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9. 열반의 길 ③ 춘다의 공양
“아난다여! 목이 마르다” 쿠쿠다江에서 마지막 목욕
바이샬리를 떠난 부처님은 ‘보가 나가라’를 거쳐 ‘파바 마을’(파바나가르. 현재의 화질나가르)에 도착, 춘다의 망고동산에 머물렀다. 소식을 접한 대장장이 아들 춘다가 서둘러 부처님 처소로 왔다. 여러 가지 가르침을 들은 춘다는 기쁜 마음에 부처님께 말했다.
파바마을 망고동산에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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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다마을 > |
사진설명: 부처님께서 마지막 공양을 올린 대장장이 아들 춘다가 살았다는 마을. 마을 입구엔 짚더미와 말려서 쌓은 연료용 소똥더미가 많았다. |
“부처님이사여! 내일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자하오니, 비구들과 함께 꼭 오시도록 하소서.” 부처님은 침묵으로 수락했다. 이튿날 아침. 춘다는 자신의 집에서 딱딱하고 부드러운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다. 음식 중에는 ‘스카라 맛다바’라는 요리도 섞여 있었다. 준비가 완료되자 춘다는 사람을 보내 “부처님이여! 때가 왔사옵니다. 공양준비도 완료되었사옵니다.”고 전했다. 부처님은 비구들과 함께 대장장이 춘다 집에 도착, 공양했다.
결과적으로 마지막이 된 공양을 부처님께 올린 춘다. 춘다가 살았던 마을을 찾았다. 쿠시나가라에 도착한 다음날인 2002년 3월23일 토요일. 쿠시나가라에서 21km 떨어진 화질나가르로 갔다. 한 시간 정도 지나 화질나가르에 도착했다. 화질나가르에서 다시 북서쪽 1km 부근에 위치한 춘다 마을로 방향을 틀었다. 작은 길로 들어가니 자이나교 사원이 보였다. 마을 입구에 아치문을 만들고, 문 위엔 마하비라 상 사진과 글씨가 붙어있었다.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어 안내인에게 물으니 “자이나교 교주 마하비라가 이곳에서 죽었고, 이를 기념해 자이나교 사원이 건립됐다”는 내용이 적혀있다고 알려줬다.
마하비라는 부처님과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자이나교주. 바이샬리에서 태어난 그가 바이샬리 근방의 화잘나가르에서 죽은 것이다. 그를 기념해 자이나교 사원이 춘다 마을에 세워졌던 것. 마을 입구에 도착해 자이나교 사원을 돌아가니, 사진 속에서 많이 보았던 예의 그 소똥더미들이 곳곳에 있었다. 아직도 연료로 사용하고 있단다. 마을 사람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춘다 집터가 어디인지 물었다. 옆에 있던 어린아이가 “자기가 안다”며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논둑 길을 걸어 한 참 가니, 수로(水路)가 나왔다. 수로 건너 서쪽으로 100m정도 걸으니, 잡목 우거진 곳이 나왔다. 우리를 안내한 아이는 “여기가 춘다의 집터”라고 설명했다. 잡목을 헤집고 들어갔다. 붉은 벽돌 조각들이 있고, 스투파의 흔적이 있었다. 인도고고학국이 세운 유물 안내 표지판도 있었다. 들판에 표지판이 있는 것을 보니, 뭔가 의미 있는 장소인 것 같은데 춘다의 집터라고는 확인할 수도, 확신할 수도 없었다. 우리를 안내한 어린아이가 다시 조금 떨어진 망고나무 숲을 가리키며 “저기가 부처님이 머물던 춘다의 망고 동산”이라고 말했다.
망고 동산에 가보았다. 망고나무만 있었다. 여기가 부처님이 머물렀던 망고동산이고, 춘다의 집터가 확실할까. 몹시 궁금했다. 유물도, 증거도 없이 무엇으로 단정할까. 춘다의 집터라고 어린이아들이 말한 곳에서 걸어나와 마을로 돌아갔다. 마을 입구엔 소똥더미들이 즐비했다. 손으로 만져보니 딱딱한 게 냄새는 나지 않았다. 소똥더미 옆 나무 그늘에 앉았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인도의 나무 그늘은 너무나 고마운 존재들이다. 인도를 다녀본 사람은 누구나 인정한다. 더운 대지의 열기를 식혀주는 나무 그늘이 얼마나 좋은지를. 춘다의 집에서 공양하던 부처님 모습을 떠올렸다.
춘다의 옛집터·망고동산 추적
춘다 집에서 ‘스카라 맛다바’를 공양하고 돌아온 직후 부처님은 심한 병에 시달렸다. 피가 섞인 설사를 계속하는 고통으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고통에도 부처님은 괴로워하지 않고, 바르게 사념하고 바르게 의식을 보전해, 지긋이 고통을 감내했다. 그리곤 “아난아! 쿠시나가라로 가자.”고 말했다. “잘 알았사옵니다. 부처님이시여!”라고 아난존자(尊者)는 대답했다.
부처님이 춘다 집에서 먹은 스카라 맛다바가 뭘까. 어떤 음식이기에 부처님이 먹고 설사를 했을까. 바이샬리에서 병을 얻어 이미 몸이 약해진 탓 아닐까. 5세기 때의 유명한 주석가 붓다고사는 스카라 맛다바를 ‘연한 야생 돼지고기’라고 설명했다. 중국의 역경사들은 ‘전단향 나무 버섯’으로 옮겼다. 그러나 전 동국대 교수 호진스님의 설명에 의하면 언어학적으로 ‘스카라’는 ‘돼지’라는 말이고, ‘맛다바’는 ‘부드러운, 연한’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때문에 스카라 맛다바는 분명히 연한 돼지고기가 의미상 맞다고 한다.
그런데 〈마하파리닛바나 숫탄타〉에는 스카라 맛다바를 “특별히 귀한 요리”라고 했다. 귀한 요리를 먹고 부처님이 설사했다는 것인데, 아마도 80노구에 바이샬리에서 난 병으로, 부처님 몸은 그때 상당히 쇠약해졌을 것이다. 게다가 인도의 더운 날씨에 돼지고기 요리가 상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설사를 계속하신 것은 아닐까.
‘스카라 맛다바’ 먹고 설사
춘다마을을 한바퀴 돌고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목욕했다는 쿠쿠다 강으로 갔다. 〈마하파리닛바나 숫탄타〉에 의하면 쿠시나가라로 가던 도중 부처님은 길 옆의 어떤 나무 아래에 앉았다.
“아난다야! 물을 길어다 주지 않겠는가? 나는 몹시 목이 마르다.”
“부처님이시여! 이 시냇물은 5백대의 수레가 조금 전 지나갔기 때문에 물결이 채 가라앉지 않아 도저히 마실 수 없사옵니다.”
부처님은 세 번씩 물을 찾았고, 결국 아난다 존자는 강으로 갔다. 신기하게도 강물은 깨끗하게 정화돼 있었다. 부처님 위신력에 놀란 아난다 존자는 물을 발우에 가득 채우고 부처님께 드렸다.
물을 먹고 난 뒤 부처님은 비구들과 함께 쿠쿠다 강(현재의 가기강)으로 향했다. 흐르는 강물에 몸을 담가 결과적으로 마지막이 된 목욕을 하고, 물을 먹었다. 그것이 끝나자 강변에 올라 근처 망고나무 숲으로 갔다. 숲에서 부처님은 아난존자에게 말했다.
“아난다야! 장차 저 대장장이 아들 춘다에게 다음과 같은 비난이 있을지도 모른다. 즉 ‘그대 춘다여! 여래께서 그대가 올린 공양을 마지막으로 입멸하셨다는 것은 너에게는 이익 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난다야! 그로 말미암아 춘다가 나에게 최후로 공양한 것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아난다야! 너는 대장장이 아들 춘다를 위로하여라. … (중략) … 음식을 시여함에는 큰 과보와 큰 이익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큰 결과를 초래하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것을 먹고 여래가 위없이 바른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때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먹고 여래가 남김 없는 완전한 열반의 세계에 들 때이니라.”
화장터로 이용되는 쿠쿠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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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쿠다강 > |
사진설명: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목욕한 쿠쿠다강. 강폭은 25m 정도. 쿠쿠다강은 화장터로도 이용되고 있다. 앞에 보이는 탑모양의 것은 무덤. |
쿠쿠다 강의 강폭은 20m 정도. 우기가 되면 최소 25m는 될 것으로 보였다. 작은 강은 아니었다. 물은 깨끗했다. 강변에 차를 세우고 내려갔다. 강을 사이에 두고 주변 둑엔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고, 무덤도 보였다. 쿠쿠다 강변에서 현재 화장(火葬)도 한다고 안내인은 설명했다. 강물에 손을 담가 물을 만졌다. ‘푸더덕’ 소리가 나기에 고개를 들어보니, 마침 소 4마리가 목욕하고 있었다. 한 참이나 목욕하는 것을 보았다.
목욕을 마친 부처님은 아난다 존자에게 “자 아난다야! 우리들은 이제부터 히라냐바티 강의 맞은 편 언덕, 쿠시나가라 외곽 ‘여래가 태어난 곳’인 사라 숲으로 가자.”고 말한다. 많은 수의 비구들과 함께 히라냐바티 강 맞은 편, 쿠시나가라 외곽의 사라 숲에 도착했다.
“아난다야! 이 한 쌍의 사라 나무 사이에 머리가 북쪽이 되도록 침상을 준비하여라. 나는 피로하므로 누워서 쉬고 싶다.”
열반의 땅 쿠시나가라에 부처님이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쿠시나가라로 가자”
쿠쿠다 강을 건너서는 차에서 내려 걸어갔다.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걸어간 길을 조금이라도 더 느껴보기 위해서였다. 길. 부처님은 길에서 자고, 길에서 설법하고, 길에서 공양하고, 길과 함께 평생을 보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가하러 가던 길, 바라나시로 첫 설법하러 가던 길, 쉬라바스티로 가던 길, 그리고 쿠시나가라로 가던 열반의 이 길. 길은 같은데 의미는 전혀 다르다. 쿠시나가라로 가며 부처님은 과연 무엇을 생각했을까. 걸어가며 내내 생각해보았지만, 잡히는 것은 없었다. 상념에서 깨어나니, 쿠시나가라 사라 숲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인도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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