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밀이란 저 언덕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언덕은 생사이고, 저 언덕은 열반이며, 그 중간 흐름은 번뇌이다.
波羅密是到彼岸. 此岸是生死, 彼岸是涅槃, 中流是煩惱.
비유하면 이 언덕은 무엇일까요? 이 언덕은 바로 생사윤회입니다. 한 호흡이 오지 않으면 내생은 무엇으로 변할지 당신은 모릅니다. 당신은 윤회하며 영원히 쉬지 않을 것입니다. 저 6도 중에서 인간세계는 이미 다들 느끼기를 신맛, 단맛, 쓴맛, 매운맛 등 세상의 온갖 고초 풍상이 맛이 아닙니다. 인간 세상은 그래도 선도(善道)입니다. 당신이 축생으로 변하면 인간보다도 더 괴롭습니다. 가장 흔히 보는 것이 돼지인데, 돼지는 그 자신이 살해당할 뿐만 아니라, 자자손손 모두 목이 잘려 죽고 고기는 다 먹히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습니다. 축생 아래에는 또 아귀가 있습니다. 배가 고프지 않은 아귀는 없으며, 무엇을 먹자마자 먹은 것은 곧 불로 변합니다. 왜 아귀에게 시식하여 천도를 돕는 일인 방염구(放焰口)를 해야 할까요? 염구(焰口)라는 두 글자는 어떻게 오게 되었을까요? 아귀는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기에 염구(焰口)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한 가지 밀법인데, 이 시식법을 닦는 것은 바로 그의 불을 꺼서 없앰으로써 아귀들에게 음식을 먹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으면 방염구를 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런 효용 때문입니다. 아귀 아래는 또 지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이 생사의 괴로움이 수레바퀴처럼 쉬지 않고 돌고 있는 것, 이것이 이 언덕[此岸]입니다.
피안(彼岸)은 바로 열반입니다. 열반은 바로 적멸(寂滅)이요 원적(圓寂)입니다. ‘원적’에서 ‘원’은 공덕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 없이 원만하기에 원(圓)이라고 합니다. ‘적(寂)’은, 장애가 남아 있지 않고 제거되지 않은 장애가 없어, 모든 장애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고요해졌습니다. 그것이 피안이며, 청정해졌습니다. 생멸이 이미 소멸하여서 적멸이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生滅滅已, 寂滅爲樂]. 이 언덕과 저 언덕 사이인 중간 흐름은 바로 번뇌입니다. 다음은 또 하 선생님의 원문입니다.
반야의 반면은 무명⋅어리석음이다. 반야가 본래 있는 것인 바에야, 왜 현재 당신은 무명인가?
般若的反面是無明、愚癡. 般若既是本有, 爲什麼當前是無明?
이 질문은 잘 물었습니다. 그것이 언어로 성립되자마자 그것과 상대적으로 대립하는 면이 있습니다. 반야와 상반되는 것은 바로 무명(無明)이요 어리석음[愚痴]인데, 무명은 바로 생사의 근본입니다. 그렇게 반야가 이미 본래 있는 것인 바에야, 왜 현재 당신은 무명입니까?
그런 까닭은, 깨달음을 등지고 6진에 합하면 무명이고, 식(識)을 전환하여 지혜를 이루면 반야이기 때문이다.
這是由于:背覺合塵即無明, 轉識成智即般若.
이것은 하 선생님 원래의 말씀인데, 매우 정련(精鍊)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깨달음[覺悟]을 등진 채 이 ‘진(塵)’을 따라갑니다. ‘진’은 무엇일까요? 흙먼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불교 명사로서, 색⋅성⋅향⋅미⋅촉⋅법이 모두 ‘진’입니다. 그래서 6진이라 합니다. 일체 보이는 색상들, 구별되는 음성, 맛보는 맛, 신체상의 감촉, 코가 맡는 냄새 등등, 의식이 생각하여 분별하는 갖가지 옳고 그름, 이 모두를 ‘진’이라 합니다. 당신이 본래 있는 반야를 위배하고, 아름다운 색⋅아름다운 소리⋅아름다운 맛을 좇고 그것을 향해 추구하고 애착하면, 이것을 배각합진(背覺合塵)이라 합니다. 6진과 서로 합하고 깨달음과는 서로 등지니, 이것이 바로 무명입니다.
그렇다면 왜 본래 반야인데 현재는 무명일까요? 그것은 바로 지금 당신이 곳곳에서 깨달음을 등지고 6진에 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이렇게 되어버렸는데 어떻게 본래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전식성지(轉識成智)’, 식(識)을 지혜로 전환하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8식이 있는데, 안⋅이⋅비⋅설⋅신⋅의는 모두 전6식이고, 제7식은 말나식이며, 제8식은 아뢰야식입니다. 이 8식을 전변(轉變)하여 4지(四智)를 이룸이 바로 반야입니다. 그러므로 반야가 있어야, 이 8식으로 하여금 전변을 얻게 할 수 있습니다. 이 전변이 바로 반야입니다. 다음은 또 하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도량에 참가할 수 있음은 모두 다생의 인연이다. 선근⋅복덕⋅인연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모두 이 도량에 참가할 수 없다. 이는 진실로 백천만겁에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
能參加今日道塲皆多生因緣. 善根、福德、因緣缺一皆不能參加此道場. 此真百千萬劫難遭遇者也.
오늘 도량에 참가할 수 있음은 모두 여러 생의 인연입니다! 선근⋅복덕⋅인연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참가할 수 없습니다. 이 도량은 정말 백천만겁에도 만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디 말씀은 오늘 우리의 이 모임에도 적용됩니다. 이 도량에 참가할 수 있음은 모두 다생의 인연입니다. 그러니까 아마 어떤 사람은 단지 여기 일을 좀 도와주러 와서 약간의 일을 하는 것이지, 불교도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귀로 한두 마디를 들을 수 있는 것조차도 간단한 일이 아니어서, 선근⋅복덕⋅인연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모두 참가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일들에는 장애가 있습니다. 보세요, 오늘 이 자동차가 장애가 될 뻔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은 하기 어렵고, 다른 일은 모두 하기 쉬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도량 하나를 창립해서 불법을 좀 선양하고 발전시키고자[弘揚] 하는, 이런 일을 하기는 대단히 어렵고도 어렵습니다. 당신이 하나라도 부족하면 당신은 전혀 참가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언제 장애를 일으킬지 모릅니다. 자기 자신이나 아니면 무엇이……. 그래서 이 도량에 참가할 수 있는 것은 정말 백 겁, 천 겁, 만 겁에도 만나기 어려운 것입니다.
‘겁(劫)’은 시간의 단위로 시간을 대표합니다. 1겁의 시간이 얼마나 긴지, 그 ‘수(數)’를 말하기 어렵고, 명확하게 말할 수 없으며. 다 말할 수도 없습니다. 당신이 만(萬)을 말하고 억(億)을 말하려면, 당신은 몇 억 동안을 말해야 해서, 당신은 말을 해도 해도 다 말하지 못합니다. 단지 이런 비유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사방의 길이가 40 리인 긴 돌덩이 하나를, 천인이 지극히 가볍고 얇은 천을 입고 5백 년에 한 번씩 내려와 그 천으로 돌덩이를 이렇게 한 번 가볍게 문질러서, 마침내 그 돌덩이가 문질려 완전히 없어지기까지의 그 많은 시간을 ‘1겁’이라 합니다. 그러기에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삼악도에 한 번 업보를 받으면 5천 겁 동안이다 [三途一報五千劫].” 여러분이 이 말을 들으면 그저 소홀히 하고 당신은 모르는데, 당신이 삼악도에 들어간 뒤에 일단 이 과보를 받고 이 과보를 벗어나고자 하면 당신은 얼마나 걸릴까요? 당신은 5천겁을 지나야 합니다! 겁이 얼마나 긴 시간입니까!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백천만겁에도 만나기 어렵습니다 [百千萬劫難遭遇]. 여러분은 만나기 어려운 것을 만날 수 있었으니, 반드시 이 기회를 잡아 금생에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오늘 만날 수 있음은 당신이 과거 다생 다겁 동안에 걸쳐 닦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참 동안 닦았어도 금생이 여전히 그저 이 모양인데, 당신이 다시 이렇게 굴러가면 어느 날까지 굴러가서야 비로소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결심해서 이 일생에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