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소세지에 오이지라?
을지로 입구 세운상가. 전자 제품이 널려있는 곳에 윤재가 발을 디뎠다. 가정용 컴퓨터로 나온 컴퓨터를 장만하기로 나선 주말 오후 외출이었다.
삼보 트램의 16비트 컴퓨터. 일반 산업용으로 출시된 지 얼마 안 되고서, 나온 가정용 보급 컴퓨터와 프린터를 구입했다.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평창동 외할아버지댁에서 Today를 연주하고 어른들로부터 받은 금일봉을 다 털어놓기로. 윤재는 단단한 각오로 샀다. 가족이 선물한 컴퓨터다.
스테레오 카세트도 한대 추가했다. 장비가 좋아야 효율이 날개를 다는 법. 회사 일을 마치고 집에서도 할 일이 많을 거니까.
컴퓨터는 충직한 비서로, 카세트는 바깥세상과 소통의 메신저로 임명했다.
***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윤재의 폐부를 찔렀다. 퇴근 후, 침상에 누워 듣는 오페라 합창. 손을 뻗어 카세트 볼륨을 좀 올렸다.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다.
강하다 싶다가도 다시 부드럽게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오르내리는 선율이 거듭되면서 윤재의 몸이 나비처럼 꿈틀거렸다. 예술가의 손길이 따로 없었다.
‘강을 건너온 자’, 히브리 사람들이 즐겨 불렀다는 노래. 이탈리아인들에게 제2의 국가라고 불렸던 베르디가 작곡한 노래 오페라 나부코가 울려 퍼졌다.
베르디가 세상을 떠날 때 30만 인파가 애도하며 몰려들었고, 그 자리에 울려 퍼졌다는 오페라 나부코. 억압받은 자들이 노역 현장에서 부른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왠지 윤재 몸에 잘 받았다. 억울한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힘들고 고단할 때 누어서 들으면 알 수 없는 힘이 다시 충전되었다. 리튜얼, Ritual이 뭐 별거겠는가. 몸과 마음이 하나 되고 새롭게 거듭나면 되는 것이지.
***
윤재가 드랩터앞에서 연필을 깎으며 도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AMC 프로젝트 일환으로 보완한 레이아웃 도면. 이제 가까스로 본도 윤곽이 잡혔다.
AMC 출장 준비를 위해서 정 팀장님도 관련 업무 조율에 바빴다. 오늘도 평택 공장에 들렀다가 광주 공장으로 떠났다. 한 대리님은 본사로 출근했다.
윤재는 여기저기서 오는 업무 전화를 받으며 팀을 지키는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됐다. 공격수, 수비수를 동시에 해야 했다. 더해서 골키퍼까지 하며 날아오는 공도 막았다.
공을 받아 안거나, 아니면 있는 힘껏 쳐냈다. 정신없었지만, 노련한 운동선수 같은 최상의 기량은 쑥쑥 성장세를 탔다.
개발 차량 만드는 시작 반에서 다급하게 온, 천 대리님의 전화에 윤재가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 났나. 왜 저리 까칠한 목소리로 명령이야. 정말.
T2 프로젝트 일환으로 진행 중인 시제작 차량을 보러 현장 시작 반으로 내려갔다. 안색을 찡그린 채, 오달인 판금 반장이 망치로 판넬을 두들기고 있었다.
“오 반장님. 수고가 많으세요.”
“어. 강 기사. 오랜만이네. 어쩐 일이야.”
“T2 시제작 차량 확인하려고요. 오달인 반장님 마술 손 솜씨도 보러 왔어요. 좀 전에 천 대리님이 전화했는데요. 천 대리님 어디 계시죠?“
“마술 손 솜씨면 뭐 하나? 설계자들이 도면을 제대로 그려서 보내야지. 잘못 그려 보내면. 헛심 팽겨. 나야 도면대로 애써 시간 맞춰 만들었는데. 뭐야, 다시 만들어야잖아.
아~힘 빠지네. 정말. 못 해먹겠어. 사무실에선 연필만 굴리면 되는 거여? 현장에 자주 들러 확인도 하고서 해야지.
어으~ 그 천 대리. 아침부터 핏대나 세우고 난리던데. 혼자 일하나? 젠장.”
뭐야. 아침부터 심상치 않은 분위기다. 그 천 대리님은 어디 갔나. 그때 저만치서 정 대리님과 천 대리님이 옥신각신 언성을 높이며 걸어왔다.
“야, 정대리. 네가 도면 잘못 그려줘서 오 반장님이 애쓰게 만든 도어 이거 못 쓰게 됐잖아. 바디 몸체와 매칭이 안 돼. 5밀리는 단차가 생겨서.
이거 만드는데 일 주일간 눈 빠지게 고생했는데. 너 땜시 개발 시제작 차량 일정 못 맞추게 생겼다.
너 평소 치밀하고하면서도 깐깐하잖아아. 근데 이번엔 뭔 일 있었냐? 평소 꼼꼼한 정시재답지않게”
“어떡하냐~ 내가 그런 실수를 할 줄 꿈에도 몰랐네. 중간에 점검하면서 그려야 했는데.”
듣고 보니 사달이 벌어졌다. 저런 실수면 어떡하냐. 변명으로 될 일도 아니다. 윤재가 천 대리 앞으로 걸어가 가만히 인사했다.
“천 대리님. 부르셨어요?”
“어, 강 기사. 이거 큰 일났다. 한 대리는 어디 갔냐? 정 대리 땜시 개발 시제작 차량 일정 못 맞추겠다. 개발 총괄팀에서 긴급회의 소집해라. 어서!”
정 대리가 머리를 긁적이며 기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서두르느라 옆쪽 바디 틀 필라 쪽. 중간 변경 사항을 미처 못 챙겼네. 어으~ 나도 쉬지 못하고 눈알 빠지게 집중해서 그린 건데.
오 달인 반장님. 정말 죄송하네요. 강 기사. 일을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 이해해라.“
그 말에 천 대리가 정 대리를 향해 또 질타했다.
“넌 이 상황에서 뵈는 게 없냐. 나한테는 사과 한마디도 없이.”
“야, 천 대리. 오 반장님과 강 기사한테 먼저 미안하다고 한 게 죄냐. 동기가 그런 것도 이해 못 해주냐. 너도 되게 못 됐다.”
“뭐야. 이 자식 봐라.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정말. 그러게 네가 소세지란 소릴 듣지, 소세지. 맞지 않냐?“
“뭐, 소세지라고? 내가 그 말 듣기 싫다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또 이렇게 날 무시하냐. 오 반장님이나 강 기사 앞에서. 넌 인마! 사람이 왜 그러냐? 그럼 넌 지식아 오이지겠다, 오이지!”
세상에, 지금 말싸움이나 할 때는 아닌 것 같은데. 천 대리와 정 대리의 언성이 계속 올라가며 주먹다짐 직전까지 갔다. 나이 먹어도 감정 건드리면 다 짐승 된다.
대리분들이 감정싸움이나 하고 일 났네. 엎질러진 물 어떻게 할 건가. 대책이나 빨리 세워야지. 그때 들려오는 커다란 목소리. 시작부 최선규 부장님이었다.
“야, 자식들아! 여기가 너네 안방이냐? 뭐 잘했다고 작업장 분위기 말아먹냐 지금. 천 대리! 너 당장 내 방으로 올라와!”
“알겠습니다. 부장님.”
천 대리가 최 부장님앞에 고개를 숙였다. 정 대리는 몸 둘 바를 모른 채, 최 선규 부장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최 부장님. 제 불찰이라 죄송합니다.”
“정 대리! 너 자식. 일 똑바로 안 할래? 대리 2년차가 그런 실수나 다 하고. 너도 즉시 올라가 설계변경 검토해. 밤을 새워서라도 마쳐라. 그래야 너 산다. 알겠냐?”
“ 네. 부장님. 끝마치고 퇴근하겠습니다.”
멱살잡이 싸움 일보직전까지 갔던 천 대리와 정 대리가 자리를 떴다. 윤재도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가려는데 오 반장이 물었다.
“강 기사. 천 대가 정 대리한테 말한 게 그게 무슨 말이야? 왜 그 말에 화를 내고 난리지. 소세지 말야. 또 오이지는 뭐냐?”
“아이구. 오 반장님도. 지금 그런 것 아는 게 중요해요? 소세지는요. 소심하고 세심하고 지랄 같다는 말이에요. 오이지는 오만하고 이기적이고 지랄 같다는 말이고요.
정 대리님은 소세지 A형이고, 천 대리님은 오이지 O형이라서요. 두 분은 동기지만 천적 같아요. 소세지와 오이지. 아이 시큼해.”
“푸 하하하~ 난 또 뭔 소린가 했네. 그 소세지와 오이지를 최 부장님이 씹어버렸구먼. 잘한다 잘해. 이렇게라도 해서 웃으니 내 얼굴이 좀 펴지네. 크크크.” *
19화 끝 (3.521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