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26일 일요일.
새벽 1시. 배가 많이 흔들린다. 잠에서 깨어 윈디를 보니 바람이 27노트, 항 밖 파도가 2.5미터. 오트란토 마리나는 외부 방파제가 없어 파도의 영향이 많다. 옆에는 곤하게 자는 아내와 차가운 곳을 찾아 여기저기 굴러다니며 자는 우리 딸 리나. 이들은 온전히 아빠 하나를 믿고 지구 반대편에 있다. 가족 모두가 함께 하는 요트 여행이니 행복하겠다, 부럽다 말하는 분들이 많지만 ‘집 떠나면 고생’ 이라는 말이 왜 생겼겠는가? 여행의 본질은 고생이다. 그것을 이국적 정취와 신기한 세상 구경으로 갈음하는 거다. 이 정도 배가 흔들리면 선실에 앉아만 있어도 멀미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텐데, 다행이 우리 가족은 끄떡없이 잘 먹고 마신다. 오늘 저녁 6시 이후에야 풍랑이 잦아든다.
밖에 나가 배를 점검하고 계류 줄을 당겨 묶는다. 선수 클리트 아래 밧줄에 의한 마모 방지를 위해 덧 댄 스텐 커버 조각이 하나 떨어져 나가고, 티크에 흠집이 생겼다. 방치하면 티크가 떨어져 나가겠다. 월요일 무스카텔로에게 말해 스텐 커버 조각을 덧 붙여 달라 해야겠다. 이런 사소한 일조차도 부품이 있을까? 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 그러다 다시 생각한다. 세일요트는 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그게 본질이다. 그렇다면 내 배는 언제든 출항 가능하다. 마음 편하게 먹자. 나이 들수록 점점 더 노심초사하게 되는 성향에서 벗어나 보자. 노력이라도 해보자. 육체가 아니라 마음이 먼저 노화한다. 나는 육십이지만 환갑 어쩌구 했으면 여기 이탈리아에서 아드리아해와 지중해를 항해할 꿈도 꾸지 않았을 거다. 나는 코히마르(Cojimar)의 산티아고처럼 사자 꿈을 꾼다.
어쩌다 보니 오트란토에서 제일 큰 요트가 되어 버렸다. 마리나에는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이 모여 우리 요트를 구경하는 경우가 잦다. 리나는 선실 계단을 올라가 목을 내밀고 부둣가를 구경한다. 혹시나 떨어질까 염려해서 반드시 따라 올라가 안고 내려온다. 계단 끝에 올라간 리나가 갑자기 손을 흔든다. 뭐지? 하고 올라가 보니 이탈리아 노부부가 미소 짓고 있다. 지나가다 요트 구경하는데, 갑자기 조그만 동양 꼬맹이가 쏙 올라와 고사리 손을 흔든 것이다. 노부부의 표정이 진짜 절묘하다. 개들도 많이 데리고 다닌다. 그래서 깔끔한 대리석 길에 깔린 개똥도 조심해야 한다. 개가 뭔 죄. 개똥을 뿌리고 다니는 인간들이 문제지.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서나 다 비슷하다.
부둣가 주유소 근방에는 동네 노인네들이 아침부터 나와 담소중이다. 이탈리아식 손짓과 몸짓. 지켜보고 있으면 상당히 재미나다. 실례되지 않을 정도로 지켜보다 눈이 마주치면 본 조르노 하고 인사한다. 그러면 그분들도 반드시 본 조르노 하고 답인사를 건넨다. 한달 가까이 이탈리아 살면서 인사를 쌩까거나, 뭘 봐? 눈깔어! 하고 시비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적게는 두세 명 많게는 팔구 명씩 모여 수다를 떨면서도 멱살을 잡거나 다투는 이들을 본적이 없다. 다들 알로라! 알로라! 해가며 즐거운 표정들이다. 그러고 보니 주정뱅이도 한명도 못 봤네. 이들은 뭔가 외롭지 않아 보인다. 혼자 노트북을 켜거나 우두커니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선 사람이 하나도 없다. 사교와 대화의 즐거움이 그대로 남은 사회다. 빠르고 편리한 IT세상.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이탈리아에는 아직 남아있다. 눈부신 발전이라고? 어쩌면 우리 사회 전체가 고독 행 직행열차에 탑승 중일지도 모른다는 우울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턴다.
가든 카페에서 영상 자료를 올리다 문득 바다를 보니 오트란토 내만으로 들이치는 파도가 장난 아니다. 아내에게 리나를 맡기고 배로 뛰어 간다. 가보니 역시나 배 뒷부분이 부두에 닿고 있다. 미리 끼워둔 펜더 3개중 하나가 다 찌그러져 있다. 부교를 내릴 새도 없이 배로 점프해서, 뒷줄 두 개를 풀고 앞 줄 두개를 당겨 배를 부두에서 조금 더 떨어트린다. 라고 적으면 아주 간단 한 것 같다. 실은 죽을 고생했다.
13톤 넘는 배가 조류 힘을 받아 움직이니 계류 줄이 클리트에 돌처럼 단단히 묶였다. 도저히 손으로 풀리지 않아 배 안 공구 통을 열고 드라이버를 꺼내 간신히 줄을 푼다. 앞 계류 줄은 배 무게를 그대로 받는다. 배 흔들림에 맞추어 줄이 느슨해지는 순간! 사력을 다해 당긴다. 헛! 겨우 당겼는데 도로 주르르 풀려나간다. 어차피 힘으로 될 일이 아니다. 요령이 필요하다. 죽을둥살둥 계류 줄에 매달렸다가 간신이 40센티쯤을 당긴다. 기온은 12도인데 온몸에 땀이 배고 손발이 떨린다. 한계를 느낀다. 몸이 무리한다는 경고를 보낸다. 혈당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파도에 밀리는 배는 요동치고, 나는 매순간 몸의 피로를 느낀다. 나는 젊지 않다. 27%쯤 남은 핸드폰 배터리 표시를 보는 느낌. 오늘 저녁엔 여기저기 쑤시겠군. 일단 배는 부두에 직접 닿지 않는다. 펜더를 다시 정리하고 태엽 풀린 인형처럼 느릿느릿 걸어 아내에게 간다. 가다가 누가 헤이 킴! 하기에 보니 파브리치오다. 내가 배에서 사투를 벌이는 걸 본 모양이다. 파도가 세지? 늘 있는 일이야. 오후면 괜찮아질 거야. 오케이 괜찮아져야지.
혹시 잊을까봐 미리 이야기하는데, 이탈리아에서 제일 친절한 마리나 관리인을 찾으려면 오트란토 마리나에서 파브리치오를 찾으면 된다. 몇 안남은 남은 계류 선석을 운영하고, 밤에만 전기 사용가능하고, 지금 Wifi 안테나가 부서져 매 주마다 온다고 뻥치는 기술자를 기다리지만, 몇 가지 불편함을 빼면 하루 계류 비 20유로. 엄청 저렴하고, 부탁하는 것은 뭐든 해결해 주려고 노력하는 선한 사람이다. 오트란토 마리나의 파브리치오. 인간미 물씬 풍기는 사내다.
이곳에서 몇 번 마주친 중국인 아줌마가 있다. 오늘도 마주쳤다. 오늘은 남편도 같이 왔다. 길에 서서 수인사하고 물어보니 5년 전 중국에서 은퇴하고 이탈리아에서 산다고 한다. 그렇다면 중국 공산당 간부였거나 상당한 재력가겠지. 아내는 중국인 아줌마 자전거가 꽤 허름하다고 한다. 그렇게 주목 받지 않고 사는 게 제대로 노후를 즐기며 사는 거다. 중국서 은퇴하고 이탈리아서 사는 건 중국에서 절대 보통일은 아니다. 남편은 보기에도 포스가 느껴진다. 핸드폰으로 뭘 열심히 찾더니 내게 보여준다. 인기 드라마 카지노다. 최민식! 최민식! 하며 열광한다. 역시 한류다. 뿌듯하다. 두 분 나중에 한국 오면 꼭 들르라고 인사한다.
정오가 되자 종탑의 종들이 요란하게 울린다. 40년 전까지도 강릉에서 흔히 듣던 소리다. 이젠 끊겨 들리지 않는 그리운 소리. 한때 우리에게 머물다 사라진 것들을 이탈리아에서 보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뒤에 남기며 어디로 가는 걸까? 제대로 가기나 하는 걸까? 젠장, 벌써 뻐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