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876 - 1973) 스페인의 첼리스트이자 작곡가,지휘자.
1.첼로의 성자(聖子), 파블로 카잘스 (Pablo Casals)
카잘스는 1876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남쪽에 있는 카탈로니아의 시골에서 태어났다. 올린을 배웠으며 그 다음으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첼로를 배웠다. 에 의해서였다. ...내가 처음 첼로 소리를 들은 것은 호세 가르시아의 연주를 들은 당시였다. 그 이전에는 그런 악기를 본 적도 없었다. 아름다웠다. 게 말했다. "아빠, 저거야말로 내가 연주하고 싶은 악기예요". 이때부터 카잘스는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호세 가르시아에게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다. 주를 했는데 당시 단골 손님 중 하나는 그를 이렇게 회상했다. 다....
이 그를 왕궁에 초빙하여 연주를 하게 하였고,그에게 첼로 '갈리아노'를 하사했다. 그는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학교에서 호세 가르시아에게 사사 받았으며 마드리드 음악원을 나왔다. 쉽고 좋은 소리를 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그후로는 이 새 주법의 발견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2.파블로 카잘스와 첼로의 성서,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첼리스트 카잘스를 말할 때 그가 첼로의 새로운 운지법을 고안해냈다는 것 말고,더욱 중요 한 것이 있다면 그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만남이다.
래된 악보 상점에 들렀다. 어를 발견했다. 나는 마치 왕관에 달린 보석들처럼 그 악보를 품고서 돌아와 방에 처박혔다. 대했을 때의 놀라움은 항상 생생하게 마음속에 남아 있다. 가 생기지 않았다. 『나의 기쁨과 슬픔, 파블로 카잘스』>
무려 200여 년간이나 먼지 속에 잠들어 있던 바흐의 걸작『무반주 첼로 모음곡』악보를 거 리의 헌책방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카잘스로 인해 이 곡은 첼로의 성서가 되었다. 스의 열의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르러서야 비로소 녹음을 했다. 로 발매되었다. 가르시아의 지도로 첼로를 익히기 3년만에 그는 벌써 스승을 능가하는 첼리스트가 되었 고,1898년,친구이자 작곡가인 엔리케 그라나도스의 첫번째 오페라 「카르멜파의 마리아」의 리허설 지휘를 맡으며 지휘자로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지 몰고 갈 정도로 절망하게 했다. 파리는 많은 뛰어난 작가들,화가들,음악가들이 모이는 예술 활동의 중심지였다. (Ravel)과 생상(Saint-Saens), 그리고 카잘스가 유명한 몇몇 초기 녹음을 함께 했던 음악가 이자이(Ysaye), 티보(Thibaud),코르토(Cortot) 등과 사귀었다.
3.한 사람의 위대한 음악가이자 위대한 인간이었던 카잘스
카잘스는 파리에서 연주하랴,관광하랴,친구들과 사귀랴 매우 바빴지만,다른 방면의 지식을 얻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자신의 인생 철학도 발전시켰다. 그는 어떻게 웃는가,행복한가를 알고 있었지만,본질적으로 그는 진지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었다. 대한 강한 믿음을 가졌으며,종교적,사회적인 질문들에 대한 그의 감상적인 마음은 거의 위 험한 수준이다.”라고 썼을 정도였다. 였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는 심지어 자살까지도 고려했다.리틀헤일스는 또한 카잘스가‘계시록’으로 받아들였던 칼 맑스(Karl Marx)의 저작들도 읽었다고 쓰고 있다. 에 의해 저질러지는 보통 사람들에 대한 억압에 분연히 항거할 것을 결심했다. 으며,그 자신의 인생에,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세계에 커다란 충격을 미쳤다. 1958년에 국제연합의 총회장에서 카잘스가 그의 첼로를 연주했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향인 카탈로니아 지방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있던 그는 1919년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사재를 털어 바르셀로나 카잘스 관현악단을 조직한다. 지휘자들(쇤베르크,프로코피예프,클렘페러,앙세르메 등)을 초빙해 연주하여 그의 관현악단 은 꾸준히 성장해 간다. 라는 카잘스의 음악관에 따른 것이었다. 나를 습격하는 바람에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 내란은 1936년 7월 17일,이태리의 뭇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로부터 물자와 군대를 대량으로 지원받은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에 의해 발발했다. 자 독일에서 첼로 연주하는 것을 중단했다. 중 카잘스는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그는 반란군들이 곧 바르셀로나에 들이닥친다는 것을 카잘스에게 알려 온 것이다. 내서 전투가 발발할 때 자신들의 가족들과 함께 있게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고했다. 카잘스는 그 메모를 교향악단과 합창단에게 읽어줬다. 의 마지막 악장을 연주하는 것으로 대신 하려는지 물었다. 창단은 쉴러의 시를 카탈로니아어로 불렀다. 고향에 다시 돌아온다면 다시 한 번 함께 모여 연주할 것을 맹세했다. 다니는 폭도들로 채워져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의 다른 도시들은 파시스트에게 점령되었다. 문자 그대로 피의 욕조로 변해 버렸다. 수 없었다. 믿지 않았다. 되었고,그 때에야 비로소 자신들이 누구를 죽일 뻔했는지 깨닫고 사과했다. 어느 때는 무장한 남자들이 카잘스의 집에 와서 카잘스의 친구를 체포했다. 대해 매우 분노하면서,강경하게 항의하였다. 록에 올랐다. 람이 있었고, 카잘스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내란은 3년 동안 계속되었고, 스페인 국토는 황폐화했다. 에 의해 대략 7만명의 시민들이 학살되었고,반란군들이 내륙으로 이동함에 따라 희생자들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5.프랑코 독재정권에 항의하여 10년간 첼로 연주를 멈추다
스페인 내전이 결국 프랑코의 승리로 끝나자 그는 프라데에서 프랑코가 다스리는 스페인에 서 망명해 오는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온갖 힘을 기울였다. 다. 지를 설명하겠다며 그를 초대하자 카잘스는 "그는 정치를 말할 속셈이지만 나는 도덕을 논 하고 있는 거야"라며 이에 응하지 않았다. 프라데에서 개최하는 바흐 음악제에 참가한 때문이었다. 어 프라데에서 축전을 열었다. 게티,그리고 피아니스트 제르킨과 같은 세계 일류 연주가가 그를 위해 불과 5,400여명의 주 민이 살고 있는 이 작은 도시를 찾아온 것이다. 옮겨 갈 때까지 매년 베풀어졌다.
카잘스가 푸에르토리코로 옮긴 뒤 푸에르토리코 정부에서는 푸에르토리코 대학의 협력으로 카잘스 음악제를 베풀기로 하였다. 르토와 바이올리니스트 티보와 함께 트리오를 만들어 활약했다. 이 트리오는 세계에서 으뜸 가는 것이었으나 티보는 비행기 추락 사고로,코르토는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 뒤에는 홀로 남아 활동해야 했다.(정확히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일설에는 티보가 사고 당하기 이전부터 트리오는 해산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그 이유는 티보가 파시 스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 까닭에 파블로 카잘스가 그와는 더 이상 연주 활동을 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았다. 몬테스와 결혼한다. 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젊은 아내를 맞이하여 100세까지는 문제없이 살겠다고 장담하던 카잘스는 그 약속을 못 채 우고 1973년 10월 23일 푸에르토리코의 아우크시료 무토오 병원에서 향년 96세의 나이로 세 상을 떠난다. 이때 카잘스가 임종의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음악 역시 바흐라고 한다. 카잘스의 부인 몬테스가 요청했다고 한다. 다. 한 평생 첼로만을 연구하고 사랑했던 첼로의 성인이었던 파블로 카잘스. 자 양심의 소리에 따르는 강하고 의연한 생활 자체로서 그대로 더없이 훌륭한 예술의 경지 와 결부된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록 신이 내려준 축복이자 선물이었다.
7.작곡가로서의 카잘스
카잘스는 1902년(25세)까지 활발한 작곡 활동을 보였고 그의 선생님들도 카잘스의 작곡 능 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가 첼리스트이기 보다는 작곡가의 길을 가길 바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 력이 주요하게 된다. 1932년 Montserrat 수도원에 헌정 하기 위한 성가곡들을 작곡하면서 다시금 작곡 활동을 시 작했고,이 후 프랑코의 독재에 항거하여 공식적인 연주 활동을 접었을 동안에도 여러편의 작품을 작곡했다. 1962년에 카잘스는 그가 전쟁중에 작곡한 평화의 오라토리오 'El Pessebre'와 함께 평화운 동을 시작한다고 공표하고 타계하기 직전까지 오케스트라와 함께 전세계를 다니며 음악으로 써 평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나는 아티스트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다.인간으로서 내 첫번째 사명은 동시대인들의 복 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다하도록 나는 노력할 것이다. 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것이다."... - Pablo Casals 카잘스는 자신이 죽기 전에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인 자신의 명성이 작품 평가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Montserrat 수도원의 성가대를 위해서 작곡한 종교음악에 대해서는 출판을 허락해 그가 생존해 있을 때 출판되었고 'El Pessbre' 또한 그가 타계하기 몇 달전에 출판되었다. 현재 레코딩,발매 된 그의 작품으로는 'El Pesebre'와 Montserrat 수도원에 헌정된 성가곡 들인 'O vos omnes', 'Nigra sum', 'Eucaristica', 'Salve Montserratina' 등이 있다. 이 작곡 리스트는 커크(H.L.Kirk)가 카잘스의 미망인 마르타(Marta)의 도움으로 카잘스 사 후에 그의 집에서 발견 된 악보들을 기초로 작성한 리스트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주요한 작품들은 모두 포함하고 있다.
|
출처: 사랑 과 꿈 원문보기 글쓴이: black sil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