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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의로움의 해답인 까닭은 무엇인가?(롬 4:1-25)
율법의 행위들은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하는 가짜 해답이다. 그런데 이 율법의 행위들이란 율법을 실제로 지키는 태도가 아니라 율법을 소유하고 자랑하면서도 정작 지키지는 않는 위선적 행태를 겨냥한다. 그런 점에서 할례, 음식 규정 및 절기 규정 등은 가장 대표적인 율법의 행위들이다. 이것들이야말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확실히 구별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칭의의 문을 열 수 없는 엉터리 열쇠다. 할례 받은 유대인이라고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다(갈 2:15). 유대인이라는 외적 신분이 칭의의 열쇠가 아닌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가 의인이라고 인정될 것인데(롬 2:13), 유대인이라는 외면적 정체성이 이런 실천적 순종을 가져다는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말은 정당하다. 하지만 이는 껍질이 아니라 알맹이의 문제다. 율법의 소유나 육체의 할례 등으로 확보되는 인종적, 문화적 정체성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와 율법 순종으로 드러나는 실천적 정체성이어야 하는 것이다(롬 2:28-29).
그렇다면 이런 관점이 ‘믿음에 의한 칭의’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바울은 마음의 할례와 율법의 순종을 최종 해답으로 제시하며, 그래서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한다(롬 2:13). 사실 이것이 바울이 칭의에 관해 던진 최초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이런 이행칭의(justification by works) 원리는 바울 복음의 상징인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교리와 모순이 아닌가?
바울이 율법의 행위들을 가짜 해답이라고 질타한 것이 율법 실천의 부재 때문이라면, 믿음을 그 해답으로 제시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니까, 이제는 율법 실천의 길이 아닌, “오직 믿음”이라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유대인의 실수는 결국 그들의 불순종보다는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바울의 비판은 왜 그들의 불순종을 그토록 집중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오직 믿음”의 의미를 오해한 것은 아닐까? 사실 바울은 “오직 믿음”이라는 말로 “믿음이야말로 참된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해답이다”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심판의 시점을 두고 보았을 때, 순종/행위가 궁극적 판단 기준이 된다는 것은 맞지만, 이는 율법 혹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확보될 수 있는 것이라는 선언이 아니냐는 것이다.
바울의 복음과 행위 앞에서 우리는 ‘믿음의 행위’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갈라디아서의 “사랑을 통해 활성화되는 믿음”이나 로마서의 “믿음의 순종”을 언급하기도 했다(살전 1:3; 살후 1:11; 갈 5:6; 롬 1:5; 16:26). 이들은 모두 믿음에서 행위가 산출된다거나, 믿음이 사랑을 통해 제 기능을 발휘한다거나, 믿음에 의해 순종이 가능해진다는 생각을 전제한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믿음의 핵심이 아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이어진다”는 식의 말을 하곤 하지만, 이는 주로 바울과 야고보의 대결 상황에서나 나오는 말이지, 믿음 자체의 특징을 말하며 떠올리는 생각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행위 아닌 믿음”이라는 이항대립에 익숙하다.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행위 아닌 믿음”이라고 말해 놓고, 이 (행위 없는) 믿음이 반드시 행위로 이어진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언어유희 아닌 정상적인 논법으로는 해명되기 어려운 진술이다. 논리적 모순을 함축한 설명이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의 복음이 “믿음 – 행위”의 이항대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바울이 배격한 율법의 행위란 행위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부재를 폭로하는 것이다. 반대로 바울은 행위, 사랑, 순종 등을 믿음과 함께 엮는다. 이는 유대인의 전통적 사고 속에서 율법과 연결되었던 것들이다. 바로 여기에 바울 복음의 차별성이 드러난다.
항간의 오해와는 달리, 바울의 복음은 십자가를 내세워 행위의 요구를 폐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바울의 정책은 결코 하향평준화가 아니다. 마태복음 혹은 히브리서, 야고보서뿐 아니라 바울 또한 순종을 종말론적 칭의, 곧 궁극적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한다(롬 2:6-11; 6:19-23; 8:13; 고전 6:9-10; 갈 5:21; 6:7-9).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행위 혹은 사랑, 순종 등은 모두 종말론적 구원의 필수 요건들이다. 바울은 이러한 결과들을 율법에서 떼어내어 믿음과 연결한다. 구원에 필요한 순종이란 율법의 소유나 할례의 산물이 아니라 믿음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바로 여기에 복음의 차별성이 있다.
율법은 불순종을 정죄할 수는 있어도 이를 순종으로 바꿀 수는 없다. 육신에 할례를 줄 수는 있지만 마음에 할례를 줄 수는 없다. 그래서 율법은 무력한 “글자/의문”의 영역에 머문다(롬 2:29; 고후 3:6-7). 그런데 “율법이 할 수 없는”(롬 8:3) 바로 그 일을 믿음이 해낸다. 믿음이 해답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는 순종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참된 순종의 가능성이 있다는 선포다. 우리의 과제는 바로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믿음의 속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믿음의 가벼움
우리는 믿음과 은혜에 열광한다. 하지만 믿음과 은총에 대한 우리의 열정은 정말 열광 수준에서 멈추는 것 같다. 황소가 붉은 깃발에 흥분하듯, 우리는 믿음과 은총이라는 말에 흥분하지만, 그 말에 대한 진지한 관심은 흔치 않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우리가 믿음과 은총으로부터 필요로 하는 것이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닌 탓이다.
많은 신자들에게 있어, “오직 믿음”의 반가움은 그것이 구원과 내 삶을 분리한다는 사실에 있다. “오직 은혜”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오직 은혜”이건 “오직 믿음”이건, 실제 의미는 똑같다. 곧 “행위 없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과 은혜에 열광하는 것은 믿음과 은혜 자체의 울림 때문이 아니라 믿음과 은혜가 구원의 방정식에서 행위를 배제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신학교에서건 교회에서건, “행위 없이”라는 말 말고 믿음의 속뜻을 설명해 보라고 하면 대개 긴 침묵이 따른다. 은혜에 관해 물어보아도 같은 결과다. “행위 없이”라는 사실 때문에 믿음과 은혜를 읊어왔는데, 그것을 빼고 믿음과 은혜를 설명하라니 난감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난감함은 성경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얼마나 정치적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행위 없이”라는 반가운 대목에서는 끊임없이 밑줄을 치면서도, 그 외의 사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믿음과 은혜에 대해 바울이 말한 전부라면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믿음과 은총에 대해 그토록 많은 말을 하고 있는데도,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조작의 몸짓은 참된 구도의 태도라기보다는 종교적 위선의 표현이기 쉽다. 우리 신념의 이러한 편향성과 우리 교회의 도덕적 무력함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누가 자신할 수 있을 것인가?
갈라디아서와 믿음
믿음은 하나님이 정한 칭의/구원의 방식이다. 이 믿음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예수를 향한 믿음 혹은 예수를 통해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라는 점에서, 이 믿음은 일체의 인간적 조건 혹은 방식을 넘어선다. 이것을 은혜라 부른다.
하나님은 구원이 “은혜로” 되도록 하기 위해 모든 인간적 근거를 무시하고 “믿음”의 방식을 택하셨다(롬 4:16). 하지만 인간적 조건을 무시하는 것 자체가 무슨 해답인 것은 아니다. 인간적 조건의 하나인 할례가 무익하다면, 이를 무시한 무할례 역시 무익하기는 마찬가지다. 가짜 해답을 버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해답을 확보해야 한다.
바울은 믿음을 진짜 해답으로 제시한다. 그렇다면 이는 믿음 속에 율법의 행위라는 엉터리 해답이 갖지 못한 어떤 실질적 효과가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그 효과가 무엇일까? 왜 율법의 행위는 의롭게 못하는데 믿음은 우리를 의롭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의 숙제는 로마서 본문을 읽으며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로마서에서 믿음을 가장 절묘하게 묘사하는 대목은 4장의 아브라함 이야기다. 하지만 이것이 믿음에 대한 바울의 첫 이야기는 아니다. 이보다 먼저 기록된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미 같은 주제를 다룬 적이 있다. 그래서 로마서의 믿음을 살펴보기 전에 갈라디아서의 이야기를 잠시 들어 보기로 하자.
갈라디아서의 싸움터는 칭의다. 엄밀히 말해, 현재적 칭의가 아니라 “의의 소망”, 곧 미래적 칭의가 주제다(갈 5:5). 이 “의의 소망”을 두고 율법의 행위와 믿음이 서로 싸움을 벌인다. 물론 바울의 입장은 분명하다. 율법의 행위들은 해답이 아니며, 믿음만이 참 해답이다(갈 2:16; 5:6). 왜 그럴까? 의미심장하게도, 율법의 행위와 믿음의 대결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관건은 다름 아닌 성령이다.
갈라디아인들의 회심 체험을 상기시키며, 바울은 이렇게 따진다. “여러분이 성령을 받았던 것이 율법의 행위 때문이었습니까? 듣고 믿었기 때문입니까”(갈 3:2, 5). 물론 그들은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 바울의 논점은 이것이다. 율법의 행위는 가짜 해답이다. 그것으로는 성령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은 칭의의 해답이 된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령을 받기 때문이다.
율법의 행위가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하는 것은 그 속에 무슨 교리적 독이 있어서가 아니다. 할례나 무할례는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갈 5:6; 6:15). 문제는 이들이 성령의 통로가 아니라는 데 있다. 하나님은 “오직 믿음으로만” 성령을 주신다. 바로 여기에 율법의 행위 혹은 모든 가짜 해답들과 믿음이 차별성이 있다.
그래서 바울은 거듭 믿음을 성령의 통로로 반복하여 제시한다(갈 3:14).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는 말도 “믿음에서 나는 성령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높다(갈 5:5). 그러므로 이 역시 성령이 믿음에서 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물론 이 믿음은 그리스도, 곧 그의 죽음으로 수렴된다. 따라서 이는 결국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우리의 성령 받음을 위해서라는 말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건지신 것은 “우리가 믿음을 통해 성령의 약속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다(갈 3:14 하).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 일과 “그 아들의 영을 보내신” 일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치다(갈 4:5-6).
바울이 칭의를 성령과 연결하는 이유도 분명하다. 의의 소망이란 율법이 아니라 성령으로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려면 육체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필요하다(갈 5:19-25). 육체에다 인생의 씨를 뿌리면 그로부터 썩어짐을 수확하는 반면(바울 서신에는 지옥의 개념이 없는데, “썩어짐”은 복음서의 지옥에 비견될 만한 개념 중 하나다), 성령에다 씨를 뿌리면 이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수확한다(갈 6:7-9).
결국 우리가 “의의 소망”(혹은 하나님 나라, 영생)에 이르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다. 그런데 이 성령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주어진다. 우리가 할례-무할례 대신 “믿음에서 나는 성령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는 말은 이런 바울의 관점을 정확하게 요약한다(갈 5:5).
물론 이는 할례로 대표되는 율법 언약, 혹은 율법의 행위가 줄 수 없는 복이다. 율법에는 “생명을 부여하는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갈 3:21).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지적은 바로 이러한 율법의 한계를 포착한다(갈 3:2, 5; 나중에 바울은 이러한 무기력한 율법을 “의문”, 곧 “글자 나부랭이”이라고 부른다. 롬 2:29; 고후 3:6-9).
할례를 받는다고 무엇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죄 혹은 육체의 욕심을 해결하는 것인데, 이는 성령의 간섭, 곧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간섭을 필요로 한다(갈 1:1). 이런 초자연적 간섭은 할례와 같은 인간적 조건들 혹은 율법의 행위들을 내세움으로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믿음은 의의 소망을 향한 해답이다.
일단 율법의 행위가 율법 준수와 다르다는 사실을 수용하고 나면, 곧 믿음이 결코 행위의 반대가 아님을 인식하고 나면, 믿음 자체의 구체적 속내가 분명히 드러난다. 갈라디아의 성도들은 처음 바울이 선포한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를 “듣고 믿었다.” 이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다.
이 성령은 그들을 미래(의의 소망 혹은 하나님 나라, 영생)로 인도하는 소망의 근거였다. 성령을 따라 살면서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의 자태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반면, 할례를 의지하고 율법 언약에 머무는 것은 생명의 성령 없이 “자력으로” 의의 소망에 이르겠다는 불가능한 시도다.
그러므로 믿음과 율법의 행위 간의 대립은 수동적 믿음과 적극적인(그래서 율법주의적인) 율법 실천 간의 대조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믿음과 율법(의 행위) 간의 대조의 본질은, 성령의 인도 아래 참된 삶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과, 생명을 줄 수 없고 육체의 욕망을 극복할 수 없는 무의미한 자랑거리들 간의 대조인 것이다.
사라와 하갈의 알레고리
결국 믿음과 율법의 행위 간의 대립은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적 수단 간의 대조로 소급된다. 하나님의 초월적 손길이 닿은 것과 그 손길이 없는 인간적 자랑거리들 간의 대조다. 바울은 이를 성령과 육체의 이항대립으로 표현한다. 믿음이냐 율법의 행위냐 하는 물음은 결국 성령의 역사를 가능하게 하느냐 인간의 영역에 머물러 있느냐 하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로마서에서 다시 나오겠지만,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아브라함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진리를 설명한다. 흔히 ‘사라와 하갈의 알레고리’라 불리는 바로 그 구절이다(갈 4:21-31).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하나는 여종에게서, 그리고 하나는 자유로운 여자에게서 태어났다(갈 4:22). 비유적으로 두 어머니는 율법과 약속이라는 두 언약을 가리킨다(갈 4:24). 두 어머니, 곧 언약의 상이함은 그 아들들의 출생 방식과 연관된다. 여종에게서 난 아들은 “육신을 따라” 태어났다(갈 4:23). 이는 그냥 인간적인 방식으로, 곧 하나님의 간섭 없이 태어났다는 뜻이다.
반면, 사라의 아들은 그저 육신적 과정으로는 해명되지 않는다. 인간적으로는 아이가 태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시작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아들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났다(갈 4:23). 물론 약속했다고 아이가 저절로 생길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는 결국 하나님이 손을 대어 아이가 생기게 하셨다는 뜻이다. 바울은 이 간섭을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 역사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약속을 따라” 났다는 것은 “성령을 따라” 났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이 아들은 성령의 역사 없이, 그저 인간적 수단으로 태어난 아들과는 다르다. 물론 미래는 약속/성령으로 난 아들의 몫이다. 이후 창세기 이야기에서처럼, 육신을 따라 출생한 아들은 추방되고 약속으로 출생한 아들만이 적법한 상속자로 인정받는다.
이삭을 “성령으로 태어난 자”라 부르는 데서 감지할 수 있듯이, 바울은 성령으로 출생한 이삭을 역시 성령으로 출생한 갈라디아인들과 엮는다. 믿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갈라디아인들은 “이삭처럼 약속의 자녀들”이다(갈 4:28). 이 약속은 물론 “하나님의 약속”이며, 바울이 믿는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이다(갈 1:1). 결국 이 약속의 자녀라는 말은 생명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 친히 성령으로 만드신 자녀라는 뜻이다.
믿음이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효과적인 방식이 되는 것은 이 믿음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매개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할례나 음식 규정 같은 육체의 행위가 우리를 의의 소망으로 인도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인간적인 차별성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를 매개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에 연유한다.
다시 로마서로
잠깐의 외도를 끝내고, 다시 본래의 산책길로 돌아가자. 그렇다면 로마서는 어떨까? 갈라디아서에 제시된 믿음과 성령의 이야기가 로마서에서도 통할까? 앞에서 살핀 것처럼, 아브라함의 칭의는 믿음과만 관계될 뿐 할례, 곧 유대인의 신분과는 무관하다. 칭의 당시 그는 무할례자였다. 칭의 후의 할례는 믿음에 의한 칭의를 확인하는 절차였다.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주어진 복이다, 믿음에 근거한 것이므로 일체의 인간적 조건과 무관하다. 따라서 칭의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다. 이처럼 미래를 상속하리라는 약속이 오로지 은혜에 달린 것이 되게끔 하기 위해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통로를 폐쇄하고 “오직 믿음으로”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셨다(롬 4:16).
그렇다면 할례는 무의미한데, 믿음은 칭의의 근거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물음을 두고 바울은 믿음의 모범답안인 아브라함을 탐구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이것이 그에게 의로 간주되었습니다”(롬 4:3, 9). 로마서 4장 전반부가 칭의의 근거를 다룬다면 4장 후반부는 그 근거인 믿음을 설명한다. 혹자는 믿음이 쉽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막상 아브라함의 상황을 놓고 보면 사태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알다시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한 시점은 아들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브라함은 “백 살이 다 되었다.” 자녀 생산을 두고 보자면, 죽음에 해당하는 상황이다. 그의 몸은 죽었고, 사라의 태 역시 죽었다(롬 4:19).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아들을 약속했고, 아브라함은 이를 믿었다. 말하자면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롬 4:18).
통상적인 경우라면 약속 자체를 허튼소리로 무시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대신, “믿음에 견고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롬 4:20). 물론 그가 그 약속에 “아멘!”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약속하신 분이 그 약속을 이루실 능력 또한 가지신 분”임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죽은 몸을 다시 살려 아들을 낳게 할 능력이 있다. 왜냐하면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불러내시는” 분, 곧 창조주이시며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롬 4:17).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롬 4:20)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 곧 생명의 창조주로 인정했다는 뜻이다. 바로 이 점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1장에서 지적된 불경건과 대조된다. 사람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고 그분에게 감사하며 그분에게 영광을 돌려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온갖 형태의 우상을 만들어 그것들을 창조주로 경배하며 영광을 돌렸다(롬 1:21). 창조주 하나님께 가야 할 영광을 피조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롬 1:23). 하지만 아브라함은 달랐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아멘으로 화답함으로 하나님을 생명의 창조주로 인정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렸다. 하나님은 바로 이 믿음을 보시고, “이것을 그에게 의로 여겨 주셨다”(롬 4:22).
부활, 믿음의 DNA
아브라함의 신앙은 하나님을 생명/부활의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이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에 대한 믿음이다. 아브라함의 상황으로 말하면, 아들을 “약속”하신 하나님이 자기의 죽은 몸을 되살려 아들을 낳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 부활 신앙이 그를 의롭게 한 믿음의 핵심이었다(롬 4:22).
그런데 이 아브라함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해 우리로 하여금 읽도록 했다는 것은 그 사건이 아브라함뿐 아니라 오늘의 우리, 곧 “장차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될”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뜻이다(롬 4:23-24). 왜 그런가?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적 연관관계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을 믿었다면, 오늘의(바울 당시의) 우리는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다(롬 4:24). 하나님을 생명/부활의 주권자로 고백한다는 점에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은 정확히 일치한다.
동일한 부활 DNA를 공유하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우리 사이에는 분명한 친자관계가 성립한다. 우리 역시 부활 신앙으로 규정되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들”이기에(롬 4:16), 아브라함은 우리 조상임이 분명하고, 우리는 그의 후손임이 분명하다.
이처럼 칭의의 관건이 되는 믿음은 부활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다. 우리에게 있어 이 부활 신앙은 하나님이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신앙으로 고백된다(롬 4:24). 그래서 우리의 칭의는 예수의 부활을 전제한다. 부활 없이는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고,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부활 신앙 역시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바울의 경우에서 보듯이,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다. 다메섹 이후 바울에게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 혹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고백된다(갈 1:1; 고후 1:9; 롬 8:11). 아브라함에게서 보듯이, 칭의란 바로 부활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산물이다.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칭의
부활이 없다면, 칭의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4장 25절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예수는 우리의 범죄로 인해 내어줌이 되고, 우리의 칭의를 위해 살아나셨습니다.”
여기서 죄 용서는 십자가와, 칭의는 부활과 연결된다. 물론 이는 용서와 칭의 혹은 십자가와 부활을 분리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 둘을 모두 강조하려는 수사적 표현이다(롬 3:25). 하지만 부활과 칭의의 긴밀한 연관은 여전히 선명하다. 예수께서 우리의 칭의를 위해 살아나셨다면, 그의 부활 없이는 칭의 자체를 말할 수 없다. 이는 통상 칭의를 십자가 죽음 및 죄 용서로 생각하는 우리의 습관과 어긋난다.
칭의는 분명 죄 용서를 포함하지만(롬 3:23; 4:7-8), 죄 용서가 칭의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부활의 하나님을 믿어 의롭게 된다면, 그래서 우리의 칭의를 위해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라면, 우리가 의롭게 되는 과정 속에는 죽음을 통한 죄의 청산뿐 아니라 부활을 통한 새 생명의 발현 또한 포함될 것이기 때문이다.
칭의/구원과 부활의 구체적 관계는 앞으로 계속해서 차근차근 설명할 것이다. 일단 여기서는 부활이 칭의와 구원의 핵심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흔히 “오직 믿음”의 근거 구절로 인용되곤 하는 로마서 10장 10절을 생각해 보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릅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구절은 종종 (행동이 아니라) 마음으로만 믿고, (행위와 무관하게) 입으로만 고백하면 구원받는 뜻으로 곡해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이 오히려 행위와 연결된 개념이고, 입술의 고백이 제대로 된 공개적 고백임을 무시한 결과다. 실제 바울의 의도는 확실하게 제대로 믿는 믿음이 구원의 근거라는 것이다.
더 이상한 것은, 이 구절과 한 덩어리를 이루는 9절은 거의 인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실제 믿음의 내용이 9절에 나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여간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믿어 의롭게 되고 구원에 이르는 것인가?
“당신이 만일 당신의 입으로 예수를 주님으로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을 당신의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롬 10:9).
구원의 관건은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음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칭의와 구원으로 인도하는 믿음의 핵심이다(고전 15:2). “예수는 주이시다”라는 고백 역시 부활을 전제한 고백이다.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으로 등극하신 예수께서 이제 온 우주의 “주”로서 통치하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행 2:36).
믿음을 부활과 연결하는 로마서의 움직임은, 믿음을 성령과 연결했던 갈라디아서와 다르지 않다. “생명의 성령”이라는 말에서 확인되듯(롬 8:2), 성령이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생명의 작용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이 성령을 주지 못한다는 말은 율법에는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말이다(갈 3:2-5, 21).
따라서 믿음이 성령의 원천이라는 갈라디아서의 말은, 믿음은 부활의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의 역사를 실행하실 것이라는 로마서의 신념과 구별되지 않는다. 접근 방식이 살짝 다를 뿐,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되찾아야 할 부활 신앙
부활에 대한 고백은 부활의 역사성에 대한 고백을 포함한다. 부활이 껄끄러운 사람들이야 “사실보다는 의미가 중요하다”는 궤변을 늘어놓겠지만, 사실이 빠진 의미란 기초 없는 건물만큼이나 공허하다. 그렇다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부활의 역사성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며, 그래서 대단한 의미를 함축한다. 바로 이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복음의 본질을 파악하는 관건이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이유 때문에 십자가에 집착하겠지만, 하나님은 오늘도 부활의 메시지로 우리의 삶에 도전하신다. 그 옛날 부활의 약속으로 죽은 몸의 아브라함에게 도전하셨던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께서 낙담한 제자들을 만나 그들의 삶을 뒤집으셨던 것처럼, 오늘도 부활의 도전은 계속된다. 하지만 우리가 그 도전을 인식하기는 하는 것일까?
많은 신자들에게 있어 부활은 일종의 회색지대다. 십자가의 의미는 잘 알지만, 부활은 어색하다. 다 완성된 퍼즐 위에 남아도는 출처 모를 조각처럼, 내가 완성한 복음 속에는 딱히 부활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 보인다. 십자가에 관한 찬송은 언제나 인기를 끌지만, 부활에 관한 찬송은 부활절이 지나면 금방 어색하다. 내가 죄 용서에만 집착한다면, 내게 중요한 건 죽음이지 부활이 아니다. 부활하셨다니까 그렇게 믿는 것이지, 굳이 살아나시지 않았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는 왜 예수의 부활에 관해 그토록 목청을 높였을까? 도대체 나의 구원에 있어 부활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칭의가 부활에 기초한다는 바울의 선언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 자체가 헛되다는 바울의 말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부활은 우리의 전망을 현재에서 미래로 넓히도록 요구한다. “의의 소망”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듯이(갈 5:5), 칭의 역시 현재적 지평에서 끝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바울이 칭의를 부활과 연결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부활에 대한 우리의 무지 혹은 무관심은 구원에 대한 우리의 ‘현세주의적’ 조급함과 관계가 있다.
구원 얻을 것이라 말하기보다는 구원받았다고 말하고 싶고,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우리) 구원을 일구어 가야 할” 필요보다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사실의 확인에 더 집착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소중하다. 나는 우리의 이런 태도를 ‘영적 축지법’이라 부른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 사이의 거리를 없애 버림으로 미래를 이미 가진 것처럼 믿고 싶은 심리다.
하지만 이런 우리에게 바울은 부활을 선포한다. 그 부활과 더불어 우리 시야를 마지막 결승점, 곧 재림과 심판의 시점으로 옮기라고 말한다(빌 3:10-14). 구약적 비유를 활용하자면, 출애굽의 과거에 집착하는 우리에게 가나안이라는 미래를 깨우친다. 그리고 바로 이 가나안이라는 미래적 지평 속에서 출애굽의 참의미를 발견하라는 가르침이다.
물론 ‘이미 가나안’을 말하고 싶은 우리로서는 현재 우리의 삶이 광야의 여정임을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 광야의 여정에서 멸망한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불편하다. 하지만 좋든 싫든 그것이 성경의 입장이다(고전 10:1-13; 히 3:1-4; 13; 벧전 1:17; 2:11; 유 5절).
이를 무시하는 가르침은 구원의 복음이 아니라 죽음의 속삭임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을 발견하는 과정은 구원을 보는 우리의 시력을 교정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앞으로 이어질 로마서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출애굽에서부터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과 그 속에서 우리를 인도해 가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임재를 확인해 나갈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미 가진 것보다 더 확실한 구원, 곧 “소망으로 얻은 구원”의 의미를 새로이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를 통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라면, 더더욱 그를 통해 장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원수일 때 그 아들의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라면, 이제는 더더욱 그의 살아나심을 통해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롬 5:9-19).
-권연경 교수(숭실대 기독교학과), 「로마서 산책」(복있는 사람)에서

첫댓글 로마서나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믿음과 행함의 조화 문제가 평소 궁금했던 분들은 꼭 끝까지 다 읽어보세요. 한번 믿고 구원받으면 무조건 구원이 보장된다고 주장하는 분들은 성경적인 칭의와 성도의 견인 부분에서 기존의 익숙한 교리만 권위적으로 고집하거나 답습하기보다 성경신학자들의 새로운 발견과 탐구에 좀더 열린 자세로 진지하게 신학적 성찰을 나눠가야 할 때라고 느낍니다. 그들이 제도권 안에서 이 작업을 게을리하며 침묵하는 동안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신칭의의 진정한 의미를 오해한 채 구원의 안전에 대한 그릇된 확신 가운데 윤리에 깨어 있는 삶을 놓쳐 결국 구원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면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기독인들이 이신칭의의 진정한 의미를 오해한 채 구원의 안전에 대한 그릇된 확신가운데 있어 결국 구원받지 못하게 될수도 있다고 하시는데요,, 그렇다면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기독인들 중에 구원 못 받을 사람의 수도 많을 수 있다고 생각이 드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시는 사랑으로 우리와 화평하시기를 바라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면서도 안믿는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도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까? 저는 항상 이런 질문들이 생각이 납니다?
기준은 성경이 어떻게 말하느냐이지 불완전한 내 생각, 느낌, 경험이 아니겠지요.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 자체를 부지런히 읽고 탐구하며 답을 찾아나가는 성실하고 열린 자세를 갖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지금도 더 온전한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중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 만큼 위에 게시된 글을 다시금 찬찬히 읽어보시면 하나님의 마음을 나름 '읽으실'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로마서 8장 29~30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은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구절의 제가 가지고 있는 성서의 해설에는 ,, " 미리정하심(예정)과 부르심에 관한 발언들은 구원받는 사람의 수적 한계를 확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결단을 앞질러서 인간을 위하여 취하시는 하나님의 결단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길의 신뢰성이 이것에 대응한다. 이 구원의 길의과정을 29-30
절에서 열거한다 이 구원의 길은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이 영화롭게 하심에 관하여 이미 과거형 시제로 말했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데요,, 제가 이 설명에 관하여 제대로 이해를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그 부르신 자들을 끝까지 인도하신다는 말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목사님의 염려의 일깨움들도 하나님의 구원의 길의 과정에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정원 님이 궁금해하시는 로마서 8장 29-30절 말씀에 대해서는 조만간 따로 답글을 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감사합니다^^ 목사님 천천히 목사님 편하실대로 답글 주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