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자의 질문2313-목사님 대답해주세요. 성경은 ‘선생이 되지 말라’ 하셨는데 왜 입니까? ☎ 010-7793-0153
듣기 ☞ http://file.ssenhosting.com/data1/bbh3004/lsj20230328.mp3
안녕하십니까? 십계명회복선교교회 이소자입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목사님 대답해주세요. 성경은 ‘선생이 되지 말라’ 하는데 왜 입니까?」입니다.
지난 번 말씀으로는 그리스도의 ‘군사’의 의미를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선생’과 ‘스승’의 의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질문입니다. ‘선생’과 ‘스승’을 ‘교사’라고도 하는데 ‘선생’과 ‘스승’은 의미가 확연히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신약성경은 ‘선생’을 헬-‘디다스칼로스’라 하고, ‘스승’은 ‘파이다고고스’라 합니다. ‘말소리’가 다른 것은 의미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선생’과 ‘스승’을 우리말로 그 의미를 정의하면 그 기준은 ‘사람’의 정체성이 동물과 다르다는 데서 비롯됩니다.
‘동물’은 본능으로 살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하였기 때문에 ‘육체의 욕구, 욕망’을 억제하는 이성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동물처럼 본능으로 살지 않고 사람답게 사는 법, 즉 도리(道理)와 규범(規範)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은 ‘사람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 학생’(學生)입니다.
그래서 무릇 사람이면 누구든지 ‘선생’과 ‘스승’이 있어야 합니다.
‘선생’은 ‘학생’과의 관계로 누구든지 차별 없이 학생으로 받아들여서 ‘학생의 인생을 위하는 사람’으로 자기의 문하(門下)을 이룰 수 없고, ‘스승’은 ‘제자(弟子)’와의 1:1의 관계로 ‘어떤 조건으로 자기의 전문적인 것을 제자에게 전수(傳授)하고, 제자는 스승에게 조건을 제공하여 스승의 것을 받는 관계’로 문하를 이루고, 조건에 합당하지 않으면 스승은 그 제자를 파문(破門)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선생’과 ‘스승’의 다른 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의 관계는 예수님이 선생이면서 스승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학생’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선생’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는 조건’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스승’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23: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예수님의 친족 형제 야고보는 성령의 감동으로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약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
야고보가 이렇게 편지한 것은 야고보 시대 사람들이 ‘선생’이라는 직임의 권위와 명성에 마음이 끌려 도덕적, 윤리적, 영적인 책임 의식 없이 선생이 되려는 사람이 교회에도 문제가 될 만큼 심각했음을 짐작케 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의 문제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되어 성경을 상고해보았습니다.
왜 ‘선생이 되지 말라’ 하는지도 말씀하였습니다.
『[약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에 굴레 씌우리라 [3]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몸을 어거하며(제어하며) [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선생’은 무엇으로 먹고 삽니까?
『‘말’로 먹고 삽니다. 그래서 ‘말에 실수가 많으니 입에 재갈을 먹이고, 선생이 되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물론 ‘스승’도 말로 먹고 사는 신분입니다.
신약성경에 ‘스승’을 언급한 기록은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딤전2: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디다스칼로스=선생)이 되었노라’』
디모데전서는 순교를 앞둔 사도 바울이 사도직을 계승하는 에베소교회의 목사인 디모데에게 보내는 ‘목회서신’으로 사도 바울이 자기가 ‘믿음과 진리 안에서 이방인의 스승(디다스칼로스=선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후에 보낸 편지 디모데후서 4:2로 이렇게 권하였습니다.
『[딤후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디다스칼로스=선생)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교회 안에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 사람들(기독교인들)이 자기의 사욕을 위하여 많은 스승을 둔다’는 것입니다.
딤전2:7의 사도 바울이 자기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다는 그 ‘스승’과 딤후4:3, 4의 ‘귀가 가려운 기독교인들이 자기의 사욕을 위하여 좇는 스승’은 같은 의미의 ‘선생’인 ‘디다스칼로스’입니다. 한글성경은 둘 다 ‘스승’으로 번역하였지만 헬라어는 ‘선생’입니다.
그렇지만 직임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딤전2:7의 ‘스승’과 딤후4:3의 ‘스승’은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사도직을 계승하는 에베소교회 목사인 디모데에게 사욕을 충족해주는 선생이 되지 말라고 편지 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늘날 교회 ‘목사들’에게 엄히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 사욕을 좇는 귀가 가려운 기독교인들에게 스승노릇 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선생질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께서 사도 바울로 말씀하셨습니다.
『[고전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파이다고고스)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교회 안에 ‘사욕을 좇는 기독교인이 많이 두는 스승’이 어떤 자들이라는 것입니까?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라고 하시니 ‘아비 된 마음이 없는 자들’이 사욕 때문에 귀가 가려운 교인들에게 스승노릇(선생노릇)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이 되지 말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딤전1:11로는 구체적으로 증언하였습니다.
『[딤전1: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디다스칼로스=선생)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예수님은 ‘선생이 되지 말라’ 하셨는데 사도 바울은 자기가 ‘선생으로 세우심을 받았다’ 하니 잘 못 된 말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교사로 세우심을 받았다’ 한 것입니다.
교회들이 주의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의 터가 된 사도들’입니다. ‘교회’는 ‘사도들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이지 ‘그리스도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가 아닙니다.
『[고후3:3] 너희는(고린도교회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사도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먹으로 쓴 것, 돌비에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은 교회는 유대사상, 유대주의 율법조문에 의한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4:4의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 요6:63의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하신 ‘영이신’ 예수님의 말씀, 요3:6로 말씀하신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하신 성령으로 난 영이 된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기 때문에 ‘사도들의 증언이 육의 심비(마음)에 기록된 성도들의 공동체’가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기 때문에 자기를 교회의 ‘교사(디다스칼로스=선생)’라 한 것입니다.
이렇듯 교회의 ‘선생’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증인으로 보내신 사도들입니다.
사도 요한이 그것을 증언하였습니다.
『[요일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그러니까 ‘인자이신 나사렛 예수’를 직접 목도하고 만진 증인인 사도들과 그리스도의 제자들 외에는 선생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들만이 교회의 터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사렛 인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증인이 ‘아닌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선생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교회학교의 ‘교사’를 세우는 것은 ‘그 교회’의 교사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교사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성경을 서로 다르게 말하고, 교회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다르게 말하는 것은 이에 원인이 있습니다.
사실이 그러함을 성령께서 사도 베드로로 말씀하셨습니다.
『[벧후2: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민간에’ 즉 ‘사회에 거짓 선지자들이 준동’을 하였지만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합니다. ‘너희 중에도’입니다. ‘교회 안에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사욕을 좇는 기독교인들의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주는 말’을 하는 거짓말쟁이 선생들입니다.
이어서 어떻게 귀를 즐겁게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2]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3]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利)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잠자지 아니하느니라』
‘너희로 이(利)를 삼으니’를 흠정역(제임스왕역)은 ‘너희를 상품 취급하리니’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의 교인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는 말을 하는 선생들은 교인들을 ‘상품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교인 수(數)’로 ‘중형 교회’ ‘대형 교회’라고 하는데 교인들을 상품 취급하는 말일 수 있기 때문에 자랑할 말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즉 오늘날 교회 안에 ‘아비 마음을 하지 못한 일만 스승들’이 득실거리는 중에 ‘사도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가 마음에 기록된’ 교사는 누구인지 분명하게 이해야 합니다.
다음 말씀으로 확인이 됩니다.
『[갈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합니다. 그러면서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이라 합니다. 그래서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흠정역-진실로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있으리라)’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무엇이 ‘의롭다함을 얻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까? ‘몽학선생 율법’입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믿음이 온 후로는’ 즉 ‘하나님이 구세주 그리스도로 세상에 임마누엘 하신 후로는 몽학선생인 율법 아래 있지 않다’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몽학선생인 율법’입니다. 율법이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임마누엘 하시기 전까지 하나님이 세우신 ‘선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선생입니까?
21, 22의 ‘능히 살게 하는 율법’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는 율법’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둔 율법’입니다. ‘사람이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다가 멸망하는 것이 죄의 결과’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어리석은 사람, 즉 ‘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일깨워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 하신 것입니다.
‘몽학선생’의 ‘몽학’은 ‘어린 학동’이라는 의미이지만 ‘어리석은 사람’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그래서 생명이 무엇인지, 죽음과 사망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선과 악’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살려주시려고 율법으로 하나님께로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아비 마음을 한 선생’과 ‘사욕 때문에 가려운 귀를 긁어주는 거짓 선생 일만 스승’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이해가 됩니다.
‘몽학선생인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바르게 말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입니다.
대한민국 교회 목사들은 ‘사도들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아버지 마음을 한 선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습니까?
말씀을 마치며 정리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거짓 선생들이 가만히 끌어들인 ‘멸망케 하는 이단’의 대표적인 것은 ‘재물 신(神) 맘몬!’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마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맘몬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런데 오늘날 교회 목사들은 ‘땅의 재물(맘몬)’을 하나님의 복이라 ‘축복’합니다.
성령께서 사도 베드로로 말씀하신 말씀을 다시 듣습니다.
『[벧후2: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 [3] ‘저희가(거짓 선생들이)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利)를 삼으니(너희를 상품 취급하리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잠자지 아니하느니라』
오늘날 교회들 중에 ‘교인들을 상품으로 여겨’ 멸망케 하는 이단 맘몬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인 거짓 선생들 많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을 잘 상고하셔서 예수님이 왜 교회의 문을 두드리시는지 생각해보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아멘!
- - - - - - - -
후원은 기독교 개혁선교에 큰 힘이 됩니다.
☎ 010-7793-0153
국민은행
008601-04-158786
십계명회복선교교회
이소자 목사 글 보기
☞ https://band.us/@lsjso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