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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영월읍에 있는 낙향조 신영숙의 효자비를 모신 효자정문. | | | | |
<!--온나라 감동 지극한 孝行 정신 계승>
■ 목가 시인 신석정 슬픈 목가,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하면 떠오르는 시인이 바로 신석정(辛夕汀. 본명은 辛錫正), 영산(영월) 신씨 후손이다. 1930년 '시문학' 3호부터 동인으로 참가하여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시로 풀어내어 문단에 주목을 받았다. “혹시 ‘조선왕조 5백년’의 극작가 신봉승 선생도 영월 신씨가 아닐까요?” “바로 보셨습니다. 우리 영월 신씨 부원군파지요. 강릉에는 부원군파가많이 살아요.” 시조의 31세손이라고 밝힌 신재만(辛在萬) 영월 신씨 판서공파 중앙종회 부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옆에 국회의원을 지낸 신민선 선생의 동생인 32세손 신중선(辛重善) 영월 종친회장이 함께 자리를 했다. 티비 드라마 '왕건' 때문에 철원 궁예도성이 부각됐고, 춘천 서면 신숭겸의 묘역이 늘어난 답사객들로 시설물을 새롭게 단장해야만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조선왕조 5백년'은 장장 8년에 걸쳐 방영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극작가 신봉승은 1933년 5월 강릉시 옥계면에서 태어나 강릉사범학교를졸업하고 한때 초등학교 교실에서 꼬마들을 가르치는 일에 신명을 올리기도 했었다. 이후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20여 년 간 한양대, 경희대, 동국대 등에서 극영화에 대해 강의를 맡기도 했다. 그가 드라마만 쓴 것으로 알면 큰 오해다. 57년에 '현대문학'을 통해 시를 발표했고, 61년에는 문학평론까지 손을 댔다. 본격적으로 시나리오와 드라마를 쓰기 시작한 계기는 “두고 온 산하굅?현상모집에 당선되면서부터였다. “갯마을, 저 하늘에도 슬픔이, 봄 봄, 팔도강산.... 수없이 많은 작품을 남겼지요. 강원도문화상을 비롯해서청룡상, 대종상, 대한민국예술상 등등 상도 많이 받구요. 지금은 예술원 회원이시죠?” 물어본 쪽은 신중선 영월 종친회장이었고 대답한 쪽은 필자였다.
■ 시조 고려조 정의공 신경 “어떤 문헌에 영산 신씨(靈山辛氏)와 영월 신씨는 시조가 같다 하여 통합하고 단일본으로 대동보를 편찬한다는 기록을 보았는데, 사실입니까?” “그래요. 시조 어른의 4세손 태사공 신몽삼(辛夢森) 선조의 묘소에서 발견된 지석(誌石;죽은 사람의 이름, 생몰연대, 행적, 무덤의 방향 따위를 기록한 석판)에 본관이 영주(寧州) 신씨라는기록이 나왔기 때문에 영산, 영월 신씨를 영주로 통합하려 했었지요.” 시조 신경(辛鏡)은 고려 인종 16년(1138년)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로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에 이르렀다. 이윽고 관직을 놓고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으로 낙향했다. 영산면에 있는 영취산이 중국 8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려국에 건너오기 전 자신이 어렸을 때 살던 감숙성의 천축산과 산세가 비슷한 때문이었다. 이후 후손들은 시조 신경이 처음 정착한 영산(靈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잇기 시작했다. 사후에조정에서 정의공(貞毅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알려진 대로 영산, 영월 신씨의 시조 정의공 신경 어른의 선계는 중국 농서성 농산 사람으로 당나라 현종 때 엄시랑(嚴侍郞;영월 엄씨의 원조)과 함께 신라에 들어와 정착하게 된 것으로 전해지지만 충분히 입증할만한 자료는 없습니다.” “태사공 신도비에는 또 신씨는 본래 중국 농산의 영주 사람이며 영주는 농서성의 속현이라 적혀 있지요. 허나 ‘신씨성관고’에는 영주가 중국땅에는 없고 우리나라 천안의 옛 지명이므로 귀화한 성씨가 아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다시 영주라는 지명이 중국 요동반도 조양성 어딘가에 실재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조는 같지만 본관지 영산과 영월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답니다.”
신재만 부회장이 꼼꼼하게 일러주었다. “신씨가 영산과 영월로 분관된 것은 9세손부터입니다.” 추밀원사를 지낸 시조의 8세손 신지화(辛至和)는 슬하에 네 형제를 두었다. 판밀직사사를 역임했던 첫아들 신천은 덕재공파로, 좌찬성을 지내고 영산부원군에 봉해진 둘째 신혁(身革)은 초당공파, 영월부원군에 봉해진 셋째 신온(身蘊)은 부원군파, 이부판서를지낸 넷째 신한은 판서공파의 파조가 되었고 8세손 신공근(辛恭近)의 아들이며 중정대부에 오른 신성렬(辛成烈)은 상장군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다섯 형제 중에서 두 형제, 부원군파(府院君派)와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후손들은 영월로 분관하여 세계를 잇게 되었고 나머지는 그냥 영산 신씨로 남게 되었지요.”
■ 낙향조 판서공 7세손 영숙 신영숙은 시조 정의공 신경의 15세손이요 판서공 신한의 7세손이다. 조선 개국 때 이태조를 도운 공으로 통훈대부로서 한성서윤(漢城庶尹;종4품) 자리에 있었다. "모친께서병환이 위독하다는 기별을 듣자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영월로 낙향하셨지요. 침식을 잊고 노모의 병간호에 매달렸지만 돌아가셨습니다. 묘소 옆에 초막을 짓고 탈상까지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불효자로서 속죄하기 위해 죽만 드셨답니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도 3년 시묘살이를 해내자 신영숙의 효행이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의 효행을 널리 알려 귀감을 삼고자 조정에서는 수천 평의 토지와 함께 효자정문을 내리게 되었다. 사후에 효염공(孝廉公)이란 시호를 받기도 했다. “영월문화회관에서 장릉 사이에 효자비를 모신효자각이 있구요, 그 어른의 묘소는 영월읍 팔괴리 동안동에 자리잡고 있답니다.” 신재만 부회장이 사진자료를 내보이며 말했다.-->
■ 목가 시인 신석정 슬픈 목가,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하면 떠오르는 시인이 바로 신석정(辛夕汀. 본명은 辛錫正), 영산(영월) 신씨 후손이다. 1930년 '시문학' 3호부터 동인으로 참가하여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시로 풀어내어 문단에 주목을 받았다. “혹시 ‘조선왕조 5백년’의 극작가 신봉승 선생도 영월 신씨가 아닐까요?” “바로보셨습니다. 우리 영월 신씨 부원군파지요. 강릉에는 부원군파가 많이 살아요.” 시조의 31세손이라고 밝힌 신재만(辛在萬) 영월 신씨 판서공파 중앙종회 부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옆에 국회의원을 지낸 신민선 선생의 동생인 32세손 신중선(辛重善) 영월 종친회장이 함께 자리를 했다. 티비 드라마 '왕건' 때문에 철원 궁예도성이 부각됐고, 춘천 서면 신숭겸의 묘역이 늘어난 답사객들로 시설물을 새롭게 단장해야만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조선왕조 5백년'은 장장 8년에 걸쳐 방영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극작가신봉승은 1933년 5월 강릉시 옥계면에서 태어나 강릉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초등학교 교실에서 꼬마들을 가르치는 일에 신명을 올리기도 했었다. 이후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20여 년 간 한양대, 경희대, 동국대 등에서 극영화에 대해 강의를 맡기도 했다. 그가 드라마만 쓴 것으로 알면 큰 오해다. 57년에 '현대문학'을 통해 시를 발표했고, 61년에는 문학평론까지 손을 댔다. 본격적으로 시나리오와 드라마를 쓰기 시작한 계기는 “두고 온 산하”가 현상모집에 당선되면서부터였다. “갯마을, 저 하늘에도 슬픔이, 봄 봄, 팔도강산.... 수없이 많은 작품을 남겼지요. 강원도문화상을 비롯해서 청룡상, 대종상, 대한민국예술상 등등 상도 많이 받구요. 지금은 예술원 회원이시죠?” 물어본 쪽은 신중선 영월 종친회장이었고 대답한 쪽은 필자였다.
■ 시조 고려조 정의공 신경 “어떤 문헌에 영산 신씨(靈山辛氏)와 영월 신씨는 시조가 같다 하여 통합하고 단일본으로 대동보를 편찬한다는 기록을 보았는데, 사실입니까?” “그래요. 시조 어른의 4세손 태사공 신몽삼(辛夢森) 선조의 묘소에서 발견된 지석(誌石;죽은 사람의 이름, 생몰연대, 행적, 무덤의 방향따위를 기록한 석판)에 본관이 영주(寧州) 신씨라는 기록이 나왔기 때문에 영산, 영월 신씨를 영주로 통합하려 했었지요.” 시조 신경(辛鏡)은 고려 인종 16년(1138년)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로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에 이르렀다.
이윽고 관직을 놓고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으로 낙향했다. 영산면에 있는 영취산이 중국 8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려국에 건너오기 전 자신이 어렸을 때 살던 감숙성의 천축산과 산세가 비슷한 때문이었다. 이후 후손들은 시조 신경이 처음 정착한 영산(靈山)을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잇기 시작했다. 사후에 조정에서 정의공(貞毅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알려진 대로 영산, 영월 신씨의 시조 정의공 신경 어른의 선계는 중국 농서성 농산 사람으로 당나라 현종 때 엄시랑(嚴侍郞;영월 엄씨의 원조)과 함께 신라에 들어와 정착하게 된 것으로 전해지지만 충분히 입증할만한 자료는 없습니다.” “태사공 신도비에는 또 신씨는 본래 중국 농산의 영주 사람이며 영주는 농서성의 속현이라 적혀 있지요. 허나 ‘신씨성관고’에는 영주가 중국땅에는 없고 우리나라 천안의 옛 지명이므로 귀화한 성씨가아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다시 영주라는 지명이 중국 요동반도 조양성 어딘가에 실재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조는 같지만 본관지 영산과 영월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답니다.” 신재만 부회장이 꼼꼼하게 일러주었다. “신씨가 영산과 영월로 분관된 것은 9세손부터입니다.” 추밀원사를 지낸 시조의 8세손 신지화(辛至和)는 슬하에 네 형제를 두었다. 판밀직사사를 역임했던 첫아들 신천은 덕재공파로, 좌찬성을 지내고 영산부원군에 봉해진 둘째 신혁(身革)은 초당공파, 영월부원군에봉해진 셋째 신온(身蘊)은 부원군파, 이부판서를 지낸 넷째 신한은 판서공파의 파조가 되었고 8세손 신공근(辛恭近)의 아들이며 중정대부에 오른 신성렬(辛成烈)은 상장군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다섯 형제 중에서 두 형제, 부원군파(府院君派)와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후손들은 영월로 분관하여 세계를 잇게 되었고 나머지는 그냥 영산 신씨로 남게 되었지요.”
■ 낙향조 판서공 7세손 영숙 신영숙은 시조 정의공 신경의 15세손이요 판서공 신한의 7세손이다. 조선 개국 때 이태조를 도운 공으로 통훈대부로서 한성서윤(漢城庶尹;종4품)자리에 있었다. "모친께서 병환이 위독하다는 기별을 듣자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영월로 낙향하셨지요. 침식을 잊고 노모의 병간호에 매달렸지만 돌아가셨습니다. 묘소 옆에 초막을 짓고 탈상까지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불효자로서 속죄하기 위해 죽만 드셨답니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도 3년 시묘살이를 해내자 신영숙의 효행이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의 효행을 널리 알려 귀감을 삼고자 조정에서는 수천 평의 토지와 함께 효자정문을 내리게 되었다. 사후에 효염공(孝廉公)이란 시호를 받기도 했다. “영월문화회관에서장릉 사이에 효자비를 모신 효자각이 있구요, 그 어른의 묘소는 영월읍 팔괴리 동안동에 자리잡고 있답니다.”
신재만 부회장이 사진자료를 내보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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