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대간 5구간(고촌마을-매요마을)
1. 산이름 : 수정봉, 고남산
2. 소재지 : 전북 남원시
3. 산행 코스 : 정령치모텔(고기리) ←(2.0km)→ 노치샘 ←(1.8km)→ 수정봉 ←(1.2km)→입망치 ←(0.92km)→ 700봉 ←(2.3km)→ 여원재 ←(1.5km)→ 561.8봉 ← (3.6km) → 고남산 ←(3.5km)→ 573.2봉 ←(1.3km)→ 매요휴게소(유치재)
4. 산행 거리 및 소요시간 : 15.66Km(5시간 13분) = 주촌리~ 통안재(13.94km, 4시간 53분) + 통안재~ 권포리 접속구간(1.72km, 20분)주촌리(주촌1제, 11:12) → 1.22km → 노치마을(11:26) → 1.94km → 수정봉(12:06) → 1.27km → 입망치(12:27) → 3.17km → 여원재(13:33) → 5.33km → 고남산(15:40) → 1.01km → 통안재(16:05) → 1.72km → 권포리(권포회관, 16:25)
5. 산행 인증 : 수정봉, 여원재, 고남산 인증
6. 산행 안내 : 고촌숙박-노치마을-산행-매요마을도착- 버스-남원 숙박
○ 교통 : 88고속도로 지리산 휴게소 동쪽(10분 거리) 아곡 마을-남원간 시내버스 이용하거나, 인월 택시(063-636-2162)를 이용 인월에서 직행버스편으로 남원, 함양 연결아곡-남원 : 07:50, 11:00, 14:40, 16:45남원-아곡 : 08:10, 11:40, 14:50, 16:05, 20:40
고촌(노치)마을-매요마을 구간
모텔에서 숙박하고 노치마을에서 출발하여 안내표시를 따라 여원재까지 가기로 하니 시간이 갑자기 많이 남았다. 대간의 유일한 마을인 노치마을로 간다.
노치마을 표지석 뒤로 보이는 수정봉을 보며 사진 한 장 찍고는 백두대간이 지나는 노치마을의 백두대간 기념비가 있는 노치쉼터에서 또 한참을 쉰다. 오아시스처럼 반가운 샘인 노치샘은 한 우물을 먹으며 대간 종주자들끼리의 연대감을 새삼 느끼게 하는 곳이다.
물맛이 좋아 일단 물통에 담는다. 나는 수정봉을 경유하여 여원재로, 백두대간은 마을 가운데를 지나 당산 소나무가 있는 곳을 오른 뒤 수정봉으로 이어진다.
노치샘에서부터 대간 길은 수정봉을 향해 고도를 높이면 곧바로 노치 마을의 당산 소나무를 만난다. 아름이 넘는 건강한 육송인데도 바위틈에 뿌리내린 소나무처럼 운치 있게 휘어져 있다.
소나무 앞에서 잠시 몸을 돌려세워 평화로운 노치마을을 바라보고, 저 멀리 운무에 의해 시야가 흐린 만복대에서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의 줄기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수정봉으로 가는 약 500m의 된비알을 맛보며 게으른 황소처럼 느릿느릿 오른다. 구룡폭포갈림길에서 부터는 수정봉으로 가는 길은 고도차가 거의 없어 힘들이지 않는다.
시간의 여유가 많아 조금 느리게 덕운봉을 지나 오묘한 모습을 하고 있는 고인돌바위를 만났다. 자연의 조화란 참으로 신통방통하다. 수정봉으로 가는 올망졸망한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이 길의 운치가 보통이 아니다.
끝없이 소나무 숲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진한 솔향을 맡으며 예전에 산에 수정 광산이 있었다 하여 이름이 붙여진 수정봉(水晶峰)에 올랐다.
경남에서 오신 산객들이 점령해버린 수정봉.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연상할 만큼 술판을 벌이고 있는 그들 사이를 나와 고도를 끝없이 내리면 동쪽의 운봉읍 행정리 갓바래 마을과 서쪽 이백면 과립리 입촌 마을을 넘나드는 고갯길인 입망치(笠望峙)를 지난다. 입망치에서 갓바래봉까지 또다시 고도를 한껏 높인다.
갓바래봉까지는 된비알이라 숨이 목까지 차오름을 느낀다. 다행스러운 것은 소나무 향이 진하여 기분을 좋게 하는가 하면 오름이 힘들어 뒤를 돌아보면 수정봉과 덕운봉이 실체를 확인하며 기를 북돋울 수 있음이 다행스럽다.
조금 힘들게 갓바래봉에 오르니 정상의 이름을 모르고 지나갈 뻔 했는데, 비록 맞춤법은 틀리게 표현하고 있었으나 봉우리 이름과 대간의 방향을 표시하고 있어 대간꾼들의 편의를 위한 마음만은 고맙다.
지금부터 여원재까지는 내림 길이라 크게 힘들이지 않고 산행을 즐길 수 있게 한다.
여원재 1.0km 전에 임도와 만나고, 다시 숲으로 들어가자 말자 또다시 임도를 건너 숲으로 들어간다. 날머리가 가까워지자 대간꾼의 쉼터인 민박집 안내와 함께 막걸리를 먹을 수 있는 곳을 안내하고 있다.
여원재 0.24km를 나타내고 있는 이정표에서 부터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이동하다보면 민박집을 만난다. 차후에 대간을 하며 민박을 이용해야하기 때문에 나에겐 소중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숲 사이로 다음 구간에 갈 고남산의 중계탑이 눈에 들어오는가 싶더니 24번국도 상에 세워진 돌벅수 ‘운성대장군’ 보였다.
왜구의 손찌검으로부터 몸을 지키고 자결한 주모의 원신이 금방이라도 환생할 것 같은 고개마루에 앉아 오가는 차를 바라보며 여원재의 고개 이름의 역사와 오늘날까지도 주민들에게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한다. 역시 여원재엔 지리산 동학민중항쟁의 마지막 전투 장소가 되었기에 ‘농학농민혁명유적지’가 세워져 있다.
수정봉을 내려서 임도와 능선을 오가던 백두대간의 길이 다시 아스팔트를 만나운봉과 남원을 잇는 여원재에서 ‘운성대장군’이란 이름을 단 돌장승이 외롭게 분주한 자동차 흐름을 바라보며 서 있어 나도 한동안 도로를 보며 돌장승처럼 그의 혼이 되어 본다.
이성계가 승전을 다짐한 고남산을 향하여 지난번에 봐두었던 여원재에서 이어지는 산속으로 들어서니 산은 소나무로 가득하다. 솔 향을 맡으며 솔잎이 바닥에 깔려있어 걷는 길이 편안하다.
조금 지나서 연재마을이 가까워서 그런지 개 짖는 소리가 계속 이어진다. 마을길로 들어서서 리본을 찾아 직진하다가 왼쪽으로 시멘트 길을 올라가니 여원재 0.4km, 고남산 5.0km라는 이정표가 한여름의 더위 때문인지 누워서 산객을 맞는다.
고개에서 다시 오른쪽 산길로 들어섰다. 묘가 있는 곳에서 3시 방향으로 내리막길이 이어지더니 이내 소나무 숲 사이로 편안한 대간이 계속 된다. 몇 번의 봉우리를 지나가는 길이지만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여원재에서부터 계속 소나무 숲이라 길은 참으로 편했다. 785봉을 넘어 내리막길과 평탄한 길이 계속 이어지더니 다시 오르막길이 한참이다. 그러던 중 느닷없이 밧줄이 눈앞에 나타났다. 오르는 길이 가파르기 때문에 밧줄을 매어 놓았으나 거리는 짧다.
약간 힘들게 올라가니 정상이 아니다 다시 봉우리가 보인다. 평지를 조금 가다 봉우리를 올라서니 기지국이 꼭대기에 설치되어 있고 그 옆에 고남산 847m라는 팻말과 함께 이정표가 있었다.
이정표를 지나 조금 아랫 쪽에 고남산 정상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어 배낭을 벗어놓고 인증을 하고, 그 아래쪽에 KT송신소가 자리하고 있는 송신탑을 둘러서 나무계단으로 내려오면 송신소 건물로 가는 시멘트 도로가 나온다. 도로를 따라 조금 올라오니 진입로를 알리는 리본들이 매여 있다. 리본을 따라 진입로를 조금 걸어 내려오니 다시 시멘트길이 나온다. 아랫마을에서 송신소까지 구불구불 올라가는 길로 조금 전 만났던 길과 같은 길이다.
시멘트 길을 따라 50여 미터 내려오면 구부러지는 곳에서 다시 등산 진입로가 나온다. 이 부근이 통안재라고 한단다. 산길은 계속 소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산등성이를 따라 계속 가는 길은 평지 같았다. 완만하게 내려가는 길이다.
중간에는 벌목을 하느라 임도를 낸 곳도 있었으며 저수지도 보이고 벌목으로 산등성이 길도 훼손된 곳도 있었다. 유치재를 찾았으나 어디가 유치재인지 정확히는 모르며 산행을 이어간다. 왼쪽으로는 시원스러운 고속도로가 보이는가 싶더니 능선을 조금 더 내려가니 마을을 있는 시멘트 도로가 나온다.
고남산 4.4km, 사치재 3.2km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매요리(梅要里) 마을 입구다.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마을로 들어서니 백구가 목숨을 걸고 짖는다. 백구입장에서는 이방인의 출현이 반갑지 않겠으나, 나로서는 움직이는 생명체를 보니 반갑다는 생각을 하며 매요마을회관에서 물통에 물을 채우고 뜨거운 몸을 식히고 백두대간에 터를 잡은 매요마을은 사치재 오르는 길까지 도로가 접해있어 한동안 뜨거운 열기를 느끼며 가야한다.
나무 앞에서 보니가건물처럼 보이는 작은 규모의 매요휴게소가 안쪽으로 보였다. 매요휴게소에서 남원가는 버스를 타고 모텔에서 숙박을 하였다.
노치마을 (蘆峙, 웃새목, 上鳥項, 아랫새목, 下鳥項, 동화석)
노치리(蘆峙里)의 지명은 노경(蘆頃, 갈갱이) 마을의 노(蘆)자와 송치(松峙, 솔치)마을의 치(峙)자를 각각 취하여 노치리라 하였다. 노치리는 노경(蘆頃, 갈갱이)마을, 송치(松峙, 솔치) 마을, 수단(水丹)마을, 상조항(上鳥項, 웃새목), 하조항(下鳥項, 아랫새목), 동화리(冬花里, 동화석굴) 등 6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6.25 동란으로 솔치, 웃새목, 동화석굴, 수단마을은 폐촌되고 현재 아랫새목(下鳥項=노치)과 갈갱이(蘆頃) 마을만 남아 있다.
조항마을은 원래 새목이라 부르는데 그 뜻은 마을 형태가 새의 목처럼 잘록하다 하여 이렇게 불렀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조항이라 하였다.
동화석굴의 뜻은 겨울에도 따뜻해 꽃이 핀다고 하여 이렇게 부르고 있다.
노치마을의 뜻은 갈경마을(蘆) 과 솔치마을(峙) 의 이름자를 한개씩 취하여 만들어진 이름으로 이제는 새목을 보통 노치마을이라 부른다. 마을을 세분하면 새목, 동화석굴, 하누바위거리로 구분된다.
1789년 호구총수에는 동복현 내북면(內北面) 조항리(鳥項里)로 기록되어 있고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동복군 내북면(內北面) 조항리(鳥項里)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당시 화순군 내북면 노치리(蘆峙里) (조항리, 노경리, 송치리)로 편입되고 1932년 행정구역개편때 내북면과 외북면을 합하여 북면으로 칭하면서 화순군 북면 노치리로 되었다.
1개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록에 보면 갈갱이 마을을 노항리(蘆項里) 또는 노경리(蘆頃里) 로 표기하고 있는데 1917년의 지도상에 표기된 노경리(蘆頃里) 가 옳게 표기된 것이다.
수정봉(水晶峰)
높이 804.7m이다.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행정리, 주천면 덕치리, 이백면 효기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맥을 잇고 있다. 남원 지역의 백두대간은 대략 만복대~정령치~고리봉~가재~수정봉~입망치~여원치~고남산으로 이어진다.
옛날에 산에 수정 광산이 있었다 하여 수정봉(水晶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산의 9부 능선을 둘러싸고 삼국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테뫼식 산성인 노치산성(蘆峙山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주천면 호경리에 있는 육모정(六茅亭)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하면 구룡폭포와 구룡계곡을 거쳐 정상에 닿을 수 있다.
여원재
남원에서 24번 국도를 타고 운봉읍으로 가다보면 여원치(여원재)를 넘는다. 해발 477m의 여원치는 그 이름의 유래가 깊다. 교통이 불편하던 옛날, 남원과 운봉, 함양을 오가는 길손이라면 반드시 거쳐야했던 이 고개의 유래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던 때 이곳 운봉현까지 왜구의 침략이 잦았다. 고개마루 주변 주막집을 들락거리던 왜구무리들은 주모에게 손찌검을 했다. 이에 주모는 날이 시퍼런 칼로 왜구의 손을 탄 왼쪽 가슴을 잘라내고 자결한다. 한편으로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운봉에 당도한 이성계는 꿈자리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파로부터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날짜와 전략을 계시받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이성계는 꿈에 나타난 이 노파가 왜구의 손찌검으로부터 몸을 지키고 자결한 주모의 원신이라고 믿고, 고개마루 암벽에 여상을 암각한 다음 주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사당을 지어 여원이라고 불렀다. 이런 사연으로 여원치라는 명칭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현지 주민들은 이 여원치를 연재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필시 여원의 이름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렇듯 이 고개 이름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 됐으며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남원에서 운봉을 향하다 여원치 정상 바로 못 미쳐 한 굽이 휘돌다 우측의 옛도로 수풀사이에 발을 디디면 남원분지의 너른 들판과 지리산 시루봉을 비롯해 서쪽으로 장쾌하게 펼쳐진 산군들을 만나볼 수 있다. 여원재에서 바라보는 일몰, 즉 여원낙조는 운봉팔경 중 하나로 손꼽힐 만큼 아름답다. 등산동호인이나 문화유산 답사 애호가들은 지리산 연봉을 한눈에 감상하기 좋은 곳이 바로 이곳 여원치라고 대답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고갯마루를 지키고 있는 운봉대장군 석물상을 지나치면 들녁 끝에 지리산 산줄기에서 뻗어 나온 부운치와 팔랑치, 바래봉의 장엄한 능선이 펼쳐진다. 바래봉은 봄철 철쭉 군락지로도 유명하다.
한편 운봉읍은 목기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24번 국도 주변에는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여러 개의 목기공장과 전시장이 길손의 눈길을 끈다. 운봉이라는 고장은 목기 외에도 동편제라는 소리가 자랑인 곳이기도하다. 인월로 향하는 비전마을에는 송흥록에서 송만갑, 근대에 와서는 명창 박소월로 이어지는 동편제를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곤 한다. 여원재 고개의 사연과 풍경을 감상한 후 지리산 단풍비경을 만나려면 운봉읍 주촌리에서 시작, 정령치를 넘는 산록도로를 찾아가 보도록 한다. 정령치 고개를 넘어 만복대와 반야봉 사이 지리산 관통도로 삼거리에 이르면 북동쪽으로 실상사, 남서쪽으로 노고단 성삼재와 시암재를 거쳐 천은사로 가게 된다.
농학농민혁명유적지
지리산은 동학민중항쟁의 마지막 전투 장소가 되었고, 현대에 접어들어 여순사건에서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치열한 격전으로 수만의 목숨이 산화한 곳입니다. 지리산은 동전의 양면처럼 때론 생활의 터전과 피난지로, 다른 한편으론 치열한 싸움터로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수정봉을 내려서 임도와 능선을 오가던 백두대간의 길이 다시 아스팔트를 만나 주춤거린다. 운봉과 남원을 잇는 여원치에서 ‘운성대장군’이란 이름을 단 돌장승이 외롭게 분주한 자동차 흐름을 바라보며 서 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은 잦았다. 규모가 큰 왜구들은 남해로 상륙해 강을 따라 올라와 운봉을 지나 전라도 곡창지대로 향했다. 왜구는 여원치에서 주막으로 생계를 잇는 여인을 희롱했다. 여인은 왜구의 손길이 닿은 가슴을 스스로 도려내고 죽음을 택했다. 여인은 후일 산신으로 부활해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성계를 도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 데 힘을 보태기도 했단다. 고갯길이 여원치라는 이름을 갖게 된 내력이다.
고남산(古南山)
높이 846.8m이다. 가재~수정봉~고남산~여원치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산으로,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북서쪽에 산동면과 경계를 이루며 솟아 있다. 정상에 서면 운봉분지와 산동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려 말에 태조 이성계가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도착하여 제단을 쌓고 나서 산신제를 올리고 대승을 거두었다고 하여 '태조봉' 또는 '제왕봉'이라고 불린다.
산은 돔(dome) 형태로, 중생대의 대보화강암인 조립질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사가 급하고 곳곳에 바위 덩어리들이 솟아 있지만, 정상부에는 풍화층(바위가 풍화 작용에 의하여 부스러져 이루어진 지층)이 형성되어 약간 평탄한 편이다. 산 정상부에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남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동쪽으로는 운봉천과 남천(람천)이 되어 경호강을 통해 낙동강으로 빠져나가고, 북서쪽으로는 요천(蓼川)을 이루며 섬진강에 합류한다.
매요리(梅要里)는 지세가 말의 형국을 닮았다 하여 ‘말 마(馬)’자와 ‘허리 요(腰)’자를 합하여 마요리(馬腰里)라 칭하게 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정유재란이 7년 만에 끝나자 고승 사명당(유정(惟政))이 산천을 두루 유람하다가 마요리에 당도하였다.
사명당은 매화의 꿋꿋한 정기가 감도는 것을 보고, 이 마을 사람들은 매화같이 선량할 것이니 지형과 인심에 맞게 매요리(梅要里)로 고치는 것이 합당하다 하여, 그 후부터 매요리로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