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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 想
박 창 규(6회 농업과 졸) ․서울대 농학과졸/김해시농촌지도소장 ․전 충청남도 농촌진흥원장
1943년도에 개교되어 우리의 정다운 동문들이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각 방면에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고 또 앞으로 새시대를 열어갈 서해안 명문고로 계속 육성해 나가는데 총력을 경주하고 계신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교직원 선생님들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한편 사회적으로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모교 사랑을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고 계신 역대 동창회장님과 임원님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소생은 제14대 동창회장 정성원형과 농업과 동기생(6회)으로 당시 유주성 교장님(제6대)을 모시고 열심히 공부하였던 제자입니다. 나의 서재에는 620쪽의 큼직한 대형 칼라 책자 「서산농공업고등학교 동창회 회원명부」에 16,000여명의 대가족들의 명단을 보면 마음이 흐뭇해지고 또 올해 하반기에는 「서산농공고 60주년사」책자가 옆자리를 찾이 할 것이라 생각하니 감회가 깊어 집니다. 농고시절에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그 때가 6.25동란 직후라 학교나 사회 질서가 어수선할 때라 힘이 센자가 인기가 있어 교우간에 마음에 와 닿는 친구끼리 10여명씩 크럽을 만들고 방과 후에는 일정한 장소에 모여 곤봉, 역도, 평행봉, 쌘드백 치기, 벅싱 등 체력단련과 난상토론으로 더욱 친숙해 졌던 생각...... 그 당시 나도 감찰부 완장을 차고 활보하던 생각 지금 생각해보면 아!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구나...... 또 하기 힘들고 싫었던 포장실습, 병아리 부화기(습식) 관리 등...... 그러나 당시 선생님들 수준은 최상급이엇다. 고향으로 피난오신 서울의 명문대 교수님들이 수준높은 강의가 이루어져 공부만은 열심히 하였기 때문에 시골 학교에서 수십명이 명문대 입학의 영광을 찿이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에 농대(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학과)를 거쳐 농업의 본산지인 수원에 있는 농촌진흥청(작물시험장 지도국 식량증산 상황실)과 산하기관인 시군농촌지도소장(김해, 용인, 화성-서기관급)과 충청남도 농촌진흥원장(대전-이사관급)을 마지막으로 35년간의 농업관련 공직생활을 마쳤습니다. 이토록 평생 농업, 농촌, 농민들과 호흡을 같이 하게된 동기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선친께서 부석 땅에서 큰 과수원을 경영하셨고 또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 즐겨 읽었던 책 심훈선생(당진출신)의 「상록수」와 유달영선생의 「새역사를 위하여」 그리고 매현 윤봉길 의사(덕산출신)의 망명길에 오르기 전 농촌계몽운동(농촌진흥 식량증산)에 감화되어 나도 꼭 해보겠다는 마음가짐을 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공직생활에서 보람이 있었다고 하면 농촌진흥청 상황실을 운영하면서 식량증산의 일환으로 강력히 추진된 통일(統一)벼 확대 보급을 위한 대대적인 농민교육, 농민 포장 현장지도와 TV, 방송, 신문, 잡지 등 홍보 강화, 농민들의 적극 참여로 온 국민의 오랜 숙원이었던 쌀 자급달성으로 이 땅에 녹색혁명(綠色革命)을 성취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하여 정부에서 식량증산 유공자 표창(‘75 대통령표창, ‘77녹조근정 훈장)을 받았습니다. 또 충청남도농촌진흥원장 근무 당시에는 우리 충남농업 발전을 위하여 원예 특작 시험장(태안 백합시험장, 예산-국화, 논산-딸기, 부여-토마토, 청양-구기자)을 신설하여 이를 핵으로 하여 앞으로 지역농업발전에 크게 보탬이 되리라 전망됩니다. 한편 일등 영농주 육성을 위하여 농촌지도자, 농민후계자, 4H, 생활개선회 등 가급 학습단체를 전국 최고 단체로 육성하였으며 또 농촌진흥기관과 농고와의 유대 강화를 위하여 산학협동사업을 강력히 추진(서농공고에 3천여만원 보조 지원)하여 후배 양성에 힘을 기울였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아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노년기에 들어가 아들, 딸들은 건강을 지키며 편안한 아파트에서 같이 살아 보자고 원하고 있으나 농업에 대한 나의 집념은 변하지 않고 있고 또 아내도 나의 뜻에 호응하고 있어 나의 제2 고향 수원 도심지인 세계문화재인 화성(華城) 밑 전원주택에서 뜰 안밖 대지 90 여평에 사과, 배, 감, 오이, 토마토 등 각종 과실나무를 가꾸며 근거리에 있는 논, 밭(2천여평)에 벼와 각종 채소를 가꾸어 가족들에게 먹거리를 공급해 주며 만족스런 마음으로 노후생활을 하고 있으며 일요일에는 성당에 찿아가 열심히 기도하며 생활해 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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