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명으로 풀어본 한국사
노원구 월계동의유래
- 녹천0| 살던 마을, 사슴이 내려온 동네 -
노원구蘆原區의 범정동 중 가장 오랜 동명을 지닌 월계동月溪洞은 지형이 반달처럼 생긴데다가 우이천과 중랑천(한천漢川)이 동서로 흐르는 지형으로서 이곳에서 만나기 때문에 월계동이란 명칭이 붙었다. 시내의 위치에 따라 상계上溪, 중계中溪, 하계下溪의 동명이 붙여졌으므로 월계리月溪里도 그와 같은 연유에서 붙여진 마을 이름일 것이다.
월계동은 조선 후기까지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으로 있다가 일제강점기 때인 1911년 노원면 월계리란 동명이 생긴 이래 성북구, 도봉구, 노원구로 각기 편제되면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동명이다. 월계동은 현재 월계 1·2·3·4동의 4개 행정동으로 되어 있으며 이곳의 자연 마을로는 녹천鹿川, 연천(벼루말), 각심절, 능골(능리陵里) 등이 있다.
녹천 이유가 낙향해 살았던 녹천 마을
녹천 마을은 역시 양주군 노원면에 속했던 마을인데 1914년 노해면蘆海面 월계리에 통합되면서 공식 명칭은 사라졌다. 월계동의 중심인 녹천(월계2동 683번지, 685번지 일대) 지역은 1백 미터 내외의 야산으로 그 사이로 계곡이 형성되어 서쪽의 우이천이나 동쪽의 중랑천으로 유입되는데 이곳 767번지 근방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이 모습이 마치 사슴 머리에서 난 뿔과 같다고 하여 녹천이라 불렸다.
마을 이름이 녹천으로 된 유래는 크게 두 가지가 전한다. 조선 시대 중랑천이 범람해서 우이천까지 흘러드는 큰 홍수로 인해 근방의 마을은 모두 폐허가되었다. 이에 마련된 회의에셔 마을 촌주 한 사람이
"지난밤 꿈에 신선을 만났는데, 내일 정오에 중랑천가에 푸른 사슴 한 마리가 내려와 목욕을 할 것이니 제물을 준비해 두었다가 사슴에게 바치라고 하였다. 또 마을에서 가장 예쁘고 정숙한 처녀 한 사람을 사슴에게 시집보내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긴 뒤 사라졌소. "
라고 말하였다. 회의 결과 염廉 집의 15세 난 딸올 사슴에게 시집보내기로 하였다.
이러한 결정이 있은 지 며칠 후 신선이 시킨 대로 산 정상에 제물을 준비하고 염씨 처녀를 곱게 단장시키고는 사슴을 기다렸다. 그런데 정말 사슴 한 마리가 산에서 내려와 중랑천에서 목욕을 한 후 처녀를 태우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사슴은 월계동의 766번지쯤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지금의 하천이 생긴 방향으로 사라졌다.
마을 사람들이 사슴이 떠난 방항을 바라보자 멀리서 물줄기 2개가 나뭇가지 모양으로 흐르기 시작하더니 중간쯤에서 합쳐져 한 줄기로 되면서 황토 흙으로 뒤덮였던 마음 앞 전답이 기름진 검은 색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이 신기한 일에 대해 놀라워하자 그 중 한 사람이
"이건 사슴과 결혼한 염씨 처녀의 눈물이니 냇물 이름울 녹천이라하자."
고 제의하여 마을 이룸도 녹촌이라 하였다. 이때부터 녹촌鹿村 흑은 녹천鹿川이라고 마을 이름을 녹천 시내와 혼용하여 썼다. 염씨 처녀가 이곳에서 사슴과 결혼했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녹천 마을은 이날 이후부터 마을이 번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편 다른 유래로 조선 세종의 6대손이 되는 영의정 이유李濡가 이곳에 닉향하여 살 때, 조선 제19대 왕 숙종이 주안산에서 눈으로 보이는 땅을 하사하였다. 당시 안개가 많아 이 지역을 받았으므로 이유의 호인 녹천을 따라 녹천 대감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변이 모두 이유의 사유지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소작인 노릇도 하여 그분을 기리는 치성을 행하였다. 음력 2월 1일, 음력 6월 1일, 음력 10월 1일이 치성재를 행하는 날인데 특이한 점은 커다란 볏짚항아리가 있다는 것이다. 항아리 속에는 볍씨가 들어 있어 풍년이 들면 씨앗을 보관하였다가 흉년에 꺼내어 사용했다고 한다. 이때 볏짚은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고 소를 잡았으며, 제단 모양의 계단 위에 지금도 볏짚 항아리룰 보관 중으로 오늘날까지도 마을 사람들은 이 전통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헌화형 지세로 지기를 다스려야했던 능골
녹천의 남쪽에 있는 능골은 좌의정을 지낸 청백리 정간貞簡 이명李蓂의 묘와 신도비 등이 마치 왕릉처럼 크게 조성되어 있어 능골이란 명칭이 나왔다고 한다. 능골은 현 월계2동 750번지 또는 760~780번지로 추정된다.
그런데 녹천 마을 아래 마을 여성들의 기氣가 세어져 음란한 부녀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자, 이곳 사람들은 사람을 사슴에게 시집보낸 해괴한 일을 한 녹천 사람들 때문이라고 하여 녹천 마을과 왕래조차 하지 않고 등을 지고 살게 되었다. 원래 능골에 이명의 무덤을 만들 때 지나가던 승려가 말하기를
"이곳은 헌화형獻花形이어서 자손은 번창하지만 음란한 지헝이니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땅을 밟아서 지기地氣들 다스려야 하는 곳으로 될 땅0|오."
하였다. 왜냐하면 헌화형은 앙다리를 벌려서 중간 구덩이를 연 것과 같은 지세인데 이는 여인이 다리를 벌린 헝태이므로 음란하여 풍수지리설로 보아 주택지나 음택陰宅(묘지)으로 별 환영을 받지 못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동네 재앙을 막을 수 있는 비법에 대해 들었고 승려는 녹천 지역 사람과 혼인을 금하고, 등을 지는 헝태로 집을 짓고 마울의 동쪽에 절을 세우면 동네 화근이 사라질 것이라 말하였다.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린 절이 있던 각심 마을
녹천 마을과 능골 사람들의 마올을 다스린다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각심사覺心寺라 한데서 이곳을 각심 마을이라 하였다. 이는 녹천 사람을 원수로 여기지 말고 자신의 마을에 액운이 깃들어 그러니 남을 원망하지 말라는 뜻으로 지어준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했는데 이때부터 각심사에서 조석으로 두 마을 사람이 공양을 하였다고 한다.
헌화형의 중심이 되는 곳은 월계2동 600번지 주공 1·2단지 일대인데 염광여자중·고등학교, 신창중·고등학교, 월계중·고등학교, 인덕예술공과전문학교(현 인덕대학)가 들어서 땅의 억센 기운이 뻗지 못하도록 했다고 볼 수있다.
노원구 월계동에 있는 각심재. 1994년 현 장소로 이전하었다
특히 1410년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각심제覺心祭는 옛날 짙병과 흉년을 막으려던 각심사 고승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이후에는 이곳 주민의 안녕과 발젼을 위한 대동제 행사로 자리 잡았다. 0|명의 신도비를 모시는 재실이 각심재覺心齊(월계동 766번지)이고, 마을 제사로 지켜지는 것이 각심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