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수 이금희는 1960년대 초반 한명숙, 현미와 함께 당대 최고의 여가수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국내 최초의 댄스가수이기도 합니다. 이금희는 1959년에 가수로 데뷔한 뒤 1963년 이후부터 본격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주로 번안곡을 불렀습니다.
이금희가 1966년에 발표한 “키다리 미스터 김”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트위스트 리듬에 맞춰서 춤을 추는 이금희는 남성팬들의 열렬한 성원을 얻었고, 이금희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키다리 미스터 김”은 국내 최초의 댄스곡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또한 “키다리 미스터 김”은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 현미의 “밤안개”와 함께 신드롬을 일으키면서 그 시절의 팬들의 기억속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전성기를 누리던 이금희는 인기절정의 시기였던 1969년에 돌연 은퇴를 선언하면서 팬들을 아쉽게 했습니다. 이금희는 “키다리 미스터 김” 이외에도 “둘이서 살짝쿵”, “날씬한 아가씨끼리”, “용꿈”, “그것 참 별꼴이야”, “작은 새”, “다이애나”, “아이 참 속상해” 등의 노래들을 히트시켰습니다. 이금희는 한국 최초의 댄스가수인 동시에 한국 최초로 팬클럽을 보유했던 가수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국내 최초로 추정되는 세시봉제작 한국최초 댄스가수 이금희 골든디스크 발견
지난 주말 오랫만에 한 오프라인 문화예술품 경매장에 다녀왔습니다.
몸이 좀 피곤한 상태인지라 쉬고 싶었지만 흥미로운 대중가요 자료가 몇 점 나왔기에 어떤 사명감처럼 경매장에 갔습니다.
사실 경매에서 낙찰받은 유물에 대해 포스팅은 거의 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엔 흥미로운 의문점이 생겨 포스팅을 해봅니다.
아마도 골든디스크란 이름은 많이들 들어보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미국레코드협회에서 싱글, 앨범 모두 50만 장 이상 그러니까 100만장 이상 판매를 기록한 아티스트에게 수여하는,
금으로 도금한 레코드를 흔히 골든디스크라 말하죠.
일명 밀리언 셀러 레코드(million seller record)라고도 합니다.
그만큼 엄청난 대중적 파급력을 발휘한 음반에게만 수여되는 상이기에
미국에서는 골드 디스크 공인은 RIAA(미국음반산업협회)를 통해 실시되고 있습니다.
위에 올린 사진은 제가 소장하고 있던 그라모폰사의 골든디스크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성음사에서 발매해 1백만장 판매기록을 세웠던 최성준에게 1988년 수여한 골든디스크입니다.
최성준이 누굴까? 가수 최희준선생의 본명이 최성준이긴 하지만 느낌상으로는 클래식 쪽 아티스트인 것 같은데
인터넷을 검색해봐도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네요.
여하튼...제가 골든디스크를 보여드리는 이유는...
이번에 경매에서 낙찰받은 유물이 다름아닌 골든디스크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에서 보시듯 1966년 주간한국에서 그해 최고인기가수로 선정한 이금희선생님에게 수여된 이 골든디스크는
당시 젊은세대들에게 최고의 음악명소로 군림했던 <세시봉>에서 기념으로 증정한 것으로 명기되어 있습니다.
1966년은 이금희 선생이 자신의 대표곡인 '키다리 미스터 김'을 발표해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MBC10대가수등
각종 대중가요상을 휩쓸었던 바로 그 해 입니다.
고 이금희선생은 국내 최초의 댄스가수로 명명된 60년대의 슈퍼스타입니다.
생전의 선생과 저는 각별한 인연을 맺었는데 이번 달 들어 선생님과 연관된 일이 많아지네요.
우선 골든디스크를 소장하기 전 온라인 경매를 통해 선생님의 60년대 TBC TV출연 오리지널 흑백사진도 한 장 구했었습니다.
돌아가신 후 선생님의 따님이 자신과 어머니 그러니까 스타 여가수와 딸의 눈물나는 이야기를 집필해
현재 출판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중입니다^.^
1966년에 세시봉에서 골든디스크를 제작해 국내가수에게 수여했다는 사실은 이 골든디스크를 통해 처음 알게되었는데
그렇담 골든디스크의 역사는 언제부터인지 궁금해 인터넷을 검색하다 흥미로운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지난 2007년 로이터 통신이 공개한 세계 최초의 골든디스크상으로 인정된 록밴드 그레이트풀 데드(THE GRATEFUL DEAD)의
'섬머 오브 러브'의 골든디스크입니다.
미국의 5인조 사이키델릭 록밴드 그레이트풀 데드는 1994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 '
공연자(performers)' 부문에 올랐고 헌정앨범만 해도 18개를 헌사 받은 세계적인 밴드입니다.
또한 롤링 스톤지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록밴드 10에서도 이들은 비틀즈 (THE BEATLES), 롤링 스톤즈(THE ROLLING STONES),
너바나 (NIRVANA), 레드 제플린 (LED ZEPPELIN), 킨크스 (THE KINKS), 비치 보이스 (THE BEACH BOYS), 후 (THE WHO)에 이어
당당히 8위에 랭크되었구요.
그런데 제 의문점은 1965년 결성된 이 밴드가 첫 싱글을 발표한 것이 1966년이란 사실에서 시작됩니다.
앨범은 1967년이구요. 그렇담 로이터통신에서 공개한 세계 최초라는 그레이트풀 데드의 골든디스크는
제작 연대가 빨라야 1967년으로 보여진다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그렇담 1966년에 세시봉에서 제작한 이금희선생의 골든디스크는?
과거의 유물이 발견될 때마다 기존에 알려진 팩트에 문제점이 발견되는 것은 이전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레이트풀 데드의 골든디스크는 세계 최초가 아니라 미국 최초로 수정해야 되는 것은 아닌지...ㅎㅎ
제가 보기엔 이금희선생의 골든디스크를 세계 최초의 골든디스크로 보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시봉에서 이전에는 없던 골든디스크를 독창적으로 기획하고 제작했을 가능성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분명 이금희의 골든디스크 제작에 영감을 준 그 이전의 골든디스크가 전 세계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국내에도 일간스포츠에서 수여하는 골든 디스크 시상식(Golden Disk Awards)이 있습니다.
1986년에부터 시작된 음반판매량으로 시상되는 25년 연륜의 음악 시상식입니다.
처음부터 골든디스크상이란 명칭을 사용했던 것은 아니고 지난 2001년부터
'대한민국영상음반대상'이라는 명칭에서 '골든 디스크상'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세시봉제작 한국최초의 댄스가수 이금희 골든디스크는 현재까지 발견된 국내 골든디스크로는 최초란 점입니다.
그러니까 비록 상당한 거금이 들었지만 본전 생각이 전혀 들지않는 굉장한 유물을 소장하게 되어 가슴이 뛰네요.
이제껏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국내 최초의 골든디스크를 제 블로그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하게 되어 기쁘네요~
역시 우리나라 대중음악역사는 위대합니다!
우리가 국민학교 시절 한창 활동했던 이금희씨
자타가 공인하는 국민가수이자
최초 댄스가수
2007년에 타계했지만
신나는 댄스와 시원한 창법으로
가요계에 일대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가요계 틀을 깬 트위스트 여걸
이금희는 1959년 데뷔해 리마 김(金), 로라 성(成), 모니카 유(劉) 등과 함께 미8군 무대와 대학축제, 다운타운의 클럽을 통해 외국 유행음악을 대중들에게 전달해준 여성 팝 메신저였다.
허스키보컬로 화끈한 율동을 곁들여 들려준 그녀의 흥겨운 곡들은 부동자세로 노래하던 정적인 가요계에 지각변동을 몰고 왔다. 이금희는 ‘미스 다이나마이트’로 불리며 댄스여왕으로 군림했던 최초의 댄스가수였다.
대표 곡 ‘키다리 미스터 김’은 온 나라에 트위스트열풍을 몰고 오며 전쟁의 포화를 딛고 일어서려는 국민들에게 큰 용기와 즐거움을 선사했고 지금도 국민가요 급 노래로 올드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본명이 이대금인 이금희는 독립운동가 할아버지 때문에 1940년 9월15일 평북 선천에서 목회생활과 개인사업을 했던 부친 이득성과 모친 임순도의 3남3녀 중 다섯째로 중국 상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울음보가 한번 터지면 동네가 떠나갈 듯 울었을 만큼 풍부한 성량을 타고났었다.
해방이 되자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해 남산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통역원으로 일했던 큰오빠 이대삼이 주둔해 있던 대전을 거쳐서 부산에 정착했을 만큼 그녀의 어린 시절은 시대의 아픔과 궤를 함께 한 유랑의 세월이었다.
부산 성지초등학교 4학년에 월반을 한 그녀는 공부, 운동, 음악, 무용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여 ‘서울내기 다마내기’로 불렸다. 동네에서도 골목대장으로 군림하며 여장부로 통했다.
그러나 그녀의 화려했던 가요계 활동의 이면엔 좌절의 아픔이 숨어있다. 사실 그녀는 경남여중 2학년 때부터 당시 음악선생이었던 오현명의 레슨을 받으며 성악가의 꿈을 키우던 클래식학도였다. 하지만 경남여고 시절 학생회 대대장과 합창부장을 했던 적극적인 성격은 고3 때 부친의 위암 수술로 가세가 기울어져 꿈을 키워오던 서울음대 진학을 포기하는 좌절을 겪었다.
이때부터 청소시간에 팝송을 부르며 춤을 추고 학교행사에서도 가곡을 부르지 않고 팝송만을 부르는 반항적 행동을 보였다. 꿈 많고 쾌활했던 이금희는 수면제를 사 모으며 자살할 기회를 엿볼 만큼 상심했다.
좌절의 세월 중 마음을 달랠겸 부산에 내려온 박단마 ‘그랜드 쇼’를 친구와 몰래 구경 같다가 현인, 남인수, 곽순옥, 백일희등 당대 스타가수들의 멋들어진 노래에 매료되며 인생이 뒤바뀌었다.
“특히 현인의 노래가 너무 좋았다. 대학은 못 가도 이런 노래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들면서 가수가 되려 했다”고 이금희는 털어놓는다. 부친의 반대는 대단했지만 어머니와 큰오빠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큰오빠의 친구인 인기가수 송민도가 부산에 내려오자 아버지 몰래 보따리를 싸들고 무작정 상경했다. 송민도의 소개로 KBS방송악단장인 그의 동생 송민영을 찾아갔다. 즉석 노래 데스트에서 팝송가사를 시원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그녀에게 반해버린 송민영은 3일 후 KBS 라디오 송영수PD가 담당하던 쇼프로그램에 출연을 주선했다.
겁도 없이 손시향, 곽순옥, 이종순 등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들 틈에 끼어 팝송 번안 곡 ‘동창이 밝았네(It's almost tomorrow)’를 부르며 엉겁결에 가수데뷔를 했다. 그녀는 첫 출연금을 봉투 째로 어머니에게 드리는 효심을 보였다.
시원한 창법으로 노래하는 신인가수 이금희는 미8군 무대에서 유명했던 베니 김(본명 김영순)의 눈에 들었다. 1963년 말 그의 주선으로 미8군 쇼 전문 ‘화양’ 엔터테인먼트의 오디션을 통과해 ‘뉴스타 쇼’에 출연하며 미 8군 가수로 거듭났다.
당시는 번안가요 전성시대였다. 이금희도 폴 앵커와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들과 ‘싱싱싱’, ‘바나나 버트송’, ‘비빠빠 룰라’ 등 외국 번안 곡을 불러 인기를 끌었다.
이금희는 “당시 미8군 여가수들의 경쟁은 치열했다. 나도 큰 거울을 놓고 연습을 하고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마르는 약을 많이 먹어 노래하다 쓰러지기도 했다”며 “많으면 10여 곡 이상의 앵콜을 요청 받아 열정적으로 춤을 추고 노래해 목이 쉬고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을 이뤄 무대화장 속 눈썹이 얼굴 사방에 흩어지기가 일쑤였다”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한다.
또한 미8군 가수였던 막내 동생 이금미(본명 이대란)와 '이씨스터즈'를 결성, TV방송에도 출연해 주목을 받았다. 1965년에는 이미자, 위키리 등과 함께 월남비둘기부대 위문공연을 떠나 말라리아에 걸리는 악전고투 속에서도 파병군인들을 열광시켰다.
월남군인과 트위스트를 추는 파격적인 사진이 외신을 타고 타전되기도 했다. 당시 정상급 가수 최희준은 “이금희 월급 반만 주면 다시 8군무대로 가겠다”고 했을 정도로 그녀는 미8군 무대 최정상의 스페셜A급 가수로 도약했다. 그녀는 당시 ‘스프링 버라이어티’ 등 유명 쇼로부터 월 40회이상 공연부킹을 받아 신중현과 무대를 함께 꾸미기도 했다.
댄스열풍 몰고 온 히트제조기
이금희의 데뷔 이전인 1950년대 말 미8군 무대에는 미스K, 먼로K라는 걸출한 한국여성댄스가수가 있었다. 그녀들은 무대 위에 드러누워 춤을 추고 노래하는 파격적인 무대매너로 미군들의 넋을 빼놓은 걸출한 댄스가수들이었지만 미군 장교들과 결혼 후 은퇴를 해버려 일반대중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이금희는 “이들의 활약을 전해 들었을 뿐 직접 보지는 못했다”며 “노래가 흥에 겨우면 자연스럽게 가사에 맞게 움직이고 춤을 췄을 뿐 그들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시공관’은 일반데뷔 무대였다. 절친했던 미8군 동료가수 이춘희와 함께 드레스도 없이 평상복 차림으로 나애심, 박재란 등 일반무대의 최고 가수들과 함께 출연한 무대에서 폴 앵카의 ‘다이아나’와 베니 김의 부인 이해연의 히트곡 ‘추억의 이스탄불’을 열정적인 춤과 함께 불렀다. 첫 무대부터 앵콜 요청을 받을 만큼 대중들은 이금희의 폭발적인 무대를 좋아했다.
이후 ‘이금희가 팝송을 부르면 바로 히트한다’는 말이 돌 정도로 가요계의 핵 폭탄으로 떠오른 그녀에게 시샘의 눈길이 쏠리며 클래식 창법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비난을 극복하기 위해 목청을 혹사하며 피나는 노래연습을 하면서 허스키 보컬이 됐다.
이후 송민영의 소개로 김광수 악단의 전속가수가 된 그녀는 동화백화점(현 신세계) 음악감상실과 미도파 백화점 옥상의 ‘21 클럽’, 고미파(화재 이전의 무학성), 유엔센터 등 당시 최고인기 무대들을 주무대로 활약했다.
161cm에 50kg대의 터질듯한 몸매에 화끈한 춤을 곁들여 노래하는 이금희는 뭇 남성들의 야릇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무대마다 앙코르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당시 수입도 대단했지만 옷 욕심이 많아 의상비로 다 섰다”고 회고했다.
대중들의 주목을 받자 박춘석을 비롯한 많은 작곡가들로부터 음반취입 제의가 몰려들어왔다. 이금희는 “어느 날 안경을 쓴 사람(황우루)이 단조롭게 느껴지는 가요를 취입하자며 찾아왔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했어요. 한달 간 지겹게 따라 다니며 졸라서 목소리 상태가 최악일 때 취입을 했는데 그게 ‘키다리 미스터 김’이에요. 내 대표 곡이 될 줄 누가 알았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하며 웃음을 머금는다.
1966년 당시 황우루는 진짜 180cm가 넘는 30여명의 키다리들을 모아 국내 최초의 팬클럽을 결성하기도 했다.
키다리 미스터 김이 1년 동안 방송금지라는 아픔을 겪었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당시 박대통령이 키가 작기 때문에 제 노래를 못 부르게 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고 이금희는 조심스레 입을 연다.
이금희는 데뷔음반 발표 후 ‘용꿈’, ‘그것참 별꼴이야’, ‘나는 말괄량이‘, ‘치맛바람’, ‘두 줄기 길’ 등 히트 퍼레이드를 벌이며 정상의 인기가수로 군림했다. 1966년에는 이미자, 유주용 등과 함께 월남 비둘기부대 위문공연을 떠나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1968년엔 동경에서 개최된 한일친선일본공연에 참가하러 출국하려다 격렬한 반일 시위를 경험한 이금희는 “일본에서 우리가수가 노래할 때 마이크 음량을 줄이는 등 훼방을 해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애국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1965년 결혼 후 이금희는 두 번씩이나 임신 5, 6개월만에 유산을 하는 아픔을 겪었다. 심한 충격을 받은 그는 셋째 윤정을 임신한뒤 1969년 MBC TV 개국 쇼 출연을 마지막으로 모든 출연교섭을 마다하며 슬그머니 가요계에서 모습을 감췄다. 출산 후에도 연예활동보다는 딸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며 펑범한 어머니의 길을 고집했다.
다만 최희준, 위키리, 한명숙, 현미 등 인기가수들의 친목모임인 ‘60회’와 ‘매미회’에는 참석해 가수들과의 친분을 유지했다. 딸의 학교 모임에만 전념한 채 애완 동물을 기르며 소일하던 이금희는 1977년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이후 1984년 호텔디너쇼에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다 1987년 7월 KBS TV ‘가요무대’로 컴백했다. 이후 TV, 라디오 프로 출연과 수 차례 해외교포 위문공연으로 동포들의 망향의 슬픔을 달래주었다.
결혼 후 늘어난 몸무게를 줄이며 강한 재기의욕을 보인 그녀는 1998년 신곡과 리메이크 곡을 담은 CD를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정동극장에서 한명숙, 최양숙, 권혜경 등 왕년의 인기가수들과 함께 이틀간 공연을 하면서 “젊은 팬들의 사인요구에 가슴이 뭉클했다. 팬들에게 너무 소홀했다는 아쉬움을 가졌다”고 고백했다.
화끈한 율동의 댄스곡들로 1960대를 흥겨운 춤바람 열풍지대로 몰아 넣었던 한국최초의 댄스가수 이금희. 그녀는 김추자, 김완선, 김현정 등 후배댄스가수들의 탄생에 자양분을 제공한 선구자였다.
가요계 틀을 깬 트위스트 여걸 '이금희'
'이금희'는 1959년 데뷔해 '리마金' '로라成' '모니카劉' '현미' '송영란' '송영희' 등과 함께 미8군
무대와 대학축제, 다운타운의 클럽을 통해 외국 유행음악을 대중들에게 전달해준 여성 팝 메신저였다
대표 곡 ‘키다리 미스터 김’은 온 나라에 트위스트열풍을 몰고 오며 전쟁의 포화를 딛고 일어서려는국민들에게 큰 용기와 즐거움을 선사해준 최고의 히트곡 이었다
본명이 '이대금'인 '이금희'는 독립운동가 할아버지 때문에 1940년 9월15일 평북 선천에서
3남3녀 중 다섯째로 중국 상해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울음보가 한번 터지면 동네가 떠나갈 듯
울었을 만큼 풍부한 성량을 타고났다고 한다
중학생 때 부터 바리톤 '오현명' 씨에게 개인 레슨을 받으며 성악가의 꿈을 키운 클래식 학도였던
그녀는 고교 시절 아버지의 투병으로 가세가 기울면서 결국 서울음대 진학을 포기하고
대중가수로 방향을 바꿨다.
좌절의 세월을 겪던 중 마음을 달랠겸 부산에 내려온 '박단마 그랜드 쇼’를 친구와 몰래 구경 갔다가
'현인' '남인수' '곽순옥' 등 당대 스타가수들의 멋들어진 노래에 매료되어 인생의 행로를 바꾼 것이다
큰오빠의 친구인 인기가수 '송민도'가 부산에 내려오자 아버지 몰래 보따리를 싸들고 무작정 상경해
'송민도'의 소개로 KBS 방송악단장인 그의 동생 '송민영'을 찾아갔다
즉석 노래 테스트에서 팝송가사를 시원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그녀에게 반해버린 '송민영'은
KBS 라디오 '송영수'PD가 담당하던 쇼프로그램에 출연을 주선했고 '손시향' '곽순옥' '이종순' 등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들 틈에 끼어 팝송 번안곡 ‘동창이 밝았네 (It's almost tomorrow)’를 부르며
엉겁결에 가수 데뷔를 했다
시원한 창법으로 노래하는 신인가수 '이금희'는 미8군 무대에서 유명했던 '베니 김'(본명 김영순)의
눈에 들었다
1963년 말 그의 주선으로 미8군 쇼 전문 ‘화양’ 엔터테인먼트의 오디션을 통과해 ‘뉴스타 쇼’에
출연하며 미 8군 가수로 거듭났다
또한 미8군 가수였던 막내 동생 '이금미'(본명 이대란)와 '이씨스터즈'를 결성,TV방송에도 출연해
주목을 받기도했다.
‘시공관’(현 명동 예술극장) 은 그녀의 일반데뷔 무대였다
절친했던 미8군 동료가수 '이춘희'와 함께 드레스도 없이 평상복 차림으로 '나애심' '박재란' 등
일반무대의 최고 가수들과 함께 출연한 무대에서 '폴 앵카'의 ‘다이아나’와 '베니 김'의 부인
'이해연'의 히트곡 ‘추억의 이스탄불’을 열정적인 춤과 함께 불렀다
첫 무대부터 앵콜 요청을 받을 만큼 대중들은 '이금희'의 폭발적인 무대를 좋아했다
이후 '송민영'의 소개로 '김광수' 악단의 전속가수가 된 그녀는 동화백화점(현 신세계) 음악감상실과
미도파 백화점 옥상의 ‘21 클럽’ 고미파(화재 이전의 무학성), 유엔센터 등 당시 최고인기 무대들을
주무대로 활약했다
161cm에 50kg대의 터질듯한 몸매에 화끈한 춤을 곁들여 노래하는 '이금희'는 뭇 남성들의 야릇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무대마다 앙코르 세례를 받았다
대중들의 주목을 받자 '박춘석'을 비롯한 많은 작곡가들로부터 음반취입 제의가 몰려 들어왔다
그녀는 “어느 날 안경을 쓴 사람(황우루)이 단조롭게 느껴지는 가요를 취입 하자며 찾아 왔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했어요. 한달 간 지겹게 따라 다니며 졸라서 목소리 상태가 최악일 때 취입을
했는데 그게 ‘키다리 미스터 김’이에요. 내 대표 곡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이금희'는 데뷔음반 발표 후 ‘용꿈’ ‘그것참 별꼴이야’ ‘나는 말괄량이‘ ‘치맛바람’ ‘두 줄기 길’ 등
히트 퍼레이드를 벌리며 정상의 인기가수로 군림했다.
그러나 그녀는 1965년 결혼 후 1969년 MBC TV 개국 쇼 출연을 마지막으로 모든 출연교섭을 마다하며
슬그머니 가요계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연예활동보다는 딸아이를 위해 펑범한 어머니의 길을 택한 그녀는 1977년 이혼의 아픔을 겪은 후
호텔디너쇼에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다 1987년 7월 KBS TV ‘가요무대’로 컴백하기도 했다
신나는 율동과 시원한 창법으로 1960대에 흥겨운 춤바람 열풍을 일으키며 한국최초의 댄스가수로
미름을 날렸던 그녀는 2007년 뇌출혈에 의한 합병증으로 쓸쓸히 세상을 떠나 고인이 되었지만
'김추자' '김완선' 등 후배 댄스가수들 탄생에 자양분을 제공해 준 선구자였다. (웹 인용)
키다리 미스터 김은~ 무대를 뒤흔들던 그녀 이제 말없이 눈빛만…
|
‘키다리 미스터 김은~, 싱겁게 키는 크지만, 그래도 미스터 김은 마음씨 그만이에요….’
1960년대 젊은이들로부터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댄스가요 <키다리 미스터 김>이다. 이 노래를 부른 이는 한국 최초의 댄스가수 이금희(67)씨. 허스키한 보컬에 화끈한 율동으로 당시 남성들의 혼을 빼놓았던 정열의 화신이다. 오죽하면 별명이 ‘미스 다이너마이트’였을까.
그런 그가 2년 전부터 뇌출혈로 인한 합병증으로 쓰러져 사경을 넘나들며 힘겹게 투병 중이다. 외동딸 민윤정씨로부터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문자메시지를 받고 서울 은평구 연세노블병원(302호실)으로 달려갔다.
병실은 노인 환자들로 꽉 차 있었다. 건강미 넘치던 몸은 이미 사라졌고 이씨는 앙상한 몸매의 백발노인이 되어 있었다. 폐와 신장 기능의 저하로 호스를 통해 산소와 영양분을 주입 받으며 힘없이 누워있었다. 세상에! 저 분이 정열적인 율동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가수 이금희씨란 말인가!
핏기가 사라진 그녀의 손을 잡고 인사를 건네자 눈을 크게 뜨고 쳐다만 본다. “어머니는 반갑고 좋으시면 저렇게 뚫어지게 쳐다보세요. 오래전부터 음식을 못 드시고 말씀도 못하십니다.”딸 윤정씨의 설명이다.
미8군 가수로 출발해 외국의 유행음악을 대중에게 전파한 1세대 여성 팝 메신저였던 그는 부동자세로 노래하던 당시의 정적인 가요계에 일대 지각변동을 몰고 온 여걸이었다. 어릴 때부터 울음보가 한번 터지면 동네가 떠나갈 듯 울었을 만큼 풍부한 성량을 타고났다고 한다. 그런 그가 노래는커녕 말조차 못하게 되었다니.
사실 그는 경남여중 2학년 때부터 작곡가 오현명에게 개인레슨을 받으며 성악가의 꿈을 키웠던 순수음악도였다. 경남여고 3학년 때 부친의 위암 수술로 가세가 기울어 성악가의 꿈을 포기했다.
마음을 달랠 겸 몰래 부산에 내려온 박단마의‘그랜드 쇼’구경을 갔다. 그때 현인, 남인수 등 당대 스타가수들의 노래에 매료돼 대중가수로 인생궤도를 수정했다. 가족 몰래 보따리를 싸들고 오빠 친구였던 가수 송민도를 무작정 따라나서서 엉겁결에 가수로 데뷔했다. 그때가 1959년. 이후 1963년, 미8군‘뉴스타 쇼’에 출연하면서 8군 쇼의 주력 가수로 성장했다.
당시 161cm의 적지 않은 키에 50kg대의 터질 듯한 몸매로 화끈한 춤을 곁들여 노래했던 이씨는 뭇 남성들의 야릇한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그녀의 차례가 오면 객석은 일순간 후끈 달아오르며 끊이지 않는 앙코르 세례가 터져 나왔다. ‘이금희가 부르면 바로 히트한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1966년, 기획자 황우루와의 만남은 그녀의 음악인생에서 전환점이라 할만큼 중요하다. 팝송이 아닌 가요곡‘키다리 미스터 김’을 처음 취입하면서 계층을 초월한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국내 최초로 팬클럽을 보유했던 가수는 오빠부대의 원조로 불리는 남진이나 ‘영원한 오빠’ 조용필이 아니다. 바로 이금희씨다. 제작자 황우루는 ‘키다리 미스터 김’의 홍보를 위해 당시로서는 드물게 신장 180cm가 넘는 30여 명의 키다리들을 모아 이금희 팬클럽을 결성해 화제가 됐었다. 이후 이금희는 영화는 물론 TV 드라마에서도 재능을 뽐냈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
그러나 절정의 인기와는 달리 여자로서 이금희씨의 인생은 고통스러웠다. 1965년 결혼 후 두 번이나 유산하는 아픔을 겪었다. 심한 충격을 받았던 그는 세 번째 임신을 한 1969년, MBC TV 개국 쇼 출연을 마지막으로 가요계에서 슬그머니 모습을 감췄다. 인기보다는 자식을 낳고 싶었다. 이때 태어난 외동 딸 윤정씨를 위해 인기가수의 길을 미련 없이 버리고 평범한 어머니의 길을 택하면서 대중과 멀어져갔다.
결국 77년 이혼한 이금희씨는 이후 극성 엄마로 살아왔다. 외동딸을 위해 반평생을 헌신했기에 모녀는‘친자매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씨는 1987년 공식적으로 컴백해 교회성가대활동과 성가집 발표 등을 하며 음악생활을 이어갔다.
건강이 악화된 것은 2004년 오른쪽 무릎에 인공 관절 수술을 하면서부터. 수술 부작용으로 혈압이 올라가 갑자기 쓰러졌다. 3개월마다 병원을 옮겨 다녔지만 2006년 1월 심한 욕창과 패혈증으로 절대 절명의 순간을 수 차례 넘겼다.
“그때 의사선생님이 2개월을 넘기지 못하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어요. 지금 이 병원으로 온 것도 치료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의학적으로 손을 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씨는 고통이 심할 때마다 천국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신앙심이 강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지만 “소중한 딸을 혼자 남겨두고 어떻게 떠날 수 있냐”며 쉽게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엄마의 끼와 재능을 이어받은 윤정씨는 대학에서 대중음악을 전공하며 가수의 꿈을 키운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씨는 한사코 딸의 가수데뷔를 반대했다.
“왜 그때 어머니가 절 말렸는지 이젠 알 것 같아요. 어머니가 인기 있던 시절엔 찾으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교회 분들 밖에는 없습니다. 연예인의 세계는 서로 사랑해줄 줄 모르는 세계라 생각하신 것 같아요.”섭섭함이 베어있는 말이었다.
고생을 모르고 자라온 윤정씨는 “엄마 치료를 위해 결혼자금으로 모아 둔 돈도 다 떨어졌습니다. 결혼은 상관없지만 치료비를 위해 내놓은 한남동 집이 팔리지 않아 걱정”이라며 “절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에는 사랑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느낍니다. 가수의 꿈은 버렸지만 앞으론 어머님의 소원인 CCM 복음가수로 살아갈 생각”이라고 눈물을 보였다.
화끈한 율동의 댄스곡들로 대중에게 흥겨운 기운을 선사했던 한국 최초의 댄스가수 이금희. 그는 김추자, 김완선, 김현정으로 이어지는 후배 댄스가수들의 탄생에 자양분을 제공했던 한국 대중가요의 큰 별이다. 이제 그를 볼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곧 설 명절이 돌아온다.
가수 이금희씨 /조선
2007 - '키다리 미스터 김' 가수 이금희씨 별세
‘한국 최초의 댄스 가수’로 일컬어지는 ‘키다리 미스터 김’의 가수 이금희(본명 이대금.68)씨가 20일 오전 1시15분 서울 은평구 연세노블병원에서 별세했다. 이씨의 딸 민윤정(38)씨는 “지난 2005년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신 뒤 병상에서 지내오다 최근 합병증으로 폐렴이 왔는데 호흡곤란이 심해져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59년 데뷔한 고인은 미8군 무대에서 가수로서 첫발을 내디뎠으며, 66년 발표한 ‘키다리 미스터 김’을 화려한 춤과 함께 선보이며 스타덤에 올랐다. 이씨는 중학교 재학 시절부터 바리톤 오현명씨에게 개인 레슨을 받으며 성악가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고교 시절 아버지가 위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자, 생계를 위해 대중가수의 길을 걸었다. ‘용꿈’,‘ 그것 참 별꼴이야’,‘ 작은 새’ 등의 히트곡을 남겼던 고인은 결혼 후 두 차례 유산의 아픔을 겪으면서 60년대 후반부터 활동을 줄여나갔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복음성가 가수로 다시 활발한 모습을 보였으며 98년에는 옛 히트곡과 팝송 번안곡 ‘다이애나’ 등을 담은 음반‘웃기지 말아요’를 발표했다. 2000년대부터는 서울예대 실용음악과를 졸업한 딸 윤정씨와 함께 모녀 복음성가 가수로 무대에 섰다. 빈소는 서울 용산구 순천향병원. 발인은 22일 오전 8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