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6:12-26, 복과 화 24.7.8, 박홍섭 목사
바리새인들과의 안식일 충돌 이후 예수님은 기도하기 위해 산으로 가십니다. 중요한 순간마다 기도로 아버지께 나아가는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누가복음의 특별한 강조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게 밤새도록 기도하신 뒤 주님은 날이 밝자 열두 사도를 택하십니다. 사도라는 헬라어 단어 ‘아포스톨로스’ (ἀπόστολος)는 'ἀπό' (~로부터)라는 접두어와 'στέλλω' (stello, 보내다)의 합성어로 ‘~로부터 보내어진 자’ 혹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신약교회 창설과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특별한 임무를 받고 그리스도의 대사로 보내어진 사람들이 사도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담은 신약교회를 창설하기 위해 많은 제자들 중에 열두 명의 사도를 따로 불러서 택하십니다. 그렇게 뽑힌 열두 사도의 이름이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나다나엘),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유다), 시몬, 그리고 가롯 유다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한 후 당신의 신적 지혜와 주권으로 뽑은 이 명단에 배신자 가롯 유다가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주님이 그의 배신을 몰라서 실수로 뽑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의 일부였으며, 예수님도 그의 배신을 알고 계십니다. 요 6:70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였지만, 그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가 멸망의 자식인 마귀임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왜 뽑았습니까? 시편 41:9, 스가랴 11:12-13의 말씀처럼 가룟 유다의 배신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일부입니다. 그의 배신을 통해 예수님은 체포되고, 십자가에 달려 죽습니다. 그렇게 주님이 우리의 죄와 죄책을 짊어지시고 죽고 부활하셔야 죄 사함의 은혜가 가능해지고 성령을 보내실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이런 하나님의 구원 경륜 가운데 열두 사도에 포함된 악한 자입니다.
사실 다른 사도들도 가룟 유다와 본질상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도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고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구원받고 나서도 죄 성이 있어서 끊임없이 십자가와 부활을 오해했고 높은 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는 날 이들은 모두 자신의 생명을 위해 스승을 부인하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포기하거나 내쫓거나 밀어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기둥들로 세워가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초석이 된 사도를 영웅시하지 말고 기도하면서 그들을 택해 끝내 그들을 교회의 기초와 기둥으로 사용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열심과 능력과 오래 참으심을 찬송해야 합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도 부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고 심지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며 궁금해하지도 않았고 자기 뜻만 주장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면서 계속 붙들어주시고 성도가 되게 하셨고 지금도 성도답게 교회답게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우리의 불신과 연약함과 패역함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더 큰 은혜로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누리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세워가려면 이 복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열두 사도와 무리들에게 소위 평지설교라고 불리는 말씀을 주십니다. 이 설교는 네 가지의 복과 네 가지의 화를 선언하는 내용으로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서로 같은 내용을 다루는 평행본문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R.T. 프랑스, D.A. 카슨, 마이클 윌킨스 등은 두 설교가 같은 설교를 서로 다른 관점과 목적으로 기록했다고 해석합니다. 반면에 크레이그 블롬버그, 조엘 그린, 존 놀란드 같은 학자들은 두 설교가 각각 다른 상황과 목적을 반영하고 있는 서로 다른 사건의 기록이라고 주장합니다.
두 설교는 시작과 끝이 같습니다. 복의 선언으로 시작해서 “두 종류의 집의 비유”로 끝이 납니다. 그 사이에 황금률, 원수를 사랑하라, 한쪽 뺨을 때리면 다른 편 뺨도 대라는 명령, 비판금지와 들보와 티의 교훈, 그리고 나무와 열매에 관한 생생한 비유들이 들어 있는 것이 비슷합니다. 하지만, 차이점도 많습니다. 마태복음은 여덟 가지 복을 말하지만, 누가복음은 네 개의 복만 소개하고 마태복음에 없는 네 가지 화를 언급합니다. 또한, 마태복음은 설교의 대상이 3인칭이지만, 누가복음은 2인칭입니다. 설교한 장소도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산 위에서 했고 누가복음은 평지에서 했습니다.
여하튼 산 위에서 열두 사도를 택하신 주님은 산을 내려와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복과 화를 선포하십니다. 주된 대상은 제자와 사도들이지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병을 고치기 위해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에서 주님께 나온 사람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 몰려든 사람들에게도 주님은 그 진리의 말씀을 생명의 떡으로 함께 나누어주십니다.
먼저 4가지 복을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가난한 자의 복을 말합니다. 직역하면 “복되다! 가난한 자들이여!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복을 선언하고 “왜냐하면”이라고 그 이유를 서술하는 형태입니다. 두 번째도 똑같은 형태로 주린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복되다. 지금 주리고 있는 너희여, 왜냐하면 너희가 만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는 자가 복이 있다는 세 번째도 마찬가지입니다. “복되다 지금 울고 있는 너희여 왜냐하면 너희가 웃을 것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 복은 예수님 때문에 미움을 받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네 가지 복을 말씀하시고 나서 주님은 정반대로 부요한 자, 지금 배부른 자, 지금 웃는 자,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고 있는 자는 화가 있다고 4가지 화를 말씀하십니다. 정리하면 가난한 자, 지금 주린 자, 지금 우는 자, 주님 때문에 미움을 받고 욕을 당하고 버림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부요한 자, 지금 배부르고, 지금 웃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자는 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설교의 핵심은 반전과 역전입니다. 굉장히 레디컬하고 선명합니다. 네 가지 복과 네 가지 화의 중간 두 가지가 지금을 강조합니다. 지금은 주리고 지금은 울지만, 나중에는 만족하고 웃을 것이므로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배부르고 지금은 웃지만 나중에는 주리고 나중에는 애통하며 울기에 화가 있다고 합니다. 역전과 반전입니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대사로 보내어지는 자는 앞으로 펼쳐질 그들의 삶이 어떤 성격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지금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예수로 인한 박해와 미움과 버림과 욕먹음으로 고통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임했으며 책임지는 주님의 사랑이 종말론적인 역전과 반전의 은혜로 그들 가운데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복은 지금 부자가 되고 지금 배부르며, 지금 웃고 지금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는 삶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에 붙들린 성도는 그 복이 목표가 아니라 예수가 목표가 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예수 때문에 가난해지고 배고프고 슬픔으로 울고 사람들의 미움과 박해와 욕과 억울함을 당해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를 믿고 의지하며 그가 보내신 부르심의 소망대로 사는 삶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복은 더 많은 힘으로 자기의 권리를 확장하고 삶의 안전과 영향력을 확대해나가는 것입니다. 부자와 배부른 자 웃는 자는 힘 있는 인생과 복 있는 삶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복은 힘으로 확보하는 권리의 확장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복은 내가 힘을 가지면 다른 누군가가 빼앗겨야 합니다. 내가 웃으려면 다른 사람이 울어야 합니다. 내가 이기려면 상대방은 져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은 그렇게 힘에 의한 자기권리와 소원을 펼치는 욕망의 확장이 아닙니다.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진리는 우리를 다른 사람과 싸울 필요가 없는 자유로 인도합니다. 성도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과 경쟁해서 이겨야만 복이 되는 삶의 원리가 아닌 그리스도로 만족하고 모든 형편에서 자족하며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전혀 새로운 삶의 원리를 배웁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목자가 되므로 굳이 다른 사람과 피 흘리며 싸우지 않아도, 지고 다른 사람보다 더 적게 먹고 입더라도, 설령 우는 일이 있고 억울함이 있어도 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누르거나 빼앗거나 속여서 그들을 울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은혜와 생명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을 책임지고 핸들링하는 주인이 계셔서 그분께 내 삶을 맡기고 자유합니다. 그 자유는 예수를 더 많이 얻을 수 있다면 내 인생과 운명을 손해봐도 좋다는 말도 안 되는 믿음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그 믿음을 우리가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믿음을 스스로 만들지 못합니다. 로마서 할 때 이미 확인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은 오직 은혜의 왕 노릇으로 생깁니다. 믿고 난 후의 거룩한 삶도 오직 은혜의 왕 노릇으로 가능합니다. 죄와 사망이 왕 노릇 하던 우리 인생에 은혜가 찾아와서 왕처럼 나를 다스리고 통치하여 이 특별하고 새로운 나라의 법도와 질서와 생명을 가르쳐서 배우게 하고 맛보게 하고 나누게 하십니다. 그렇게 은혜가 왕 노릇 하여 우리를 다스리기에 성도는 복됩니다. 세상이 말하는 어떤 불행과 고통으로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가난도, 배고픔도, 슬픔과 미움과 박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가 왕 노릇 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보다 그리스도가 더 좋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다 가져도 그리스도와 바꿀 수 없음을 압니다. 우리는 부자가 복의 진수가 아니며 지금의 배부름과 지금의 웃음과 지금의 인정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큰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왕 노릇 하지 않는 인생들, 여전히 죄와 사망이 왕 노릇 하여 부와 배부름과 웃음과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이 인생의 전부이며 가장 큰 목표와 의미와 가치가 되어 있는 사람은 이 진리와 자유를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졌다 할지라도 그 자체가 불행이고 저주이며 화입니다. 이들은 부가 주는 웃음과 배부름과 인정이 전부여서 거기에 자기 삶을 올인합니다. 이들은 이 세상이 전부이고 오늘과 지금이 전부이기에 영원한 나라에 관심이 없고 그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생명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나라의 생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의 눈에 영적 비늘이 벗겨지지 않는다면 여전히 자기 자신의 더 많은 권리와 행복을 확보하기 위하여 이웃과 경쟁하며 그들을 이기고 극복해야 하는 대상으로만 보게 됩니다. 신앙도 그런 수단이 됩니다. 그런 마음과 그런 눈에 이 나라의 복은 보이지 않고 이해되지도 않습니다. 부자, 배부름, 웃음, 칭찬과 인정과 박수가 복이지 어떻게 가난과 배고픔과 슬픔과 미움과 박해받음을 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저와 여러분도 여전히 그런 복과 화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의 복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기독교 신앙을 동원하고 계시는 분은 없는지요? 여러분은 예수 잘 믿어서 복 받는 삶을 무엇으로 기대하고 있습니까? 무엇으로 정리하고 계시며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오늘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여러분은 복 있는 자입니까? 아니면 ‘화 있을진저’에 해당하는 인생입니까?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주님이 복되다고 말씀하시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