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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카페 게시글
▣ 안동문화 스크랩 송재 이우선생
혜명 추천 0 조회 140 11.06.01 01: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송재(松齋) 이우(李?, 1469∼1517)는 1498년(연산군4) 생원으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봉된 후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다. 이 초상화는 공신도상(功臣圖像)으로써 안동시 종가내(宗家內)에 봉안되어있던 것이다. 바닥에 깔린 채전과 족좌대(足座臺)를 묘사하는 방식이 이전의 초상화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요소이며, 신체의 윤곽선이 부드럽고 옷 주름선이 각지게 처리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단령의 짙푸른 색은 후대에 가채(加彩)한 것으로 보인다.
[작자미상, 16세기 축(軸), 견본채색(絹本彩色), 170.0×104.

 

 

 

 

 

墓碣識(조카 滉이 울면서 쓴 묘갈지)

 

숙부 참판부군은 성이 이씨요, 그 선조가 진보로부터 왜구를 피하여 안동에 이사하셨다. 高祖의 휘는 자수子脩이신데 고려 말을 당하여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지셨으며 관官이 판전의사사判典儀寺事에 이르셨다. 曾祖는 휘가 운후云侯이신데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으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증직 받으셨다. 祖는 휘가 정禎이신데 일찍이 영변 판관이 되어 모린위 정벌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선산부사善山府使로 벼슬을 마치셨으며,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증직되셨다. 考는 휘가 계양繼陽이시고 성균진사로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 兵曹參判이 증직되셨다. 참판은 영양김씨 부사직 유용의 따님에게 장가드시고 또 예안현의 온계리로 이사하셨다. 부군府君은 성화 기축 4월 2일에 나셨다. 젊어서 글 읽기를 좋아하시고 글을 잘 지으셨으며, 우리 아버지와는 금 같은 형이요, 옥 같은 아우로서 壎(질로 구워 만든 악기의 한 가지)과 지(관악기에 딸린 저의 한 가지. 오래 묵은 대통에 다섯 구멍을 뚫어서 만듦)의 합주처럼 형제간의 우애가 좋아서 명성이 함께 성해서 영남의 뛰어난 선비들이 다 추천하여 앞세웠다. 임자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시고, 무오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뽑히시고 기미년 예문관 검열檢閱로 옮기시어 대교待敎 봉교奉敎를 지내셨으며, 신유년 가을에 성균관 전적典籍에 오르시고, 8월에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시고, 겨울에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셨으며, 갑자년 봄에 올라서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시고, 곧 이어 병조정랑지제교兵曹正郞知製敎로 옮기시고, 을축년에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셨다가 칠월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主官을 겸하셨으며, 이어 봉상시첨정봉상시첨정에 옮기시고, 9월에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시고, 나머지는 전과 같으며, 병인년 여름에 군기시 부정으로 옮기시고, 7월에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지제교 겸 춘추관 수찬관에 오르시고, 9월에 중종 즉위 때 녹공錄功으로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이 되시고,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지셨으며, 가선대부의 품자에 오르시와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이 되셨다. 조정 의론이 승정원의 상품관인데 지금 승지의 관계가 모두 가선대부니 부당하다고 말하고, 부군 또한 봉군이 바뀌었다. 겨울에 어버이가 늙었으므로 외직을 빌어 청하여 진주목사가 되셨다. 이  때에 백성들은 물에 빠지고 불에 타는듯한 괴로움에서 나와서 어진 정치를 바라는 것이,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과 같았다. 부군께서는 행정을 맑고 간명하게 하시고 힘써서 백성들에게 휴양토록 하시니 범죄가 줄고 백성을 무마하고 사랑하신 은혜를 믿고 도와 두루하니 백성들이 부모와 같이 사랑했다. 임금님은 특별히 겉옷 안옷을 내리시고 포상하셨다. 기사년에 조정에 들어와서 동지중추부사가 되시고, 얼마 안 되어 호조 참판 겸 도총부 부총관이 되시었다. 경오년 여름에 형조 참판에 전임되시고 겨울에 나가서 강원도 관찰사가 되시었다. 신미년에 임기가 다 되어 군에 봉해지셨다. 임신년에 어버이가 늙었으므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오시어 곧 이어 병으로 집에 돌아오시어 밖에 나가지 아니하셨다. 영해 김해의 두 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다 부임하지 않으셨다. 갑술년 봄에 대간이 논하여 정국靖國하던 날 승지들은 공이 없고 허물이 있다하여 훈자勳資를 지우기를 청하니 이에 따랐다. 대개 이날 밤에 변이 났다는 말을 듣고 숙직하던 승지는 당연히 나가서 무슨 변인가를 정탐해야 할 것이나, 동료 승지들이 밖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부군에게 미루고 부군께서는 하는 수 없이 나가셨는데, 이미 나가시자 궁성 안과 밖은 떨어져 막혀서 다시 들어가실 연분이 없는데 대의는 이미 결정되어 대신이 자전慈殿에 품하여 대명을 받들자면 승지가 없어서는 안 되며, 드디어 이와 함께 동조東朝에 가서 새 임금을 받드는 의거에 힘을 보태셨다. 그 때 사람들이 그 사유를 분별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주워 모아 말을 꾸몄다. 부군께서는 본래 항상 뜻밖의 공을 수치로 생각하셨는데, 이에 이르러 마음이 처음으로 다행스럽고 편안하였다. 그러나 특히 이러한 터무니없는 검은 말을 묵묵히 용납하지 못하시어 이에 상소하여 스스로 밝히시니, 임금께서는 손수 위로하는 답을 내리셨다. 그 이듬해 을해년에 안동부사에 임명되시고, 병자년에 행정이 가장 뛰어났으므로 포상褒賞을 더 보태서 다시 가선嘉善을 주었다. 정축년 11월 초 팔일 병으로 관사에서 돌아가시니 향년이 49세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의 수곡선영의 동쪽에 장사지냈다. 부군은 풍채가 깨끗하고 뛰어나셨으며, 품위가 고아하시고 원대하여 온화하고 착하며 화락하고 단아하여 효성과 의리에 돈독하셨다. 대부인을 섬기는데 순종하고 마음을 편하게 하고 기쁘게 해 드림에 극진하셨고, 여러 아비 없는 조카들을 어루만지고 가르치심이 친아들과 같았다. 누구와도 부드럽게 대하셨으며 급한 일을 당하더라도 말을 빨리하고 당황하는 얼굴빛을 볼 수가 없었다. 평상시에도 책을 곁에 두시고 맛 좋은 음식처럼 이것을 즐기셨다. 비록 병이 들어 오래되어 싫증이 날 때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셨다. 문장을 지으시면 조촐하고 넉넉하고 또 법칙에 맞아 아담하였으며, 더욱 시에 뛰어나셔서 당대에 이름난 선비와 만나시면 반드시 술을 시키시고 시를 읊어 유쾌하고 즐거워서 무아지경에 빠지시니 쇠를 두드리고 돌을 치는 풍악도 이보다 더 즐겁지 아니하였다. 부군의 재주와 온축은 밝은 조정에도 우둑하시기에 넉넉하였으며, 학문은 큰 계획을 빛내기에 넉넉하였고, 풍채와 태도는 헛된 풍속을 진압하기에 넉넉하였으나 불행히 막된 세상을 만나 포부를 펴지 못하셨고, 성상이 즉위하심에 이르러서는 어버이가 늙고 몸이 병들어 돌아가 봉양할 것을 빌어 청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하게 되시니, 앞뒤의 일이 잇달아 일어나 다시 참여치 못하셨다. 맑고 밝은 시대가 되어서는 무고하는 말이 지목하여 또 횡액을 입으시니, 무어라 말하겠는가. 부군께서 충효의 한 생각으로 한 발자국 걸을 때에도 잊지 않으셨으니 뒤에 오르신 성군께서도 바야흐로 가상해 하셨고, 자친께서도 병이 없으시며, 연기도 오십이 되지 않으셨는데 갑자기 돌아가시니 으슥하게 남긴 한을 마침내 풀 길이 없습니다.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는 이치가 이와 같이 어긋나니 아픈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부군의 배위는 월성 이씨 생원 휘 심의 따님이오, 대사헌 휘 승직의 손녀이며, 정부인에 봉해 지셨다. 부인은 정숙 단정 온화 공손 자애로우셨으며, 어버이를 봉양하고 병을 시중드는데 손수 반찬을 장만하고 약을 달이느라 겨울철에는 손등이 터지셨다. 집안은 화목하고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아도 비복들이 마음을 다했고, 안팎의 모든 일이 정리되고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었다. 부인은 아들 하나를 낳으시니, 수령 황산 찰방이오, 딸 둘은 함안 군수 조효연, 전의 현감 오언의가 사위이다. 찰방은 아들 셋을 두니 빙, 결, 충이오, 딸 둘은 이영승, 채운경이 그 사위이다. 외손이 넷이니 조윤신, 윤구, 오수정, 수영이다. 윤구와 수영은 진사이다. 온계의 위에 선인이 손수 심으신 소나무 숲이 있는데 부군은 그 곁에 집을 짓고 사시니 고향을 생각하고 어른들을 추모하는 뜻을 감추었도다. 인하여 스스로 호를 지어 송재松齋라 하셨다. 지으신 시와 문장이 많았으나 흩어져 없어지고 관동록關東錄 귀전록歸田錄이 있어 지금 합하여 송재집松齋集 한 권을 만들었다. 또 동국사략東國史略 두 권이 있다. 부인은 부군보다 이십 년이나 뒤에 돌아가셔 같은 두던에 장사하였다. 겨우 상을 벗자 찰방이 또 돌아가니 까닭으로 묘도에 오래 글을 새겨 세우지 못했더니, 지금 빙 들과 의론하고 계획해서 세계世系와 훌륭한 의지와 행동의 대강을 삼가 기록하여 비석의 뒤에 새기니, 명문銘文을 짓는 일과 같은 일에 이르러서는 황滉이 감히 할 수가 없어 뒤에 오는 군자를 기다리노라. ----------姪 滉 泣書 


墓碣銘묘갈명

오호라! 명중明仲은 갔는가! 팔십 자안慈顔께서 집에 계신데 이를 버리고 어디로 갔는가? 좌부左符를 벌어서(乞左符:옛날 군수로 나갈 때 좌어는 군수에게 주고, 우어는 군고에 두어서 신표로 삼았다. 여기서는 부모님 봉양을 위해서 지방관을 자청했던 일을 말함. 곧 중종이 즉위한 해 겨울에 부모님이 늙으셨으므로 외직을 청하여 진주목사가 된 일) 가까이에서 효양하면서 아직껏 잠시도 슬하를 떠난 적이 없더니, 갑자기 하루아침에 눈을 감고 길이 하직하니, 죽은 이가 아는가 모르는가? 운명인가? 안타깝도다! 어찌 그다지도 참혹한가? 굴신영허(屈伸盈虛 구부리고 폄과, 가득 참과 공허함. 곧 궁달의 뜻으로 쓰임)와 수요장단은 추위가 가면 더위가 오고 낮이 지나면 밤이 되는 자연의 섭리와 같은 것이지마는 모자간의 정으로는 비길 바가 못 된다. 이 천지가 다할 때 까지도 가슴에 맺힌 아픔, 세상에 어찌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公의 휘諱는 우이니 진보인이다. 성격은 온건하고 담백하여 매우 우뚝하거나 아주 기이한 행실이 없었다. 대인과 접물에 있어서는 온화한 기상이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었고 곧고 올발라서 치우치지 않았으며, 꿋꿋한 절개는 누구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성스러워 외모를 꾸미지 않았고 자상스러워서 포용력이 있었다. 두 고을을 다스림에 모두 부모님을 모시고 가서(待板輿以行) 사가에 들어와서는 어버이를 섬기고 나가서는 공무에 봉사하니, 모두가 지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정사는 번거롭지 않아서 백성이 편안했고 형벌은 엄하지 않았으나 이속들이 두려워했다. 비록 혁혁한 치적은 없었으나 떠난 뒤에는 백성들이 모두 사모하였으니 진실로 옛날의 순리(循吏, 청렴하고 선량한 관리)이었다. 먼 조상 석께서는 고려 말에 벼슬하여 밀직부사에 추증되었고, 증조부曾祖父 운후 조부祖父 정 선고先考 계양께서는 모두 공으로 말미암아 관작이 추증되었으니 각각 차등이 있었다. 禎께서는 일찍이 세종 조에 출신하여 영변, 한산의 수령을 지내고 모두 명성과 훌륭한 치적을 남겼으니 여지지, 명환록에 기록되어 있다. 공은 예안현에 세거하여 집에 소나무 두어 그루가 있어서 이로 인하여 송재松齋라고 스스로 號를 삼았다. 공이 지은 시문은 모두가 법도에 맞아 맑으면서도 함축이 있고, 올바르면서도 기괴하지 않고 한가롭고 심원하여 웅심 깊어서 진정한 문인의 지취가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아직도 깊이 그의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자당은 영양의 세족인 김유용의 따님이고, 부인은 생원 이시민의 따님이니, 대사헌 승직의 자손이다. 홍치 11년 무오에 등제하여 기미년에 예문 검열이 되었고, 신유년에는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가 이조좌랑이 되었다. 갑자년에는 병조정랑 지제교가 되었다가 사간원 사간을 역임했다. 정덕 원년 병인년에는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냈다. 금상께서 즉위하여 책훈(策勳, 공훈이 있는 사람의 이름을 기록 하는 일)을 할 때에 가선대부 우부승지에 올랐으나 그해 겨울에 어버이가 늙었기 때문에 외직을 빌어서 진주목사가 되어 치적이 첫째로 평가되어 어언을 찍은 포미褒美의 조사를 받았고, 임기가 차서 첨지중추부사의 배명을 받고 호조와 형조의 참판을 역임했다. 경오년에는 강원도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가 임신년에는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신병 때문에 3년 동안은 출사하지 않았다. 갑술년 봄에 반정反正하던 날에 입직승지는 모두 공로가 없다고 말하는 이가 있어 훈작을 삭탈 당하고 강자降資되었다. 을해년에 안동부사를 배명 받아 이듬해 병자년 가을에는 치적이 으뜸으로 가선嘉善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정축년 동짓달 초여드렛날 관에 있은 채 돌아가니 향년이 49세 이었다. 딸이 둘이니 맏은 부사 조치우 아들 군수 효연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오석복의 아들 현감 언의에게 출가하였다. 아들 하나는 이름이 수령이니 충순위 신종손의 딸에 장가들었다. 公은 평생 동안 나와는 가장 친하게 지낸 터로 나보다 여섯 해가 젊고 출신이 일곱 해가 뒤졌지만은 서로 만나 즐길 때에는 총각들이 떼를 지어 벗하는 것과 다름없었고, 진심을 털어놓고 조금도 숨김이라곤 없었다. 술잔을 잡고 담소할 때에는 서로 두 몸을 잊었더니 남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꿈에 영혼마저도 그 곁을 왕래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임기가 차서 조정으로 돌아오면 조용히 만날 것을 바랐더니 갑자기 영결하니 아득한 회포가 어찌 한이 있겠는가? 명하기를, 세상에는 비록 살았으되 죽음과 같고, 비록 죽었으되 삶과 같음이 있도다! 죽어서 향기를 유전하여 만고에 오히려 형통하였으니, 살아서 일컬어짐이 없으면 백년 산들 무엇이 영광스러우랴! 공과 같은 이는 살아서는 선善을 짊어지고 행했고, 죽어서는 선善을 품어 편안하도다! 살고 죽음에 어찌 무겁고 가벼움이 있으랴? 다만 한스러움은, 아직도 춘휘(春輝, 맹교의 시에 [수언촌초심誰言寸草心 보득삼춘휘報得三春暉]라고 있다. 춘휘는 따뜻한 봄기운을 말하는데 이것이 초목을 발육시키기 때문에 자모에 비유한다)가 걷히기 전에 채무(彩舞, 노래자老萊子는 나이 70에도 오색 알롱달롱한 옷을 입고 어린이 놀이로 부모를 즐겁게 했다고 한다)가 먼저 기울었음이로다. 그러나 이 천지가 멸망한대도(天荒而地老) 황천의 아픈 정은 말하지 않으리--------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 崔淑生  撰


自明疏자명소

 臣은 「따뜻하고 보드라운 바람이여 골짜기에서만 솔솔 불고 높은 우뚝한 봉우리까지에는 미쳐주지 않으니 죽지 않은 풀이 없고 마르지 않는 나무가 없다」는 詩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대개 봄을 맞아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높고 우뚝한 산꼭대기까지 골고루 미쳐야만 온 산의 만물이 각각 그 삶을 누리는데도 그 사이에 죽거나 마르는 풀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만 백성에게 베푸시는 어진 정치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과 같이 멀고 가까운데 골고루 미쳐 한나라의 신민이 넉넉한 생활과 수양을 하지 않은 이가 없는데 그 중에 신과 같은 자는 홀로 죽고 마른 초목이 되어 이 암담한 실매듭을 안고서 그 있을 자리를 얻지 못하니 심히 슬프고 아픕니다. 신은 일찍 임신년에 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멀리 령 밖에 있으며 병을 얻어 자리에 누운 지 수년 동안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고 있어온 바, 지난 봄 2월 16일에 내리신 전지傳旨 안에 「폐조 때 승지 누구누구는  반정하던 날 정원에서 숙직을 하다가 화가 미칠 것을 모면하려고 폐한 임금을 속이고 앞을 다투어 달려 나왔으니 모두 훈적을 깎아서 절의를 장려한다. 云云」하였음을 보았습니다. 신은 원래 공이 없고 외람되게 훈록勳錄에 올라 항상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이제 훈勳을 깎으신다는 명을 받자오니 신의 마음이 비로소 편안하오나 다만 모면하려고 속였다는 것은 臣의 한 바가 아닌데도 일률로 함께 다루셨으니 신이 마음 아파하는 바입니다. 입은 바 죄가 일신에 크게 관계되지 않는다면 비록 자기가 범한 바 아닐지라도 또한 마땅히 받고서 지나쳐 버리지, 구구한 변명은 필요치 않습니다. 만약 남의 신하된 자가 임금을 속이고 구차하게 면하면 배신하여 일정한 주장이 없는 심한 것이니 어찌 사람의 무리에 섞일 수가 있사오리까. 그 범한 바가 아니면서 관계되는바 이와 같으니 이것이 신이 통분하고 눈물 흘리는 까닭은 만 번 죽임을 당할 지라도 신이 당일 행한 바를 뒤좇아 말씀하여 임금님이 들으시도록 스스로 변명하는 바입니다. 신은 폐조에서 승지로 임명되어 한 달 남짓 반정 하던 날 정원에 숙직하고 있었는데 밤중에 남쪽 담 문졸門卒이 「밖에 변이 있다」고 알리므로 신은 정원의 아전을 시켜 가서 염탐케 하고 또 이르기를 「만약 큰일이 있거든 병조와 도총부가 반드시 이것을 먼저 알 터이니 너는 거기를 자세히 보라」하였더니 보고하기를 「병조와 도총부가 다 나가고 관청이 비었더라.」고 하기에 변이 있음을 믿어 곧 윤장 등에게 알리고 함께 차비문差備門으로 나아갔더니 폐주께서 듣고 나오시기에 신은 모시고 꽤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폐주께서 신들에게 「나가서 변을 자세히 살피라」고 말씀하시고 이어 표신標信을 내리시니 윤장 들은 변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여 밖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위축이 되어 나가지 못하고 표신을 신에게 전하므로 신의 직위가 끝이므로 마음은 비록 의심하고 두려우나 사양하지 않고 나가 정원 문밖에 이르러 검열檢閱 김흠조를 만나서 함께 돈화문으로 향하여 변을 살피려던 차에 갑자기 尹璋의 아우 부장 尹琮을 보았는데 와서 하는 말이「나오는 것이 왜 늦었는가. 두세 대신이 거의擧義에 앞장을 서니 모두 조정 신하가 지금 거의擧義 대궐 문 밖에 모였는데 숙직하는 승지만이 나오지 않아 내 兄 璋을 위하여 들어왔노라」하고 거의擧義하여 전하를 추대한 일을 자상하게 말하였음으로 신 또한 비로소 믿어 의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미 밖에 나왔고 궁성 안과 밖이 막히었으며 거의擧義를 듣고 사세가 다시 들어갈 수 없었음으로 곧 흠조와 의론하여 거취를 결정하고 나가서 거의擧義 대신을 뵈었더니 대신이 말하기를 「나오는 것이 왜 늦는가」하고 또 말하기를 「승지 강흔은 진성군 저택에 가서 모시고 있고 한순은 궁성을 지키고 있으며 김준손은 성 밖에 있어서 아직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지금 대비전의 대명을 받아야 하는데 또한 승지가 없어서는 안 된다」하고 드디어 신을 인솔하고 함께 경복궁에 가서 자지慈旨를 받은 후에 전하의 수fp를 맞이하여 들어왔고 즉위하실 때에는 곁에 시위하여 따라 갔으니 신이 그날 한 일은 이것뿐입니다. 이미 표신標信을 받아 나왔고 또 윤종의 보고를 듣고 흠조와 만나 의론하여 나왔사온데 어찌 모면하려고 임금을 속이고 황급히 다투어 나올 일이 있겠습니까. 하물며 처음 나올 때에 아직 바깥 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모두 밖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명령을 미루니 어길 수 없어 명령을 받고 나왔사온데 임금을 속이고 급히 달아나지 않았음은 명백하지 않사오리까. 뒤에 나온 승지들이 마침내 당기고 이끌려 나오지 못하고 그 속에서 한 일에 대해서는 신은 알 수 없으며 신은 신의 일을 밝힐 뿐 어찌 남의 일에 미치겠습니까. 또 절의를 힘씀에는 반드시 그럴만한 바탕이 있어야 하는데 반정하는 날은 절의를 지킬 만 한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신이 만약 정원 안에 있어서 혹 변이 무슨 일인지 모르고 혹은 반역하는 난리가 일어나서 임금을 버리고 지름길로 나왔다면 어찌 다만 절의가 없을 뿐이겠습니까. 비록 불충의 죄에 복죄된다 해도 달게 받을 것이오나 이번 일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룻밤 거의擧義 한 뒤에 종묘사직의 신령과 천지산천의 신과 온 나라 신민의 마음이 다 이미 전하에게 속했는데 신이 대의를 돌보지 않고 망령되게 절의를 다하고자 했다면 어찌 다만 전하의 죄인이 될 뿐이겠습니까. 참으로 천지산천 종사 신민의 죄입니다. 옛날 송나라 덕우(남송 7대 황제 공종)가 잡혀서 북에 끌려갔을 때에 문천상(남송 말의 충신. 주자학을 배웠고 원나라 병사에게 잡혀 순절했으며 정기가로 유명함)은 죽지 않고 달아나 돌아와 도종(남송의 6대 황제 二子 욱과 병, 원의 세조에 의해 임안이 함락되고 공종이 포로가 되었다. 그 뒤 송의 충신들이 받든 두 아들이 끝내 죽음으로써 송은 멸망한다)의 두 아들을 받들고 말하기를 「이 때를 당하여 사직은 중하고 임금은 가벼우며 내가 두 왕자를 받드는 것은 종사를 위한 계책이다. 회민을 따라 북쪽으로 간 자는 충성이 아니오, 원제를 따르는 것이 충성이라. 덕우가 북쪽으로 간자는 충성이 아니오, 고종을 따르는 것이 충성이다. 덕우가 북쪽으로 감으로써 송은 이미 망했다. 오히려 도망쳐 와서 두 어린 왕자를 따르는 것이 송나라 종사의 보존을 도모하고자 함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번 거의擧義때 당당한 국세가 전하에게서 다시 개혁 되었으며 종묘사직이 다시 편안하여 튼튼하게 되었는데 신이 나와서 따르지 않고 또 무엇을 기대 하겠습니까. 신이 가만히 생각하오나 전하의 고명하심으로써 거의擧義하는 날이 절의에 힘쓸 자리가 아님을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다만 임금을 속이고 구차하게 면한 것이 너무 심한 일이라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의 한 바가 아님으로 신의 죄와 같은 것은 마땅히 가려내야 할 것입니다. 방금 안으로는 언부로부터 밖으로는 군현에 이르기까지 비록 하찮은 남녀일지라도 조그마한 억울함이 있으면 판별하여 처리하여 스스로 변명할 수 있는데 하물며 신이 안고 있는 빈민과 같은 하찮은 남녀의 일일 뿐이 아니니 마침내 성세에서 스스로 밝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전지傳旨를 처음보고 즉시 수레를 타고 빨리 와서 저의 간절한 심정을 아뢰고자 하였으나 도리어 다른 사람들이 신이 번민의 소재를 알지 못하고 반대로 신이 공훈이 깎인 것을 불평한다고 의심할까 두려워서 지금까지 미루어 왔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니 대전선비의 깨끗한 마치 실의 흰 빛과 같아서 한번 검은 물이 들면 비록 천 번 빨고 만 번 헹군다 해도 마침내 흰빛을 회복하기가 어렵습니다. 신의 깨끗한 행실이 비록 흰 실의 흰빛과 같지 않다 하더라도 어찌 평소에 한 치 한 치의 조그마한 익힘이 없었겠습니까. 지금 다른 사람의 허물에 억울하게 물들고 벗어나지 못한다면 어찌 다른 사람들의 일시적 의심 때문에 그 몸을 깨끗이 하지 못하고 만세에 까지 물든 대로 두겠습니까. 비록 신을 의심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만약 한번 신의 말을 자세히 살피면 신의 고민이 여기에 있지 거기에 있지 아니함을 알게 될 것은 명백합니다. 신은 「말이 정에서 나와서 정을 다하지 않는 것은 지극한 정이 아니오, 정이 말에 움직여서 말을 느끼지 않는 것은 간절한 말이 아니다」라고 들었습니다. 신은 간절하고 지극한 심정으로써 절박한 말을 하게 되오니 전하께서는 한번 보시기만 한다면 반드시 정의 지극함과 말의 간절함을 아실 것이므로 어찌 전하의 마음속에 느끼는 바가 없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 살펴 주시옵소서.


批曰 今見卿疏知卿曖昧俊問朝廷徐當議處

비답에 지금 경의 소를 보니 경이 애매함을 알겠다. 뒤에 조정에 물어 마땅히 의론하여 처리할 것이니라 하였다.


神道碑銘

중종대왕이 즉위한 지 12년째인 정축년 11월 8일 송재 이선생이 안동관사에서 돌아 가시와 예안현 온계 선영 동경 언덕 자좌子坐에 장사한지가 사백년이 넘었다. 묘지가 있고 묘갈이 있고 묘의가 약간 갖춰졌으나 선생의 덕이 높고 벼슬이 드러났으므로 마땅히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져야 될 법이어서 후손 種洙 敎爀 種韶가 나에게 의논하러 왔다. 후생의 얕은 학식으로 감히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었으나, 높은 덕을 숭앙하고 퇴계선생의 뜻을 받들어 외람되나마 드디어 비명碑銘을 짓는다. 서문에 가로되 선생의 휘는 우 요, 자는 명중明仲이며 송재松齋는 號이다. 성은 이씨이며 시조는 진보인으로 휘는 석이다. 고조는 휘가 자수인데 고려 말에 홍건적을 토벌한 공으로 송안군에 봉해졌고 벼슬이 판전의시사에 이르렀다. 증조의 휘는 운후인 바 군기시부정으로 사복시정에 증직되셨다. 조는 휘가 정인데 선산부사였고 병조참의로 증직되셨다. 고는 휘가 계양인데 성균관진사로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이조판서에 가증되었다. 선생은 예종 기축년(1469)에 태어나셨다. 젊어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했고 글을 잘 지었으며 백형伯兄 찬성공과 가지런히 금과 옥 같은 형제라고 평판이 자자했다. 성종 임자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연산 무오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대교 봉교가 되셨다.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헌납 사간 사헌부 장령으로서 춘추관 기주관을 겸했다. 이조좌랑 병조정랑 지제교로 수찬관을 겸했다. 자리를 옮겨 봉상시첨정 군기시부정이 되고 통정대부에 올라 동부승지, 가선대부에 올라 호조 병조참판 중추부 동지사 도총부 부총관 경연특진관을 지내고 정국공신으로 훈록勳錄되어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다. 외직으로는 진주목사 강원도 관찰사와 안동부사를 지냈다. 이것이 선생의 전후 이력의 대략이다. 대각臺閣에 있어서는 간사한 신하를 탄핵하고 또 재이災異로 인하여 높은 말씀과 정당한 의론을 진술하여 곧기가 화살과 같았다. 경연에 있어서는 어두운 조정의 어지러운 정치를 고치고, 문묘를 중수하여 위폐를 도로 봉안하였고, 팔도의 정려旌閭가 폐철된 것을 모두 복구할 것을 아뢰어 명망을 높이셨다. 진주목사가 되어서는 행정이 맑고 간소해서 백성을 편하게 하니 백성들이 떠받들기를 부모와 같이하였다. 이에 나라에서는 겉옷과 안옷을 내려 포상하였다. 선생은 정신과 풍채가 맑고 빼어났으며 성품과 도량이 온화하고 어질었다. 어머님을 섬김에 효성을 다하고, 여러 아비 없는 조카들을 사랑을 다해서 교육하고 남과 교제함에는 오로지 너그럽고 화평하며, 바쁜 일을 만나도 말을 급하게 하거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학문에 종사하면서 맛좋은 음식처럼 기뻐하셨고 정자 주자학에 힘써서 시전대아詩傳大雅편에 이른바 「온온한 조심성 있는 사람은 오직 덕의 기본이다」라고 한 것은 곧 선생을 말함이 아니겠는가. 아! 선생은 세상을 다스릴 재주가 있었고 나라를 부하게 할 역량이 있었으며 곧고 밝은 절개가 있었으니 당시에 삼공육경三公六卿이 될 만한 기국이라 인정하였다. 불행하게도 혼조昏朝를 만나 그 쌓은바 포부를 펴지 못하였고 착한 임금에게 반정함에 있어 조정이 맑고 밝았으나 또 어버이가 늙고 병들어 귀향을 빌어 사직하였으니 성상과 가까이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아! 그것이 운명일진저. 그렇기는 하나 퇴계선생은 곧 선생의 백씨의 아드님이시다. 선생께서 가르치심에 법도가 있었고 훈도하여 덕이 이루어져 동방의 백세에 사표가 되셨으니 유학에 공이 있음은 대개 이와 같다. 정부인 이씨는 관향이 월성인데 대사헌 승직의 손녀이시며 생원 시민의 따님이었는데, 정숙 단정해서 부인의 덕성을 다 갖추었다. 一男의 휘는 수령이고 찰방이다. 二女중 맏은 군수 조효연 둘째는 현감 오언의에게 출가했다. 찰방의 아들 빙은 부솔副率로 사복정에 증직되었고 결은 생원이요, 충은 충순위로서 딸은 이영승  채운경에게 출가 하였으며, 조효연의 남은 윤신 윤구이고 , 오언의의 남은 수정 수영인데 수영은 참판에 증직되었고 수영은 진사이다. 선생은 문장이 청아하고 넉넉하며 더욱 시에 뛰어나서 문집이 세상에 널리 애송되고 있으며 동국사략 두 권의 저서가 있다. 명하여 가로되, 진보 명문에 도탑게 큰 선비 나셨네. 온량한 성품 화락한 기상 곧은 덕의 증거이다. 뜻을 세워 행실을 바르게 하니 누구와 견줄 수 있을까. 학문과 정사에 넉넉하게 여유가 있었네. 곧고 깨끗한 모양 명망과 실상이 모두 조정의 으뜸이어다. 지켜서 변하지 않음은 오직 나라위한 작은 정성뿐이었다. 간사한 무리 찾아내고 물리치는 글발은 서리바람같이 날카롭고, 백성의 근심을 아파하고 그 즐거움을 웃고 노래하니 다스림이 공수 황패와 같았다. 경연에 있을 때는 임금을 보좌할 것을 생각하고, 허물을 크게 들춰내어 온갖 힘 다 하지 않음이 없었다. 성균관을 중수해서 의전범례 갖추었고, 정려를 왕명으로 세워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다시 나타냈다. 퇴계의 학문의 실마리는 실제로 선생으로부터 나와서, 더운 훈기가 점점 물들어서 마침내 대성했도다. 낙양의 정자와 주자의 학맥이 비로소 동방에 밝혀지니, 유교의 학문에 공이 이고 명성은 우주에 넘쳤도다. 온계의 두던에 넉자 높이 큰 무덤이 있으니 크게 쓰고, 대사 특서해서 큰 돌에 세기노라.  ---------丁丑仲春哉生魄  後學 安東金寗漢 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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