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온 길 /김순옥
이 길 끝에 서있다.
누군가 걸어온 길
누군가 걸어갈 길
내가 알지 못하는 수 많은 이야기들이
쏙닥거리는 길
봄볕 따뜻한 날
댕기 머리 순이가
콧노래 부르며
냉이 캐러 가던 길
녹음 짙은 여름 날
뒷마을 철이가
물옥잠, 물달개비, 올채이고랭이, 새섬매자기, 올미, 마디꽃, 올챙이자리, 쇠톨골, 미국 외풀, 알방동사니, 강피(논피), 물피(돌피), 여귀바늘, 벗풀
풀 매러 가던 길
이 길 끝에 서있다.
누군가 걸어온 길
누군가 걸어갈 길
내가 알지 못하는 수 많은 이야기들이
살아 숨 쉬는 길
해변 (海邊)
나의 발자국은 모래 위에 그림을 그리고
조약돌은 햇빛을 만나 보석이 되었다.
파도와 합창하는 우리들의 숨소리!
아이는 바다 같은 인생을 배워가겠지.
하늘 위 갈매기는 그림을 그리고
바다 위 뱃고동 소리는 만선을 기원한다.
파도와 춤을 추는 해녀들의 숨비소리!
소년은 파도치는 인생을 알아가겠지.
태양은 수평선에 그림을 그리고
연인은 해변에서 미래를 약속한다.
잔잔한 파도와 같은 연인들의 숨소리!
청년은 해변에서 연분홍 인생을 시작하겠지.
사랑으로 빛나는 햇살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기와집 온돌방에서 소녀와 어머니는 화롯불에 군밤을 구워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눈이 침침해진 어머니는 실타래를 소녀에게 주며 도와달라 말씀하신다. 바늘구멍에 실을 꿰는 것이 귀찮은 소녀는 실을 길게 잡았다.
“우리 딸 시집을 아주 멀리 가려나 보네. 서운해서 어쩌지!”
“나는 시집 안 간다. 평생 엄마랑 같이 살련다.”
얼굴이 빨개진 소녀는 이불속에 몸을 파묻고 누워 한참을 뒹굴다 일어나 함박눈이 쌓인 마당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그래도 바닷가 같은 데서 한 번 살아봤음 좋겠다. 서울 같은 큰 도시에서도 살고 싶고. 아니다. 미국이나 일본 같은 곳으로 이민을 하여서 살아봤으면.’
킁이와 나는 여고 동창소개로 처음 만났다. 킁이와 만나기로 약속한 전날 밤, 23살 꽃다운 처녀는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설레는 마음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 욕실에 들어가 한참을 씻고 나와 꽃단장하기 바쁘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수 없는 오전 11시경, 그녀는 시내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에는 만개한 벚꽃이 꽃비를 휘날리고 개나리, 진달래, 봄꽃들도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대전광역시 번화가에 있는 중앙데파트 건물 주변은 주말만 되면 아마추어 뮤지션들의 무료 공연이 열려 시끌벅적했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학생들, 손을 꼭 잡고 앉아있는 연인들까지 제법 많은 사람이 노랫소리를 경청하고 있다. 나도 잠시 공연에 심취해 있다 서둘러 약속 장소인 ‘로마의 휴일’ 커피숍으로 향했다.
가게 문을 들어서자 친구와 앉아있는 낯선 남자가 보인다. 그 짧은 순간 남자의 눈과 내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얼굴이 빨개진 나는 조심스레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이쪽은 언약교회 다니는 청년 ‘문순옥’, 여기는 내 친구 ‘김순옥’.”
친구가 뜬금없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당황한 내 얼굴이 일그러지며 매운 고추처럼 붉게 변했다. 커피숍 손님들도 우리가 앉은 테이블 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 자리를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더듬거리는 낯선 남자의 말이 귀에 거슬려 나를 더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킁이는 주말마다 대전에 내려왔다. 어느 날 데이트 끝자락에 킁이가 오동도로 당일 여행을 가자고 말하고는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나는 별생각 없이 승낙했다.
이른 아침 대전역에서 여수행 기차를 기다리는데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팔에 닭살이 올랐다.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나에게 킁이는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어깨에 얹어 주며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기차에 오른 다음 가방을 열어 보온병에서 따뜻한 차를 꺼내 삶은 달걀과 함께 먹으라며 건넸다. 아침도 못 먹고 나와서 그런지 꿀맛이다. 얼었던 몸이 녹아 곤해진 나는 킁이의 어깨에 기대어 스르르 잠이 들었다. 덜커덩덜커덩 간이역에서 잠시 멈추었던 기차는 목적지인 여수를 향해 달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기차에서 내린 킁이는 나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짜릿한 감정과 따뜻한 온기가 나를 흥분시킨다. 그리고 나를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킁이는 창세기 2장 23절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해 청혼했다. 동백꽃이 만발한 동백섬에서 함께 나눈 진한 첫 키스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신기루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 동백꽃은 더 선명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그려진다. 그 시간이 너무 짧았던 우리는 그만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당황한 나에게 괜찮다며 달래던 킁이는 지나가는 트럭을 잡아놓고 손짓을 한다. 그날 우리는 어렵게 대전으로 향하는 막차를 탈 수 있었다. 그녀는 오동도에 다녀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상견례를 치렀다.
결혼 준비로 바쁜 어느 날, 관광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 제주도 가시는 분 성함이 ‘문순옥’, ‘김순옥’이 맞나요.”
“ 네, 맞습니다.”
결혼 후 우리는 가정이라는 한 도화지 위에 서로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내는 남편이 퇴근 후 함께 영화도 보고 그날 있었던 일도 이야기도 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다. 하지만 직장에서 돌아온 남편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휴식을 원했다. 남편의 퇴근 시간만 기다리던 새색시는 돌아온 남편과 티격태격하기 시작한다. 숨을 곳이 없는 작고 작은 공간에서 우리는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것들과 부딪치고 있었다. 작은 습관의 차이가 만드는 불편함에 대해 최대한 잔인하게, 가족까지 들먹거리며 서로를 괴롭히며 신경전을 벌인다. 그렇지만 신혼의 묘미는 베갯잇 송사에 있었다. 낮에 만상을 찌푸리고 죽일 것처럼 싸운 날도 밤이 지나면 금방 좋아지는 게 신혼이었다.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벌써 2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같은 이름 다른 성의 두 사람은 아들, 딸 하나씩 낳고 북적이며 살았다. 부부싸움을 할 때면 이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다. 부부가 이름이 같다고 삶의 결도 닮은 건 아니었다. 어쩌겠는가!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까지 같은 한 쌍인 것을.
하루
경기도 이천에 있는 아리산에는 명산물이 있다. 그것은 예쁜 새소리다. 아침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면 어디서 울고 있는지 알 수도 없는 이름 모를 새들이 노래를 부른다. 나는 새소리와 함께 하는 아침이 좋다. 밥을 안치고 국을 끓이고 밑반찬 몇 가지를 만들어 놓은 다음 가족들을 깨우러 간다. 화장실 물소리, 헤어드라이로 머리 말리는 딸, 옷 찾아달라 소리치는 남편의 목소리로 정신없는 30분이 흘러갔다. 현관문 도어락 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지고 난 후에야 나에게 자유가 찾아온다. 변주곡 없는 주부들의 아침 풍경과 닮은 나의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이렇게 시작되는 아침을 나는 사랑한다.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 산속 어딘가에 숨어 있을 새소리를 찾아 산책을 나섰다. 삼복더위 끝자락, 가는 여름을 붙잡고 싶은 매미 울음소리가 애절하다. 높고 푸른 하늘이 펼쳐진 하늘, 망초꽃이 산을 이루고 있는 밭, 수확을 앞두고 있는 옥수수… 들길은 걷는 이에게 소소한 재미를 준다. 숲속 가까이에 이르자 작고 노란 새 한 마리가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울음소리가 너무 황홀해 잠시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작은 몸에서 어떻게 저렇게 크고 예쁜 소리가 나오는 걸까? 사람이 부담스러운 새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새소리는 이승에서 못다 이룬 사랑을 향해 울부짖는 망인의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오솔길 사이로 노부부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오고 있다. 소박하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등산복 차림의 모습이 보기 좋다. 나도 이분들의 삶과 닮은 인생길을 걸어갔으면. 나무 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청설모가 어디로 갔나 보이지 않는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다시 걸어가고 있는데 산길 옆으로 이름 모를 버섯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제 곧 가을이 오려나 보다.
온몸에 땀이 배어 흘러내리고 있을 때쯤 어디서 나타났는지 하루살이 몇 마리가 내 주위를 돌며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손을 휘저으며 쫓다 보니 문득 옛 생각이 떠올랐다. 아버지를 따라 논으로 밭으로 놀러 다니던 유년 시절,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따라오던 녀석들이 바로 이‘하루살이’다. 그 수가 얼마나 많던지 헤아릴 수 없었다. 하루살이가 세상에 나와 사는 기간은 짧게는 1시간, 보통 2~3일, 길게는 2~3주 정도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하루살이는 어른벌레가 되어 오래 살지 못하는 것일까? 그건 바로 하루살이의 ‘입’ 때문이다. 하루살이 애벌레는 물속의 바위나 자갈에 붙은 물때와 물속 낙엽을 먹고 사는데 어른벌레가 되면 입이 사라지기 때문에 먹이를 먹을 수가 없게 된단다. 그래서 오래 살 수 없다. 하루살이는 단 하루를 위해 그렇게 1~3년이라는 애벌레 시기를 견뎌내고 있었다.
숲속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며 온몸에 흐르는 등산객들의 땀을 식혀주고 있다. 새소리, 풀벌레 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듯 노래를 불러주는 하루가 흘러가고 있다. 나는 매일 반복되는 이 하루를 무엇을 위해 살아내는 것일까? 어제와 오늘이 만나 만들지는 세월을 우리는 인생이라 부른다. 그 하루가 어떤 날은 환한 웃음을 선물하며 설렘으로 다가와 보랏빛 향기를 내뿜다 지나가고, 다른 날은 비바람 치는 폭풍우처럼 불안과 초조로 다가와 나를 괴롭히다 지나간다. ‘나의 삶이 하얀 백지로부터 시작된다면 어떻게 채워가야 잘 살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고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울긋불긋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윤슬이 되어 빛을 발하는 정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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