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18:1-16, 사랑과 시기를 동시에 얻은 다윗, 24.5.8, 박홍섭 목사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골리앗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승리로 이끌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크게 다윗을 환영합니다. 이 사건은 다윗에 대한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사울에게 극단적으로 다른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극진히 사랑하게 되었고, 사울은 다윗을 미움과 증오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먼저 요나단의 반응을 보십시오. 1절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여기 마음이 하나 되었다는 말을 영어 성경은 ‘뜨개질하다’로 번역했습니다. 뜨개질은 실과 실을 서로 엮어 하나의 옷을 만드는 행위입니다. 그처럼 서로 엮여서 하나 되는 상태이며, 다른 말로는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다고 표현합니다.
3절에도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라고 합니다.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그런 사랑이 언약을 맺게 했습니다. 언약은 사랑의 결과이며 사랑은 언약을 낳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여 언약을 맺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언약을 맺었다는 말은 그의 다윗 사랑이 인간의 감정과 상식을 뛰어넘은 하나님과 우리의 언약을 내포하고 있는 신적 섭리의 결과로 보아야 합니다.
그 뒤에 나오는 4절이 이를 더욱 잘 반영합니다.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요나단의 사울의 장자입니다. 왕위 계승 서열 1번입니다. 그런 요나단의 겉옷은 단순한 겉옷이 아닙니다. 왕자와 왕위 계승의 공식적인 권위가 있는 옷입니다. 특별히 지금은 전쟁터에서 입는 군복이 겉옷입니다. 군복만큼 계급과 권위를 차별하여 나타내는 옷이 어디 있습니까? 가장 서열의 차이가 뚜렷한 옷 중의 하나가 군복입니다. 그런데 그 옷을 다윗에게 벗어 줍니다. 왕자의 무기와 칼과 활과 띠도 다 줍니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왕위 계승자이지만, 그 모든 지위와 신분을 너에게 넘겨준다는 뜻입니다.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사랑은 단순한 우정이 아닙니다. 호감을 표하는 감정적인 좋아함의 의미도 아닙니다. 왕자의 권세와 왕이 될 자격도 넘겨주는, 다윗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이양하는 사랑입니다. 마음과 생명을 다해 사랑했고 그 사랑을 언약으로 나타내었으며, 그 언약이 참되고 진실함을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뜻하는 겉옷과 무기를 넘겨줌으로 확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행하신 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백성들이 승리하게 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도하는 왕의 모습임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보이자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택하시고 그와 함께하고 계심을 깨닫게 되고 주저함 없이 자신의 모든 왕위 계승의 권리와 자격과 신분을 다윗에게 이양한 것입니다. 자신이 아니라 다윗을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 인정했습니다.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이런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 사랑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다윗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랑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주권을 맡기고 넘겨주듯이 하나님께서 왕으로 택하여 세우신다고 믿은 다윗에게 자신의 왕위 계승권과 모든 것을 넘겨주었습니다.
이 언약적 사랑으로 인해 다윗은 이후 사울의 핍박으로부터 생명을 건질 수 있게 됩니다. 실제로 19장에서 사울이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명했을 때 요나단이 그 사실을 다윗에게 알려주고 은밀한 곳에 피신시킨 뒤 사울에게 다윗은 죄가 없고 블레셋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공을 세웠으니 죽이지 말라고 간청하여 사울이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다시 다윗을 궁으로 데려옵니다. 그런데 또 사울이 악령이 들어 다윗을 창으로 죽이려 하자 다윗이 밤 중에 도망하여 자신의 집으로 갑니다. 사울이 전령들을 다윗의 집에 보내어 아침에 죽이려 하지만 다윗은 아내 미갈의 도움으로 창을 타고 내려와서 라마의 사무엘에게로 도망합니다. 여기까지 사울의 손길이 미치자 다윗은 라마나욧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에게 갑니다. 그리고 요나단에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너희 아버지가 이렇게 나를 죽이려고 안달하냐고 애통하면서 자신과 죽음 사이는 실로 한 걸음뿐이며 너 모르게 사울이 나를 은밀하게 죽일 수도 있다고 호소합니다. 심지어 다윗은 요나단과 자신의 언약을 말하면서 내게 죄가 있다면 사울에게 죽는 것보다 너의 손에 죽는 것이 나으니 차라리 요나단 네가 나를 친히 죽이라고 말합니다(20:1-8).
다윗의 이런 호소를 듣고 있던 요나단은 자신이 사울의 의향을 살펴서 네게 알려주겠다고 하면서 만약 그렇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기를 원한다는 자기 저주의 형식으로 자신의 사랑이 변함이 없음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20:14-16입니다.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지금 어떤 상황이라고요? 요나단이 다윗을 지켜주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실제로 그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오히려 다윗에게 자신을 살려달라고 하면서 너의 인자로 우리 집을 끊어 버리지 말라고 자신과 자기 집안의 안위를 당부하면서 다급하게 언약을 맺으려고 합니다. 요나단은 알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그가 쫓기는 처지이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고 계시며 장차 다윗을 대적하는 사람은 지면에서 끊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때 다윗에게 여호와의 인자를 베풀어줄 것을 부탁하면서 자신과 자기 집안의 안위를 의탁하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서로 언약 관계를 확증합니다.
이것은 23장에도 반복됩니다. 16-18을 보십시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머물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여기서도 자신을 잊지 말고 기억하여 자신과 자신의 집을 후대해 달라고 반복해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확인하면서 부탁합니다.
그러므로 요나단의 다윗 사랑은 단순한 감정과 순간적인 느낌에 기인한 사랑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복종하는 믿음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그 뜻에 근거해서 자신을 다윗에게 다 내어주는 언약에 근거한 언약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백성들이 다윗에게 보이는 사랑과는 다릅니다. 16절에 “온 이스라엘과 유다가 다윗을 사랑하였다”라고 하는데 이는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여 언약을 맺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 것과 다릅니다. 백성들이 다윗을 사랑한 것은 자신들에게 유익을 주었기 때문에 좋아하고 지지하는 순간의 반응입니다. 이들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블레셋을 물리친 일을 두고 열렬히 다윗을 환영하고 개선장군으로 칭송했습니다. 이들의 반응을 요나단처럼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다윗이 자신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면 언제 그랬냐고 하면서 변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울도 그랬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 아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였고”라고 했습니다. 5절도 이렇죠. “다윗이 사울의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로 군대의 장을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사울도 다윗을 귀히 여겼습니다. 다윗을 인정했고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여인들의 노래 소리에 다윗을 향한 그의 마음이 순식간에 변했습니다.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하자 사울은 너무 불쾌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시기와 질투를 넘어 극심한 경계와 분노를 품고 다윗을 주목하는 단계까지 나아갑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여기 주목은 그냥 바라본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윗이 백성들에게 자신보다 더 인기를 누리는 모습을 보고 시기와 질투와 분노와 경계로 그를 해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감시했다는 뜻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향한 극도의 분노와 질투와 시기의 마음으로 사로잡혀 있는 다윗 콤플렉스 속에서 다윗을 두 번이나 죽이려 합니다. 10-11을 보십시오.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안에서 정신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왜 사울이 이렇게 미쳐갑니까?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너무 아끼고 사랑하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폐하신다고 했는데도 포기를 못합니다. 다윗이 나타나 악한 영에게 시달리는 자신을 고쳐줄 때는 좋아하고 골리앗을 이기고 전쟁의 승리를 가져다 주었을 때도 좋아해서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했고 군대의 장으로 삼았지만, 그가 자신의 자리를 위태롭게 한다고 느꼈을 때는 자기를 너무 사랑하는 사울은 견디지 못했습니다. 견디지 못했고 다윗을 향한 마음도 바꾸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자기를 사랑하느냐? 아니면 자기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느냐의 차이입니다. 딤후 3:1-5을 찾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자기 사랑은 결국 자기 고통과 다른 사람과 세상의 고통을 초래합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마귀의 전략을 보십시오. 그들 안에 있는 자기 사랑의 욕구를 부추겼습니다. 네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있냐고 속였습니다. 거기서 죄가 산출되었고 모든 불행과 고통이 따라왔습니다. 자기 사랑이 돈을 사랑하는 것과 그 뒤의 모든 결과를 산출하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자기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다윗을 사랑할 수 있었지만, 사울은 자기를 너무 사랑하다 보니 하나님이 사랑하는 다윗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미워했지만, 실은 다윗을 사랑한 하나님을 미워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미워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는 그 지독한 이기성입니다.
이렇게 요나단의 사랑과 사울의 미움과 시기를 함께 받은 다윗이 어떻게 다윗의 미움과 살해 위험을 이기고 견딜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요나단의 사랑과 언약, 그리고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신의 믿음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모든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이냐? 자기 사랑이냐입니다. 사울이 지독한 자기 사랑으로 다윗을 미워하여 주목했던 그 마음과 눈을 내려놓고 다윗과 요나단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저녁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