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武 5편..전란이 가져다 준 거대한 변혁,한국의 조총(鳥銃)
아들아, 이번에는 한국의 武, 다섯 번째 이야기..조총(鳥銃)에 관해 얘기해 보자.
우리나라에서는 조총(鳥銃), 일본에서는 철포(鐵砲)라고 부르는데..
개인 휴대용 소화기, 현재 육군의 기본병기인 소총의 먼 조상 격인 무기라고 해야겠다.
이 조총을 중시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화약무기의 등장이 전통적인 전쟁의 양상을
크게 바꾸었다는 것이겠지.
조총의 등장 이전에 여러 화약무기와 총통이 개발되었지만, 제대로 된 위력을 가지고
혁신을 이룬 무기가 바로 조총이고, 화약무기의 등장으로 촉발된 전통적인 전쟁의
변화를 더욱 크고, 빠르게 가져간 것이 조총의 존재 때문이었단다.
조총 사격하는 일본군
일본에서는 16세기에 포르투갈과의 교역을 통해 조총이 도입되었고, 조총을 분석해서
성능을 개량하는데 성공하였다. 일본은 16세기에 수많은 다이묘라 불리는 영주들이
일본 전토를 통일하고자 오랫동안 전쟁을 벌여왔는데..그 통일전쟁의 수많은 전투에서
조총이 실제 도입되어 운용하였고, 조총을 활용한 전술을 개발하여 실전에 응용하였지.
조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오다 노부나가가 거의 완성한 통일을 완수한 사람이 바로
토요토미 히데요시, 7년 조일전쟁을 일으킨 전쟁범죄자였고, 우리나라와 중국을 넘어
인도까지 정복하려는 망상에 사로잡힌 자였지. 이자의 광기가 일으킨 전쟁이 우리가
잘 아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 조일전쟁이었단다.
7년 조일전쟁을 당하여 전쟁 초반에 우리 조선군은 무기력하게 패전을 거듭했단다.
그 패전에는 여러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데, 조총의 위력 때문이었다는 것도
분명 사실이었지.
아들아, 우리는 지금까지 배우기를..이때까지 조선은 조총의 존재를 몰랐다고 했는데
실은 그게 아니란다. 전쟁이 벌어지기 2년 전에 대마도주 소오 요시토시(宗義智)가
조총 2자루를 우리 조정에 진상했고, 시험발사까지 해봤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었고, 그때는 우리도 유사한 승자총통이라는 개인 소화기를 개발했었기 때문에
조총의 장단점도 어느 정도는 파악했던 것 같아. 문제는 조총의 단점을 크게 봐서
그대로 군기시 창고에 방치한채 그냥 넘겼다는 것이지.
조선군 개인 소화기, 승자총통
조총은 유효 살상거리는 약 50m, 유효 사거리도 100m를 넘지 않으며 조준에서
발사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고..연사할 수 없으므로, 우리가 가진 활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그렇게 판단했고..그게 틀린 판단은 아니었어.
하지만 조총은 유효 살상거리와 사거리에서의 위력은 활 이상으로 강력한 무기였고
일본은 오랜 실전 경험을 통해 조총의 발사 시간을 단축하고, 조총병을 3열로 세우고
순서대로 사격을 하면서 사실상 연사효과를 거둘 수 있게 하였으며,
조총의 조준에서 발사까지 걸리는 시간을 이용해 기마병 등을 이용해 돌격하는 전술도
강력한 창검병으로 저지하는 전술까지 완벽하게 숙달된 일본군은 전쟁의 달인들이었지.
아들아, 그래서 우리는 7년 조일전쟁 초에 조총의 위력에 재대로 당했단다.
그리고 조총은 활보다 배우고 익히기 쉽다는 장점도 있다.
조총사격하는 일본군
7년 조일전쟁을 거치면서 우리도 조총을 접하게 되고 조총을 제작하고 또 조총병을
양성해서 그 조총부대로 전투에 투입해서 전과를 올리는 단계까지 나아가게 되었단다.
여기에는 일본군이었다가 우리에게 투항했던 일명, 항왜(降倭=항복한 왜병)의 존재가 있었지.
이들에게서 조총의 제조부터 운용전술까지 그 모든 것을 얻어낼 수 있었는데..
아들아, 네가 여러번 가서 익숙할 대구 달성군 우록동의 녹동서원에 봤던 그 조총의
주인이었던 사야가, 모하당 김충선 장군이 항왜의 대표격에 해당하는 사람이란다.
이분이 실제 조선군에 투항한 이후, 조총술 전수에서 부터 조총병 양성과 실제 전투에
나서 군공을 세우기까지 그 모든 것을 했었지.
사야가, 모하당 김충선 장군 (대구 달성군 우록리 녹동서원)
김충선 장군 혹은 그 휘하 항왜의 조총 (녹동서원 충절관)
7년 조일전쟁 전에는 궁병과 기병 중심의 조선군이 전쟁 후에는 큰 변화를 겪게되지.
화포와 조총을 운용하는 포수의 비중이 점점 크게 차지하게 되었는데, 조선 숙종대의
기록을 보면 충청도 속오군 1,300명 중 보병의 70% 이상이 조총병이었다는구나.
7년 조일전쟁을 거친 후, 조선의 조총병은 두차례 조청전쟁(朝淸戰爭), 두차례에 걸친
나선정벌에서 실전경험을 쌓고 활약하였단다.
영화 남한산성의 조선 조총병들
아들아, 1636년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조청전쟁, 우리가 알고있는 그 병자호란은
우리 역사에서 씻지 못한 수치로 남은 패전이었단다.
그때 우리의 산성 중심의 방어전략은 청군이 산성을 무시하고 바로 한성으로 직공하며
기동력 넘치는 기병중심의 전략에 무력화 되었단다. 그리고 우리 조선군은 무기력하게
패전을 거듭했던 것으로 알고있지만..그렇지는 않았단다.
철원의 충렬사(백전전투의 주역, 류림과 홍명구 장군 배향)
아빠가 조청전쟁에서 비교해서 말해주고 싶은 전투는 경기도 광주 쌍령전투와 강원도
김화의 백전전투란다.
경기도 광주 쌍령전투는 경상도 근왕군 4만이 겨우 3백의 청나라 기병에게 철저히
유린되어 패전한 전투로 한국사 3대 패전 중의 하나로 꼽히는데..원인은 사령관의
조총병 운용실수와 탄약과 화약배부 실패, 훈련도 낮은 조총병이 흥분해서 무분별
사격하면서 그렇게 화약이 떨어지자 그대로 돌격해온 청의 팔기군에게 대응하지 못하고
지휘장수의 상당수가 전사하고 사상자만 1만이 넘는 엄청난 패전을 당했었단다.
철원 김화 백전전투의 현장
하지만 김화의 백전전투는 승리한 전투였단다. 평안도 병마사 류림 장군이 이끄는
근왕병이 잣나무가 우거진 고지에 진을 치고 높은 곳에 진을 치면서 적절한 위치선정을
했었다. 언덕 위라 청군의 기병이 돌격하는데 어려웠고 우거진 잣나무 때문에 청군의
화살이 먹혀들지 않았지. 반면에 잣나무에 기대어 우리는 정확한 조총사격으로 청군을
공격했단다. 그리고 류림 장군은 화약과 탄환이 부족하기 때문에 낭비하지 않고 적이
가까이 왔을때만 일제사격을 하여 그 위력을 크게 했단다.
영화 남한산성의 조선군
그 전투 중에 류림 장군은 적진의 흰말을 타고 있는 적장을 저격해서 죽였는데..
이 사람이 청 태종의 매부인 야빈대였지. 대단한 성과였고, 청군의 고위지휘관이
전사한 몇 안되는 사례중의 하나였단다.
김화의 백전대첩은 치욕의 병자호란, 조청전쟁 중에 건져낸 몇 안되는 귀중한 승리였지.
나선정벌에서의 전투
그리고 또 세월은 지나..조선 효종 때 두차례 나선정벌에서 조선의 조총병은 대단한
활약을 펼쳤단다. 원래 효종은 청에 대해 복수하려고 군사를 양성했던 것인데..
청나라가 흑룡강 일대에서 러시아와 영토분쟁을 벌이게 되는데, 청이 불리하여 조선에
조총병 파병을 요구해와, 두차례에 걸쳐 파병하였던 전쟁을 나선정벌이라고 해.
기본 무기인 소총은 러시아의 수석식 소총이 우리가 가진 화승총보다 훨씬 우수했는데
우리 조선군 조총병의 사격술이 워낙 뛰어났단다. 조선군의 활약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는데..
이때도 청군은 도와주러온 우리를 위해주지는 못할 망정 갑질을 하며 괴롭혔단다.
2차 나선정벌에서 활약하고 돌아온 신류(申瀏)장군이 이때의 기록을 북정록(北征錄)에
상세하게 기록하여 우리에게 그때의 일을 전하였지.
아들아, 우리의 조총에 대한 역사는 대략 이정도로 마무리할까 한다.
역시 활을 잘쏘는 명궁이 넘치는 민족은 그대로 총도 잘쏘는 명사수도 넘친다 해야할까.
조일전쟁과 조청전쟁 이후..최고의 기량을 가진 조총병은 우리 조선의 조총병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처음엔 악연으로 만났던 조총이라는 무기가, 어떻게 오래도록 우리를 지키는 중요한
무기가 되었는지를 얘기했고, 우리 역사 속에서 조총이 가져온 큰 변화도 잊지 말고
새겨야 할 것이 분명 있을 것이다.
언젠가..다음에 달성의 녹동서원을 찾아 김충선 장군의 그 조총을 보게되면..
이번엔 정말 관심을 가지고 한번 제대로 들여다 보려무나.
그 조총이 무슨 얘기를 전하는지 한번 귀를 기울여 보거라.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