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향명상교실-2013.10.7(월)
쾌락의 끝은 무엇인가?
부와 권력을 향한 삶의 끝은 무엇인가?
방황의 끝은 어디인가?
부처님 당시 최고로 번성했던 부유한 도시 바라나시에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부와 권력이 허락하는 모든 혜택을 다 누리면서 안락하고 유쾌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아마도 오늘날 재벌2세에 해당하는 삶을 살았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의식주를 위해서 노동할 필요가 없는 그는 24시간이 온통 여가 시간이다. 게다가 모든 종류의 쾌락을 만족시킬 수 있는 수단을 다 가지고 있다. 눈과 귀를 기쁘게 하고, 코와 입을 즐겁게 하며, 미인의 감촉과 감미로운 감정과 향락적인 상상을 다 만족시킬 수 있다. 하루 종일 이렇게 살고, 한 평생 이렇게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이 부와 권력을 가지고 싶어 하는 이유가 아닌가? 부와 권력에서 소외된 대중은 가진 자들은 아마도 모두 그렇게 살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런 삶을 부러워하고 닮고 싶어 한다. 그러나 부유한 자들에게도 고통은 있다. 쾌락이 보장된 삶에 권태라는 것이 끼어든다. 한 때 즐거움을 주던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들해진다. 쾌락의 한계효용이 체감하는 것이다. 경탄할 만한 경치도 자꾸 보면 그냥 배경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영혼을 울리는 음악도 오래 들으면 청각을 무디게 만든다. 뇌쇄적인 미인의 섹시미도 자주 보면 시들해지고, 입맛은 까다로워지고, 취향은 세련되어진다. 만족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호사와 사치와 모든 유흥과 향락이 권태로워진다. 권태를 이기기 위해 전위적이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쾌락을 추구해본다. 변태성 섹스에 마약까지도. 과도한 쾌락은 심신을 소진시키고, 권태는 정열을 식게 만든다. 삶은 무의미해지고 무력감에 빠진다. 어릴 때부터 부족함을 모르고 살아왔기 때문에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누리고 소비하고 즐기는 식으로 살아왔으니 자기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젠 누리고 즐기는 일조차 심드렁해졌다. 남아나는 게 시간이라, 눈을 뜨면 ‘오늘은 뭐하고 지내지, 뭐 재미난 일 없나?’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시들해졌다. 뭐 한번 해봤으면 하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바라나시의 청년 야사(Yasa)가 이런 지경에 다다라 숲속을 헤맨다. “아, 싫다. 괴롭다. 정말 비참하구나.” 이른 새벽, 어둠이 가시지 않은 녹야원에 낯선 절규가 메아리쳤다. 한 젊은이가 술이 깨지 않은 채 헝클어진 머리로 옷깃을 풀어헤치고 숲 속을 휘젓고 있었다. 고요히 앉아계신 부처님이 나직하게 부르신다. “젊은이, 이곳에는 괴로움이 없다네. 비참함도 없다네.” 아침공기처럼 상냥한 목소리에 청년은 놀란다. “놀라지 말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시 여기에 앉게.” “무엇이 그토록 싫고 비참한가?”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아무리 되뇌어보아도 제 삶은 너무나 비참합니다. 이제는 지긋지긋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얘기해 줄 수 있겠는가?”
보라, 부처님은 정신없는 청년을 정신 차리게 하려고 자기가 살아온 과정을 제 입으로 말하도록 유도한다. 자기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하듯이 하게 되면 자기를 객관화하여 볼 수 있게 된다. 자기에게 묶였던 주의가 풀어져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자기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 고통의 원인을 찾아낼 수 있는 계기가 올 수도 있으니까. 야사는 쾌락을 일삼던 이제까지의 삶이 싫증이 났고, 역겨워졌으며,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다. 나름대로 길을 모색해보았으나 어디에도 길은 보이지 않았고, 홀로 가슴을 썩이며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쾌락의 끝은 권태요, 좌절이며, 불만족이며, 공허함이며, 추락이며, 자포자기이며, 죽음이다.
“젊은이, 그대가 살고 있는 삶은 끝없는 허전함과 고통을 안겨주고 결국은 파멸로 이끌 것이네. 그대가 서 있는 곳은 위험하고 불안해. 내가 있는 자리로 오게. 이곳은 안전하고 평온한 곳이네.”
“성자시여, 평온하고 안전한 곳은 어디입니까?”
이제 야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걸려들었다. 평온하고 안전한 곳. 갈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충만한 경지. 무엇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곧바로 느낄 수 있는 행복. 지금 여기에서 느낄 수 있는 자존감. 흔들리지 않는 평온과 진부해지지 않는 생동감. 권태와 좌절이 눈 녹듯 사라지는 황홀한 순간. 얼마나 간절히 원했던 것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이여. 얼마나 상쾌하고 유익한 처방인가! 권태와 좌절로 방황하던 야사의 눈을 뜨게 하고 활기를 되찾아주며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Svakkhato bhagavato Dhammo
스와카또 바가와또 담모
존귀하신 분에 의해서 잘 설해진 담마!
Sanditthiko akaliko
산딧티꼬 아깔리꼬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결과는 곧 바로 나타나니
Ehipassiko opanayiko
에히빠씨꼬 오빠나이꼬
와서 보라고 초청할 수 있으며, 향상으로 인도되는 진리이며
Paccattam veditabbo vinnuhi
빠짯땅 웨디따보 윈뉴히.
지혜로운 자라면 알아야 하는 진리.
젊은이, 여기 내 옆에 앉아보게. 그대의 몸과 마음은 지금 이대로 온전하네. 쾌락을 추구해서는 안정된 행복을 얻을 수 없다네. 사물과 사람에게 의존하는 쾌락은 마취된 것이며 중독된 것이라, 권태와 좌절이 필연적으로 따라온다네. 쾌락을 쫓아가지 말게. 나에게는 대상에 의존하지 않는 차원이 다른 쾌락이 있다네. 그것은 사람과 사물에 의존하여 얻어진 것이 아니므로 권태로워지지도 않고 피곤해지지도 않는다네. 쾌락을 구하려던 마음을 내려놓게나. 혐오스럽고 비참했던 기억을 내려놓게나. 싫어하고 좋아하는 양단간의 감정을 내려놓게나. 그리고 물들지 않는 어린아이의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게나. 몸과 마음을 편하게 내려놓고 호흡을 느껴보게나. 숨을 들이 쉬고 내쉬어보게. 숨을 들이쉴 때는 들이쉰 줄 알고, 내쉴 때는 내쉰 줄 알게. 한 호흡 한 호흡을 느껴보게. 호흡이 그대를 안온하고 미묘한 행복으로 이끌어 갈 걸세. 지금 여기에 무슨 비참함과 고통이 스며들 것인가? 권태와 좌절이 어디에서 끼어들 것인가?
젊은이여. 이 자리가 방황의 끝이니라. 이 자리가 유가안온이요 해탈이니라.
야사는 하얀 실크에 물이 곱게 들듯이 법에 젖어들었다. 진리를 보는 눈이 맑아지고 시간을 잊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렸다고 야단스럽게 이리저리 찾아다니던 야사의 부모는 부처님과 함께 명상에 들어있는 아들을 발견했다. 법의 환희에 잠겨있는 야사의 얼굴은 빛나고 있었다. 성스러운 현존의 아우라가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를 감싼다. 야사의 아버지는 부처님의 두발에 예배하고 합장한다.
“기쁜 일입니다. 부처님, 마치 넘어진 이를 일으켜 세워주듯, 가려진 것을 벗겨주듯, 길 잃은 사람에게 길을 가리켜주듯, 눈 있는 사람은 보라며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쳐주듯, 부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법을 설해 주십니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
바라나시의 청년 야사에게 법이 보여졌고, 고통의 소멸로 가는 길이 열렸다.
쾌락의 끝은 환멸이다. 부와 권력의 종말은 허무이다. 방황의 끝은 죽음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난다면, 쾌락의 끝은 놓아버림이요, 부와 권력의 끝은 '버리고 떠나기'이며, 방황의 끝은 해탈이다. 여기에 길이 있다고 나는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