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대동사회

이덕일 역사평론가
조선 선조 때의 선비 정여립(鄭汝立)은 벼슬을 그만두고 전라도 진안(鎭安) 죽도(竹島)로 낙향해서 서실(書室)을 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했다.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는 『혼정편록(混定編錄)』에서 “정여립은 전주·태인·금구(金溝) 등 인근 고을의 여러 무사(武士)와 공사(公私) 천인(賤人)들까지 상하를 통해서 계를 만들어 대동계(大同契)라고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대동계는 매월 15일에 모여 활을 쏘면서 “육예(六藝)는 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육예에는 예(禮), 악(樂), 서(書), 수(數)와 함께 말이나 전차를 모는 어(御)와 활쏘기인 사(射)도 들어간다.
임란(壬亂) 5년 전인 선조 20년(1587) 왜구가 습격하자 전주 부윤(府尹) 남언경(南彦經)은 정여립의 도움을 청했는데 『혼정편록』은 “(정여립이) 한 번 호령하는 사이에 군대가 다 모여 감히 뒤처지는 자가 없었다”면서 왜적을 물리친 후 정여립이 “훗날 오늘 같은 변고가 있으면 각각 부대를 이끌고 한 시에 도착하도록 하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대동계는 지방관의 요청으로 왜구를 격퇴했던 공개된 조직이었으나 2년 후인 선조 22년(1589) 반대당파에 의해 정여립을 역모로 몰아 죽이는 도구로 악용되었다. 대동계가 역모의 결정적 증거로 사용되었으므로 이후 대동(大同)이란 말은 금기가 될 법한데도 그렇지 않았다. 대동이란 용어는 정여립 사형 20여 년 후인 광해군 즉위년(1608)에 대동법(大同法)이란 세법으로 다시 살아났다.
대동법은 국가·왕실에 바치는 각종 진상품(進上品)인 공납(貢納)을 쌀로 통일해서 내는 세법을 뜻한다. 과거의 공납은 부자와 빈자의 구분 없이 비슷한 금액이 가호(家戶)마다 부과되어 가난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대동법은 농토(農土)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부과했으므로 조세정의에 가까웠는데 그 시행 관청이 ‘백성들에게 널리 은혜를 베푸는 관청’이란 뜻의 ‘선혜청(宣惠廳)’일 정도로 가난한 백성들이 환영한 세법이었다.
정여립은 왜 대동이란 용어를 썼을까? 대동(大同)은 동양의 개혁 정치가들이 지향했던 이상사회였다.
동양 사회는 대동(大同)→소강(小康)→난세(亂世)의 순으로 분류된다.
중국 공산당은 2003년 당시를 소강(小康)사회로 평가하면서 앞으로는 대동사회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식 사회주의의 진로를 동양 고전에서 찾았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도 미래 방향을 둘러싼 진통이 계속되고 있지만 동양 고전에서 답을 찾으려는 시도는 좌우 어느 쪽에서도 하지 않는다. 대동, 소강, 난세의 편린이나마 살펴보면 우리 사회의 진로에 대해 조금은 깊이 있는 고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대동사회(2)
동양 유학 사회에서 이상으로 삼았던 대동(大同)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예기(禮記)』 ‘예운(禮運)’ 편에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공자(孔子)가 농사의 신인 신농(神農)씨를 제사하는 사제(祭)에 빈(賓)으로 참석하고 나서 관(關:성문) 위에서 쉬다가 서글프게 탄식했다.
자유(子游)가 까닭을 묻자 공자는 먼저 ‘대도(大道)가 행해졌던 때는 천하가 공공의 것이었다(天下爲公)’고 말했다. 대도가 행해졌던 요·순(堯舜) 임금 때는 세상이 모두의 것이라는 천하위공(天下爲公) 사상이 지배했다는 뜻이다.
공자는 구체적으로 “어질고 능력 있는 자를 뽑아서(選賢與能) 신의를 가르치고 화목을 닦게 하니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만을 부모로 여기지 않았고, 자신의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자신의 부모나 자식만을 식구로 여기지 않는 천하일가(天下一家) 사상이었다.
공자는 “노인들은 편안하게 일생을 마치게 했으며, 젊은이는 다 할 일이 있었고 어린이는 잘 자라날 수 있었으며, 과부·홀아비·병든 자를 불쌍히 여겨서 다 봉양했다. 남자는 직업이 있고 여자는 시집갈 자리가 있었다”고 말했다. 모든 약자를 봉양하는 복지사회의 전제는 ‘젊은이는 다 할 일이 있었으며… 남자는 직업이 있는’ 사회였다. 곧 풍부한 일자리가 복지사회의 전제라는 사실을 2500년 전의 공자는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공자는 또 “재물을 땅에 버리는 것을 싫어했지만 반드시 자기를 위해 쌓아두지는 않았다. 몸소 일하지 않는 것을 미워했지만 반드시 자기를 위해서만 일하지는 않았다”면서 노동의 보편성과 소유의 공공성을 설파했다. “그래서 바깥 문을 열고 닫지 않았으니 이를 일러 대동(大同)이라고 한다”고 공자는 설명했다.
대동사회에 울려 퍼지는 노래가 격양가(擊壤歌)다.
1세기 때 왕충(王充)이 지은 『논형(論衡)』 ‘예증(藝增)’ 편에 나온다.
50세의 사람이 길에서 “크도다, 요(堯)임금의 덕이여!”라고 임금을 찬양했다.
그러자 땅을 두드리던(擊壤) 사람이 “해 뜨면 나가서 일하고, 해 지면 돌아와 쉬네/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 갈아서 밥을 먹는데/ 임금의 힘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
(日出而作, 日入而息/鑿井而飮, 耕田而食/帝力於我何有哉))”라고 반박했다.
한마디로 임금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잘 돌아가는 무위이치(無爲而治)의 세상이 대동사회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편에 “봉황은 저 높은 산봉우리에서 울고/ 오동나무는 저 조양 땅에서 자라네(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兮 于彼朝陽)”라는 노래가 있다.
봉황은 태평한 시대에만 나타나는 새다. 청와대 문양에 봉황을 그린 뜻을 아는 사람 얼마나 될까마는.
[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소강사회
앞 칼럼에서 말한 대동(大同)사회보다 조금 못한 세상이 소강(小康)사회다.
조선 태종은 재위 7년(1407) 종3품 이하 문신들의 시험 때 직접 시무책(時務策)을 출제하면서 “내가 부덕(否德)한 몸으로 한 나라 신민(臣民)의 임금 자리에 올랐는데 비록 덕교(德敎)를 백성들에게 미친 것은 없지만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거의 소강(小康)을 이루기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도전도 태조의 입을 빌려 대신 출제한 과거시험 문제인 전시책(殿試策)에서 “우러러 전대(前代:고려)를 본받아 꼭 소강(小康)을 이루려고 기약한다”(『삼봉집(三峰集)』)고 말했다. 조선뿐 아니라 고려도 소강사회를 지향했다는 뜻이다.
대동사회는 요순(堯舜) 임금이 다스리는 사회를 뜻하고, 소강사회는 우(禹)·탕(湯)·문왕(文王)·무왕(武王)·성왕(成王)·주공(周公)이 다스리던 시대를 뜻한다. 요순이 다스리는 무위지치(無爲之治)보다는 못하지만 그럭저럭 살 만한 세상이다. 자유(子游)에게 대동사회의 모습을 설명한 공자는 이어서 소강사회의 모습을 설명한다. 공자는 “지금은 대도(大道)가 모습을 감추니 천하는 자기 집안의 것이 되었다”고 한탄했다.
이 부분이 대동과 소강의 가장 큰 차이다.
대동사회는 천하가 공공을 위하는 천하위공(天下爲公) 사회라면
소강사회는 천하가 자기 집안을 위하는 천하위가(天下爲家) 사회였다.
공자는 소강사회는 자기 어버이만을 어버이로 여기고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며 재화와 힘을 자기만을 위해 쓴다고 말했다. 천자나 제후 같은 대인(大人)들은 자리를 세습하는 것을 예(禮)로 삼고, 성곽과 해자(垓字)를 파서 스스로 굳게 지키는 사회다.
그러나 소강사회도 그럭저럭 살 만한 사회로 보았다. 공자는 그 이유를 “예의를 벼리로 삼아서(禮義以爲紀), 군신(君臣) 사이가 바르게 되고, 부자(父子)가 돈독하게 되고, 형제가 화목하고 부부가 조화를 이룬다”고 말했다. 우·탕·문왕·무왕·성왕·주공 여섯 군자(君子)는 예(禮)를 삼가지 않은 이가 없어서 의(義)가 드러나고, 믿음이 이루어졌는데, 공자는 “만약 이를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집권자라도 백성들로부터 재앙으로 여겨져서 쫓겨났다”면서 “이를 일러 소강(是謂小康)”이라고 한다고 『예기(禮記)』 ‘예운(禮運)’ 편에서 말했다.
중국 공산당은 2003년 대략 소강사회는 이룩했다면서 앞으로 대동사회를 지향하겠다고 선언했다. 중국이 유교국가로 갈 것으로 보는 주요한 근거의 하나다. 중국이 문화대혁명 같은 난세(亂世)에서 벗어난 것이 맞지만 지금이 소강사회라는 데는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우리 사회도 소강사회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덕일 역사평론가 / 중앙
禮記 <禮運第九>
LJ09,001
昔者仲尼與於?賓, 事畢, 出遊於觀之上. ?然而嘆. 仲尼之嘆蓋嘆魯也. 言偃在側, 曰, “君子何嘆?”
孔子曰, “大道之行也, 與三代之英 丘未之逮也, 而有志焉.
大道之行也, 天下爲公, 選賢與能, 講信, 修睦.
故人不獨親其親, 不獨子其子, 使老有所終, 壯有所用, 幼有所長, 矜寡孤獨廢疾者皆有所養. 男有分, 女有歸. 貨惡其?於地也不必藏於己,
力惡其不出於身也, 不必爲己. 是故謀閉而不興, 盜竊亂賊而不作,
故外戶而不閉, 是謂大同.
옛날에 중니가 노국의 사제(?祭)의 빈(賓)이 되었더니 일을 마치고 나와서 관(觀 높은 臺)위에 쉬고 있다가 한숨을 쉬며 탄식하였다. 중니가 탄식한 것은 아마 노나라의 일을 탄식하신 것일 것이다. 언언(言偃. 子游) 이 곁에 있다가 말하였다. "군자께서 무엇을 탄식하십니까?"
공자가 말씀하셨다. "옛날 큰도가 행하여진 일과 3대의 영현한 인물들이 (때를 만나 도를 행한 일을) 내가 비록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3대의 영현들의) 한 일에 대하여는 기록이 있다.
큰 도가 행하여지자 천하를 公(公共)으로 여겼고 어질고 유능한 인물을 선출하여 (選賢與能).신의을 강습하고 화목함을 닦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의 어버이만을 친애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기의 아들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노인으로 하여금 그 생을 편안히 마칠 수 있게 하고, 장년으로 하여금 쓰일 곳이 있게 하며 어린이로 하여금 성장할 곳이 있게 하고, 불쌍한 과부, 고아, 자식없는 홀애비와 고질병에 걸린 자로 하여금 다 부양을 받을 수 있게 하며, 남자는 (사.농.공. 상.의) 직분이 있고 여자는 의탁할 곳(돌아갈 남편의 집)이 있었다.
재물이 땅에 버려지는 것을 미워하나 꼭 자기에게만 (사사로이) 감추어 두지 않았다.
노력이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으면 미워하나 반드시 자기 자신만을 위해 하지 않았다.그런 까닭에 간사한 꽤는 폐색되어 일어나지 않았으며, 도둑질이나 세상을 어지럽히는 무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집에 문을 닫지 않았다. 이를 일컬어 대동(大同)이라한다.
? 납향제 사,납향제(臘享祭 : 납일에, 그 한 해 동안 지은 농사 형편과 그 밖의 일들에 대해서 여러 신에게 알리는 제사 ). ?月사월 : 한 해의 열두 달 가운데 네 번째 달,‘섣달’을 달리 이르는 말..
觀 : 양관(兩觀). 궁문(宮門) 좌우에 있는 높은 대(臺). ?然而嘆 위연이탄. 한숨을 쉬며 크게 탄식함. ?然 ① 탄식하는 모양 ② 한숨 쉬는 모양 ③ 한탄하는 모양
今大道旣隱, 天下爲家, 各親其親, 各子其子, 貨力爲己,
大人世及以爲禮, 城郭溝池以爲固.
禮義以爲紀, 以正君臣, 以篤父子, 以睦兄弟, 以和夫婦, 以設制度, 以立田里, 以賢勇知, 以功爲己.
故謀用是作而兵由此起,
禹湯文武成王周公由此其選也. 此六君子者未有不謹於禮者也. 以著其義, 以考其信, 著有過, 刑仁, 講讓, 示民有常.
如有不由此者, 在?者去, 衆以爲殃. 是謂小康.
지금의 (세상은 천하를 공유로 하는) 대도는 이미 없어지고 천하를 (사사로운)집으로 생각하여 각각 자기의 어버이만을 친애하며 각기 자기의 아들만을 자애한다. 재화와 인력은 자기만을 위하여 바친다.
천자와 제후는 세습하는 것을 예로 여기며 성곽과 구지를 견고하게 한다.
예의를 紀(벼리.기강.법)로 삼고 그것으로 임금과 신하의 분수를 바로 잡으며 부자 사이를 돈독하게 하고,형제를 화목하게 하며, 부부사이를 화합하게 한다. 제도를 설정하여 전리(田里 농토와 동네)를 세우며 용맹함과 지혜 있음을 어질다고 하고, 공(功)은 자신만을 위하여 한다.
그런 까닭에 간사한 꾀가 이로서 쓰이고 일어나니 전쟁(兵)이 일어나는 연유다.
우왕. 탕왕.문왕.무왕.성왕.주공은 이 예의를 써서 잘 다스린 자들이다. 이 여섯 사람의 군자들은 예를 삼가하지 않은 이가 없다. 그리하여 의를 밝히고 신을 이루며, 허물 있는 것을 드러내 밝히고 인(仁)으로 다스리고 겸양을 가르키어 백성들에게 떳떳한 법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만약 이에 따르지 않으면 집권자일지라도 제거하고 백성들이 재앙이라 여겼다.
이러한 세상을 小康(조금 평안한 세상)이라고 말한다
十八史略 樂府詩集
擊壤歌 격양가.
옛날 중국(中國) 요임금 때 늙은 농부(農夫)가 땅을 치면서 천하(天下)가 태평(太平)한 것을 노래한 데서 온 말로 태평(太平)한 세월을 즐기는 노래
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于我何有哉?
해뜨면 일하고, 해지면 쉬며. 우물파서 마시고, 밭갈아 먹으니. 제왕의 힘이 어찌 나에게 미치리오? (태평세대의 농촌을 표현한 노래) 鑿 뚫을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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