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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정원박람회
송치 고개를 넘은 순례자들은 순천 시청 옆에서 일박을 했다. 다음날(9월10일) 아침 7시 10분 전에 금오랑은 조식을 어디서 할 것인지 알아보려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연 식당이 없다. 마침 ‘아침 식사 됩니다.’라고 안내하는 식당을 발견했다.
“아침 식사는 8시부터 하는데요.”
‘이거 참 낭패네. 7시에 식사한다고 알렸는데... 순천 사람들은 일찍 출근 안하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른 식당을 알아보았다. 가게 문을 열고 음식을 장만하고 있던 아주머니에게 강요하다시피 주문했다. 7시 반까지 좀 해 주셔요. 빨리 되는 것이 뭡니까?“
“생선조림이 젤루 빨리 되오.”
금오랑이 문자를 보냈다.
“아침 식사는 7시 반부터입니다. 어제 저녁의 식당 보다 골목으로 더 들어가 <유명식당>을 찾으세요.”
이날 순례자들은 아침 식사를 제대로 해야 한다. 박람회장까지 50분쯤 걸어야 하고 넓은 박람회장을 서너 시간 걸어서 보아야하기 때문이다.
“야, 여기 반찬 제대로 나오네. 역시 음식은 전라도가 푸짐해.”
“생선구이가 이 집 메뉴 중 제일 비싼 거라서 찬도 많은 걸 거예요.”
순례자들은 순천 동천을 찾아들어갔다. 동천 변에는 자전거 길과 화장실이 있고 야생화로 조경을 해 놓았다. 둑방길 가로수는 시원한 그늘로 순례자를 반겨주었다. 걸음이 늦다고 식당에서 남보다 일찍 출발한 권대사와 검암이 후발대와 만났다. 일행은 박람회장의 남문으로 입장했다. 한국정원을 먼저 보라는 남문 안내자의 권고대로 서편을 향했다. 한국정원은 창덕궁의 정원을 옮긴 듯했다. 세계정원으로 가려면 컨테이너를 연결해 만든 <꿈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 다리는 세계 14만 어린이의 그림을 타일로 만들어 붙인 설치미술가 강익중 작품이다. 이 다리를 통과하면서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다. 조그만 타일 마다 초등학생의 발랄함이 꼭꼭 박혀있다. 14만 명이나 되는 어린이의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꿈의 다리를 건너면 중국과 프랑스 정원이다. 꿈의 다리를 건너며 꿈속을 헤맨 까닭인지 금오랑은 홀로 남겨졌다.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호수 위에 떠있는 둥근 잔디 언덕이다. 달팽이 무늬의 하얀 길을 따라가면 정상에 이르고, 계속 나아가면 하강하는데 오르는 길 사이에 난 길이므로 오르는 사람과 마주치지 않게 설계했다. 찰스 젱스의 디자인이다. 이를 삽화로 설명하면 그림과 같다.
금오랑이 입구의 다리를 지나 정상에 오르니 마침 검암과 권대사가 하강하여 호수다리를 건너 출구로 향하고 있었다. 순례자들은 이미 순례자가 아니다. 그들은 이제 관광객이다. 저마다 흥미를 쫓아다니므로 세 명이 함께 가는 모습은 좀처럼 없다. 그는 네델란드 정원 근처에서 안내자의 설명을 듣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안내자는 시원한 언덕 위에 심은 나무에 대해 득의의 미소를 띠우며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기증 받은 희귀 종이라 했다. 청호, 낙산, 노작가가 아픈 다리를 쉬면서 주위의 경치를 바라보며 듣는 둥 마는 둥하고 있었다.
계속 쉬겠다는 사람을 두고 홀로 내려온 금오랑은 다리가 아파 잔디에 앉아 쉬었다. 그는 노작가와 낙산을 만나는가 싶더니 다시 세계정원에 취하여 또 홀로가 되었다. 이러다가는 순례자들 한데 모으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금오랑은 순례자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동문집합 13시. 윤 교수도 만납세. 중식은 왜성을 보고 15시쯤 합니다. 왜성은 서문 밖에서 버스나 택시로 갑니다.”
금오랑은 혼자서 이탈리아, 스페인, 터키, 일본정원을 둘러보았다. 태국정원을 보고 동문에 이르니 검암과 권 대사가 먼저 와 있었다. 이때 인송이 도착했다.
“좀 둘러보았나?”
“그럼 1시간 반, 볼 건 거의 다 보았어.”
인송은 순천역에 11시5분에 도착해서 박람회장 가는 셔틀을 타고 곧장 온 것이다.
“지금이 딱 식사시간인데 왜성까지 가야하나?”
“귀경해야 할 사람도 있으니 여기서 점심 식사합시다.”
그들은 가까운 남도식당A로 들어가 각자의 취향대로 주문했다.
식사 후 검암과 권 대사는 귀경한다고 헤어지고 남은 7명은 서문까지 걸었다. 꿈의 다리는 다시 건너도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나가는 도중에 중국교예단의 아크로바트 공연이 방금 시작되고 있었다(14:00). 순례자들은 왜성 가는 것도 망각하고 넋을 잃고 관람했다. 마치 다리도 아픈데 잘 되었구나하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21.2 여수의 귀인
서문에서 왜성을 가려면 순천버스터미널까지 가야 한다. 택시도 잘 안 보였다. 왜성 가기에 적절한 수단이 없는 것이다. 금오랑은 시간이 너무 지연되었기에 왜성을 생략하고 여수관람으로 일정을 변경했다. 그들은 시내버스 기사의 안내를 받아 순천역에 내려 건너편에서 여수행 시외버스를 기다렸다. 운임은 여수까지 4000원이다. 금오랑은 승차권 자판기에 천원지폐 4장 넣고 차표 한 장 받기를 계속했다. 버스가 막 도착했기에 우선 타고 보니 한 장을 덜 샀다.
여수터미널에 도착하자 기사가 승차권을 받았다.
“기사님, 시간 없어 한 장 못 샀네요. 현금으로 받으셔도 되죠?”
금오랑이 내리면서 기사에게 운임을 주었다.
“어이구, 참 오랜만일세.”
문 회장이 낯선 사람과 악수를 했다. 그는 여수에서 누가 마중 온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순례자들은 마중 나온 사람이 누구일까 궁금했다. 문 회장이 소개했다.
“여기는 조 사장, 대학 건축과 친구야. 인사하게.”
그 친구와 회사 직원이 각자 자기의 승용차를 가지고 나왔다.
“누가 운전 잘 하시나요?”
“...”
금오랑이 눈치를 살피더니 선뜻 나섰다.
“제가 합니다.”
회사 직원이 그랜저 키를 건네주었다.
“이거 처음 보는 키네요.”
“네 주머니에 넣고 그냥 가지고만 있으면 됩니다. 그 직원은 키를 주고 떠났다.최신형 그랜저는 시동키 꼽는 자리가 없다. 그 자리에 스타트 버튼이 있다. 키 가진 사람이 돌리면 시동되고 키 없는 사람이 돌리면 시동이 안 된다. 문이나 크렁크도 마찬가지다. 키 가진 사람이 옆에 있으면 누구든 열면 열린다.
21.3 충민사에 있는 충무공 유물
순례자가 7명이므로 앞 차에 3명, 따르는 차에 4명 타니 안성맞춤이다. 금오랑은 처음 보는 모델의 차를 운전하며 앞차를 따랐다. 앞차 기사 조 사장은 일행을 안내 해 여수에 있는 충무공 유적을 되도록 많이 보여주겠다는 각오였다. 그는 뒤따르는 차의 거리를 보면서 속도를 늦추거나 갓길로 비켜서 따라오기를 기다렸다. 두 대의 승용차는 4시 50분쯤 충민사(忠愍祠)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충민사는 이순신이 전사한 3년 뒤인 1601년(선조 34) 왕명으로 우의정 이항복(李恒福)이 현지시찰을 하고 통제사 이시언(李時言)의 주관 아래 건립한 사당인데, 충무공 관련 사액(賜額)사당 제1호다.
금오랑이 방명록에 ‘백의종군로순례자’라고 서명했다. 순례자들은 충무공의 유물과 동영상을 보았다. 동영상은 장군의 일대기를 요약한 것이다. 명조팔사품(明朝八賜品)은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충무공의 전공을 보고하니 명(明) 황제 신종(재위 1572-1620)이 내린 선물로서 8가지 군사 장비이다. 그것은 독전기, 남색과 홍색의 소령기(신호기), 도독의 도장, 구리로 만든 구부러진 나팔, 나무로 된 영패 등이다. 영패는 명을 내릴 때 어깨에 메거나 죄인을 잡아올 때 보낸다. 독전기의 글은 '凡軍臨敵不用命者處所(범군임적불용명자처소) 무릇 군사로서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목을 벤다이다.
유물 중 장검(長劍)은 보물 326호이다. 이 칼은 1594년 4월, 한산도 장인 태귀연과 이무생이 만들었다고 명문에 밝혀있다. 충무공은 이 칼을 벽에 걸어두고 마음을 다스렸을 것이다.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강산이 피로 물들도다. 一揮掃蕩 血染山河)
21.4 고음내: 충무공 모친의 주거지
일행은 충민사에서 나와 승용차로 충무공 모친 주거지까지 갔다(17:20). 고음내는 자그마한 동산인데 나무가 울창하고 매우 큰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주변은 중장비가 땅을 고르고 있어 시끄럽고 번잡했다. 시가 이 지역을 개발 중인데 충무공 모친 거주지를 부각하려고 하는 공사인지 다른 산업시설 공사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최근까지 정 대상 장군의 후손이 거주한 집인데 지금은 아무도 안 산다. 아마도 시가 매입한 듯하다. 관광객이 불시로 찾아와 개인 집을 보자 하니 주인은 참 귀찮았을 것이다.
“충무공이 아마도 부하장수에게 모친을 잘 모시도록 부탁했을 겁니다. 때는 임진년 다음해 6월일 겁니다.”
계사년(1593년) 5월에는 모친이 아직 아산에 계셨다. 이를 입증하는 해당 일기를 보자:
十八日辛未。晴。早朝。氣甚不平。呑溫白元四丸。有頃。快注。氣似平安。○奴木年至自蟹浦。因聞天只平安。卽答書還送。甘藿五同送于家。(후략)
십팔일신미。청。조조。기심불평。탄온백원사환。유경。쾌주。기사평안。○노목년지자해포。인문천지평안。즉답서환송。감곽오동송우가。(후략)
계사년5월18일[신미/6월16일] 맑다. 이른 아침에 몸이 무척 불편하여 온백원(위장약) 네 알을 먹었더니, 조금 있다가 시원하게 설사가 나오니 좀 편안해진다. 종 목년이 게바우개(아산 해암 해포)에서 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한다. 곧 답장을 써 돌려보내며 미역 다섯 동을 함께 보냈다. (후략)
6월에는 모친이 여수에 계셨다. 이를 입증하는 해당 일기를 보자. 아래 글에서 본영은 진해루가 있는 여수일 것이다:
十九日壬寅。或雨或晴。大風吹不止。移陣于烏楊驛前。風不定船。又移陣于固城亦浦。○菶及卞有憲兩姪送還本營。探天只氣候而來。(십구일임인。혹우혹청。대풍취부지。이진우오양역전。풍부정선。우이진우고성역포。○봉급변유헌량질송환본영。탐천지기후이래。)
6월19일[임인/7월17일] 비가 오다가 개이다가 한다. 바람이 세차게 불며 그치지 않는다. 진을 오양역(거제군 사등면 오양리) 앞으로 옮겼으나, 바람에 배를 고정할 수가 없으므로 다시 고성 역포(亦捕 : 통영시 용남면)로 옮겼다. 봉과 변유헌, 두 조카들을 본영으로 보내어 어머니의 안부를 알아서 오게 했다.
二十一日甲辰。晴。曉。移陣閑山島。○朝。豚薈入來。因聞天只平安。爲幸爲幸。午時。元埏來。(이십일일갑진。청。효。이진한산도。○조。돈회입래。인문천지평안。위행위행。오시。원연래。)
6월21일[갑진/7월19일] 맑다. 새벽에 진을 한산도로 옮겼다. 아침에 아들 회가 들어와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다행이다. 오정에 원연이 왔다.
임진년 난이 일어 난지 두해가 지났다. 충무공은 새해가 되어도 어머니를 뵙지 못하다가 열흘이 지나서야 겨우 뵈러 갈 수 있었다. 이 신년 하례의 만남에서 공의 모친은 세계의 어느 여걸 못지않은 명언을 남겼다. 당시의 일기를 보자:
十一日庚寅。陰而不雨。朝。以覲乘舟。從風直抵古音川。南宜吉,尹士行,芬姪同往。謁天只前。氣息奄奄。言語則不錯。討賊事急。不能久留。(십일일경인。음이불우。조。이근승주。종풍직저고음천。남의길,윤사행,분질동왕。알천지전。기식엄엄。언어칙불착。토적사급。불능구류。)
갑오년 1월11일[경인/3월2일] 흐리되 비는 아니 오다. 아침에 어머니를 뵈려고 배를 타고 바람 따라 바로 곰내(古音川 : 熊川)에 대었다. 남의길·윤사행, 조카 분이 같이 가서 어머니를 앞에서 뵈니, 기력은 약하시지만 말씀하시는 데는 착오가 없으셨다. 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하여 오래 머물지 못했다.
十二日辛卯。晴。朝食後。告辭天只前。則敎以好赴。大雪國辱。再三論諭。少無以別意爲歎也。還到船滄。氣似不平。直入北房。(십이일신묘。청。조식후。고사천지전。즉교이호부。대설국욕。재삼론유。소무이별의위탄야。환도선창。기사불평。직입북방。)
1월12일[신묘/3월3일] 맑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준비해) 나아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고 두 번 세 번 타이르시며, 조금이라도 떠난다는 뜻에 탄식하지 않으셨다. 선창에 돌아오니 몸이 좀 불편한 것 같다.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모친의 당부에 호부(好赴)라는 말은 ‘잘 가라.’는 인사가 아니다. 부(赴)는 일하러 간다는 뜻이다. 부임(赴任), 부난(赴難), 부원(赴援)은 임지로 감, 나아가 나라의 재난을 구함, 구원하러 감이다. 여기서 호부(好赴)는 잘 준비해 전장에 나아가라는 뜻으로 새겨야 옳다. 실제로 공의 일기에도 이점을 분명히 했다. 즉, ‘조금이라도 떠난다는 뜻에 탄식하지 않으셨다.’는 글은 어머니가 자식의 떠남을 탄식하지 않고, 나라 구함을 강조했다는 기록이다.
웅천동에는 오충사라는 유적도 있다. 조 사장은 오충사 입구에 잠시 차를 멈추고 멀리서 오충사를 가르키기만 하고 계속 차를 몰았다. 그는 시간이 없기에 운전을 하면서 오충사를 설명했다.
21.5 선소: 여수 시청 앞 바다에 있는 유적지
조 사장은 순례자들을 선소와 굴강으로 안내했다(18:25).
“저 아래 뻘을 둘러막은 곳이 굴강이라고 해서 거북선이나 판옥선을 만들 때 저기에 숨기거나 가두는 곳입니다. 당시는 이 언덕에 사람이 많이 살았었을 것이오. 지금도 조선소는 사람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습니까? 당시에도 배 만드는 장인이 많았을 터이니...”
조 사장이 언덕을 가리켰다. 그는 보여줄 곳이 많으므로 회원들이 긴요한 곳만 빨리 보고 곧장 오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일행은 승용차로 돌산대교를 건넜다. 그들은 전망 좋은 돌산공원 위에서 여수항을 바라보며 예정에 없던 관광을 즐겼다. 조 사장은 공원 아래로 일행을 인도해 거북선모형 앞에서 잠시 관람토록 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타볼 수도 있었을 텐데...”
“저 거북선 모형이 엠블렘 첫 번 디자인과 비슷한 느낌이다.”
문 회장은 엠블렘의 첫 디자인을 선호한다. 해군은 거북선이 한반도를 가로질러 육지 위에 있는 디자인을 꺼린다고 한다. 그래서 금오랑은 거북선을 남해로 내린 디자인을 앰블렘으로 삼았다.
21.6 내륙으로 들어가게 된 진남관
진남관은 여수항에서 상당히 내륙으로 들어가 있다. 진남관 주차장은 좁았지만 마침 두 대가 주차할 공간은 있었다. 진남관은 6시까지만 개방하므로 문이 잠겨 있었다. 문 회장은 들어가 샅샅이 보지 못해 못내 아쉬웠지만 그래도 담 넘어 보이는 대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조 사장이 아래쪽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옛날에는 저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 왔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저 아래 골목 밖으로는 집이 없었습니다. 저기는 그냥 바다였는데 메꾸어서... 지금은 진남관이 내륙에 있는 듯하지요.”
“제가 오기 전에 공부했는데요,”
금오랑이 끼어들었다.
“원래 진해루라는 명칭인데 왜란 때 소실되고 나중에 그 자리에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진남관이라고 했다는...”
21.7 남행하면 귀인을 만날 괘
6시 50쯤 되니 날이 저물었다. 조 사장이 일행을 이순신광장으로 안내했다. 이 근처가 숙박과 식사에 편리하다. 광장에는 장군의 동상과 안내 벽이 있었다. 조 사장은 일행을 가까운 <복춘식당>으로 안내했다.
“아구탕, 찜, 서대회 잘 하는 집이오.”
“우리는 백의종군하는 죄인이라서 서민들이 가는 식당을 갑니다.”
“이 집이 그런 곳입니다.”
조 사장이 그랜저 주인에게 전화를 했다.
“차를 진남관 주차장에 두었네. 비상용 보조 키 있지? 그 키 가지고 와서 타고 가. 여기 키는 내가 받아서 내일 돌려줄 께.”
“그 분도 함께 식사하면 좋을 텐데...”
“지금 식사하고 있답니다.”
순례자들은 그 사이 메뉴를 선택하고 있었다.
“어유, 여수에 왔으니 금풍생이를 먹어봐야 지. 얼마나 맛있는데. 어유.”
낙산이 특유의 말투로 메뉴를 추천했다.
금오랑이 한 말씀하겠다고 일어났다.
“오늘 여수에서 뜻밖의 귀인을 만나 죄인들이 고급 승용차로 충무공의 유적을 잘 보았습니다. 조 사장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토정비결에 남으로 가면 귀인을 만날 것으로 되어 있나봅니다.”
“저는 오늘 기쁘게 안내했습니다. 정말 오래 만에 친구를 만난 것 아닙니까? 이번 식사는 제가 내겠습니다. 여기는 조촐한 곳입니다. 다음에 저 친구 혼자서 내려오면 상당히 멋진 곳으로 안내할 겁니다.”
“난중일기에 보면 충무공이 백의종군 중에 고을 원으로부터 은근한 대접을 받았다는 글이 있습니다. 사실 고을 원은 공적으로는 금오랑, 서리, 나졸을 대접한 것이지만, 그것이 곧 죄인을 대접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조선 시대에는 죄인이 자기를 호송하는 의금부 관리의 출장비를 대는 것이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아, 그런 법이 있었나요?”
대부분의 순례자에게 서대회와 금풍생이 구이는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었다. 순례자들은 과분한 대접을 받은 데 대하여 저마다 감사의 말씀을 하고 조 사장을 보냈다.
21.8 여수 밤바다
8시 반쯤 되어 그들은 여수의 밤바다를 구경했다. 기온이 23도 정도로 낮아져 쾌적했다. 돌산대교와 거북선 대교 사이로 거북선 형태의 유람선이 지나가고 있었다. 10개의 노가 교대로 다른 색깔의 빛을 발하도록 꾸며 실감났다. 데크에는 벤치와 의자가 잘 설치되어 있어 가벼운 음료를 즐기는 청춘남녀가 많았다. 낚시를 드리고 기다리는 사람, 걷는 사람, 담소를 하거나 먼 곳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모습은 여수의 밤바다라는 노래가 작곡될 만 했다. 문 회장은 아까부터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네게 들려주고파 전활 걸어, 뭐하고 있냐고...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
버스커버스커(장범준)의 곡을 계속 읍조리며 걸었다.
밤차로 귀경해야 하는 순례자가 4명이 있기에 그들은 자리를 잡고 뒤풀이를 했다. 금오랑이 맥주와 음료를 사왔다. 인송이 정원박람회장 입장권을 일반표로 샀다가 다시 경로우대권으로 바꾼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 8,000원 남았네.”
“그래, 이것은 내가 쏜다.”
“아참, 아까 여수 올 때 탄 버스 승차권 4,000원씩 금오랑에게 내야지.”
누군가 기억해 냈다.
“귀경하는 밤차, 힘들 텐데. 낼 가면 안 되나?”
“강의 들어야 하고, KBS 녹화해야 하고, 회사 일 봐야 하고,...다들 불가피해.”
“자, 그런 그렇고, 이 순간을 즐기자. 건배사는 여수 밤바다로 하자.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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