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항상 이런 식이었던 건 아닙니다. 제 말은 제가 향상 뭔가를 철저히 납득하고 나서야 믿곤 했던 건 아니란 겁니다. 사실 제가 젊었을 때는 항상 모든 게 잘되리라 믿었죠.
저는 굴레 벗은 낙관주의자였습니다. 무모한 낙관주의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요. 내가 신을 두려워하면서 자랐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면, 이런 심리상태는 이중으로 무모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여튼 저는 그랬습니다. 아이였을 때 저는 언제나 제가 원하는 것을 갖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도 항상 그랬고요. 게다가 대개는 별다른 노력 없이요. 이건 우리 형을 몹시 짜증나게 만들어서, 형은 “닐은 정말 운도 좋아”라면서 큰 소리로 불평하곤 했죠. 한번은 아버지가 형의 이런 불평에 대꾸하시는 걸 우연히 들었는데 아버지는 “닐은 자기가 운을 만드는 거야”라고 하시더군요.
아버지 말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 중 일부는 우리 부모님에게 있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나를 삶에 대한 사랑과 창조적인 온갖 것들로 물들이셨고, 우리 아버지는 내게 자신감이란 축복을 주셨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아버지는 되풀이해서 자꾸 해보게 하셨지요. “시도도 안 해본다면 무슨 수로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시면서요.
또 아버지는 제 나이 열다섯 살 무렵에 제가 평생 잊지 못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얘야, 어떤 일을 하는 데 ‘옳은 방법’이란 건 없다. 네가 하고 있는 방법만 있을 뿐이다. 네 방법을 옳은 방법으로 만들어라”
“어떻게 그렇게 하죠?”라고 묻자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렇게 되게 만들어서.” 35년 후에 나이키 사는 이 깔끔한 작은 철학을 세 마디 슬로건으로 표현하더군요.
그냥 그렇게 하라Just do it.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등학교에 들어간 저는 곧바로 온갖 도전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모든 과외 활동들이 저를 무지 바쁘게 했지만, 그래도 제가 좋아했던 영어와 연설, 정치학, 음악, 외국어 같은 과목에서는 꽤 점수가 좋았습니다. 내가 지겨워하던 생물학과 대수학, 기하학들에서는 낙제점수를 간신히 면한 정도였지만, 그래도 어쨌든 밀워키의 위스콘신 대학은 가급제(假及第)를 조건으로 제 입학을 허락했지요.
하지만 대학에는 그리 오래 붙어 있지 못했습니다. 딱 3학기만에 학생처장이 내 학생증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지만, 저는 별로 개의치 않았죠. 한시바삐 라디오 방송국에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던 참이었으니까요.
내가 낙제로 대학에서 퇴학당하자, 아버지가 한마디 하시더군요. “좋다, 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나는 널 위해 할 수 있는 걸 다 했는데, 너는 네 하고 싶은 대로만 하는구나?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 말에 겁도 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스스로 책임지는 어른으로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니 솟구쳐오르는 흥분을 억누르기가 힘들었습니다. 저는 당시 막 방송을 시작한 작은 에프엠 방송국에 무료 방송요원으로 이미 이름이 올라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구속에서 풀려난 나는 대담하게도 주파수가 약간 더 높은 또 다른 에프엠 방송국의 사장 집무실로 직접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까놓고 말했죠. 나를 고용해야 한다고요.
래리 라루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껄껄 웃더군요. “그런데 왜 내가 그렇게 해야 하지?”라면서요.
나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방송국에 데리고 있는 어떤 직원보다 내가 더 나으니까요.
래리는 웃음을 그쳤지만, 그렇다고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가신 건 아니었습니다.
“여보게, 난 자네가 마음에 들어. 자넨 철면피를 이겼어.”(전 그 당시 이 단어가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이게 좋은 건가?’라고 생각하던 게 기억납니다.) 그는 회전의자에 앉은 채로 의자소리를 끽끽대며 내 쪽으로 왔습니다. “어떻게 할지 말해주지. 오늘밤 8시에 이리로 다시 오게. 내가 쇼 방송을 담당하는 밤 근무자더러 자네에게 방송 요령을 가르쳐주라고 시키겠네. 아홉 시부터는 자네가 진행하게. 나는 듣고 있겠네. 만일 아홉 시 반에 내가 자네를 부르지 않으면, 거기서 나가서 두번 다시 날 찾아오지 말게.”
이제 그의 웃음에는 장난기가 배여 있었습니다.
“아주 공평하시군요.” 나는 그와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오늘밤 당신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바랍니다.”라고 덧붙이면서요. 그리고는 밖으로 나와서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계속 방송국 주차장에 앉아서 기다렸지요.
덕분에 그날 밤 마이크를 잡았을 때까지도 나는 배가 아팠습니다. 나는 잠시 방송국 소개 방송을 내보낸 뒤, 곧 바로 음악으로 들어갔습니다. 다시 노래 두 곡을 더 보내고 나니 9시 28분이었습니다. 아무 연락도 없더군요. 이제 정규방송 디제이에게 업무를 인계해야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막 소지품들을 챙기려는 순간, 정규방송 디제이가 스튜디오 안에 머리를 들이밀고는 말하더군요.
“사장에게서 구내전화가 왔네.” 저는 전화기를 집어들었습니다.
“자넨 고용됐어. 열한 시까지 계속하게. 그리고 내일 아침 아홉 시에 내 사무실로 와주게.” 래리의 말투는 무뚝뚝했습니다.
전 래리 라루가 그 막간을 내게 준 일을 평생 잊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내쫓을 수도 있었겠지요. 몇 년 후에 볼티모어의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프로그램 디렉터(PD)로 있을 때 저는 그의 그런 호의가 이어지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애들에게는 항상 기회를 주라’는, 내가 나중에 라루 규칙이라고 부르게 된 것을 활용해서요.
사실 전 무작정 방송국을 찾아와서 내 방문을 두드리곤 하던 아이들을 여러 명 만났습니다. 물론 나로서는 래리가 했던 식으로 그들을 무작정 스튜디오 안에 밀어넣고 방송을 해보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고서도 문제없이 넘어가기에는 너무 큰 시장을 놓고 다투는 중요 방송사였거든요. 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들을 내 사무실에 들어오게 해서 그들의 오디션 테입을 들어주는 온당한 대우를 해주었지요. 개선해야 할 점들을 조언해주기도 하면서요. 그러나 그 애들을 고용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라디오 방송에서 그런 시대는 지났다는 게 제 판단이었거든요. 그런 애들이 지금도 있는 건 분명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격려조차 받을 기회도 없이요. 오늘날에는 누구나 예선전을 통과해야 합니다. 아마 우리 세대가 옆문으로 몰래 들어갈 수 있었던 마지막 세대였을 겁니다. 이건 정말 좋지 못한 상황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도제수업을 받을 수 있는 더 많은 기회가 필요합니다. 이런 기회가 부족하기 때문에 20대 초반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성공에 대한 압박감이 엄청나죠.
문제를 더 나쁘게 만드는 건 지금의 젊은이들 상당수가 예전의 그 연배들보다 소양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이건 내가 자주 거론하는 주제인데, 밀워키의 남구 고등학교에서 제가 받았던 교육이 지금으로 치면 지방 전문대학 졸업생들이 받는 교육수준과 맞먹을 겁니다. 그것도 꽤 괜찮은 전문대학일 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