계단을 따라 쭈~욱 올라간다.
11 : 58. 76.5m 정상의 오목대. 되돌아 내려갔는데 여기서 우측으로 내려가면 육교를 건너 이목대로 이어진다.
12 : 06. 다시 내려온 갈림길. 좌측 산아래길을 따라간다. 중간에 이목대로 올라가는 길이 어딘지 모르겠다.
12 : 27. 전주동헌.
12 : 35. 전주향교.
12 : 42. 완판본문화관.
12 : 56. 오목교.
13 : 16. 한벽당. 한벽굴로 나가 도로를 따라 이목대를 찾아간다.
13 : 36. 한벽루.자만벽화마을 정류소. 우측 위는 자만벽화마을.옥류벽화마을 0.1km.350. 430번 버스.
13 : 51. 이목대. 도로 위에 있다.
13 : 59. 오목육교를 건너간다.
14 ; 04. 오목대. 11;58에 올라왔던 오목대다. 아까와는 바대편인 우측으로 내려간다.
14 : 14. 오전에 왔던 태조로를 따라 내려간다.
14 : 18. 공예품 전시관을 다시 지나고. 점심 먹을 곳이 마땅찮아 AI에게 물어보니 잔라감영뒤 객사 앞 3곳을 일러준다.
14 : 38. 다시 경기전 앞을 지나 풍남문 교차로 사거리에서 우측으로 큰 도로를 따라간다.
14 : 58/15 :31. 풍패지관 객사 근처의 하숙영 비빔밥집에서 육회비빔밥으로 늦은 점심(18000X2)
15 ; 37. 다시 전라감영 앞을 지나
15 ; 45. 풍남문에서 우측으로 도로를 따라간다.
15 : 57. 전주천 싸전다리 앞에서 좌측으로 천변도로를 따라간다.
16 : 05. 남천교 청연루. 버스를 타러 남부시장정류소로 되돌아 나간다.
16 ; 18/37. 남문교회옆 남문역사문화관에서 커피 한잔하고 핸드폰 충전.
16 ; 41. 남부시장 정류소. 1001번 버스 타고
16 : 58. 금암광장 정류소 하차. 걸어서 시외버스터미널로 간다.
17 :13/ 50. 전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천안행 시외버스 (10900X2)
19 : 30. 천안 시외버스 터미널 도착. 천안 오니 비가 온다. 택시 타고 귀가
08 : 34. 전주 빈센트호텔에서 제공하는 우유와 시리얼. 죽으로 아침을 먹고 출발.
전주 빈센트호텔.
전라북도 예술회관.
08 : 46. 풍패지관. 객사.
풍패지관은 아직 문을 안 열어서 우측 객사길로 한바퀴 돌아온다.
풍패지관(전주객사).보물 583호.
풍패지관(전주객사).보물 583호.
전주풍패지관은 전주를 찾아온 벼슬아치와 사신을 대접하고 묵게 하던 조선시대 숙소이며 보물 제583호이다. 조선시대에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으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는 축하 의식을 거행했다. 이곳의 건물은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는 주관과 숙소로 사용하던 익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관의 처마 아래에 풍패지관이라고 쓴 거대한 편액은 전주객사의 위상을 보여준다. 풍패란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의 고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건국자의 본향을 일컫는데 전주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풍패지향이라 하고 전주객사는 풍패지관이라 한다. 현재 길고 넓은 마루에 앉아 쉬어가기 좋은 휴식처이자 수십 년간 전주시민의 만남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주변으로 전동성당, 오목대, 자만벽화마을, 한옥마을 등 전주의 손꼽히는 명소들이 10분 거리에 있으며 다양한 맛집과 카페가 들어선 객리단길을 함께 둘러보기 용이하다.
풍패지관(전주객사).보물 583호.주관.
풍패지관(전주객사).보물 583호.익헌.
풍패지관(전주객사)
풍패지관(전주객사).
09 ; 06. PNB빵집에서 빵을 한 보따리 사서 걸머지고
이름있는 빵집이란다.일부 빵들은 아침 일찍 동이 난단다.
한옥마을에도 판매점이 두 군데가 있는것을 모르고 아침부터 종일 지고 다녔다.
09 : 23. 다시 돌아와서 빈센트호텔과 전라감영 앞을 지나
전라감영. 완산 경찰서 앞이다.
저앞에 풍남문을 보며 간다.
앞사진 우측에 있는 그림이다.
공익질옥.지금의 전당포를 말한다.
09 : 32. 풍남문.보물 308호.
풍남문.보물 308호.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층은 앞면 3칸, 옆면 3칸이고, 2층은 앞면 3칸, 옆면 1칸으로, 지붕은 겹처마를 둔 팔작지붕이다. 전주부성(全州府城)의 4대문 가운데 남문(南門)이다.
1734년(영조 10)에 전주부성을 크게 고쳐 쌓은 전라도관찰사 조현명(趙顯命, 1690∼1752)의 기록에 의하면, 전주부성은 고려 말에 최유경(崔有慶, 1343∼1413)이 쌓았는데, 1734년에 고쳐 쌓을 때, 남문에는 2층 문루(門樓)를 세워 명견루(明見樓)라 부르고, 동 · 서 · 북문은 단층으로 건립하고서 각각 판동문(判東門) · 상서문(相西門) · 중차문(中車門)이라는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1767년(영조 43)에 큰 화재가 일어나 남문과 서문이 모두 불타버렸는데, 9월에 부임한 전라도관찰사 홍낙인(洪樂仁, 1729∼1777)이 새로 건립하고는 풍남문과 패서문이라고 이름지었다. 당시 홍낙인은 한나라 고조의 향리(鄕里) 이름인 ‘풍패(豊沛)’를 따서 풍남문이라고 지었다고 풍남문 상량문(上樑文)에 기록되어 있다. 원래 풍남문 좌우에는 포루(砲樓)와 종각(鐘閣)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1978년에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82년에 옹성(甕城)과 함께 복원하였다.
성문의 가운데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그 위에는 2층의 문루가 있다. 문루 주변에는 벽돌로 여장(女墻)을 쌓아 둘렀는데, 좌우 양쪽에는 양쪽에 기둥을 하나씩 세우고서 문짝을 단 일각문(一角門)을 협문(夾門)으로 두어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갈 수 있게 하였다.
문루의 1층과 2층은 평면이 다르고, 규모 또한 갑자기 줄어든다. 1층에는 앞뒤로 각각 4개의 고주(高柱)를 세웠는데, 이것은 2층까지 그대로 이어져 2층의 모서리 기둥이 되었으므로, 2층의 너비는 갑자기 줄어든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가구(架構)는 다른 문루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방식이다. 1층 안에는 나무로 만든 계단을 놓아 2층으로 올라 갈 수 있도록 하였다. 2층은 바닥에 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반자가 없는 연등천장이며, 각 기둥 사이에는 판문(板門)이 달려 있다.
문루의 각 기둥 윗부분에는 창방만 돌리고서 주심포(柱心包) 건물처럼 공포(栱包)를 올렸다. 기둥 위에 올린 쇠서는 다포(多包)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앙서(仰舌)와 수서(垂舌)의 모습인데, 앙서에는 연꽃 봉오리 모양이 새겨져 있다. 1층 앞뒷면의 가운데칸 기둥 위에는 용머리 조각을 두었고, 귀포에도 살미에 용머리 조각을 두었다.
첨차는 덩굴풀무늬〔唐草文〕를 조각한 ‘쌍S’자형 첨차와 함께 끝부분을 둥글게 깎아낸 교두형(翹頭形) 첨차를 섞어서 설치하였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창방 위에는 도깨비 얼굴〔鬼面〕 · 꽃병 · 짐승상〔獸像〕 등의 여러 가지 모양으로 조각된 화반(花盤)이 올려져 있다. 이처럼 공포에는 조선 후기의 건물에 나타난 복잡한 조각이나 기교, 재치 등이 엿보인다.
문루 2층의 남쪽면에는 ‘풍남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북쪽면에는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풍남문’ 글씨는 1842년(헌종 8)에 전라도관찰사 서기순(徐箕淳, 1791∼1854)이 쓴 것이라고 전한다.
풍남문 좌측의 전동성당.
풍남문 우측 뒤는 남부시장.
09 ; 40. 남부시장.
남부시장.
남부시장.
전주는 예부터 물산이 풍부해서 사람들이 살기에 좋은 땅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전국에 장이 개설되는 초창기부터 많은 시장이 문을 열었다. 당시 전주성 4개의 성문마다 장이 개설되었는데, 그중 남문장과 서문장이 큰 시장이었다.
1907년에는 서문이 헐리고 일본인들이 그 일대를 장악해 공설시장을 세웠다. 이후 1923년 서문장이 남문장과 통합되었고, 1928년에는 공설시장이 남문장과 통합되면서 전주를 대표하는 남부시장이 탄생했다. 한편 전주에는 지리산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팔기 위해 형성된 약령시가 유명했는데, 일제 때 폐지되고 말았다.
한동안 침체기를 겪던 남부시장은 2000년대 들어서 변화를 도모하며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시장 2층에 청년몰을 만들어 젊은이들의 발길을 불러 모으고, 전주의 대표 관광지인 한옥마을과 연계해 야시장을 열며 관광객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또한 과거 남부시장 인근에 섰던 노점들을 새마을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정비해 시장 특유의 활력을 찾고 있다.
풍남문.
전동성당 전모.
09 ; 50. 전동성당 앞을 지나고
전동성당.
손꼽히는 아름다운 성당.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로 꼽히며 로마네스크 양식의 웅장함을 보여주는 전동성당은 호남지역의 서양식 근대 건축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성당이 세워진 자리는 원래 전라감영이 있던 자리로 우리나라 천주교 첫 순교자가 나온 곳이기도 하다.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중국에서 벽돌 제조 기술자를 직접 데려 오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공사 시작 7년 만인 1914년 완성되었다. 영화 「약속」에서 남녀 주인공이 텅 빈 성당에서 슬픈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을 촬영한 곳으로도 유명한데 성당 내부의 둥근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다우며 화강암 기단 위에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건물 외관과 중앙 종탑을 중심으로 작은 종탑들을 배치한 상부의 조화로 웅장함이 느껴진다. 성당 앞의 하얀 그리스도상이 성당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한국 최초 순교터’ 라고 새긴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의 전주는 전라감영과 진영이 있었으므로 천주교회사에서 전동은 자연 순교지의 하나가 되었으며, 이 성당은 바로 천주교인들이 처형되었던 풍남문(豊南門)이 있던 곳에 있다.
1891년(고종 28) 보두네(Francis Baudounet) 신부가 전주 남문 밖에 집을 매입하고 정착하였다. 그 뒤 1908년 프와넬(Poisnel) 신부의 설계로 성당 건축에 착수하여 1914년에 준공을 보았다. 벽돌로 된 완전한 격식을 갖춘 로마네스크양식의 성당 건물은 서울의 명동성당과 외양상 유사한 점이 많으나 건축양식상으로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회색과 적색의 이형(異形) 벽돌을 사용하여 섬세한 모양을 꾸며낸 점은 같으나 반면에 아치의 모양이나 종탑의 양식은 전혀 다르다.
내부 열주(列柱)는 8각의 석주(石柱)로 되어 있으며, 정면 중앙의 종탑부는 12개의 채광창을 돌린 12각형 고상부(鼓狀部) 위에 12각의 총화형(葱花形)으로 된 둥근 지붕을 얹었고, 좌우에는 그보다 약간 작은 8각형의 고상부 위에 8각의 지붕을 얹었다.
두툼한 외부 벽체와 반원아치의 깊숙한 창이 로마네스크양식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고딕양식의 명동성당이 내부 열주 사이를 뾰족한 아치로 연결한 아케이드인 데 반하여, 이 성당은 8각 석주 사이가 반원아치로 연결되어 있다.
초기 천주교 성당 중에서 그 규모가 크고 외관이 뛰어나게 아름답다. 이 성당은 건평 189평에 대지 4,000평이며, 전주 중앙본당이 1956년에 준공되기 전까지는 전주교구 주교좌성당이었다.
1981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09 ; 52. 경기전 앞을 지난다.
경기전( 慶基殿) .
경기전(慶基殿)은 조선시대 국조인 태조의 어진(초상화)을 봉안하고 제사 지내던 외방 진전 중의 하나이다.
조선시대에는 국조인 태조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진전을 서울에는 문소전(文昭殿) 한 곳, 외방에는 전주의 경기전, 영흥의 준원전,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평양의 영숭전(永崇殿), 개성의 목청전(穆淸殿) 등 다섯 곳에 두고 유지하였다. 조선 왕실의 관향인 전주에 있던 태조의 영전에 경기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1442년(세종 24)의 일이다. 이듬해에는 새로 태조의 어진을 경기전에 봉안하였고 제위전을 두어 제사의 비용으로 쓸 수 있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 서울의 문소전과 어진을 보관하였던 선원전이 불타고, 외방 진전 중에서도 전주 경기전과 영흥 준원전의 태조 어진만이 보전되었다. 아산으로 옮겨 보전되었던 경기전의 태조 어진은 다시 난이 있을 것에 대비해 강화를 거쳐 묘향산으로 옮겼다가 1614년(광해 6) 경기전을 중건한 후 봉안하였다. 묘향산에서 전주로 영정을 옮길 때 왕이 모화관으로 나가 맞이한 후 전작례를 올렸고, 승지와 중사가 한강까지 나가 전별하였다. 경기전 태조 어진은 병자호란 때에 적상산성으로 옮겨졌고, 난 후에 다시 전주에 안치되었다.
이후 서울의 태조 진전은 복구되지 못한 채로 있었다. 1677년(숙종 3) 남별전을 3실로 중건하였고, 1688년(숙종 14)에 전주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서울로 가져와 모사한 후 남별전의 남은 칸에 봉안하였다. 이모를 마친 후 경기전의 어진은 다시 신련(神輦)에 실어 환봉하였고, 태조 어진을 실었던 신련은 경기전에 그대로 보관하였다. 1764년(영조 40) 태조 어진의 뒷면에 손상된 곳이 많아 서명응(徐命膺)을 보내 배접하게 하였다. 1767년(영조 43) 전주성에 화재가 나 경기전 어진을 향교로 옮겼다가 다시 봉안하였다. 1771년(영조 47)에는 경기전 옆에 전주 이씨 시조묘를 세우고 ‘조경묘(肇慶廟)’라 하였다. 1872년(고종 9) 경기전에 봉안한 어진이 세월이 오래되어 희미해지자 서울로 옮겨 이모한 후 새 어진을 경기전에 봉안하고 옛 어진은 세초한 후 매안하였다. 1894년 동학군이 전주부를 습격하자 경기전 어진을 위봉산성 행궁으로 옮겼다가 다시 환안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경기전 의장과 기물들을 천자의 의식대로 고쳐 배열하였다. 1907년 제향 장소를 일제히 정리하는 칙령이 반포되었는데 영희전과 장녕전, 화령전, 육상궁, 경우궁, 선희궁 평락전 등에 봉안된 어진을 창덕궁 내 선원전으로 옮기도록 한 내용이었다. 경기전은 영흥의 준원전과 함께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선 말기까지 서울의 진전과 봉안각에 남아 있던 역대 왕들의 어진이 한국전쟁기에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1872년 마지막으로 옮겨 그려진 경기전의 태조 어진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전주 한옥마을 안내도.
전주시 관광명소.
태조로.
09 ; 56. 좌측길로 들어-2분 후 우측길로
경기전 담장을 끼고 들어가서 우측으로.
10 ; 01. 최명희 문학관.
최명희 문학관.
최명희 崔明姬( 1947년 10월 10일~ 1998년 12월 11일 ).
본관은 삭녕(朔寧).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전주 출생. 부친의 본향인 전북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 마을은 삭녕 최씨의 500년 세거지(世居地)로, 그의 대표작 「혼불」의 주 배경 마을이다. 전주풍남초등학교와 전주사범학교 병설중학교,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를 거쳐, 1972년 2월에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한 해 3월에 모교인 전주 기전여자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고, 1974년 3월에 서울 보성여자고등학교로 전근하였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s「쓰러지는 빛」이 당선되어 문단에 정식으로 나왔다. 1981년 ‘동아일보 창간 60주년기념 장편소설공모’에 「혼불」(제1부)이 당선되었다.
이후 보성여고 교사직을 사임하고 전업작가로 나서, 몇 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였고, 미완의 장편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전통문화』에 연재하다가 「혼불」 집필에 전념하기 위해 중단하였다. 1988년 9월 「혼불」 제2부를 월간 『신동아』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1995년 10월까지 계속하였다. 그런 가운데 1990년 12월에 「혼불」 제1부와 제2부를 네 권 분량으로 한길사에서 출간하였으며, 최종적으로 1996년 12월에 전 5부 10권으로 한길사에서 출간하였다.
「혼불」은 최종 출간 당시 집필 기간만 17년이 넘게 걸린 결과로서 작가의 투혼이 발휘된 작품이라 하여 높이 평가되었다. 그렇지만 그보다는 민속과 풍속 등 민족지적 정보를 발굴하여 세심하게 기술한 점,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극화한 점 등이 이 작품 특유의 미학으로 꼽혀 높이 평가되곤 한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모국어의 바다’를 이룰 꿈을 이 작품에 투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아, 단재상(문학부문) · 세종문화상 · 호암상(예술부문) · 여성동아대상 · 전북애향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전북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예술혼을 기리고 후원하려는 각계의 인사들이 모여 ‘작가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결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영예를 뒤로하고, 지병이 악화되어 1998년 12월 11일 영면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전주 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른 후 전주시 덕진동 소재 ‘최명희 문학공원’에 안장되었다. 위의 작품 외에도 「만종(晩鐘)」 · 「몌별(袂別)」 · 「정옥이」 · 「탈공(脫空)」 등 단편소설을 남겼다.
10 : 04. 부채문화관.
부채문화관.
부채문화관.
부채문화관.
부채문화관.
부채문화관.
부채문화관.
부채문화관.
부채문화관.
부채문화관.
10 ; 18. 교동미술관.
교동미술관.
교동미술관.
교동미술관.
10 ; 26. 좌측으로 꺾어간다.
10 : 30. 동학기념관. 앞엔 600년 은행나무. 되돌아 나간다.
600년 은행나무.
600년 은행나무.
동학기념관.
동학기념관.
동학기념관 2층 전시실. 백산봉기.
동학기념관 2층 전시실.
동학기념관 2층 전시실.
동학기념관 2층 전시실.손화중(좌).전봉준.손병희(우) 흉상.
동학기념관 2층 전시실.
우리 놀이터 마루달.
우리 놀이터 마루달.
10 ; 53. 한옥마을 역사관.
한옥마을 역사관.
한옥마을 역사관.
한옥마을 역사관.
한옥마을 역사관.
한옥마을 역사관.
11 : 05. 골목 안에 승광재. 되돌아 나가 사거리에서 좌측으로.
저 안쪽 끝 집이 황손의 집.
문은 빗장이 걸려있어 담 넘어로 본 황손의 집.
11 : 19. 태조로로 나와서 좌측으로.
태조로.
태조로.
PNB 빵집에서 빵 하나씩 사먹고
PNB 빵집에서 빵 하나씩 사먹고.
11 : 36. 공예품 전시관.
공예품 전시관.
공예품 전시관.
공예품 전시관.
11 : 46. 우측 산밑길로 들어갔는데 여기서 도로 따라 올라가 언덕 위 도로에서 오목대로 오르면 편하다.
11 : 52. 갈림길. 좌측 계단을 따라 쭈~욱 올라간다.
오목대가 있는 76.5m 정상까지는 오르막 계단이다.
11 : 58. 76.5m 정상의 오목대. 되돌아 내려갔는데 여기서 우측으로 내려가면 육교를 건너 이목대로 이어진다.
오목대(우)와 기념물 16호인 오목대 비.
한벽당과 전주향교의 북쪽 4차선 노변, 벼랑같이 솟은 언덕에 세워진 오목대는 고려 말 우왕 6년(1380년)에 이성계가 운봉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돌아가던 중 조상인 목조가 살았던 이 곳에 들러 승전을 자축한 곳으로, 그 후 고종 황제가 친필로 쓴 태조고황 제주필유지비를 세웠다. 여기서 육교를 건너서 이목대가 있는데, 천주교의 성지 치명자산이 있는 승암산 발치에 위치한다. 오목대에서 육교를 건너면 70m 위쪽으로 이목대가 있는데 건물이 있는 80m 아래쪽에 비석과 비각을 세웠다. 이 비 속에는 목조대왕 구거유지라 새겨져 있는데 고종 황제의 친필이다. 목조는 조선조를 건국한 이태조의 5대 조로, 목조가 어릴 때 이곳에서 진법놀이를 하면서 살았던 유적지로 알려져 있으며, 그러한 내용이 용비어천가에도 나타나 있다. 목조가 당시의 전주 부사와의 불화로 이곳에서 함경도로 옮겨간 것이 이성계로 하여금 조선조를 건국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으므로, 이를 하늘의 뜻이라고 여겼다 한다.
고려 우왕(禑王) 6년(1380) 금강으로 침입한 왜구가 퇴로를 찾아 남원으로 내려오자 이성계가 이들을 맞아 운봉(雲峰)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는 길에 오목대에서 개선 잔치를 베풀었다고 전한다. 여기에는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라는 제액(題額)을 쓴 비석이 세워져 있어서 조선 왕조를 일으킨 태조이성계(李成桂)를 기념하기 위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이 비는 1900년에 세워진 것으로 앞면의 제액은 고종이 직접 쓴 글씨이고, 뒷면의 글은 고종이 짓고 김영목(金永穆)이 쓴 것이다.
오목대의 맞은편에는 이목대가 있고 그곳에도 비석이 있는데, 고종의 글씨인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제액이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 태조의 5대조인 목조(穆祖)이안사(李安社)의 출생지로 전하여 오는 곳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李翰) 공 이후 목조에 이르기까지 누대에 걸쳐 이곳에서 살았으나 목조대에 이르러 관원과의 불화로 함경도로 이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비각(碑閣)은 원래 오목대의 동편 높은 대지 위에 있었으나 도로확장공사로 이곳에 옮겨 세웠다.
오목대.
오목대.
오목대에서 본 전주 한옥마을.
되돌아 내려간다.
12 : 06. 다시 내려온 갈림길. 좌측 산아래길을 따라간다. 중간에 이목대로 올라가는 길이 어딘지 모르겠다.
어성초.
전주동헌 가는길의 선비길.
전주동헌 가는길의 선비길 안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