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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원 시집「일곱 명의 엄마」서평 (2016. 시산맥 제11회 시산맥 기획공모 당선시집)
지표 밖으로 표출된 詩의 에너지
마경덕 (시인)
최근 ‘지진’이란 말이 자주 매스컴을 장식하고 있다. 세계 600개 이상의 활화산 중 화산의 80%는 일본 동남아 뉴질랜드 등 태평양 연안지역을 잇는 고리 모양으로 분포되어 있다. 일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몰려 지진 화산대를 이룬 불의 고리(ring of fire), 대부분 화산대는 지각판끼리 만나는 경계면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시와 시인이 만나는 지점은 어디일까. 땅속의 거대한 암반이 갈라지는 충격에 땅이 흔들리듯이 지각변동을 일으킬 ‘시의 지각판’은 어디쯤 매장되어 있을까. 시인들은 어딘가에 감춰진 ‘시의 고리’를 평생 찾아 헤맨다. 시의 밑절미는 ‘불’이 아닐까. 깊은 해저에서 물을 뚫고 오르는 불의 기운이 땅을 가르듯이 물경, 그 힘이 막대하여 수시로 마음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시의 힘’을 시인이 아니고서는 감히 짐작이나 하랴. 점도(粘度)에 따라 분화구 근방에서 굳어지거나 먼 곳까지 흘러가는 용암처럼 시에도 점도가 있다면 단연 후자일 것이다. 시(詩)는 뜨겁게 흘러가야한다. 한곳에 유착되지 않고 대중에게 두루 스며야한다. 깊은 지하에서 생성된 마그마가 벌어진 지각의 틈을 통하여 지표 밖으로 나올 때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하듯이 고여 있던 생각이 활자로 변해 세상으로 유출될 때 놀라운 힘이 발생한다. 하여 시인은 활화산 같은 존재가 아닌가.
이해원 시인의 메커니즘, 또는 시적 구도는 도시를 중심으로 띠를 두르며 형성된다. ‘시의 고리’가 대부분 특정 지역에 집중된 것은 환경이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물이나 바람의 힘으로 이동하여 쌓인 암석층을 분석하면 지구의 역사를 알 수 있듯이 시의 지층을 보면 시인이 천착한 생각의 흐름을 알 수 있다. 이해원 시인은 도시와 인접한 주변의 사물에 접근한다. 이 시집이 주목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통해 실존적 고통에서 ‘삶의 가치’를 발견해내는 것이다. 아래 예시「부레옥잠」도 이와 같은 상황적인 맥락으로 이어진다.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불법체류자의 불안을 자연과 접목한 방식이 새롭고 낯설다.
바람의 찌가 물에 떠 있다
물 위의 집
창문 없는 방
바닥에 닿지 않는 초록의 방은 작은 파문에도 뿌리째 흔들린다
다양한 말이 섞인 회색 가구공장
야자수 잎사귀에 햇살이 쏟아지듯 온몸은 톱밥으로 뒤덮이고 차가운 소음이 어깨에 내려앉는다
지문이 닳도록 자르고 맞추는 목재들
하지만 기둥이 없어 발 뻗을 방 한 칸 들일 수 없다
떠도는 곳의 고장 난 계절은 늘 겨울이다
전선이 늘어진 골목 낯선 발소리는 누군가의 귀향을 암시한다
단속이 나타나면 빠르게 퍼져나가는 통화음에도 혼선이 있어 며칠 전 또 한 사람이 사라졌다
침묵하는 골목
어둠이 망을 본다
벽에 걸린 달력엔 야근을 표시한 숫자가 빼곡한데 십여 년이 가방 하나로 정리된 이주 노동자
짐을 싸는 건 남은 자들의 몫이다
부모의 미등록 신분을 유전처럼 물려받은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유령처럼 뿌리가 없다
부르튼 손에 잡히는 건 허공뿐 보랏빛 꽃봉오리는 보이지 않고
흔들리는 둥근 방
쫓기는 자들은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부레옥잠」전문
시인은 불안과 절망을 통해 이 시대의 환부를 들여다본다.「부레옥잠」은 ‘삶의 비애’ 와 ‘치열한 생존’의 문제를 다룬 빼어난 작품이다. 대상의 특징을 집요하게 조명한「부레옥잠」의 생존지는 다국적 언어가 섞인 가구공장이다. 열대 아메리카가 원산지인 부레옥잠, 중앙이 물고기 부레처럼 부풀어 식물체가 물위에 뜬다. 잔뿌리를 물에 담그고 물 밑 땅에 고착하지 않는「부레옥잠」은 타국으로 떠돌아다니는 부평초 같은 외국인노동자를 지칭한다. 시간과 노동, 감정까지 지불하고 얻어낸 대가를 얻기 위해 단속에 쫓기며 살아가는 불법체류자들. 개인에게 부여된 ‘개인의 사생활’마저 차압당한 채 한 마디 불평조차 못하고 살아간다. 경제의 힘이 비대해질수록 개인의 힘은 약해진다. 그 무력이 행해지는 집단으로 들어가기 위해 숱한 구직자들은 얼마나 많은 이력서를 써야하는가. 대상에 접근하는 방법은 세밀한 관찰력이다. 감정을 배제한 집중된 생각이 노동현장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시인은 ‘삶의 허무’를 증폭시키며 오히려 끈질긴 삶의 의욕을 다루고 있다.「연근 날다」에서도 자연을 객관적상관물로 사용해 상상력의 반경을 넓히고 있다.
연잎이 연밭을 날고 있다
바람에 휩쓸리던 여린 잎사귀도 제법 바람을 탄다
물에 뜨는 부석처럼
뜨기 위해 연근은 물속에서 뼈를 깎는다
무거운 바람은 지표면을 쓸고
가벼운 바람만 채집하는 줄기는 바람의 통로
뿌리는 마디마디 바람을 품는다
깊은 물속
하늘을 날아다닐 싱싱한 생각이 둥근 구멍을 오르내리다 아득한 하늘이 연못으로 내려오면 이슬을 털고 힘차게 날아오른다
초록 날개를 펼치고 펄럭펄럭
새들 몇 마리 섞여 있다
강변의 연이 하늘 높이 오르면
뚝뚝 떨어지는 기온이 서둘러 연의 목을 꺾는다
고통의 부피만큼 가벼워진 뿌리
연근차를 마시면 깃털처럼 가벼워지려나
기포를 품은 돌은 발뒤꿈치에서 날고
목련은 나뭇가지에서 날고
연근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연근 날다」전문
「연근 날다」는 상상력과 활유적 표현으로 생명감이 넘치는 작품이다. 시인의 자유로운 화법을 통해 연은 초록 날개를 펼치고 펄럭펄럭 새처럼 날아간다. 역동성을 지닌 새로운 시적 문장을 탐색함으로서 시적 언어의 긴장도를 높이고 있다. 상투적이고 상식적인 감각을 탈피한「연근 날다」는 하나의 임계점에 도달해 텅 빈 세계의 심연으로 돌아간다. 얼레를 물고 연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계절에 연못은 침잠한다. 겨울 연밭은 참혹, 그 자체이다. 빼곡했던 녹빛들, 바람에 한들거리던 푸른 연잎은 갈색으로 변해 물속으로 주저앉는다. 물속에서 뼈를 깎고 깊은 물속에서 하늘을 날아다닐 희망이 뿌리의 둥근 구멍을 오르내렸지만 찬바람이 연의 목을 꺾어버린 것이다. 겨울 연못에 가면 씨를 다 털리고 말라버린 연밥이 허리를 꺾고 있다. 무성하던 연못은 그렇게 침몰한다. 연밭은 한때 푸른 에너지가 넘쳤던 곳이다. 생성과 소멸이 모두 한 곳에서 진행되고 허무와 상실만 남았다. 깃털처럼 가벼웠던 사람들도 점점 무거워져 연근차를 마시며 날개를 꿈꾸지만 매끈하던 뒤꿈치도 거칠어졌다. 뒤꿈치의 균열은 안간힘으로 살아낸 삶의 기록이었다.
젊음은 욕망이라는 연료를 어디에 소비할까를 고민한다. ‘불금’이라는 신조어가 생기고 불태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젊음은 주말을 코앞에 둔 ‘금요일’에 절정으로 치닫는다. 최근 유흥가에서 많이 소비되는 밤(bomb)은 주로 에너지 음료에 특정 주류를 섞은 것으로 장시간 피로를 잊고 유흥을 즐길 수 있지만 효과가 사라지면 급격한 체력저하를 느낀다고 한다. 잠깐의 쾌락을 위해 몸의 에너지를 다 빼 쓰는 격이다. 그러고 보면 “생명을 담보”로 한 유흥은 대여인 셈이다. 질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탈구축의 욕구와도 맞닿아있는 쾌락은 한철이고 잠깐이다. 어느 시인은 이 시대는 ‘개인’을 잃어버린 채 ‘개인’을 회복하길 갈구하는 개인들이다’고 하였다. 개인에게는 또 다른 개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개인을 통해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체험을 하기 때문이란다. 스스로 위로하지도, 받지도 못하는 개인들. 개인에게 소외와 고립을 강요하는 사회구조에서 궤도를 빗나간 절망이 겨울 연밭의 흔적처럼 남아있다. 아래에 전개되는「종이와 물의 관계」는 현재 진행 중인 사회현상을 다룬 작품이다.
돗자리를 깔고 책이 바람을 쐰다
입을 꼭 다문 책
들러붙은 책장에서 한 장 한 장 말을 떼어내는 여자
바람의 길목에서 교과서가 접힌 귀를 펼쳐놓고
햇빛을 더하고 물기를 뺀다
페이지마다 빼곡한 붉은 글씨와 활자들이 퉁퉁 불었다
손가락도 슬쩍 베어버리는 종이가 물을 기억하고
둘은 쉽게 엉겨붙었다
억지로 떼어내자 살점이 떨어진다
누가 책의 등을 떠밀었을까
한 방울의 물도 종이는 두렵다
책을 빠져나가려고 아우성인 물기
물이 종이를 삼켰을까
종이가 물을 가뒀을까
서로 맞불을 놓는다
저 쭈글쭈글한 흔적
종이의 상처일까
물의 상처일까
둘의 관계는 일그러졌다
—「종이와 물의 관계」전문
「종이와 물의 관계」를 보며 왜 노량진 학원가를 서성거리는 낙타를 떠올렸을까. 컵밥을 찾아 서로 겨루다가 힘이 빠진 낙타들, 페이지마다 빼곡한 퉁퉁 불은 활자들을 먹고 사는 낙타의 행렬을 보았다. ‘합격과 불합격’으로 구분되는 ‘노량진’, 사막을 탈출할 수 있는 건 합격뿐이다. 사막에서 청춘을 저당 잡힌 낙타들, 그동안 몇 번의 거친 물살에 휩쓸렸을까. 도시의 사막으로 유배된 낙타의 무리를 무엇이 가뒀을까? 누가 이곳으로 등을 떠밀었을까. 손가락도 슬쩍 베어버리는 종이의 힘, 물을 만나 둘은 엉겨 붙었다. 종이의 상처인지, 물의 상처인지 알 수 없지만 둘의 관계는 일그러졌다. 고시원 쪽방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한 판의 전쟁에 노량진은 떠도는 낙타들로 불이 꺼지지 않는다. 세상이라는 한 권을 해독하기 위해 재수, 삼수, 사수로 이어지는 이 경기는 어디쯤에서 끝이 날까. 시인은 맞물린 둘의 관계를 끈질기게 추적하며 그 고통에 참여하고 있다.「도마를 이해하다」에서도 비슷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종이와 물의 관계」는 관계에 대한 질문으로 출발해서 본질을 탐문하는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잠결에 어둠이 찢어지는 소리
진원지는 주방
무거운 통나무도마가 구석에 떨어져 있다
옆에 있던 페트병이 날벼락을 맞았다
몸을 펼쳐놓고 말리던 도마가 채 마르기도 전에 중심을 놓쳤다
나는 옆에 있는 가스레인지를 의심한다
불을 좋아하는 가스레인지와 물을 좋아하는 도마
취향은 상극이지만
이곳을 벗어날 수 없는 둘은 주방의 피를 나눠 가졌다
한자리에 묶여 꼼짝 못하는 가스레인지는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도마가 얼마나 부러웠을까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자기 영역에 들어오자 주먹을 날렸다
날선 칼날은 거뜬히 받아내면서 날쌘 한 방은 피하지 못했다
한 번도 불을 이긴 적 없는 나무
이제 이해하게 되었다
스스로 화기를 피해 바닥으로 내려온 나무도마를
—「도마를 이해하다」전문
서로 관련을 맺은 사람과 사물과 현상을 다룬「도마를 이해하다」는 주방이라는 같은 장소에 거주하는 도마와 가스레인지의 관계를 다루었다. 위에서 언급한 ‘종이와 물’처럼 ‘화기와 도마’는 위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불’은 ‘나무’에게 위협적이다. 예각을 지닌 공격성에 곁에 있던 페트병이 날벼락을 맞았다. 시기와 질투가 난무하는 세상의 모습이 주방에서도 재현된다. 어떠한 사물이 다른 사물에 미치는 영향으로 ‘한자리에 묶인’ 가스레인지와 자유로운 ‘도마의 관계’는 불편한 지경에 있다. 예리한 칼날도 거뜬히 받아내던 도마에게 화기(火氣)는 칼날보다 두려운 존재이다. 한 번도 불을 이긴 적 없는 나무, 스스로 화기를 피해 바닥으로 내려온 것이라 믿는 순간, 의심은 사랑으로 바뀐다.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순간, 혐의가 풀린다. 역할은 다르지만 주방의 피를 나눠가진 것들의 불편한 관계는 타인을 ‘이해’함으로 해결되었다.「도마를 이해하다」는 자신의 이익을 먼저 취하려는 세상의 이기적인 모습을 일정한 관계의 구성원으로 참여한 당사자가 ‘이해’라는 명목으로 화해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빈 화분」에서도 고정관념에 길들여진 ‘편견’과 이해에 접근하는 방식을 그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차분하게 보여주고 있다.
흙에 덮인 침묵
뿌리를 품은 계절이 잠잠하다
보랏빛 비비추가 왁자하던 자리
오가는 눈빛 한 아름 보듬던 곳이 썰렁하다
꽃이 진 뒤
이름이 바뀌는 화분
마음에서 사라진다
봄이 오면
일제히 입을 열고
지난해의 각질까지 털어낸다
파릇파릇 일어서서 다시 이름을 바꾼다
때를 기다리며 비어 있는
꽉 찬 겨울 화분
뿌리를 품고 죽은 듯 살아 있다
우리는 보이는 것만 계산한다
—「빈 화분」전문
포획된 사소한 풍경을 담담하게 그려낸 시인은 관찰자이다. 시적 대상은 일상적인 삶 가운데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고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빈 화분이다. 꽃이 지는 순간 우리의 마음도 멀어지고 뿌리를 품은 겨울 화분을 빈 화분이라고 부른다. 지각 변동이 있었던 곳에 지층이 끊어지고 휘어져있듯이 뿌리가 묻힌 화분은 대기 중인 봄이 담겨있는데, 보이는 것만 계산하는 눈에는 현재만 보인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어느 쪽이 더 비중을 차지할까. 그들이 남기고 간 파문은 아직 살아있는데 보이지 않는다고 정말 사라진 것일까. 바람 한 줌에 반응하던 꽃의 떨림, 한 줌의 햇살에도 입을 열던 꽃의 입술, 그것들의 흔적이 아직 기억에 남아있는데 빈 화분이라고 구석에 밀쳐 두거나 화분을 뒤엎어야만 할까.「빈 화분」은 사람들의 일방적인 계산법이다. 그렇다면 꽃의 계산법은 어떤 것일까. 뿌리가 살아있어 아직 진행 중인 생이다. 미처 마치지 못한 계산으로 가슴 졸이는 중이다. 비었다고 말하는 순간 소스라치는 계산법이다.「빈 화분」도 사람들과 관계가 이어지도록 보잘 것 없는 풀뿌리 하나라도 보듬지 않았을까. 잔풀이 많은 화분들, 그래서 빈 화분은 어디에도 없다. 사람의 시간과 나무들의 시간이 다르고 사람의 계절과 나무들의 계절도 다르지만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의 잣대는 너그럽지 않다. 보다 나은 것을 위해 살아있는 목숨도 가차 없이 내다버린다. 제 몸의 진액을 짜내어 꽃을 피우던 줄기마다 꽃의 웃음이 말라서 바삭거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대한 저술 중 20% 이상은 생물학에 대한 탐구이다. 탐구의 중요한 내용은 분류인데, 그렇게 분류에 기울인 관심은 생명체의 ‘존재 목적’을 밝히는데 있었다고 한다. 그는 생물을 분류하면서 그 생물들의 기관의 기능에 초점을 맞추었다. “자연은 목적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하찮은 풀잎도 목적이 있어서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닌가. 설사 해충이라 할지라도 그 해충이 필요한 어떤 생물이 이 지구에는 반드시 존재할 것이니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목숨은 없을 것이다.「빈 화분」은 멀리 있는 것은 보지 못하고 눈앞의 것만 좇는 인간의 편협함과 고정관념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근원적 내면의 측면에는 다시 부활로 이어지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힘은 그의 시가 삶에 대한 진정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열쇠를 꽂아도 반응이 없다
가로막힌 벽 하나로 이곳과 저곳
완벽한 단절이다
거실 전화벨 소리만 현관문을 넘어 온다
말귀가 막힌 철문
투덜거린 말들, 다급한 마음이 발등으로 떨어진다
소통이란 마음 밑바닥까지 들어가 보는 것
언저리에서 맴돌다 끝내 열리지 않던 사람처럼
나를 거부하는 저 벽창호
문을 바꾸려는 속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문득 어느 전철역 광고가 생각났다
곤룡포와 갑옷 사진
어느 쪽이 甲옷일까요
아이들이 모르는 것
그동안 마음을 헤아린 적 없이
차가운 열쇠로 명령만 내렸다
내가 甲이었다
—「갑옷」전문
언제부턴가 우리 곁에 ‘갑’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가끔 힘을 가진 자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도 보인다. “甲질한다”는 말도 생겨났다. 전쟁에 나갈 때 몸을 보호하려고 입는 갑옷도 ‘甲’이다. 어린 아이들은 아직 ‘갑질’의 ‘甲’을 모른다. 어느 날 시적화자에게 닥친 단절은 집의 출구인 ‘현관문’이다. 어떤 오류인지 원활하던 관계는 소통불능이다. 늘 명령만 내리던 화자는 알고 보니 ‘甲’이었다. “곤룡포와 갑옷”도 역시 주종을 이루는 관계이다. 곤룡포를 입은 왕은 ‘甲’이고 갑옷을 입은 장수는 ‘乙’인 셈이다. 하지만 ‘乙’이 있기에 ‘甲’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甲’은 얼마나 될까? 소통이 되지 않는 ‘완강한 문’을 통해 시인은 아직도 존재하는 ‘신분의 차이’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그릇된 사회구조를 언급하고 있다. 세계 최초의 체계적인 윤리학 저서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모든 기술과 탐구, 모든 행위와 추구는 어떤 선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선이라는 목적이 있고 궁극적으로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질 권리가 있지만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행복을 짓밟는 행위는 ‘갑질’을 넘어 범죄에 가깝다. 잠긴 현관문은 벽창호가 되고 소통을 거부하는 귀를 가진 ‘甲’, 역시 벽창호이다.「갑옷」은 현대사회에서 벌어지는 ‘갑과 을’의 불편한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강 씨의 뒷주머니에 숨어서 먹이를 노리는 멍키
제네레타 쎄루모타 라지에타
타 자만 들어도 식욕이 돈다
차 밑에 거꾸로 매달려
온기가 남은 뱃가죽부터 뜯기 시작하자
트럭은 맹수의 습성을 풀어 놓는다
맹렬한 속도로 허기를 돌리던 엔진도
엔진의 속도로 내달리던 난폭한 네 개의 바퀴도
차가운 쇠 이빨에 물리면 맥을 못춘다
—「멍키의 힘」부분
거대한 트럭이 작은 공구 하나에 물려 맥을 못춘다. 속도를 놓쳐버린 트럭은 더는 맹수가 아니다. 그저 쇳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차 밑에 거꾸로 매달려 온기가 남은 뱃가죽부터 뜯기 시작하는 멍키, 친숙한 공구와 트럭의 관계는 이곳에서 ‘甲’이 ‘乙’로 바뀐다. 작은 나사 하나가 빠지면 속도는 망가지고 위험해진다. 어떤 상황에서는 ‘乙’이 ‘甲’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성촌공원 앞에서 줄줄이 단속에 걸린다
원효대교 아래 이촌동 방면으로 좌회전하면 바로 거기,
교통경찰이 쳐놓은 그물에 운전자들이 죽방멸치처럼 걸려든다
갇히는 줄도 모르고 흐름을 따라 들어간 덫,
냄새 하나 새지 않게 아무리 숨을 들이켜도 드러나는 혈중농도
연말, 방심한 흔적이 찍힌다
한 번 들어선 길은 막다른 길
날숨 한 번에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펄펄 끓는 멸막을 지나며 피가 마른다
다리 위만 무사하다
—「다리 아래」전문
원효대교 아래 이촌동 방면으로 달리는 차들, 좌회전을 해야만 교통경찰이 쳐놓은 그물이 보인다. 죽방멸치처럼 걸려드는 운전자들, 은밀히 음주단속이 한창이다. 펄펄 끓는 멸막을 지나야한다. 누구는 불편한 진실이 찍히고 누구는 결백이 찍힌다. 이 역시 쫓고 쫓기는 ‘甲’과 ‘乙’이다. 이해원 시인은 이런 크고 작은 ‘관계’에 집중하며 도시의 이면을 조명한다.「꽃을 업다」에서 보여주는 가로등과 허리에 핀 페튜니아의 관계도 재치가 넘치는 작품이다. 가로등은 꽃을 붙잡고 꽃은 가로등의 키를 넘지 않는 관계는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닌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관계”이다. 이 시집의 표제작인「일곱 명의 엄마」는 가족의 부재를 통해 떠난 자와 남은 자들의 애틋한 관계를 조명하고 있다.
아빠가 엄마 손을 잘랐다 흙에 묻어 놓고 맨날맨날 들여다봤다 엄마는 한 손으로 빨래하고 밥도 했다 엄마의 남은 손 하나를 또 잘라서 흙에 묻었다 손이 없는 엄마는 다른 데서 손이 나왔다 흙에 묻어 놓은 엄마의 손은 점점 자라서 몸통이 되고 거기서 손이 나와 엄마가 되었다 또 손을 잘라서 묻으면 엄마가 되고 되고 되고 그래서 엄마는 수없이 많아지고 아빠는 선인장 화분을 아주 많이 갖게 되고
엄마가 병원 가고 없으면 나는 집이 무서웠다 동생한테 엄마가 네 명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집에 유치원에 이마트에 그리고 피자집에도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동생은 엄마가 세 명 있으면 좋다고 했다 우리 집에 어린이집에 아이스크림 가게에도 엄마가 있으면 좋다고 했다 동생과 나는 내 엄마 동생 엄마가 따로따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빠는 잠만 자는 엄마를 산에 묻었다 산은 아주아주 큰 화분이라고 아빠가 그랬다 아저씨들이 엄마를 흙으로 덮으면서 마구 떠들었다 저러다가 엄마가 깨면 혼날 거라고 생각했다 누가 엄마를 꺼내가지 못하게 아저씨들이 흙을 꼭꼭 밟을 때 나는 기도했다 엄마 싹이 일곱 개 나오게 해 달라고, 아주 큰 엄마 화분을 다 만들고 아빠가 물을 뿌릴 때 나는 속으로 웃었다
—「일곱 명의 엄마」전문
우리는 불행을 예측하고 이에 대처하는 방법을 생각해낸다. 흘러간 추억을 불러오려면 그 자리를 찾아가거나 비슷한 풍경이나 배경을 값으로 사기도 한다. 하지만 복구가 되지 않는 불행도 있다. 어린 아이에게 필요한 엄마는 일곱 명이다. 독자는 동심의 해맑음을 통해 ‘그리움의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일곱 명의 엄마」는 가족과 분리의 과정에서 발생되는 결핍과 슬픔을 내면으로 응결시키며 논리적 호소보다는 감정적 호소로 독자에게 다가간다. 아이에게 전부인 엄마는 아이의 꿈이다. 죽음의 의미와 부재를 알기까지 아이에게 엄마는 죽지 않는 절대적 존재이다. 죽은 엄마와 아이의 관계는 누구도 나서서 해결할 수 없는 슬픔이 겹겹으로 포장되어 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과 새로운 발상이 돋보이는 첫시집의 무게가 알차고 묵직하다. 개성 있는 음색으로 시인이 오랜 각고 끝에 완성한「일곱 명의 엄마」는 지층에 남은 화석처럼 선명한 지표로 독자에게 오래 기억될 시집이다.
이해원 시인
경북 봉화 출생
201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일곱명의 엄마』2016. 시산맥 (제11회 시산맥 기획공모 당선시집)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