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햇빛이 살짝 인사를 한다. 그래도 빈을 떠나기 전에 좋은 날씨를 한번은 보나보다.....오늘은 체크아웃을 하고 비박을 하기로 했다. 그것도 캠핑장 바로 옆에서 말이다. 위치나 주변 상황을 보니 괜찮을 것 같다......밤에 주차해 놓은 차들도 몇 대 있으니.....그래서 아침을 먹고 준비(?)를 철저히 했다. 화장실과 생활하수를 비우고, 물을 100%로 충전했다. 모든 것이 산 넘어 산이다......차량 인수시 지급된 물 호수를 처음 사용했는데.....물이 새고 날리다.....사용 후 되감아야 하는데.....돌아가지도 않는다.....일단 급하니 대충 넣어 놓고 다음에 정리를 해야겠다.
체크아웃을 하고 차를 안전한 곳(?)에 주차를 해 놓았다. 아무일이 없어야 하는데....
우리 가족에게 익숙한 U4를 타고 쇤브룬 궁전으로 갔다.
기차역과 궁전이 상당한 거리다....오늘은 처음으로 기내용 캐리어에 필요한 짐을 넣어 갔고 나왔는데.....이것을 끌고 가기가 만만치 않다. 인도가 우리나라처럼 좋은 길을 찾기가 어렵다.....울퉁불퉁은 기본이고, 이곳 저곳 땜빵해 놓은 곳이 많고, 아스팔트 포장이 아니고 벽돌 모양의 포장 또는 작은 자갈을 이용한 포장길이 많기에 캐리어를 끌고 가기가 힘들다. 캐리어 바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 힘으로 끌고 간다는 느낌이다......아이들이 강행군으로 다리가 아프다고 하니 가끔 캐리어에 앉혀서 밀어줄까 하고 가지고 나왔는데......아이들을 태우기도 힘들고 캐리어 끌기도 힘들다.....
쇤브룬 궁전~! 프랑스 파리의 베르샤유 궁전을 보고 자극 받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장이 있던 자리에 여름 궁전을 건축한 것이란다. 두 왕가의 자존심 대결 덕분에 멋진 궁전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지만.....자존심 대결이 정말 대단하다......
하기사 두 라이벌 왕족이 지고 싶겠는가......
우리 가족은 그랜드 투어 표를 구매했다. 건우와 민서는 공짜.....어른 표 2장만 구입.
쇤브룬 궁전에는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가 있어서 낯선 궁전 문화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를 설명 받을 수 있었다. 오디어 가이드가 좋기는 좋다....관광 가이드는 가면 갈수록 힘든 일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 쇤브룬 궁전의 넓은 정원 산책은 하지 않고 궁전의 40개 방만 둘러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 궁전에 1440개 방이 있다고 한다.....
40개의 방에는 서로 다른 성격의 장식품과 내용물로 채워져 있다.
우리 나라 궁궐을 들어가보면 빈 방이나 조금은 조잡한 모형으로 꾸며져 있어 상상력으로 봐야할 때가 많은데......
궁전에서 공개해 놓은 방은 합스부르크 600년 역사에 있어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어 오스트리아인들에게 지금도 사랑 받고 있는 두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카롤린 엘리자베트.
마리아 테레지아는 카를 6세의 장려로 태어나 40년간 재위에 올라 합스부르크 제국을 다스린 여제이다. 16명의 자녀를 낳을 정도로 남편과의 사랑도 돈독했다고 한다. 남편이 먼저 죽게 되었지만 검은 상복을 한 번도 벗지 않았다고 하며,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기록해 놓을 정도로 남편을 그리워했으며, 궁전의 한 방을 남편의 초상화로 꾸며 놓았다. 누군가를 평생 사랑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축복인 것 같다.
그런데......그녀의 막내 딸이 마리 앙투아네트다. 초호화 생활을 즐기다.....프랑스 대혁명으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그녀이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왜 그렇게 초호화 사치 생활을 즐겼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친정이 합스부르크 왕족이고, 막내 딸로 태어나 얼마나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겠는가......그녀의 덕분에 역사가 바뀌었을까.....프랑스 대혁명의 초석(?)을 마련해주었으니 말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들의 결혼식도 무척 웅장하고 화려하게 행했던 것 같다. 당시의 상황을 대형 기록화로 남겨 커다란 방에 장식해 놓았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4살로 좔츠부르크에 살고 있던 모차르트가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었지만, 이 대형 기록화가 수년동안 만들어지는 동안 모차르트는 유럽 전역에서 위대한 음악가로 명성을 드높이고 있던 시기인지라.......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은 모차르트를 기록화에 그려 넣었다. 동서고금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참으로 많다. 어디서 어떻게 살던지 이런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인가....
카롤린 엘리자베트는 씨씨(SiSi)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불리어진다.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관광상품 중 하나인 초코릿의 모델이 모차르트와 씨씨이다. 그리고, 씨씨 박물관이 따로 있을 정도로 오스트리아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여인이다. 씨씨는 당대의 미녀였나보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파티장에서 만난 15세의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정혼자로 정해진 그녀의 언니를 버리고 씨씨와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황제는 매우 절제된 생활을 하고,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 뒤를 이어 합스부르크 제국을 다스리는 바쁜 정치 생활로 그녀와 관계가 좋지 않았나보다. 그녀는 매일 반나절 이상을 자신의 미모를 가꾸기 위해 투자했다고 한다. 그래서 긴 머리에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인형이 나오는데.....그 인형이 있는 방이 바로 씨씨가 많은 시간을 보낸 공간이었다. 자신이 미인이라는 것을 알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했지만......이를 예쁘게 봐줄 사람이 없었으니.....어찌보면 불쌍한 여인이다.
더욱이 시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사이가 안 좋았던지.......시어머니는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싫어해서 작은 실수도 크게 부풀려 온 나라가 알게 소문을 낸다는 기록을 남겨 놓을 정도였다. 정치로 바쁜 남편......갈등이 심한 시어머니.......아이들과의 애착관계까지 원만하지 않았던지.......그녀의 관심은 궁 밖으로 향하게 되고.......결국 그녀는 유럽 각지를 여행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일년 중 빈에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그녀는 스위스에서 무정부주의자의 칼을 맞고 객사하게 된다. 아무리 당대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미인이면 뭐하나 그 아름다움을 어루만져주며 사랑해줄 사람이 없었으니 말이다. 어찌보면 위대한 합스부르크 왕족 600년 동안 화려하고 웅장한 문화를 만든 오스트리아인들은 외롭게 살아간 여인을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궁전에서 화려한 장식의 끝을 보여주는 대형 무도회장과 왕족들이 식사를 하던 식당이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온다. 나무를 조각해 휘황찬란한 문양을 꾸미고 금박으로 마무리해서 수많은 촛불을 올려 완성한 커다란 샹들리에를 화려한 천장화 밑에 걸여 놓았다. 40미터 이상의 길이와 10미터 이상의 폭을 갖고 있는 대형 무도회장을 단 2개의 샹들리에로도 꽉 채운 것 같은 느낌을 줄 정도로 크고 웅장하며 화려하다.
그 샹들리에 아래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천장화는 종교화로 꾸미지 않고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의 태평성대를 찬양하는 오스트리아식 용비어천가의 회화 버전으로 위대함과 화려함을 느끼기에 충분한 프레스코화 작품이다. 대형 무도회장의 특색에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있다.
왕족들은 서로에게 어떤 감정이였을까.......아무리 화려한 생활을 하더라도 한 인간의 모습을 함께 공유하는 관계였을텐데.......마리아 테레지아의 화려하게 꾸며진 대형 침실과 씨씨 부부가 사용했던 큰 침실도 공개하고 있었지만.......나에게는 그렇게 포근하고 안락한 침실로 보이지는 않았다......그런 침대에서 자면 편안하게 푹 잘 수 있을까.....하하하~! 가족들이 식사하는 식당이 그나마 인간적으로 보였다. 나의 아이들과 모여 앉아 식사할 수 있는 공간. 하얀 보가 깨끗하고 정갈하게 깔려 있는 식탁과 위에 놓여 있는 화려하지 않는 하얀 도자기 그릇들....금박이나 보석으로 치장하지 않은 소박하게 반짝반짝 빛나는 포크와 나이프.......합스부르크 왕족은 가족들과 식사를 하면서 어떤 이야기를 하였을까.....
오디오 가이드 설명 중 짧지만 귀에 쏙 들어온 것 중 하나가........왕족도 궁전을 꾸미는데 참여했다는 것이다. 특히 왕족들도 서민들의 기술을 배웠으며 이를 활용하여 자신들의 공간을 꾸미기도 했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서민들의 기술이라면 소소한 생활 속의 기능일 가능성이 높다.....그런 것들을 스스로 배우고 익혀 자신의 생활을 했다는 것인데......우리 500년 조선의 왕족은 똥도 스스로 못 닦고 궁녀가 뒤처리를 해줘야 했고, 옷도 스스로 입지 않고 팔만 벌리고 있으면 입혀주었다고 하는데......밥은 혼자 먹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중간 중간에 커다란 거울의 방들이 나타난다. 이 거울의 방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인들을 위한 방이었다. 커다랗고 화려한 장식으로 이루어진 거울과 촛불들로 꾸며진 거울의 방은 왕가의 여인들이 자신의 미를 표현하고 가꾸는 공간이었고, 여인들의 사교가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나 보다. 우리 근혜 누나가 왜 그렇게 거울의 방에 집착을 했는지.....어떤 마음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는지......
쇤브룬 궁전에는 나폴레옹과의 인연도 있었다. 나폴레옹이 2번이나 빈에 왔었고 이곳 쇤브룬 공전에 머물기도 했다고 한다. 합스부르크의 공주가 나폴레옹에게 시집을 가면서 두 가문이 연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내려오고 나폴레옹 2세가 이곳 빈에 와서 외가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정원을 가꾸며 은둔의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래 살지 못하고 병으로 일찍 사망하게 된다. 아무리 위대한 정치가로 세계사에 남은 인물이라도 이렇게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면.......나폴레옹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살았을까.......
합스부르크 왕족은 자신들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유능한 외교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뛰어난 재정가로서의 능력도 갖추었던 것 같다. 합스부르크 왕족의 재정이 힘들어졌던 시기가 있었나보다.....그런데 황제가 자신의 재정전문가로서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재정 위기를 극복했다는 설명이 나온다....한 개인이든, 가족이든, 가문이든, 왕족이든, 국가이든 재정 관리 능력이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이루어낼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듯 싶다.
그리고 이 위대한 합스부르크 왕족의 역사도 작은 시골에서 시작되었으며.....그 가문이 시작된 곳의 주변을 커다란 기록화로 만들어 큰 방에 걸어 놓았다.......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하려는 자녀교육이 아닌가 싶다.....
황제의 집무실도 공개하고 있는데......생각보다 크지 않는 책상을 사용했던 것 같다. 1440개의 방을 화려한 장식으로 꾸민 궁이지만 집무실은 집중력을 높일 수 있는 공간 구조로 되어 있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책상의 크기가 마음에 들었다. 나의 손때가 묻어 반짝이는 단순한 문양의 책상과 의자로 꾸며진 공간을 갖고 싶은데.....지금은 쉽지 않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위대한 600년의 역사를 만들었지만 세계 1,2차 대전 거치며 급격하게 막을 내려버린 합스부르크 왕족에 대한 동경과 환상이 있는 것 같다. 이는 그들의 위대한 역사를 다시 재현하고 싶은 열정과 자신들의 뿌리에 대한 자긍심이 아닌가 싶다. 그런 자긍심을 만들어준 합스부르크 왕족에 대한 애정이 아닌가 싶다.
(합스부르크 왕족의 저주라는 이야기가 있다. 너무나 드라마틱하게 화려한 왕족의 역사가 막을 내렸으니 말이다. 마지막 왕족은 하야를 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의 끝을 알리는 서약식을 하고, 공국을 선포하여 지금의 오스트리아가 되었다.
비록 마지막 왕족은 외딴 섬에서 인생을 마무리했지만, 마지막 왕비는.....우리로 치면 국장을 거행하고 국립묘지에 안치되었다.)
더 이상 왕족이 존재하지 않는 대한민국......그것도 나라가 일본에 의해 망하면서 극한 고난과 시련을 안겨주며 역사의 단절을 초래하며 사라져가 이씨 왕족......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신의 목숨이라도 내놓으려 절실함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돈이 되는 왕실 자산을 처분하여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이씨 왕족......자신의 안녕을 위해 나라를 팔고 일본의 작위를 얻기 위해 열안이 되었던 고간대작들......
솔직히 그런 왕족에 대한 애정이 있지는 않다.....
600년의 위대한 역사를 자랑하는 합스부르크 왕족의 삶을 일부라도 살펴보았다. 위대함은 쉽게 만들어지지도 않지만 지키는 것도 참으로 힘들었을 것 같다. 나는 무엇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그리고 오늘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반문해보며 쇤브론 궁전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