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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32이은철]신학과 과학의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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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4 18:47 |
신학과 과학의 관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가토릭의 종교재판에 굴복하여 자신의 주장(지동설 즉 태양 중심설)을 철회함으로써 과학이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과학에 대한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갈릴레이가 사망한 해에 태어난 뉴턴은 중력을 발견하고 자신이 개발한 수학을 통해서 우주를 설명함으로써 마침내 과학혁명을 완성하게 된다. 뉴턴에 의해서 중세 교회의 우주론이 오류였음이 백일 하에 드러났지만 교회는 과학과의 대결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비록 우주론, 즉 천문학에서는 과학에 백기를 들어야 했지만 생물학에서는, 교회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다윈(1809-1882)이 1859 년 <종의 기원>을 출판했을 때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 방대한 증거들에 압도되어 진화론을 받아들였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 시작된 진화론과 교회의 싸움은 지금도 보수적 교회와 과학자들 사이의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어오고 있는 것이다. 즉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교회의 양상이다. 그래서 기독교 가정의 학생들 대부분은, 학교에 가서는 진화론자로 교육을 받고 교회에 와서는 창조론자(비 진화론자)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일반 평신도들은 과학과 신앙(특히 진화론)은 적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중.고등 학생들이 대학생이 되면 그 대부분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은 현실적이지 못한 이중적 가치관 속에 우왕좌왕하다 비판의식이 생기는 연령이 되면 좀 더 타당한 가치관을 따라 교회를 떠나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일까?
가톨릭 교회는 1965 년 교황 바오로 6세가 갈릴레오의 고향 피사를 방문하여 갈릴레오를 높게 평가하고 교회의 잘못을 시인함으로써 교회의 잘못을 인정하였다. 또 요한 바오로 2세도 1979년 갈릴레오 재판이 잘못되었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발언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갈릴레이를 재판한 중세의 로마 가톨릭교회도 근본적으로 과학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실추되는 위기 속에서 교리마저 위협받는 것을 막기 위해 과잉 대응을 한 것이라고 보는 게 사실에 맞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교회가 과학에 대해 심하게 억압을 행하지는 않은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어쨌든 뉴턴 이후로 과학자들은 교회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연구하고 발전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많은 교회들이 과학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자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의 교회는 그 보수적 성격 만큼이나 과학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의 언어만큼 큰 영향력을 가진 언어가 없는만큼 교회와 신학은 과학에 대해 모른 체 하거나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다. 전회의 글에서 간략하게 다루었지만 종교개혁자 루터를 비롯해 필립 멜랑히톤, 칼뱅까지 성서의 문자적 권위에 의존해 코페르니쿠스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파생된 천문학에 대한 회의적 자세는 18 세기 초까지 독일의 신학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연과학의 새로운 발견들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거나 비판하는 일을 점차 삼가하면서 신구교 교회는 모두 점차 과학과의 접촉에서 후퇴하게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다윈의 진화론은 하나님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으로 인식되어 거절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이 과학계에서 주도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여지자 독일의 신학자들은 태도를 바꾸어 과학적 관점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국과 미국은 일찍이 진화론을 수용하여 활발한 논의를 이어오고 있어서 분위기가 사뭇 달랐었다.
과학적 토론을 신학에서 완전히 철수시킨 유명한 인물은 칼 바르트(Karl Barth) 이다, 그는 그의 책 <교회교의학>의 창조론 서문에서 신학적 창조론은 과학적 이론들에 원칙적으로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신정통주의적 교회들, 특히 한국의 보수적 교회들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근대 이후에는, 과학이론들이 그 타당성을 상당히 인정받게 되어 과학이 설명하는 사실들은 타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이런 인식을 무었 으로도 바꿀 수 없게 된 것이 현실이다. 그리하여 바르트와는 달리, 신학자 칼 하임(Karl Heim)은 말하기를
"만일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담론이 과학적 자연 기술과 무관할 경우 공허한 말 장난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현대 신학자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도 그의 책 <자연신학>에서 "만일 신학자들이 하나님을 실재 세계의 창조주로 인식하고자 원한다면, 과학이 기술하고 있는 세계를 우회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여러 정황으로 봐서 신학이 과학과의 대화에 나서야 함은 피할 수 없는 대세임이 분명하다.
신학과 과학의 관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가토릭의 종교재판에 굴복하여 자신의 주장(지동설 즉 태양 중심설)을 철회함으로써 과학이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과학에 대한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갈릴레이가 사망한 해에 태어난 뉴턴은 중력을 발견하고 자신이 개발한 수학을 통해서 우주를 설명함으로써 마침내 과학혁명을 완성하게 된다. 뉴턴에 의해서 중세 교회의 우주론이 오류였음이 백일 하에 드러났지만 교회는 과학과의 대결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비록 우주론, 즉 천문학에서는 과학에 백기를 들어야 했지만 생물학에서는, 교회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다윈(1809-1882)이 1859 년 <종의 기원>을 출판했을 때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 방대한 증거들에 압도되어 진화론을 받아들였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 시작된 진화론과 교회의 싸움은 지금도 보수적 교회와 과학자들 사이의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어오고 있는 것이다. 즉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교회의 양상이다. 그래서 기독교 가정의 학생들 대부분은, 학교에 가서는 진화론자로 교육을 받고 교회에 와서는 창조론자(비 진화론자)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일반 평신도들은 과학과 신앙(특히 진화론)은 적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중.고등 학생들이 대학생이 되면 그 대부분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은 현실적이지 못한 이중적 가치관 속에 우왕좌왕하다 비판의식이 생기는 연령이 되면 좀 더 타당한 가치관을 따라 교회를 떠나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일까?
가톨릭 교회는 1965 년 교황 바오로 6세가 갈릴레오의 고향 피사를 방문하여 갈릴레오를 높게 평가하고 교회의 잘못을 시인함으로써 교회의 잘못을 인정하였다. 또 요한 바오로 2세도 1979년 갈릴레오 재판이 잘못되었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발언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갈릴레이를 재판한 중세의 로마 가톨릭교회도 근본적으로 과학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실추되는 위기 속에서 교리마저 위협받는 것을 막기 위해 과잉 대응을 한 것이라고 보는 게 사실에 맞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교회가 과학에 대해 심하게 억압을 행하지는 않은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어쨌든 뉴턴 이후로 과학자들은 교회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연구하고 발전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많은 교회들이 과학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자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의 교회는 그 보수적 성격 만큼이나 과학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의 언어만큼 큰 영향력을 가진 언어가 없는만큼 교회와 신학은 과학에 대해 모른 체 하거나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다. 전회의 글에서 간략하게 다루었지만 종교개혁자 루터를 비롯해 필립 멜랑히톤, 칼뱅까지 성서의 문자적 권위에 의존해 코페르니쿠스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파생된 천문학에 대한 회의적 자세는 18 세기 초까지 독일의 신학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연과학의 새로운 발견들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거나 비판하는 일을 점차 삼가하면서 신구교 교회는 모두 점차 과학과의 접촉에서 후퇴하게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다윈의 진화론은 하나님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으로 인식되어 거절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이 과학계에서 주도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여지자 독일의 신학자들은 태도를 바꾸어 과학적 관점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국과 미국은 일찍이 진화론을 수용하여 활발한 논의를 이어오고 있어서 분위기가 사뭇 달랐었다.
과학적 토론을 신학에서 완전히 철수시킨 유명한 인물은 칼 바르트(Karl Barth) 이다, 그는 그의 책 <교회교의학>의 창조론 서문에서 신학적 창조론은 과학적 이론들에 원칙적으로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신정통주의적 교회들, 특히 한국의 보수적 교회들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근대 이후에는, 과학이론들이 그 타당성을 상당히 인정받게 되어 과학이 설명하는 사실들은 타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이런 인식을 무었 으로도 바꿀 수 없게 된 것이 현실이다. 그리하여 바르트와는 달리, 신학자 칼 하임(Karl Heim)은 말하기를
"만일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담론이 과학적 자연 기술과 무관할 경우 공허한 말 장난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현대 신학자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도 그의 책 <자연신학>에서 "만일 신학자들이 하나님을 실재 세계의 창조주로 인식하고자 원한다면, 과학이 기술하고 있는 세계를 우회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여러 정황으로 봐서 신학이 과학과의 대화에 나서야 함은 피할 수 없는 대세임이 분명하다.
신학과 과학의 관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가토릭의 종교재판에 굴복하여 자신의 주장(지동설 즉 태양 중심설)을 철회함으로써 과학이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과학에 대한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갈릴레이가 사망한 해에 태어난 뉴턴은 중력을 발견하고 자신이 개발한 수학을 통해서 우주를 설명함으로써 마침내 과학혁명을 완성하게 된다. 뉴턴에 의해서 중세 교회의 우주론이 오류였음이 백일 하에 드러났지만 교회는 과학과의 대결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비록 우주론, 즉 천문학에서는 과학에 백기를 들어야 했지만 생물학에서는, 교회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다윈(1809-1882)이 1859 년 <종의 기원>을 출판했을 때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 방대한 증거들에 압도되어 진화론을 받아들였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 시작된 진화론과 교회의 싸움은 지금도 보수적 교회와 과학자들 사이의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어오고 있는 것이다. 즉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교회의 양상이다. 그래서 기독교 가정의 학생들 대부분은, 학교에 가서는 진화론자로 교육을 받고 교회에 와서는 창조론자(비 진화론자)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일반 평신도들은 과학과 신앙(특히 진화론)은 적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중.고등 학생들이 대학생이 되면 그 대부분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은 현실적이지 못한 이중적 가치관 속에 우왕좌왕하다 비판의식이 생기는 연령이 되면 좀 더 타당한 가치관을 따라 교회를 떠나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일까?
가톨릭 교회는 1965 년 교황 바오로 6세가 갈릴레오의 고향 피사를 방문하여 갈릴레오를 높게 평가하고 교회의 잘못을 시인함으로써 교회의 잘못을 인정하였다. 또 요한 바오로 2세도 1979년 갈릴레오 재판이 잘못되었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발언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갈릴레이를 재판한 중세의 로마 가톨릭교회도 근본적으로 과학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실추되는 위기 속에서 교리마저 위협받는 것을 막기 위해 과잉 대응을 한 것이라고 보는 게 사실에 맞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교회가 과학에 대해 심하게 억압을 행하지는 않은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어쨌든 뉴턴 이후로 과학자들은 교회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연구하고 발전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많은 교회들이 과학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자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의 교회는 그 보수적 성격 만큼이나 과학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의 언어만큼 큰 영향력을 가진 언어가 없는만큼 교회와 신학은 과학에 대해 모른 체 하거나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다. 전회의 글에서 간략하게 다루었지만 종교개혁자 루터를 비롯해 필립 멜랑히톤, 칼뱅까지 성서의 문자적 권위에 의존해 코페르니쿠스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파생된 천문학에 대한 회의적 자세는 18 세기 초까지 독일의 신학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연과학의 새로운 발견들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거나 비판하는 일을 점차 삼가하면서 신구교 교회는 모두 점차 과학과의 접촉에서 후퇴하게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다윈의 진화론은 하나님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으로 인식되어 거절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이 과학계에서 주도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여지자 독일의 신학자들은 태도를 바꾸어 과학적 관점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국과 미국은 일찍이 진화론을 수용하여 활발한 논의를 이어오고 있어서 분위기가 사뭇 달랐었다.
과학적 토론을 신학에서 완전히 철수시킨 유명한 인물은 칼 바르트(Karl Barth) 이다, 그는 그의 책 <교회교의학>의 창조론 서문에서 신학적 창조론은 과학적 이론들에 원칙적으로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신정통주의적 교회들, 특히 한국의 보수적 교회들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근대 이후에는, 과학이론들이 그 타당성을 상당히 인정받게 되어 과학이 설명하는 사실들은 타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이런 인식을 무었 으로도 바꿀 수 없게 된 것이 현실이다. 그리하여 바르트와는 달리, 신학자 칼 하임(Karl Heim)은 말하기를
"만일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담론이 과학적 자연 기술과 무관할 경우 공허한 말 장난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현대 신학자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도 그의 책 <자연신학>에서 "만일 신학자들이 하나님을 실재 세계의 창조주로 인식하고자 원한다면, 과학이 기술하고 있는 세계를 우회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여러 정황으로 봐서 신학이 과학과의 대화에 나서야 함은 피할 수 없는 대세임이 분명하다.
신학과 과학의 관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가토릭의 종교재판에 굴복하여 자신의 주장(지동설 즉 태양 중심설)을 철회함으로써 과학이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과학에 대한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갈릴레이가 사망한 해에 태어난 뉴턴은 중력을 발견하고 자신이 개발한 수학을 통해서 우주를 설명함으로써 마침내 과학혁명을 완성하게 된다. 뉴턴에 의해서 중세 교회의 우주론이 오류였음이 백일 하에 드러났지만 교회는 과학과의 대결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비록 우주론, 즉 천문학에서는 과학에 백기를 들어야 했지만 생물학에서는, 교회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다윈(1809-1882)이 1859 년 <종의 기원>을 출판했을 때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 방대한 증거들에 압도되어 진화론을 받아들였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 시작된 진화론과 교회의 싸움은 지금도 보수적 교회와 과학자들 사이의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어오고 있는 것이다. 즉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교회의 양상이다. 그래서 기독교 가정의 학생들 대부분은, 학교에 가서는 진화론자로 교육을 받고 교회에 와서는 창조론자(비 진화론자)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일반 평신도들은 과학과 신앙(특히 진화론)은 적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중.고등 학생들이 대학생이 되면 그 대부분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은 현실적이지 못한 이중적 가치관 속에 우왕좌왕하다 비판의식이 생기는 연령이 되면 좀 더 타당한 가치관을 따라 교회를 떠나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일까?
가톨릭 교회는 1965 년 교황 바오로 6세가 갈릴레오의 고향 피사를 방문하여 갈릴레오를 높게 평가하고 교회의 잘못을 시인함으로써 교회의 잘못을 인정하였다. 또 요한 바오로 2세도 1979년 갈릴레오 재판이 잘못되었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발언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갈릴레이를 재판한 중세의 로마 가톨릭교회도 근본적으로 과학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실추되는 위기 속에서 교리마저 위협받는 것을 막기 위해 과잉 대응을 한 것이라고 보는 게 사실에 맞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교회가 과학에 대해 심하게 억압을 행하지는 않은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어쨌든 뉴턴 이후로 과학자들은 교회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연구하고 발전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많은 교회들이 과학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자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의 교회는 그 보수적 성격 만큼이나 과학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의 언어만큼 큰 영향력을 가진 언어가 없는만큼 교회와 신학은 과학에 대해 모른 체 하거나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다. 전회의 글에서 간략하게 다루었지만 종교개혁자 루터를 비롯해 필립 멜랑히톤, 칼뱅까지 성서의 문자적 권위에 의존해 코페르니쿠스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파생된 천문학에 대한 회의적 자세는 18 세기 초까지 독일의 신학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연과학의 새로운 발견들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거나 비판하는 일을 점차 삼가하면서 신구교 교회는 모두 점차 과학과의 접촉에서 후퇴하게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다윈의 진화론은 하나님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으로 인식되어 거절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이 과학계에서 주도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여지자 독일의 신학자들은 태도를 바꾸어 과학적 관점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국과 미국은 일찍이 진화론을 수용하여 활발한 논의를 이어오고 있어서 분위기가 사뭇 달랐었다.
과학적 토론을 신학에서 완전히 철수시킨 유명한 인물은 칼 바르트(Karl Barth) 이다, 그는 그의 책 <교회교의학>의 창조론 서문에서 신학적 창조론은 과학적 이론들에 원칙적으로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신정통주의적 교회들, 특히 한국의 보수적 교회들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근대 이후에는, 과학이론들이 그 타당성을 상당히 인정받게 되어 과학이 설명하는 사실들은 타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이런 인식을 무었 으로도 바꿀 수 없게 된 것이 현실이다. 그리하여 바르트와는 달리, 신학자 칼 하임(Karl Heim)은 말하기를
"만일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담론이 과학적 자연 기술과 무관할 경우 공허한 말 장난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현대 신학자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도 그의 책 <자연신학>에서 "만일 신학자들이 하나님을 실재 세계의 창조주로 인식하고자 원한다면, 과학이 기술하고 있는 세계를 우회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여러 정황으로 봐서 신학이 과학과의 대화에 나서야 함은 피할 수 없는 대세임이 분명하다.
신학과 과학의 관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가토릭의 종교재판에 굴복하여 자신의 주장(지동설 즉 태양 중심설)을 철회함으로써 과학이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과학에 대한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갈릴레이가 사망한 해에 태어난 뉴턴은 중력을 발견하고 자신이 개발한 수학을 통해서 우주를 설명함으로써 마침내 과학혁명을 완성하게 된다. 뉴턴에 의해서 중세 교회의 우주론이 오류였음이 백일 하에 드러났지만 교회는 과학과의 대결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비록 우주론, 즉 천문학에서는 과학에 백기를 들어야 했지만 생물학에서는, 교회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다윈(1809-1882)이 1859 년 <종의 기원>을 출판했을 때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 방대한 증거들에 압도되어 진화론을 받아들였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 시작된 진화론과 교회의 싸움은 지금도 보수적 교회와 과학자들 사이의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어오고 있는 것이다. 즉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교회의 양상이다. 그래서 기독교 가정의 학생들 대부분은, 학교에 가서는 진화론자로 교육을 받고 교회에 와서는 창조론자(비 진화론자)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일반 평신도들은 과학과 신앙(특히 진화론)은 적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중.고등 학생들이 대학생이 되면 그 대부분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은 현실적이지 못한 이중적 가치관 속에 우왕좌왕하다 비판의식이 생기는 연령이 되면 좀 더 타당한 가치관을 따라 교회를 떠나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일까?
가톨릭 교회는 1965 년 교황 바오로 6세가 갈릴레오의 고향 피사를 방문하여 갈릴레오를 높게 평가하고 교회의 잘못을 시인함으로써 교회의 잘못을 인정하였다. 또 요한 바오로 2세도 1979년 갈릴레오 재판이 잘못되었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발언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갈릴레이를 재판한 중세의 로마 가톨릭교회도 근본적으로 과학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실추되는 위기 속에서 교리마저 위협받는 것을 막기 위해 과잉 대응을 한 것이라고 보는 게 사실에 맞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교회가 과학에 대해 심하게 억압을 행하지는 않은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어쨌든 뉴턴 이후로 과학자들은 교회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연구하고 발전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많은 교회들이 과학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자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의 교회는 그 보수적 성격 만큼이나 과학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의 언어만큼 큰 영향력을 가진 언어가 없는만큼 교회와 신학은 과학에 대해 모른 체 하거나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다. 전회의 글에서 간략하게 다루었지만 종교개혁자 루터를 비롯해 필립 멜랑히톤, 칼뱅까지 성서의 문자적 권위에 의존해 코페르니쿠스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파생된 천문학에 대한 회의적 자세는 18 세기 초까지 독일의 신학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연과학의 새로운 발견들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거나 비판하는 일을 점차 삼가하면서 신구교 교회는 모두 점차 과학과의 접촉에서 후퇴하게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다윈의 진화론은 하나님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으로 인식되어 거절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이 과학계에서 주도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여지자 독일의 신학자들은 태도를 바꾸어 과학적 관점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국과 미국은 일찍이 진화론을 수용하여 활발한 논의를 이어오고 있어서 분위기가 사뭇 달랐었다.
과학적 토론을 신학에서 완전히 철수시킨 유명한 인물은 칼 바르트(Karl Barth) 이다, 그는 그의 책 <교회교의학>의 창조론 서문에서 신학적 창조론은 과학적 이론들에 원칙적으로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신정통주의적 교회들, 특히 한국의 보수적 교회들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근대 이후에는, 과학이론들이 그 타당성을 상당히 인정받게 되어 과학이 설명하는 사실들은 타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이런 인식을 무었 으로도 바꿀 수 없게 된 것이 현실이다. 그리하여 바르트와는 달리, 신학자 칼 하임(Karl Heim)은 말하기를
"만일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담론이 과학적 자연 기술과 무관할 경우 공허한 말 장난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현대 신학자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도 그의 책 <자연신학>에서 "만일 신학자들이 하나님을 실재 세계의 창조주로 인식하고자 원한다면, 과학이 기술하고 있는 세계를 우회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여러 정황으로 봐서 신학이 과학과의 대화에 나서야 함은 피할 수 없는 대세임이 분명하다.
신학과 과학의 관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가토릭의 종교재판에 굴복하여 자신의 주장(지동설 즉 태양 중심설)을 철회함으로써 과학이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과학에 대한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갈릴레이가 사망한 해에 태어난 뉴턴은 중력을 발견하고 자신이 개발한 수학을 통해서 우주를 설명함으로써 마침내 과학혁명을 완성하게 된다. 뉴턴에 의해서 중세 교회의 우주론이 오류였음이 백일 하에 드러났지만 교회는 과학과의 대결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비록 우주론, 즉 천문학에서는 과학에 백기를 들어야 했지만 생물학에서는, 교회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다윈(1809-1882)이 1859 년 <종의 기원>을 출판했을 때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 방대한 증거들에 압도되어 진화론을 받아들였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 시작된 진화론과 교회의 싸움은 지금도 보수적 교회와 과학자들 사이의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어오고 있는 것이다. 즉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교회의 양상이다. 그래서 기독교 가정의 학생들 대부분은, 학교에 가서는 진화론자로 교육을 받고 교회에 와서는 창조론자(비 진화론자)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일반 평신도들은 과학과 신앙(특히 진화론)은 적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중.고등 학생들이 대학생이 되면 그 대부분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은 현실적이지 못한 이중적 가치관 속에 우왕좌왕하다 비판의식이 생기는 연령이 되면 좀 더 타당한 가치관을 따라 교회를 떠나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일까?
가톨릭 교회는 1965 년 교황 바오로 6세가 갈릴레오의 고향 피사를 방문하여 갈릴레오를 높게 평가하고 교회의 잘못을 시인함으로써 교회의 잘못을 인정하였다. 또 요한 바오로 2세도 1979년 갈릴레오 재판이 잘못되었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발언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갈릴레이를 재판한 중세의 로마 가톨릭교회도 근본적으로 과학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실추되는 위기 속에서 교리마저 위협받는 것을 막기 위해 과잉 대응을 한 것이라고 보는 게 사실에 맞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교회가 과학에 대해 심하게 억압을 행하지는 않은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어쨌든 뉴턴 이후로 과학자들은 교회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연구하고 발전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많은 교회들이 과학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자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의 교회는 그 보수적 성격 만큼이나 과학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의 언어만큼 큰 영향력을 가진 언어가 없는만큼 교회와 신학은 과학에 대해 모른 체 하거나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다. 전회의 글에서 간략하게 다루었지만 종교개혁자 루터를 비롯해 필립 멜랑히톤, 칼뱅까지 성서의 문자적 권위에 의존해 코페르니쿠스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파생된 천문학에 대한 회의적 자세는 18 세기 초까지 독일의 신학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연과학의 새로운 발견들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거나 비판하는 일을 점차 삼가하면서 신구교 교회는 모두 점차 과학과의 접촉에서 후퇴하게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다윈의 진화론은 하나님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으로 인식되어 거절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이 과학계에서 주도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여지자 독일의 신학자들은 태도를 바꾸어 과학적 관점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국과 미국은 일찍이 진화론을 수용하여 활발한 논의를 이어오고 있어서 분위기가 사뭇 달랐었다.
과학적 토론을 신학에서 완전히 철수시킨 유명한 인물은 칼 바르트(Karl Barth) 이다, 그는 그의 책 <교회교의학>의 창조론 서문에서 신학적 창조론은 과학적 이론들에 원칙적으로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신정통주의적 교회들, 특히 한국의 보수적 교회들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근대 이후에는, 과학이론들이 그 타당성을 상당히 인정받게 되어 과학이 설명하는 사실들은 타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이런 인식을 무었 으로도 바꿀 수 없게 된 것이 현실이다. 그리하여 바르트와는 달리, 신학자 칼 하임(Karl Heim)은 말하기를
"만일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담론이 과학적 자연 기술과 무관할 경우 공허한 말 장난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현대 신학자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도 그의 책 <자연신학>에서 "만일 신학자들이 하나님을 실재 세계의 창조주로 인식하고자 원한다면, 과학이 기술하고 있는 세계를 우회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여러 정황으로 봐서 신학이 과학과의 대화에 나서야 함은 피할 수 없는 대세임이 분명하다.
신학과 과학의 관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가토릭의 종교재판에 굴복하여 자신의 주장(지동설 즉 태양 중심설)을 철회함으로써 과학이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과학에 대한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갈릴레이가 사망한 해에 태어난 뉴턴은 중력을 발견하고 자신이 개발한 수학을 통해서 우주를 설명함으로써 마침내 과학혁명을 완성하게 된다. 뉴턴에 의해서 중세 교회의 우주론이 오류였음이 백일 하에 드러났지만 교회는 과학과의 대결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비록 우주론, 즉 천문학에서는 과학에 백기를 들어야 했지만 생물학에서는, 교회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다윈(1809-1882)이 1859 년 <종의 기원>을 출판했을 때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 방대한 증거들에 압도되어 진화론을 받아들였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 시작된 진화론과 교회의 싸움은 지금도 보수적 교회와 과학자들 사이의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어오고 있는 것이다. 즉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교회의 양상이다. 그래서 기독교 가정의 학생들 대부분은, 학교에 가서는 진화론자로 교육을 받고 교회에 와서는 창조론자(비 진화론자)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이리하여 대부분의 일반 평신도들은 과학과 신앙(특히 진화론)은 적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중.고등 학생들이 대학생이 되면 그 대부분이 교회를 떠나는 현상은 현실적이지 못한 이중적 가치관 속에 우왕좌왕하다 비판의식이 생기는 연령이 되면 좀 더 타당한 가치관을 따라 교회를 떠나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일까?
가톨릭 교회는 1965 년 교황 바오로 6세가 갈릴레오의 고향 피사를 방문하여 갈릴레오를 높게 평가하고 교회의 잘못을 시인함으로써 교회의 잘못을 인정하였다. 또 요한 바오로 2세도 1979년 갈릴레오 재판이 잘못되었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발언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갈릴레이를 재판한 중세의 로마 가톨릭교회도 근본적으로 과학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실추되는 위기 속에서 교리마저 위협받는 것을 막기 위해 과잉 대응을 한 것이라고 보는 게 사실에 맞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교회가 과학에 대해 심하게 억압을 행하지는 않은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어쨌든 뉴턴 이후로 과학자들은 교회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연구하고 발전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많은 교회들이 과학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자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의 교회는 그 보수적 성격 만큼이나 과학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의 언어만큼 큰 영향력을 가진 언어가 없는만큼 교회와 신학은 과학에 대해 모른 체 하거나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다. 전회의 글에서 간략하게 다루었지만 종교개혁자 루터를 비롯해 필립 멜랑히톤, 칼뱅까지 성서의 문자적 권위에 의존해 코페르니쿠스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파생된 천문학에 대한 회의적 자세는 18 세기 초까지 독일의 신학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하여 자연과학의 새로운 발견들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거나 비판하는 일을 점차 삼가하면서 신구교 교회는 모두 점차 과학과의 접촉에서 후퇴하게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다윈의 진화론은 하나님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으로 인식되어 거절당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이 과학계에서 주도적인 이론으로 받아들여지자 독일의 신학자들은 태도를 바꾸어 과학적 관점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국과 미국은 일찍이 진화론을 수용하여 활발한 논의를 이어오고 있어서 분위기가 사뭇 달랐었다.
과학적 토론을 신학에서 완전히 철수시킨 유명한 인물은 칼 바르트(Karl Barth) 이다, 그는 그의 책 <교회교의학>의 창조론 서문에서 신학적 창조론은 과학적 이론들에 원칙적으로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신정통주의적 교회들, 특히 한국의 보수적 교회들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근대 이후에는, 과학이론들이 그 타당성을 상당히 인정받게 되어 과학이 설명하는 사실들은 타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이런 인식을 무었 으로도 바꿀 수 없게 된 것이 현실이다. 그리하여 바르트와는 달리, 신학자 칼 하임(Karl Heim)은 말하기를
"만일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담론이 과학적 자연 기술과 무관할 경우 공허한 말 장난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현대 신학자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도 그의 책 <자연신학>에서 "만일 신학자들이 하나님을 실재 세계의 창조주로 인식하고자 원한다면, 과학이 기술하고 있는 세계를 우회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여러 정황으로 봐서 신학이 과학과의 대화에 나서야 함은 피할 수 없는 대세임이 분명하다.
② 바울 사도도 사람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권면한다. 고린도전서 10:31~33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③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마 22:21). 바울 사도도 이렇게 동일한 가르침을 준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로마서 13:7)
④ 목회자의 납세 의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에 거치는 자가 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납세의 의무를 도입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납세를 해야 하는 목회자는 비교적 부유한 목회자들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을 실족시키지 않기 위하여 성전세를 내셨거늘 이 세대가 문제 삼는 이 일을 그냥 논리를 내세워 거치는 자가 되고 복음의 장애물을 놓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⑤ 신자들끼리 어떤 행위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을 때는 구원의 문제가 아니면 너그럽게 생각하는 것이 좋다. 옳고 그름을 가지고 다투면 결국 거치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바울이 일러주는 교훈은 여러 곳에 있다:
l 딤전 1:6~7è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l 딤후 2:16~18 è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l 딤전 6:20~21è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l 디도서 3:9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l 골로새서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2013년 11월 30일 토요일
이 본문을 설교로 준비할 때 다음과 같은 주요 메시지를 정리해 볼 수 있다:
1.
2.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 안식일에 병자 고친 일로 인하여 바리새인과 논쟁이 되었을 때 그들은 예수를 죽일 궁리를 시작하였다 마 12:14. 그러자 예수께서는 갈릴리에 다니시고 유대에 다니려 하지 않으셨다. 이는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요 7:1. 오병이어 칠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예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로 물러가셨다가 헐몬산으로 옮기셨다. 그 후에 갈릴리에 내려오셔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계획이었다. 바야흐로 예수님의 마지막 공생애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마태복음 18장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 몇 개를 담고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 19장에서 주님께서는 마침내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신다. 누가복음 9:51에서는 예수님의 이런 심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3. 예수님의 관심사와 계획을 제자들은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근심을 많이 했다. 어떻게 하실 계획일까? 앞으로 주님께서 죽으시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것이 제자들의 근심 이유였을 것이다. 예수님을 가까이서 따르던 제자들이 이렇게 주님을 잘 몰랐다면 우리는 어떨까?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한 근심은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 나의 뜻과 다른 주님의 뜻 앞에 제자들의 반응은 근심이었다. 그러나 그 길은 생명의 길이요 그 길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 제자들의 이 근심은 훗날 기쁨으로 변화되었다. 그것은 주님의 뜻을 몰랐기 때문에 근심하였고 주님의 뜻을 알고 나서는 기뻐할 수 있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보기 전에는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었다. 성령의 강림도 그들의 영혼을 열어준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어떤가? 주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가? 우리에게 제시된 주님의 뜻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정지영 목사님은 물질을 드리는 것이 늘 우리의 감당할 십자가라고 한다. 사람들에게 넘겨지는 것 죽임을 당하는 것 그러나 제 삼 일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 주님께서 가셔야 할 길이었다. 그런데 우리도 그런 것 아닌가? 우리도 주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며 살다가 죽으면 주님 앞에서 영광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면 우리도 주님의 뒤를 따르는 자들이다. 그 길을 가리켜 우리는 십자가의 길이라고 한다. 주님을 따르지 않았더라면 갈 필요가 없고 느낄 필요도 없고 질 필요도 없었을 그 길 말이다. 그 길을 주님께서는 준비하시고 때를 기다리시고 이렇게 가고자 하셨다.
① 주님을 위해 살겠노라고 결심하고 아버님께 그 뜻을 말씀 드렸을 때 아버님의 근심은 크고 실망도 크셨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아버님께서는 허락하셨고 나는 이제껏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하는 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우리 성도들도 그렇게 지금까지 걸어오고 있다. 우리 교회에 나오는 모든 이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왔다. 주님께서 기뻐하실 길을 걸으리라. 그 길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근심거리가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미움거리가 되기도 한다. 또한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②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음성으로 인도하심을 받으셨으나 아직 제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성령의 음성을 따라 살아간 사람 중에 양화진에 묻힌 외국인 선교사 존 헤론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테네시 주립대학교 의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부흥회 때 성령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한 후 이제 충분히 준비하였으니 이제 땅 끝으로 가라는 음성에 순종하여 조선에 오게 된다. 그리고 조선에 6년을 머물면서 조선인들을 사랑하였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뜻에 걸림이 되거나 근심할 것이다.
4. 가버나움에 오셨을 때 성전세 징수원이 예수님의 제자를 만나 예수께서 성전세를 내시지 않느냐고 물었다. 베드로는 성전세를 당연히 내실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께 와서 물었다. 예수께서는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는 분임을 상기시켜 주셨다. 그렇다. 성전세란 하나님의 성전을 돌보는 데 필요한 세를 말한다. 수 천년 전부터 있던 제도였다. 그런 제도를 주님께서 모르실 리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서는 성전세를 내실 필요가 없는 분이셨으나 세상은 알지 못한다. 그 때 주께서는 그들을 실족시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베드로에게 물고기를 잡아 내게 하셨다. 주님은 이미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준비하고 계시지 않는가? 그런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관원을 실족하지 않게 하시려고 그런 조치를 취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은 때때로 다른 사람에게 근심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어떤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으로 살아야 한다.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에서 흠 없고 순전하게 살아 빛의 자녀로 드러나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무례하면 안 된다.
① 국세를 내고 책임을 다하자. 공동체의 일원으로 소임을 다하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이 땅의 작은 규칙을 어길 수는 없다.
② 더 많이 희생하고 손해를 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유익이 된다면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지 않을까? 내 목숨까지도 바치려 하는데 이 작은 것을 지키지 못하랴? 더 정직하고 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그리스도인은 믿을 수 있다는 말을 듣게 합시다.
③ 바울의 경우 자신은 남이 시험 든다면 즉 실족한다면 고기를 평생이라도 먹지 않겠다고 한다. 그것이 주님의 사람이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의 자세다.
5. 이상 말씀의 주요한 메시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예수님의 길은 제자들에게 큰 근심거리였다. 주님의 뜻을 행하려 할 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의 근심과 미움 또는 비웃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길이 하나님의 뜻이요 그 길이 사람들을 살리는 길이라면 주님의 종들은 따라가야 한다. 그렇게 간 사람 존 헤론을 보라.
② 성전세를 내는 문제로 주님께서 보여주신 태도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참을 일도 많다.
6. 이 메시지가 우리 성도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① 성도들이 걸어가는 길은 작은 교회를 섬기는 일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겪는 일도 쉬운 것이 아니다. 때로는 고난도 겪을 것이다. 마음에 주님께서 주시는 뜻을 행하려고 할 때 갈등도 생길 것이다. 이웃이나 가족에게 싫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을 기억하라고 권면해 주자. 그 결과는 아름다운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우리 교회는 학생들이 더 많다. 이들을 세워나가는 데는 물질도 필요하다. 어른들의 헌신이 더욱 필요한 때다. 힘을 냅시다. 이렇게 격려하고 싶은 메시지다.
②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부당한 대접을 받을 때가 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귀한 것이며 주님께서 칭찬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열매는 반드시 아름다운 것이 될 것이다.
③ 그러므로 이 설교를 통해서 분명하게 전할 주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이 당할 어려움과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취할 행동 방식이다.
주일 메시지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성경연구 자료 2013년 12월 1일 주일 설교
성경 본문: 마태복음 17:22~27
위의 성경본문을 잘 읽고 다음의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1. 22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고난과 죽음, 부활을 말씀하신 장소는 어디인가요?
2. 이것이 세 번째 말씀입니다. 그럼 앞의 두 차례는 어디서 하신 말씀일까요? 아래 구절을 찾아보고 그 대답을 찾아보세요.
① 첫 번째 수난 예고 장소: 마 16:13~25 è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② 두 번째 수난 예고 장소: 마 17:1~13è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위의 세 경우를 각각 비교해보세요.
수난 예고 |
성경구절 참조 |
제자들의 반응 |
첫 번째 예고 |
마 16:21~23 |
|
두 번째 예고 |
마 17:9~10 막 9:9~10 |
|
세 번째 예고 |
마 17:22~23 막 9:30~32 |
|
4. 수난 예고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을 보면 제자들은 심히 근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은 제자들에게는 근심과 고민거리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극구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예수님의 길을 반대하고 심히 근심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제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렇게 만류하고 심히 근심하는 그 길을 왜 굳이 가시려 할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6. 존 헤론의 이야기를 읽어보고 믿음의 사람이 선택하는 길에 관해 생각해 봅시다.
1856년 6월 15일 영국에서 출생
1885년 6월 21일 내한
의사이자, 북장로회 장로교 1호 선교사
양화진에 최초로 안장된 선교사
그림 1 (출처: http://www.kchmuseum.org/)
헤론은 동 테네시 주 메리빌 대학을 졸업하고 테네시 종합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합니다.
그리고 27살의 나이에 개교 이래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게 됩니다.
그림 2테네시대학교 (출처: http://www.utk.edu/aboutut/history/)
테네시 의과대학을 졸업하기 전 학교로부터 교수가 되어줄 것을 요청받았지만 이를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실제로 교수로 근무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그렇지만 1883년에 졸업하고 1884년에 파송받은 것을 생각해볼 때 교수직을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의사 자격시험 준비 중 교회 부흥회에 갔을 때 성령으로 거듭 나는 체험을 하고 기도 중에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땅끝으로 가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후 모교인 테네시 대 의대의 계속 되는 교수 초빙이 있었지만 기도 중 들린 말씀에 따라 자신의 사역지를 찾게 됩니다.
그 때 기독교 선교잡지를 읽던 중 조선의 이수정이 쓴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달라’ 라고 쓴 편지 내용을 보게 되었고 이 때 미 북장로교 선교부를 방문해 한국 의료 선교사로 지원했다. 존 헤론은 미국에서 한국으로 파송하는 미국장로교 최초 한국 선교사로 정식 임명되었고 일본으로 가서 이수정을 만나 조선말을 배우고 문화를 익힌 후 1884년 6월 21일 제물포에 도착합니다.
일본에서 한국어를 배우며 때를 기다리던 헤론 부부는
드디어!! 1885년 6월 21일, 의료선교사로 한국 땅을 밟게 됩니다.
알렌과 광혜원
조선으로 온 헤론은 알렌의 광혜원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헤론의 사역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알렌을 빼놓을 수 없는데요 알렌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을 세운 선교사입니다.
그림 3호러스 알렌 (출처: http://kcm.kr/dic_view.php?nid=39473)
그러다 조선에 있는 외국인들이 의사가 없어 고생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런데 그해 갑신정변이 터지게 되고, 부상당한 민영익을 치료한 공으로 광혜원을 세우게 됩니다. 이 광혜원이 나중에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어요. 1887년 알렌이 주미 조선 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임명되자
그림 4광혜원 (출처: http://blog.naver.com/bbuliro/20148169158)
헤론 선교사는 알렌의 뒤를 이어 제중원 원장이 되는 동시에 고종황제의 시의로 일하게 됩니다.
시의란 궁중에서 임금과 왕족의 진료를 맡은 의사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가 평소 사극에서 자주 보던 어의와 같아요.
중국 같은 황제국에서는 황제를 치료하는 의원을 태의(시의)라고 불렀고
조선 같은 제후국에서는 임금을 치료하는 의원을 어의라고 불렀습니다.
그림 5고종황제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헤론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신임을 받아 가까이서 왕족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습니다. 명성황후는 헤론의 부인을 무척 총애하여 잔치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참석하게 했다고 해요.
의료선교사 헤론
헤론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환자들을 매우 헌신적으로 진료했습니다. 이로 인해 헤론은 널리 알려지게 되는데 특히 백내장 수술로 유명했다네요^^ 헤론은 진료 가방을 들고 100리 이상되는 원거리를 이동하며 전염병을 진료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고 해요.
그림 6양화진에 안장된 헤론의 묘 (출처: http://sangto3.tistory.com/24)
è존 헤론이 한국에 선교사로 오기로 결심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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è존 헤론이 한국에 선교사로 오기 위해서 포기한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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è존 헤론이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성취한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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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본문 마태복음 17:24~27을 읽고 다음의 문제들을 풀어봅시다:
① 가버나움에서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와서 물은 질문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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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베드로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③ 다음을 읽고 반 세겔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출애굽기 30:11~16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들을 계수할 때에 자기의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것을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질병이 없게 하려 함이라
13.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14. 계수 중에 드는 모든 자 곧 스무 살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15.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16.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리라
l 반 세겔을 내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l 반 세겔을 사용하는 용도는 무엇입니까?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④ 반 세겔은 성전을 수리하기 위해서 내는 성전세라고 합니다. 성전세 반 세겔을 내는 문제에 관하여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들려주신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7장 25절, 26절을 자신의 말로 요약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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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27절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라고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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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결국 예수님께서는 성전세를 내셨습니다. 내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성전세를 내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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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27절에서 실족하다는 말은 넘어지게 하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을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한 바울 사도의 노력을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사람들을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했습니까? 다음 구절을 읽어보고 대답을 쓰세요.
고린도전서 8:8~13
8.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è 바울 사도가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려고 하기로 결심한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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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오늘 성경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원리를 발견합니다.
① 주님의 뜻을 순종하려 할 때 때로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근심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길을 순종으로 완주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② 그리스도인은 때때로 주님의 뜻을 위하여 또는 사람을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권리를 포기할 때도 있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희생과 손해를 감수해야 할 일들도 있다. 그 길을 주님께서 걸어가셨다.
9. 이번 성경 연구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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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번 성경연구를 통해 나는 무엇을 결심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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