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9:1-57, 아비멜렉과 세겜의 악행, 23.5.3, 박홍섭 목사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반복적으로 우상숭배의 죄에 빠져서 겪게 되는 비극을 보여줍니다.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이 다시 바알을 섬기고 바알브릿을 신으로 삼는 우상숭배에 빠지고 맙니다. 사사기 9장은 그렇게 하나님이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따라가는 고질병에 빠지게 될 때 그 결과가 어떠한지를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을 통해 보여줍니다. 여룹바일의 아들, 즉 기드온의 서자인 아비멜렉이 외가인 세겜 사람들을 부추겨 이복형제인 69명의 기드온의 아들들을 죽이고 왕이 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아비멜렉은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싶다는 욕망을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 욕망으로 외가 사람을 부추겨 우상의 신전에서 나온 부당한 정치자금 은 70을 받고 깡패들을 사서 배다른 형제를 다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됩니다.
이 참극에서 기드온의 막내 아들인 요담이 살아남습니다. 하나님은 요담을 통해 한 비유를 들려주시고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고발하고 세상의 욕망을 좇아 하나님을 배반한 행위의 결말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말해주십니다. 7-20절을 보십시오. 이 풍유를 통해 요담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지 않은 이유는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각자 하나님께 받은 귀한 소명과 정체성이 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는 각자 기름과 열매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 일을 하는 동안 그들은 그 일이 너무 기뻐서 왕이 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았고 그 정체성을 따라 살 동안에는 자기의 삶에 너무 만족했고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정당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처럼 모두 자기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죄로 생각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일로 만족하고 자기 배우자로 만족하고 자기 아이들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어떻습니까? 자기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릅니다. 가시나무의 용도는 딱 하나 땔감입니다. 가시나무가 이것을 자신의 중요한 사명으로 알고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면 다른 나무들이 자기에서 왕이 되어 달라고 했을 때 “안돼 내 사명은 마지막에 불에 타서 다른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 주고 땅을 데워주는 거야”라고 하면서 거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더라면 하나님이 그를 놀랍게 축복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 알지 못하고 욕심을 채우려 했습니다. 가시나무가 무슨 그늘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그늘이 되어줄 테니까 다른 모든 나무에게 자기의 그늘 안에 들어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 안에 있는 분노의 불로 다른 모든 나무를 태워버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중요한 점은 요담이 이 비유를 아비멜렉과 세겜에 대한 저주라고 하면서 그리심 산에 올라가서 선포한 점입니다(7). 그리심 산은 에발 산과 함께 축복과 저주를 선포할 때 축복을 선포했던 언약 의식의 장소입니다. 문제는 왜 저주를 선포했던 에발 산이 아니고 축복을 선포했던 그리심 산인가 하는 점입니다. 지금 요담의 선포는 비록 공적인 언약 갱신 의식은 아니더라도 언약에 관련하여 저주를 선포하고 있기에 에발 산이 그 저주의 성격에 합당합니다. 왜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에서 저주가 선포됩니까? 지금 이스라엘의 상태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뒤집혀 있습니다. 축복이 선포되던 곳에서 더이상 축복이 선포되지 못하고 저주가 선포될 만큼 언약에 실패하고 정체성이 뒤집혀 있음을 그리심 산에서 저주가 선포됨으로 보여줍니다.
언약의 복들은 모두 언약 백성을 위한 내용이므로 언약 백성들이 복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 되지 못할 때 그 복들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당연히 그 복을 선포하던 장소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축복을 선포하던 곳이 저주를 선포하는 곳이 됩니다. 복을 받을 자들이 없는데 축복하는 곳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심 산에서의 저주 선포는 복 받을 자들이 없어져 버린 이스라엘의 현실, 곧 언약이라는 거울에 금이 간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럼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세상의 욕망을 따라갈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자신의 뜻대로 될까요? 처음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세겜은 처음에 아비멜멕을 왕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습니다. 아비멜렉이 왕으로 있었던 시간은 불과 3년입니다. 그 후에는 세겜이 오히려 아비멜렉에게 반기를 들고 아비멜렉은 다시 그들과 싸워야 합니다. 결국 이들은 치열한 난투극을 벌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리고 세상으로 나가보십시오. 그래서 세상과 언약을 맺고 세상 속에서 위로를 받으며 살아가기로 작정해 보십시오. 처음엔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래가지 않습니다. 아비멜렉과 세겜의 밀약도 삼 년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그리스도인과 세상의 밀월 관계도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세상은 자신과 언약을 맺은 그리스도인을 상처 주기 시작하고 그도 또한 세상을 흠집 내기 시작합니다. 결국 둘은 언제 다정했느냐는 듯이 격렬하게 싸웁니다.
하나님을 떠난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언약을 맺고 그 세상의 언약으로 세상 속에서 잘 살고 대우받으며 성공하게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세상의 배신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언약이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철학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세상의 약속에 속아 그 약속 붙들고 살다가 깨지고 상해서 두 손 들고 돌아오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약속으로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약속으로 살아가려고 하면 속는 일밖에는 없습니다.
혹시 여전히 세상 약속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면 아비멜렉의 최후를 보십시오. 그는 어이없게도 한 망대를 공격하던 성문에서 이름 없는 한 촌부에 의해 죽습니다. 하나님은 한 여인이 맺돌 윗짝(머리)을 던져 스스로 왕(머리)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던 아비멜렉의 두개골(머리)을 깨뜨립니다. 얼마나 오묘하면서도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머리라고 생각하던 자의 머리가 머리 되는 돌덩이에 의해 깨어졌습니다. 그것도 여인에 의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렇게 정확하고 오묘합니다. 높아졌던 그 부분을 정확히 치시고 깨뜨리십니다. '70'명을 한 반석에서 죽이고 왕이 되었던 아비멜렉이 결국 그 일을 위해 은'70'개를 내준 사람들에 의해 배신을 당하고, 스스로 '머리'가 되려 하던 자의 '머리'가 한 여인이 던진 맷돌 '머리'에 의해 박살나는 것을 보십시오. '70'을 배신하고 '70'에 배신당하더니 머리가 되려다 머리가 깨져 죽었습니다.
정리해 봅시다. 세상의 언약을 의지해 머리가 되어 보려고 해 봐야 머리만 깨집니다. 높여 주시는 일은 하나님이 해 주셔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언약 속에 높여 주심에 대한 약속들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를 세상 속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싫어서 스스로 왕이 되려 하여 세상과 언약하면 그 언약이 결국 우리의 머리를 깹니다. 그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언약으로 성급히 왕이 되려 합니다. 돈이라는 세계의 왕, 정치라는 세계의 왕, 권력이라는 세계의 왕이 되려 합니다. 하지만 항상 더 높이 망대에 올라간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맷돌 윗 짝이 날아와 머리를 깰지 모릅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언약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뿐이며 진정으로 우리의 높아짐을 기뻐하는 언약도 그 언약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떠나 스스로 왕이 되려 하지 말고 주 안에서 언약 백성으로 머물면서 믿음으로 신실하게 잘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