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탄
박종화의 역사소설 ‘여인천하’. 고등학생 때 ‘금삼의 피’를 읽은 뒤 정말 오랜만에 그의 작품을 접하니 감개무량했다. ‘여인천하’가 처음
나온 때가 1959년, 반세기도 더 지난 작품이다. 그런데도 몇 년 전 동명의 사극으로 방송될 정도로 대중들에게 여전히 친숙한 작품이라는 점은
대단한 일이다. 그만큼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서사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
여인천하’ 는 박종화의 후기작에 속하는데, (상)·(중)·(하) 세 권으로 된 장편이다. (상)편에서는 공신들의 득세 속에 조광조의 등용,
문정왕후가 간택되기까지를 담고 있고, (중)편에서는 조광조가 개혁 시도하다 기묘사화로 몰락하기까지를 (하)편에서는 인종 뒤를 이어 문정왕후의
소생이 왕으로 즉위하고, 인종의 외숙 윤임을 제거하는 과정이 펼쳐졌다. 조선 중기에 벌어졌던 정치세력 간 갈등관계를 큰 줄기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여인천하’라는 제목에 걸맞게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와 문정왕후의 올케인 정난정, 이 두 여인이 조선 정치를 막후에서 좌지우지하게
되기까지 그간의 권력투쟁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갈등의 큰 축은 두 가지이다. 중종 반정으로 권력을 손에 쥐게 된 공신세력 즉 훈구파와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간의 갈등이 첫
번째이고, 대윤과 소윤으로 불렸던 인종의 외척 윤임과 명종의 외척 윤원형, 외척 간의 갈등이 그 두 번째이다. 여기에 공신간, 후궁간의 갈등도
양념으로 곁들여져 있다.
‘여인천하’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내용을 풀어가지만 공론보다는 몇몇 인물들의 음모와 암투나 베개머리 송사로 사건을 그려가고 있다. 그래서 문정왕후나
정난정은 생동감있고, 주동적인 인물려 그려지고 있지만, 그에 비해 중종은 공신이나 조광조 왕비의 조종에 따라 움직이는 못난 인물로만 그려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반세기 전 작품이라는 진부함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바로 권력 투쟁과 암투를 그린 그 점 때문에 박종화의
역사소설은 여러 편 사극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도 싶었다. '여인천하'는 물론이고, ‘세종대왕’이 ‘용의 눈물’로 ‘자고 넘는 저 구름아’가
‘왕의 여자’로 말이다.
박종화는
자신의 관점으로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기 보다는 기존의 역사적 평가나 인물에 대한 평가를 유지하는 쪽이라, 보수적인 색채가 묻어 나왔다. 그럼에도
문정왕후의 변화를 묘사한 부분은 눈길을 끌었다. 문정왕후가 처음부터 권력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정난정을 만난 뒤 자신의 세력을
보위에 오르게 하려는 공신과 후궁들과의 권력투쟁을 주도하는 성격으로 변화했다. 그 과정은 흥미롭기도 했거니와 공감도 됐다. 조선 여인중 가장
정치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20년이나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던 문정왕후는 선천적으로 권력지향적인 인물이 아니라 정치세력과의 갈등
속에서 후천적으로 권력을 추구하게 된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
밖에도 문정왕후와 정난정이 나누는 대화 중에서 조선의 남성과 벼슬아치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대목도 눈에 띄었다.
‘못난
사내보다 더 강하게 잘살자. 아내를 두 번 세 번 내쫓는데도 끽소리 못하고, 살아가는 사내보다는 강하게 사는 여자가 되려 나을 지도 모를
것이다. 나라에서 벼슬한다는 남자들이 정말 나라를 생각하고 백성을 조심해서 자기 직책을 다하려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느냐. 모두다
도둑놈들이다. 부귀영화를 저 혼자서 대대로 누리려 하며 겉으로는 충신인 체 하면서 사리사욕에 눈이 뒤집힌 것들 뿐이다.’ -(하)
253쪽-
정난정은
서출이라는 신분의 한계 때문에 정경부인이 되겠다는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원천봉쇄돼 있었다. 정난정, 그녀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악녀가
돼야만 했다. 여성의 욕망을 억압하기만 했던 조선사회에서 신분상승과 권력을 욕망하면서 살아 꿈틀렸던 여성상을 담아낸 것은 고무적이었다.
결국
그녀들은 못난 사내보다 더 강하게 살았고, 그 결과 여인천하를 이루었다. 비록 아들 명종을 통해서지만, 문정왕후는 눈을 감는 날까지 권력을
누렸다. 하지만 문정왕후의 사후에 정난정과 윤원형의 몰락은 예견된 결과였고, 그래서였는지 정난정의 몰락은 급하고 짧게
처리됐다.
요즘
우리 역사소설이 로맨스나 추리, 퓨전 등 다양한 방향으로 가지를 쳐가는 추세인데, ‘여인 천하’는 고전적인
역사소설로 기억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역사소설이 어떻게 대중에게 다가갔고 뿌리를 내렸는지를 보여주었고, 동시에 우리 역사소설사에서 박종화가 차지하는 무게감을 다시금 확인해 준
작품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