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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통가리로 크로싱
“저스틴. 통가리로 산행에 제니도 간다며? 나도 그 팀에 들어갈 자리가 있어? 뉴질랜드 통가리 크로싱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잖아.”
“그럼. 엘리가 부탁하는데. 자리가 없어도 당연히 엘리 자리는 만들어야지.”
“언제부턴가 통가리로 크로싱(Tongariro crossing)을 마음에 두었어. 저스틴이 팀 만들어서 간다는 소식 듣고. 이렇게 간청하는데 승낙해주니 정말 기쁜데.”
민재가 보드 멤버 후보로 나설 때, 응원하면서 만난 피닉스 운전사 팀이 준비해온 산행이었다. 여기에 사무실 엘리가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킨 모하니 장례식 일 처리 하느라 애쓴 보드 멤버들도 좀 쉬는 시간, 주말로 날짜를 잡았다. 금 토 일. 2박 3일로 5명이 팀을 꾸려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장거리 산악 등반 경험이 많은 저스틴이 팀장을 맡았다. 민재도 오클랜드 주변 산악 지대를 누빈 터라 팀워크를 위한 준비에 여러 가지를 챙겼다.
여름에서 가을로 들어서는 계절에 2박 3일간 5명이 나섰다. 날씨도 화창했다. 점심 식사 후, 저스틴 승합차를 타고 오클랜드에서 출발했다.
베이스캠프, 숙소에 도착해 팀장인 저스틴이 팀원들을 보며 격려했다. 모두 저마다의 배낭과 짐들을 꺼냈다. 숙소 방 두 개에 넓은 거실이 소박했다.
“저녁이라 기온이 차가운데. 먼저 벽난로에 불 좀 지피고. 바비큐 틀에 고기도 구워야겠네. 제니와 엘리는 쉬고. 남성 전사 셋이 서비스하는 거야.”
필립이 데크에 있는 바비큐 틀을 맡아 닦아내고 고기를 구웠다. 스테이크가 먹음직하게 지글지글 소리를 내가며 익어갔다. 나중에 삼겹살도 얹었다.
민재가 한국식으로 준비해온 상추, 깻잎, 쌈장, 스테이크 소스 등을 데크 파라솔 아래 식탁에 올렸다. 앞 접시와 와인 잔 포크 젓가락도 배열했다.
저스틴이 벽난로에 장작으로 불을 지폈다.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금세 장작이 타오르며 거실을 뜨뜻하게 데워 나갔다. 장작타는 소리가 음을 탔다.
레드와인 한 박스를 들고 나왔다. 3리터짜리, 뉴질랜드에서 즐겨 찾는 Velluto Rosso였다. 와인 박스에 문구(Soft & Smooth)가 분위기를 돋웠다.
앞치마를 두르고 고기 굽는 필립이 양산박 주막을 연상시켰다. 수호전에 나오는 산적 같았다. 데크 파라솔 식탁에 다섯이 빙 둘러앉았다.
출출했던 터라 배가 꼬르륵 소리를 내기도 했다. 필립이 주문을 받았다. 스테이크를 입맛대로 익혀 각자의 접시위에 올렸다.
“미디엄!”
엘리는 중간쯤 익은 거로 주문했다.
“웰던!”
제니는 아주 잘 익은 거로 부탁했다.
“레어!”
저스틴은 약간만 구워 살아있는 상태로 요청했다. 민재와 필립도 똑같이.
민재가 돌아가며 와인잔에 레드와인을 가득 따랐다. 잔을 든 얼굴에 곧 홍조가 물들 판이었다. 등반팀장 저스틴이 먼저 건배사를 외쳤다.
“치어스(Cheers)!”
여기저기 잔 부딪치는 소리가 저녁 공기를 깨웠다. 빗소리도 멈췄다. 여유 있게 스테이크를 들면서 와인 잔을 비워나갔다. 속이 꽉 차 들어갔다.
얼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엘리가 스테이크를 씹으며 와인을 죽 마셨다.
“일 마치고 갖는 시간이 생소한데. 주말에 통가리로 입구 산장 숙소라니. 이렇게 먹고 마시니 아주 특별해. 피닉스 팀 고맙고. 자 건배 한 번 해야지”
엘리가 원더풀! 하고 외치자 모두 따라서 원더풀을 다시 외쳤다. 참으로 좋은 시간이 맞았다. 시작이 반이라더니 이 정도만 해도 반은 온 것 같았다.
스테이크 접시를 비워가자 다음은 삼겹살이 올라왔다. 삼겹살 안주는 민재가 챙겼다. 상추, 깻잎에 파 무침까지 그리고 쌈장도 올려 한국식을 맛보였다.
고기를 굽던 필립 눈이 동그래지며 힘을 받는 느낌이었다. 저 맛이 내게 딱 맞는데. 잔들을 다시 채우고 이번에는 필립이 건배를 외쳤다.
“깐뻬이!”
민재가 상추에 삼겹살을 얹고 그 위에 파 무침과 쌈장을 올렸다. 필립 입 속에 밀어 넣었다. 필립이 왕방울만 한 눈을 껌뻑이며 우적우적 씹었다.
엘리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민재를 보며 제비 새끼처럼 입을 벌렸다.
“나도 저렇게 한 잎 싸줘 봐. 존! 아니 민재!”
민재가 좀 작고 더 예쁘게 깻잎쌈을 싸서 엘리 입에 대자, 엘리가 먹이 물고 온 엄마 새 앞에 작은 입을 벌렸다. 제니가 푸푸 하며 입을 가렸다.
엘리가 오물오물 잘도 씹었다. 민재가 큰 깻잎쌈을 하나 싸서 저스틴에게도 먹여 주었다. 저스틴은 쌈을 받아 베어 먹었다. 오래도록 씹었다.
“나도 입 있는데~”
제니가 민재 옆에서 입을 삐쭉거렸다. 민재가 모른 척했다. 제니가 다시 채근했다.
“나만 빼고 다 먹이고 뭐 하는 거야? 민재야!”
민재가 상추 아닌, 깻잎에 특별하게 쌈을 쌌다. 고추 썬 것도 하나 얹었다.
민재가 제니 입안에 쌈을 쏙 넣어주었다.
쌈을 다 먹고 난 제니가 눈물이 핑 돈 상태로 민재한테 다가와 옆구리를 콕 꼬집었다. 민재가 주춤했다. 제니가 접시 위에 남은 고추를 가리켰다. 아~하!
민재가 제니 앞에 물 컵을 살며시 내밀었다. 제니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졌다 졌어. 병 주고 약 주네. 정말. 그래도 밉지는 않네. 민재 녀석. 뭐지?”
민재가 동료들에게 건배를 제의했다.
“카르페 디엠!
이 순간을 즐기자고.“
물을 마시고 난 제니가 마지막 건배사를 조용히 읊었다.
“이멤버 리멤버!
우리 서로 기억해야지.“
동료들이 제니 건배사에 공감하며 잔을 부딪쳤다.
여행은 어디로 가는가 보다도 누구랑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을 되 새겼던 밤 시간. 집 떠나서 동료들과 만나 나누는 저마다의 이야기꽃들… .
***
별이 총총한 새벽하늘을 올려다보며 모두 일어났다. 새벽 4시 30분.
다들 일어나 기쁜 맘으로 산행 준비를 했다. 지난 밤 민재와 제니가 싸둔 김밥과 초밥을 챙겨 먹었다. 점심으로도 배낭 속에 꾸려 넣으니 든든했다.
타우포호숫가 큰 도로 버스 서는 곳까지 걸어갔다. 5시 30분이었다. 5시 40분, 기다리던 통가리로크로싱 미니버스가 도착했다.
현지인, 키위 할머니 운전사가 반갑게 인사말을 건네 왔다. 버스 이용 안내를 해줬다. 먼저, 산행 초입까지 버스로 1시간 정도 이동하기로 했다.
8시간 종일 등반 후 종착지에서 그 회사 차를 타고 다시 숙소까지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통가리로크로싱 출발지까지 둘러보는 버스 투어도 생경했다.
“싱가포르 면적만큼이나 넓다는 타우포 호수. 뉴질랜드의 푸른 심장 좀 봐. 호수를 끼고 굽이굽이 도는 길이 환상적인 꿈속 나라를 연상시키네.”
“우와! 저 멀리 하얗게 쌓인 만년설 좀 봐. 가까이 초록 들판에 풀 뜯는 하얀 양 떼들 하며~. 겨울과 여름이 공존하네. 그 위에 햇살이 쏟아지는구먼.”
출발지 망가테포포에 도착하기까지 신선한 경관에 탄성이 그치질 않았다.
출발지 망가테포포에서 종착지 케테타이 까지 18.5 Km의 코스. 약 8시간의 산행. 성스러운 종교 행사에 초대받은 느낌이었다. 민재 일행도 설레었다.
온통 외국인 일색이었다. 휴가를 얻어 함께한 영국인, 독일인, 프랑스인, 일본인, 호주인, 덴마크인, 스위스인 등등.
출발지에 모인 등반객을 행해 등반 안내자가 다양하게 설명해주었다.
“통가리로는 뉴질랜드 최초로, 세계에서는 네 번째로 탄생한 국립공원입니다. 1993년 세계 최초로 자연과 문화 복합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어요.”
“밀포드 트랙이 여성처럼 아름다운 곳이라면, 통가리로는 남성미 넘치는 다이나믹한 트랙킹 코스지요.”
“일 년 중 며칠 되지 않는다는 맑은 날이 우리 편이네요. 오늘은 축복의 날
입니다. 이런 사실이 정말 감사하지요. 자 안전하게 등반을 합시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7만 명의 등산객이 찾는 곳이라니 그 인기나 명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민재 일행, 피닉스 팀도 오길 잘했다고 입을 모았다.
출발지 망가테포포에서 소다 스프링으로 가는 늪은 아름다웠다. 돌무더기 위에 놓인 장거리 데크 발판 위도 걸을 만해 좋았다. 엘리와 제니에게도.
소다 스프링에서 사우스 분화구까지 계속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서부터 호흡이 가빠졌다. 엘리 발이 먼저 풀리기 시작했다.
1/4 지점도 못 온 것 같은데 앞 선 자와 뒤 선 자의 사이가 크게 벌어졌다. 민재도 평소 걷기 운동을 좀 해서 자신감을 가지고 임했는데 만만치 않았다.
전 코스 중 제일 힘든 곳이었다. 가장 힘들어하는 엘리를 앞세우고 저스틴이 뒤에서 배낭을 받쳐 밀어주었다.
제니도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처음엔 민재가 내민 스틱을 잡고 따라오다 주저앉곤 했다. 급기야 제니 배낭을 민재가 받아 앞가슴에 맸다.
몸이 뚱뚱한 필립은 자기 몸 하나 간수하기 힘들어하며 헉헉댔다.
정상 부근에 쌓인 눈 무더기와 구름이 산 중턱을 휘감고 돌았다. 웬 신령스러운 영봉인가! 반지 제왕에 운명의 산으로 나오는 나우루호에 산이었다.
필립의 걸음걸이가 불안했다. 얼굴을 찡그렸다. 민재가 다가가 필립 신발을 벗겼다. 신발 속에 작은 돌가루 같은 것이 들어가 꽤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민재가 반 무릎을 한 채, 필립 신발 속을 털어냈다. 신발 끈을 다시 동여매 주었다. 필립이 그런 민재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민재가 한 마디 건넸다.
“필립. 우리는 큰 산에 걸려 넘어지는 게 아니야. 이런 작은 돌가루에 힘들어하다 쓰러지는 거지. 마치 우리네 인생사와 같아. 자 힘내자고.”
민재가 배낭에서 오이를 꺼내 동료에게 나누어 주었다. 모두 앉아 쉬면서 오이를 깨물어 먹었다. 힘이 좀 솟아났다. 다크 초콜릿도 나눠 들었다.
힘든 오르막길을 끝내고 나니, 이번 크로싱 코스의 정상인 레드 크레이터 (화산 분화구)가 나왔다.
풀 한 포기 없는 황량한 돌무더기와 거친 돌조각에 붉은 화산흙이었다.
“아~여기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다른 행성 같네. 지구가 아니야. 다양한 화산 분화구와 용암이 식은 곳이네. 삭막하기 이를 데 없어. 사막보다 더 삭막해.
기괴한 석상의 화산암과 특이한 냄새가 나면서 드러내는 희한한 세상이야.”
분화구 아래, 신비스럽고 환상적인 빛깔을 가진 세 개의 에머랄드 호수에서 증기가 모락모락 나오며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차가운 산성 호수로, 마오리들이 타푸(성역)라 부르는 블루 레이크에 이르렀다. 비탈진 화산 돌 모랫길을 내려오다 엘리가 그만 미끄러졌다.
뒤따르던 저스틴이 제니 배낭을 붙잡다가 함께 데굴데굴 굴러 내려갔다. 결국 저스틴의 손바닥에 상당히 큰 생채기를 남겼다.
엘리도 옷이 돌가루로 엉망이었다. 민재가 재빨리 다가가 엘리와 저스틴을 잡아끌어 앉혔다. 엘리 옷을 털어주고 배낭에서 구급 의약품을 꺼냈다.
저스틴 손의 생채기를 소독하고 약을 발라주었다. 제니가 해밀턴 가든 일을 회상하며 민재를 다시 바라보았다. 엘리도 찬찬히 민재를 지켜봤다.
8시간, 종일 걷고 넘어지고 기진맥진할 때였다. 일행이 에머랄드 호수를 내려다보며 민재가 꺼낸 김밥과 초밥을 먹었다. 필립이 한 마디 했다.
“야. 이 김밥과 초밥. 누가 만들었어? 정말 꿀맛이네. 최고야 최고, 이 맛!”
그 뒤로 계속되는 내리막길부터 종착지 케테타이 까지는 덤불이 이어졌다. 이어 저지대 울창한 나무숲이 녹색 지대를 만들며 반겼다.
“와! 저 세차게 흘러내리는 계곡물 소리에 귀가 번쩍하네. 인간사는 마을이 가까워졌잖아. 사람은 여행, 산행을 하면서 살아야 해. 세상이 새롭게 보여.”
“풀 한 포기 살 수 없는 화산 지형에서 울창한 숲으로 들어오니 좀 살 것 같아. 일상에서 자연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맛이라니“
엘리의 선창에 제니가 후창으로 받았다. 나머지 셋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 생태계 분포도를 함께 섭렵한 산행이었어. 하여튼 여러모로 유익한 자연학습 시간이었네. 땀 흘린 보람을 충분히 만끽했으니까.”
“어젯밤 늦게까지 벽난로 앞에서 모여 나눈 인생 이야기는 정말 좋은 추억으로 남을 거야.”
저스틴과 필립도 한 마디씩 읊조렸다. 민재가 마무리 발언을 했다.
“이번 산행은 역사를 만나고, 자연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고, 행운을 만나는 축복의 장이었어.”
“원더풀!”
“이멤버 리멤버!”
풀 한 포기의 소중함과 돌 하나에 얽힌 역사와 생명의 신비함이라니. 침묵의 자연 속에 담긴 보이지 않는 손길을 언제 느꼈던가.
밤새워 나눈 대화를 통해 서로를 알게 된 본 소통의 맛은 어떻고. 모두 서로 나눌 수 있는 모습으로 살아 있음에 다시금 감사를 올린 날.
운명의 산을 넘어 현재를 선물로 받았다. 버스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계곡물 소리와 산새 소리에 발길이 가벼웠다. 이멤버 리멤버. 카르페 디엠!*
21화 끝 (5943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