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종수 시인이 10년 만에 내놓는 두 번째 시집이다. 첫 시집「자작나무 눈처럼」에서 보여주었던 삶의 본질적인 측면을 좀 더 심화시켜 소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설화적 상상으로 구체화시키며 그들의 생애에 빛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타자와 생명이 있는 존재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그들 사이의 동질성을 발견하도록 이끌고 있다.
저자 소개
저자 : 이종수
저자 이종수는 1966년 전남 벌교에서 태어나 청주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장닭공화국」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월간 엽서시를 발간하며 작은도서관 참도깨비와 흥덕문화의집 관장으로 일하고 있다. 시집 『자작나무 눈처럼』과 산문집 『요놈이 커서 무엇이 될꼬』를 펴냈다.
목차
제1부
작은 새
기린(麒麟) 85호
집
늙은 개
달함지
담배꽃 핀다
유목(遊牧)
빈집
책갈피
참나리
화양(華陽)
개 약초꾼
가은 장날
제2부
친구
새를 본다
개구리 없는 봄
국숫집
메주 만드는 날
야동
길
달력
문살
거미
꼬막
콩타작
콩타작
외갓집 가는 길
박새점이나 쳐볼까
눈물로 해를 서산에 넘겼다 ─ 박정옥(朴貞玉) 일기
제3부
땀귀걸이
사람 많다
2인실
탁발 ─ 물봉선
복화술
자폭 시집
꽃 꽃 꽃
탁발
오소리와 함께 산길을
명자꽃
밀고 당기는 시집
쌍놈의 새끼
복개(覆蓋)
오래된 집
은행에서
늙은 개
열두 고개
제4부
선암사 두꺼비
쥐꼬리를 잡고
멸
탱자 울타리
호랑가시나무가 있는
용산에서 본다
밤하늘을 걸어서
처녀로 돌아가시다
모기는 안다, 새빨간 거짓말 같은
숨바꼭질
우럭매운탕
백수 ─ 귀양간다
돌오줌
단풍
탁발
부론(富論) 가는 길
달리는 막장
해설 혼융과 유목과 설화적 상상으로 초극하기-조해옥
출판사 서평
시세계 이종수 시인의 새 시집「달함지」에서 인상적인 시편들은 소박한 사람들과 작은 존재들의 이야기를 설화적 상상으로 그려낸 작품들이다. 어머니, 국숫집에서 만난 사람들, 시장 사람들, 오지그릇 같은 사람들, 식당의 할아버지들, 다방 아가씨, 떡장수, 노동자, 아들을 셋이나 낳고도 호적에 오르지 못한 채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시인의 시는 서사적 장르의 주요 요소인 이야기성을 적절하게 수용한 예라고 말할 수 있다. 소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로 재현할 때, 그는 신산한 삶을 견뎌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에 대해 시적 사유를 집중시킨다. 대학교 다닐 때 써클실마다 떡 팔러 올라오던 아주머니 아직도 떡 팔고 있다 김밥말이 인절미 절편 튀김 담긴 고무대야를 내려놓으며 떨이떡이니 팔아달란다 아니 할머니가 다되어 등장할 대목이 아닌데 누가 쓴 쪽대본일까 떡 팔아 빌딩 몇 개는 샀다는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 줄 알면서도 괜히 믿고 싶어진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르내렸던 언덕길만 해도 지구 몇 바퀴는 되었을 텐데 간간히 오리배 타는 유원지에도 나타나곤 했던 신출귀몰한 떡들은 왜 아직도 생계형 떡으로 달라붙어 있을까 아직도 밖으로 내모는 떡의 자식들 돈 없어 못 사먹던 그때나 있어도 안 먹는 지금이나 떡은 마천루를 짓고도 남을 이문 없는 일이거나 늘 꼭대기나 벼랑에 부리고 돌아가는 저것을 달함지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달함지」전문 위의 시에서 화자는 떡장수 아주머니에게서 이 세상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함을 발견한다. 그녀는 매일 쉬지 않고 부지런히 떡을 팔았으므로 그녀가 할머니가 된 지금, 그녀는 떡함지를 머리에서 내려놓아야 세상 이치에 맞을 것이다. 따라서 떡함지를 이고 다니는 생활을 할머니가 되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의 삶은 화자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떡함지를 신비로운 달함지로 바꾸어서 바라본다. 그래야만 변함없이 고단한 생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여자의 생을 납득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화자가 “떡 팔아 빌딩 몇 개는 샀다는/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 줄 알면서도/괜히 믿고 싶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설화가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현실에서 이루어지기 힘든 우리의 바람이 우리를 설화적 세계로 이끌고 간다. 불가능한 꿈들이 실현되는 설화적 상상이 우리의 삶에서 결여된 부분, 그 빈틈을 메운다. 기린은 사슴 몸에, 소 꼬리, 말발굽과 갈기를 단 사후세계의 수호자이자 천 년을 산다는 덕의 화신 더러운 것은 입에 대지도 않으며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 밟지 않으려 겅중겅중 허방걸음을 딛는 상상 속의 동물이었다가 망할 놈의 자본과 결탁(상상하라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슬로건에 포획된)하여 마천루를 낳는 매판이 되었다 그나마 환속한 굴뚝도사 기질을 어쩌지 못해 구름이나 먹고 산다고 알려졌지만 건초 더미보다 못한 생계에 식구통 같은 눈, 핌프의 형상이지만 국기봉 같은 이념의 뿔 때문에 몇 켤레의 나사와 볼트로 남는 노동자들은 망루를 오르듯 노동의 깃발을 달 수밖에 없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상상 속의 대방광전(大方廣殿)이 되었다 벼랑에 몰린다는 말도 이제는 저 85호 기린에 오른다고 해야 맞는 말이다 기린이 생계형 굴뚝이 되고 덕의 화신으로 돌아오는 날을 위하여 저 하늘 꼭대기에서 상상을 끌어내리는 사람들이여 -「기린(麒麟) 85호」전문 기린은 용이나 봉황처럼 성스러운 의미를 갖는 상상의 동물이다. 이종수 시인은 위의 시에서 신비로운 동물인 기린과 85호를 결합시켜 놓는다. 85호는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에 맞서서 크레인 위에서 항의 농성을 한 김진숙 지도위원과 해고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연상하게 한다. “벼랑에 몰린” 노동자들이 기어오르는 크레인의 망루는 기린이라는 상상 속의 세상과는 너무나 현격한 간격을 갖는다. 이처럼 기린의 상상과 절박한 생계의 망루 위로 내몰린 노동자의 현실은 극단적으로 충돌하지만, 그 간격을 연결시켜주는 것은 노동자들의 꿈이다. 다시 일하기 위해 망루를 오르는 그들은 꿈이 있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는다. 망루가 다시 “생계형 굴뚝이 되고/덕의 화신으로 돌아오는 날을” 꿈꾸는 노동자들의 희망 속에서 강철로 된 크레인은 성스러운 동물인 기린과 다르지 않다. 추천의 글
이종수 시편에는 여전히 “하루하루 어금니 꽉 물고 살아낸 사람들”(「달력」)의 고단한 삶이 빈도 높게 등장한다. 그는 보잘것없는 작은 존재자들의 삶을 투시하면서 오늘도 이종수 식 만인보(萬人譜)를 아름답게 펼쳐낸다. 그 목록에는 참나리꽃 같은 사람들, 오소리나 햄스터 혹은 배추흰나비애벌레 같은 작은 생명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백석 시편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생명을 향한 지극한 연민은, 때로는 지구 밖까지 걸어가버릴 것 같고 때로는 흐릿한 골목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은 가녀린 존재자들에 대한 가없는 사랑으로 차차 번져간다. 그 연민과 사랑이 시인의 시선으로 하여금 “자본의 심장 위에 떠가는 별”(「용산에서 본다」)처럼 망루를 오르는 “몇 켤레의 나사와 볼트로 남는 노동자들”(「기린 85호」)에게까지 향하게 하는 근원적 힘이 된다. 이는 우리 주변과 외곽에 대한 그의 애정 어린 집착과 표현이 오랜 사회적 상상력에 의해 단련된 것임을 알려준다. 한편으로 “책날개를 퍼덕이며 새가 되는 꿈”(「자폭 시집」)을 꾸는 이 시인의 처처전진한 마음이 “괜시리 눈물이 자글자글”(「돌오줌」)할 만큼 애잔하고 아름답게 전해져오지 않는가. -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단 한 편의 시도 겉말이 없는 맑은 시집이다. 과연, 제 안을 식힐 줄 아는 시인의 시집답다. 시인이 십 년 동안이나 고행하듯 숨죽여 지고 온 『달함지』에는 그간 우리가 내려놓기 바빴던 이야기와 거들떠보지도 않던 풍경이 귀하게 담겨져 있다. 무엇보다 삶이 곧 시이고 시가 곧 삶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주고 있다. 여러 번 다시 읽어도 읽을 때마다 “괜시리 눈물이 자글자글 깨 쏟아지듯”(「돌오줌」) 나오는 아름다운 시집이다. 이대로 백년 천년 흘러도 좋겠다. - 박성우(시인, 우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