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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 기녀들의 사랑이야기
1. 기녀(妓女)
가무와 풍류로 연회에 참석하여 흥을 돋우는 것을 업(業)으로 삼던 여성. 광의(廣義)로는 의약(醫藥)•침구(鍼灸)•재봉(裁縫) 등을 배워 익히는 여자 종을 지칭하기도 한다. ‘기생(妓生)’, 말을 할 줄 아는 꽃이라는 뜻에서 ‘해어화(解語花)’, 또는 ‘화류계 여자(花柳界女子)’라고도 하였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기생이 양수척(揚水尺)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양수척은 곧 유기장(柳器匠)으로서, 고려가 후백제를 칠 때 가장 다스리기 힘들었던 집단이었다. 이들은 원래 소속도 없고 부역에 종사하지도 않고,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버드나무로 키·소쿠리 등을 만들어 팔고 다녔다. 후에 이들이 남녀노비로서 읍적(邑籍)에 오르게 될 때, 용모가 고운 여자를 골라 춤과 노래를 익히게 하여 기생을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기(妓)와 비(婢)는 원래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하고, 그 중 비가 기보다 먼저 발생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비나 기는 한 사회의 계급 분화과정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기생의 발생을 무녀(巫女)의 타락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즉, 고대 제정일치사회에서 사제(司祭)로서 군림하던 무녀가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력이 분화되는 과정에서 기생으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원래부터 세습되어 내려온 기생 이외에도, 비적(婢籍)으로 떨어져 내려와 기생이 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반역을 꾀한 역신(逆臣)의 부녀자들이다.
고려시대에 근친상간의 금기를 범한 상서예부시랑 이수(李需)의 조카며느리를 유녀(遊女)의 적에 올린 경우와, 조선 초기 사육신(死六臣)의 처자들을 신하들에게 나누어준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조선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친정어머니를 제주감영의 노비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기생은 노비와 마찬가지로 한번 기적(妓籍)에 올려지면 천민이라는 신분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기생과 양반 사이에 태어난 경우라도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따라 아들은 노비, 딸은 기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생이 양민으로 되는 경우도 있었다. 즉, 속신(贖身)이라 하여, 양민부자나 양반의 소실이 되는 경우 재물로 그 대가를 치러줌으로써 천민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한편, 기생이 병들어 제구실을 못하거나 늙어 퇴직할 때 그 딸이나 조카딸을 대신 들여놓고 나오는데, 이를 두고 대비정속(代婢定屬)이라 했다. 고전소설인 『추풍감별곡(秋風感別曲)』에는 양반의 딸이 아버지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기녀가 되는 얘기도 있다.
다만 그들에게 위안이 있다면, 첫째 양반의 부녀자들과 같이 비단옷에 노리개를 찰 수 있었던 점이고, 둘째 직업적 특성에 따라 사대부들과의 자유연애가 가능했다는 점이며, 셋째 고관대작의 첩으로 들어가면 친정을 살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신분적 제약으로 인해 이별과 배신을 되풀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불후의 시조시인으로 꼽히는 송도 명기 황진이(黃眞伊)는 시조 뿐 아니라 한시에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서경덕(徐敬德)과의 일화는 유명하다. 부안 명기 이매창(李梅窓)은 당시 문인과 명신들인 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중종 때는 선비들이 그녀의 시비를 세워주었다. 그 밖에 홍랑(洪娘)·송이(松伊)·소춘풍(笑春風) 등 시조시인으로 이름을 남긴 시기(詩妓)들이 많다.
조선 말기에 이르면 기생이 일패(一牌)·이패·삼패로 나뉜다. 일패기생은 관기(官妓)를 총칭하는 것으로, 예의범절에 밝고 대개 남편이 있는 유부기(有夫妓)로서 몸을 내맡기는 일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이들은 우리 전통가무의 보존자이며 전승자로서 뛰어난 예술인들이었다. 이패기생은 은근짜[隱君子]라고 불리며 밀매음녀(密賣淫女)에 가깝다. 삼패기생은 이른바 창녀(娼女)로서 몸을 파는 매춘부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는 한말의 기생학교·기생조합이 권번(券番)으로 바뀌었다. 권번은 서울·평양·대구·부산 등 대도시에 있었고, 입학생들에게 교양·예기·일본어 학습을 시켜 요릿집에 내보냈다. 일부 기생들은 권번의 부당한 화대(花代) 착취에 대항하여 동맹파업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한편, 어떤 친일파 인사가 거금을 주고 당시 이름난 요정인 서울 명월관(明月館)의 진주 기생 산홍(山紅)을 소실로 삼으려 하자, “기생에게 줄 돈이 있으면 나라 위해 피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며 단호히 거절하여 의기의 맥을 이었다. 그밖에도 일제강점기에는 애국충정과 관련된 기생들의 일화가 많다.
2-1. 한시, 여성
고전 여성한시 주제의 대부분이 규정(閨情)을 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만진(羅萬辰)의 딸인 나씨(羅氏)의 〈규원(閨怨)〉은 제목으로 볼 때 규방 여자의 원(怨)을 읊은 것인데, 그 내용을 명확히 알기 어렵다. 봄비가 흠뻑 내려 마을을 안고 돌아드는 시내가 더욱 맑아 보이고 뽕나무 밭이 더욱 푸르른 쾌청하고 아름다운 봄날,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야윈 모습으로 홀로 책을 보는 노인에 대한 원망을 표출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아름다운 봄날의 정경을 배경으로 자신의 원과 한을 표출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자신의 뜻을 얻지 못한 불편한 심사가 비온 뒤 더욱 맑은 봄날의 정경과 대비되어 더욱 암울하게 전해지는 작품이다.
閨怨(규원)
淸溪一曲咆村流(청계일곡포촌류) 한 굽이 맑은 시내 마을을 안고 흐르고
藥圃桑田春雨餘(약포상전춘우여) 약밭 뽕나무밭에 봄비 흠뻑 내렸네
鶴骨癯然何許老(학골구연하허로) 학 뼈처럼 야윈 모습 그 어떤 노인인가
半窓竹枕獨看書(반창죽침독간서) 들창 아래 죽침 베고 홀로 책을 보네
장모부인(張某夫人)이라는 윤씨(尹氏)는 죽음을 앞두고 쓴 〈임사작(臨死作)〉 한 수를 남기고 있다. 이 시는 윤씨가 죽음에 직면해 지은 임종시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오히려 부용성의 옥피리 소리를 듣고 고운 안개가 피어나는 것을 보고 있다. 자신의 죽음을 마치 선계로 입성하는 것인 양 묘사하여 인간의 죽음을 아름답게 승화하고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심오한 깨달음 뒤에 얻을 수 있는 경지로 보여진다.
臨死作(임사작)
芙蓉城裏玉簫聲(부용성리옥소성) 부용성 안에는 옥피리소리 나고
十二欄干瑞靄生(십이난간서애생) 열두 난간엔 고운 아지랑이 피어나네
歸夢怱怱天欲曙(귀몽총총천욕서) 돌아갈 꿈 바쁜데 하늘은 밝으려하고
半窓殘月映花明(반창잔월영화명) 들창에 지는 달이 꽃을 밝게 비추네
선비 정문영(鄭文榮)의 처의 작품인 〈대양인증인(代良人贈人)〉은 정문영의 처가 남편인 정문영을 대신하여 다른 사람에게 주는 시를 쓴 대부자작(代夫子作)이다. 정문영의 처는 남편의 글을 대신할 정도로 글 솜씨가 뛰어났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대부자작은 강정일당이 그의 남편 탄연 윤광재를 대신해 많이 지었는데, 이런 문필활동은 조선조 여성의 문학적, 사회적 공간을 확장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代良人贈人(대양인증인)
風露瑤臺十二層(풍로요대십이층) 바람과 이슬 소슬한 아름다운 누각 십이층에
步虛聲斷綵雲稜(보허성단채운릉) 허공에 발자국 소리 그치고 비단구름 일어나네
松間欲寄相思字(송간욕기상사자) 소나무 사이로 그립다는 글 부치려하나
多病長卿臥茂陵(다병장경와무릉) 장경은 무릉에 병 깊어 누워있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기녀를 제외한 생존연대 미상 여성한시의 주제는 크게 유교적 윤리규범과 남녀 간 애정, 그리고 회고·무상 등으로 유형화할 수 있으며, 유교적 윤리규범은 이에 순응하는 것과 저항의지를 피력한 작품으로, 남녀 간 애정은 이별과 연모·상사의 정을 읊은 작품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내용으로 볼 때 남녀 간 애정과 유교적 윤리규범을 다룬 작품이 반을 넘었는데, 이는 조선조 여성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반영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2-2. 여성 중의 여성, 기녀
기녀도 여성인 바 아마도 그들의 대부분은 사랑하는 한 남자의 여인으로 살아가고 싶은 소망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그들은 기녀였음에도 불구하고 임과의 영원한 사랑을 희구하였으며 이 뜻이 좌절될 때마다 더 큰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평양 기녀인 온정(溫亭)은 원래 기녀였다가 남의 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의 사랑을 믿지 못해 집을 나왔다가 다시 기녀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세보(徐世輔)의 첩이 문장에 능했는데 집을 나간 뒤에 서세보가 오히려 잊지 못하여 율시 한 수를 보냈더니 자신의 죄는 산과 같고 임의 은혜는 하늘과 같아 율시의 내용은 진실로 부당하다 하고 시를 지어 보냈다고 하는데 다음 첫 수가 실려 있다.
失題(실제)
妾身倫落屬娼家(첩신윤락속창가) 첩의 몸이 윤락하여 창가에 속했으나
願得賢郞送歲華(원득현랑송세화) 어진 낭군 만나 좋은 세월 보내길 원했답니다
不識郞心磐石固(불식랑심반석고) 임의 마음 반석같이 굳은 줄 알지 못하고
暫時移向別園花(잠시이향별원화) 잠시 다른 동산의 꽃으로 옮겨 갔지요
(中略) (중략)
紫燕辭巢西向飛(자연사소서향비) 아름다운 제비 둥지를 떠나 서쪽으로 날아갔으나
風飄輕絮落汚地(풍표경서락오지) 바람에 날리는 가벼운 버들개지 더러운 곳에 떨어졌지요
阿誰更結三生約(아수경결삼생약) 누구와 다시 삼생의 약속 맺으리오
一寸芳心不自持(일촌방심부자지) 한 치 꽃다운 마음 스스로 지니지 못했으니
(中略) (중략)
忽得郎函醉夢輕(홀득낭함취몽경) 얼핏 꿈에서 임의 편지 받고 보니
錦牋字字淚交橫(금전자자루교횡) 비단 종이 글자마다 눈물이 얼룩져요
料知明月無人夜(료지명월무인야) 밝은 달 사람 없는 이 밤, 알겠어요
猶有殷勤戀我情(유유은근연아정) 오히려 은근히 나를 그리는 정 있음을
작품 내용으로 볼 때 온정은 처음에 기녀였다가 남의 소실로 들어갔으나 집을 나와 다시 기녀 생활하는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임이 자신을 그렇게 사랑해 주는 줄 모르고 좀 더 좋은 임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다른 남성을 찾아 나왔지만 오히려 더러운 곳에 떨어져 더 어렵게 살고 있음을 자탄하고 있다. 기녀의 기구한 삶이 회한 속에 애처롭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다음은 평양의 열한 살 어린 기녀의 시인데, 미인의 순진무구한 행동을 섬세한 정감으로 노래하여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머금게 하는 작품이다. 어린 나이답게 단순하고 귀여운 시상을 담아내고 있다.
美人下堂去(미인하당거) 미인이 당 아래로 내려가
含笑折夭桃(함소절요도) 웃음 머금고 아름다운 복사꽃 가지 꺽으려다
不知纖手短(부지섬수단) 가는 손 짧은 줄 알지 못하고
還罵桃枝高(환매도지고) 도리어 복사꽃 가지 높음을 나무라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생존연대 미상 기녀 한시의 주제는 그들의 신분상 남녀 간 애정을 읊은 시가 가장 많다. 그리고 기녀라는 직업이 젊음을 재원으로 하는 것인 만큼 세월의 흐름에 민감하여 인생과 세월의 무상함을 읊은 작품 또한 많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여성한시에는 남녀 간 애정관계에서 보이는 이별과 연모 상사의 정이나 인생무상, 주변 경관에 대한 감회가 큰 공통 주제가 되며, 나머지는 각자의 신분과 역할에서 파생되는 정서가 그들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일반여성한시에는 유교적 윤리규범에 대한 시가, 기녀 한시에는 기녀로서의 자존의식이나 남성과의 풍류, 기행에 관한 시가 있어 그들만의 독자적인 시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3. 여성한시의 영원한 주제, ‘그리움’
정씨(鄭氏)의 〈기양인재적(寄良人在謫)〉은 귀양 가 멀리 있는 임을 그리워하며 부른 것이다. 정씨는 감사(監司) 정도성(鄭道成)의 딸이며, 황쇠(黃釗)의 소실이다. 『대동시선』에 의하면 이 시는 『진휘속고(震彙續攷)』에는 동양위(東陽尉) 궁비(宮婢)의 작으로, 『시화휘성(詩話彙成)』에는 정순신(丁舜愼)의 소실의 작으로 되어 있어 누가 옳은지 모른다고 했다. 동양위는 선조의 부마였던 신익성(申翊聖)이다.
〈기양인재적(寄良人在謫)〉은 귀양 가 있는 남편에게 보내는 시로, 우울하고 쇠잔해가는 이미지 속에 임을 그리는 연모의 정을 한스럽게 표출하고 있는 작품이다.
寄良人在謫(기양인재적)
病葉風中語(병엽풍중어) 바람 속에 마른 잎 서걱이고
殘花雨後啼(잔화우후제) 비온 뒤에 흐느끼듯 꽃이 지네
相思千里夢(상사천리몽) 임 그리는 천리의 꿈
月在小樓西(월재소루서) 달은 작은 다락 서쪽에 걸렸네
앞서 살펴본 〈증인〉의 작가를 권붕 가(家)의 여종 금가로, 〈기양인재적〉의 작가를 동양위 신익성의 비(婢)로 본다면, 전자는 조선 전기, 후자는 조선 후기 한시사에 편입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문헌에 전자의 작가는 양주 전부로, 후자는 감사 정도성의 딸이며 황쇠의 소실인 정씨로 다르게 표기되어 있어 작가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 없다. 만일 두 작품의 작가가 양주 전부와 정씨라면 이들의 생존 시기는 알 수 없으므로 한시사에서 제외하였다.
한편 『해동시선』에는 〈회인(懷人)〉이라는 시가 신익성 비(婢)의 작품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위 시 첫 구의 ‘중(中)’자가 ‘전(前)’자로 표기된 것만 다르고 나머지는 똑같다.
또 『소화시평(小華詩評)』에는 동양위의 관비(官婢)가 시를 잘 지었다고 하며, 그의 작품으로 다음 시를 수록하고 있다.
落葉風前語(낙엽풍전어) 바람 앞에 낙엽 서걱이고
寒花雨後啼(한화우후제) 비온 뒤 찬 꽃 우네
相思今夜夢(상사금야몽) 임 그리는 오늘 밤 꿈
月白小樓西(월백소루서) 달은 작은 다락 서쪽 하얗게 사위네
이 시는 앞의 시의 변주로 ‘병엽(病葉)’을 ‘낙엽(落葉)’으로, ‘천리몽(千里夢)’을 ‘금야몽(今夜夢)’으로, ‘월재(月在)’를 ‘월백(月白)’으로 조금씩 달리 표현하였으나 시상은 같다.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은 호는 낙전당(樂全堂)·동회거사(東淮居士)로 영의정 신흠(申欽)의 아들이며, 선조의 셋째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결혼하여 동양위에 봉해졌다.
이와 시상이 비슷한 작품이 두 수 더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해동시화(海東詩話)』에 정순효(丁舜孝)의 소실이 지었다고 전하는 작품이며, 다른 하나는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에 정순희(丁舜熹)의 소실 작으로 실려 있는 작품이다. 『해동시화』에 의하면 “정순효의 소실이 시를 잘 지어 작품이 수백 편에 이르렀으나 요절하였다.”고 한다. 정순효가 그 하나를 기록해 두었는데 다음 작품이 그것이다.
綵蝶風前舞(채접풍전무) 꽃나비 바람 앞에 춤추고
殘鶯雨後啼(잔앵우후제) 비온 뒤 쇠잔한 꾀꼬리 우네
相思惟有夢(상사유유몽) 임 그리워 꿈을 꾸느니
月白小樓西(월백소루서) 달은 작은 다락 서쪽 하얗게 사위네
『조선여속고』에는 이 시 첫 구의 ‘채(綵)’자가 ‘채(彩)’자로 표기된 것만 다르고 나머지는 똑같은 〈채접(彩蝶)〉이라는 시가 정순희의 소실 작으로 수록되어 있다. 원문에는 제목이 없는데 첫 구를 따서 작품 제목을 〈채접(彩蝶)〉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위에 예거한 여러 시 중 어느 작품이 제일 먼저 지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모두 멀리 떨어져 있는 임에 대한 상사의 정을 주제로 하되, 시상이 유사하고 사용한 시어가 비슷한 점으로 보아 모(母)가 되는 한 작품을 후대에 변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멀리 있는 임을 그리는 또 다른 작품으로 염씨(廉氏)의 〈기정인(寄征人)〉이 있다. 〈기정인〉에서 그는 임과 헤어진 뒤 밤마다 원앙이불을 홀로 덮고 자며 눈물 떨구는 외로움을 나타내고 있다. 임을 향한 그리움에 밤마다 눈물짓는 여인의 애통한 마음이 전해지는 작품이다.
寄征人(기정인)
淒淒北風吹鴛被(처처북풍취원피) 쓸쓸한 겨울바람 원앙이불에 불고
娟娟西月生娥眉(연연서월생아미) 어여쁜 초승달은 아미를 그리네
誰知獨夜相思處(수지독야상사처) 누가 알리 외로운 밤 임 그리는 곳
淚滴寒塘蕙草時(루적한당혜초시) 찬 못 난초에 간혹 눈물 떨구는 것을
임과의 이별 후 임을 연모하고 그리워하는 정서는 응당 기다림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정서 역시 임을 연모하는 마음과 같이 슬픔과 한으로 점철되어 있다. 홍당성(洪唐城) 소실 역시 〈규사(閨思)〉에서 임을 기다리는 절박한 심정을 표출하고 있다.
閨思(규사)
童報遠帆來(동보원범래) 멀리서 배 온다고 아이가 알리기에
忙登樓上望(망등루상망) 급히 다락에 올라 바라다보네
望潮直過門(망조직과문) 기다리던 물결 바로 문 앞을 지나느니
背立空怊悵(배립공초창) 돌아서서 부질없이 슬퍼하네
멀리서 배가 들어온다는 아이의 말에 혹시 그리던 임이 오는가 달려 나갔으나 그 배는 자기 집 문 앞을 그냥 덧없이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무너진 기대에 허망하게 되돌아서는 부녀자의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대동시선』에 홍당성 소실의 작으로 기록된 〈규원(閨怨)〉, 〈규사(閨思)〉 두 작품이, 『해동시화』에는 “임천(林川) 문관(文官) 홍순언(洪舜彦)이 스스로 자기의 첩이 시에 능하다고 말하며 첩이 지은 작품을 읊었다.”고 한 뒤에 실려 있어 이 작품 역시 원 작자가 누구인지 분명치 않은 실정이다.
다음 실성씨(失姓氏)는 〈영직녀도(詠織女圖)〉에서 직녀도에 의탁해 임과의 만남이 기약 없음을 한탄하고 있다.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각으로 임과의 재회를 소망하는 마음을 표방하고 있다.
詠織女圖(영직녀도)
瑤臺百尺綵雲深(요대백척채운심) 요대 높은 곳에 오색구름 깊고
萬草千花各自心(만초천화각자심) 온갖 꽃과 풀 저마다 제 마음이네
終日七襄無限意(종일칠양무한의) 종일토록 서성이며 생각은 끝이 없는데
誰知君我一般衿(수지군아일반금) 임과 나 옷깃 함께 맞댈 날 있을지 누가 알리오
4. 기녀, 기다리는 마음, 그리고 비애
기녀의 사랑은 처음부터 이별을 전제로 한 사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녀가 진실한 사랑으로 사랑에 목숨을 걸었으니 비련은 여기서 시작되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기녀 한시에는 임에 대한 연모 상사의 情과 임을 기다리는 마음을 읊은 시가 아주 많다.
남원(南原) 기녀인 계화(桂花)는 〈광한루(廣寒樓)〉에서 이별 뒤 수심(愁心)을 담아내고 있다. 비단 짜는 일을 그만 두고 홀로 광한루에 오르니 계절은 벌써 계화나무 꽃 피는 가을인데, 임은 한번 간 뒤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어 밤마다 시름에 젖을 수밖에 없다. 임과의 사랑을 견우와 직녀의 사랑에 비유하여 둘의 사랑이 만나기 힘든 서러운 사랑임을 드러내는 한편 일 년에 한번이라도 만나기를 간구하는 애달픈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해어화사』에는 이 시의 작가가 계월(桂月)로, 『대동시선』과 『해동시선』에서 계화(桂花)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 실은 시는 『대동시선』에 있는 작품인데, 『조선해어화사』에는 1, 2구가 ‘사척금사나상루 주렴고괘계화추(乍擲金梭懶上樓 珠簾高掛桂花秋)’로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廣寒樓(광한루)
織罷冰綃獨上樓(직파빙초독상루) 얇고 흰 비단 짜는 일 그만두고 홀로 누대에 오르니
水晶簾外桂花秋(수정렴외계화추) 수정렴 밖은 계화나무 꽃 피는 가을이네
牛郞一去無消息(우랑일거무소식) 우랑은 한 번 간 뒤 소식이 없어
烏鵲橋邊夜夜愁(오작교변야야수) 밤마다 오작교 가에서 시름에 젖네
성천(成川) 기녀 일지홍(一枝紅)의 〈상태천홍아내(上泰川洪衙內)〉는 임과 헤어지던 날을 회상하며 별한에 잠기는 여심을 보여주고 있다. 임과 헤어지면서 후일을 기약하고자 하였으나 부질없는 일이었다. 기녀의 사랑에서 재회의 기약은 거의 무망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임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커 그는 다음 기회를 ‘은근히’ 물어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번 떠난 임은 지금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고 무정한 세월만 덧없이 흘러가고 있다.
上泰川洪衙內(상태천홍아내)
駐馬仙樓下(주마선루하) 강선루 아래 말을 세우고
殷勤問後期(은근문후기) 은근히 다음 기회를 묻네
離筵樽酒盡(이연준주진) 이별 자리에 술도 다했으니
花落鳥啼時(화락조제시) 지고 새 우는 때였네
진주 기녀인 계향(桂香) 역시 〈기원(寄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임에 대한 상사의 정을 담아내고 있다. 임과 헤어진 상황에서 임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꿈밖에 없다. 다행히 꿈속에서 임을 만나 즐거웠는데 꿈을 깨고 나니 현실은 더욱 서럽기 짝이 없다. 임 그리는 마음에 구곡간장이 끊어지는데, 더하여 비까지 내리니 하염없이 눈물만 흘러내린다. 임과의 재회가 요원한 가운데 재회를 소망하는 연모의 정이 처연하게 전해지는 작품이다.
寄遠(기원)
別後雲山隔渺茫(별후운산격묘망) 이별한 뒤 운산 막혀 아득하니
夢中歡笑在君傍(몽중환소재군방) 꿈속 임 곁에서나 기쁘게 웃네
覺來半枕虛無影(각래반침허무영) 깨고 나면 베개 반쪽 비어 그림자도 없는데
側向殘燈冷落光(측향잔등냉낙광) 옆에 차가운 불빛 깜박이는 등불을 향하네
何日喜逢千里面(하일희봉천리면) 천리 길 임의 얼굴 언제 반가이 만날까
此時空斷九廻腸(차시공단구회장) 지금도 하릴없이 구곡간장 끊어지네
窓前更有梧桐雨(창전경유오동우) 창 앞 오동나무에 다시 비 내리니
添得相思淚幾行(첨득상사루기행) 빗물에 몇 줄기 그리움의 눈물을 보태네
다음 화산(花山) 기녀인 매학(梅鶴)은 〈금대(錦帶)〉에서 비단 띠에 써 주고 간 학사의 시를 보며 임을 그리워하고 있다. 기녀의 사랑이 대부분 기약 없는 이별을 전제로 하지만 매학에게는 임의 정표가 있어 임에 대한 애착이 더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정표가 없었더라면 기대를 덜 했을텐데 임의 정표가 있어 오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체념하지 않고 오히려 더 사랑을 희구하는 마음에서 사랑의 비애가 싹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錦帶(금대)
欹枕寒窓睡思遲(의침한창수사지) 차가운 창 보고 베개 베니 생각에 잠은 더디고
一燈明滅照雙眉(일등명멸조쌍미) 깜박이는 등잔불 눈썹을 비추네
眞緣不必陽臺夢(진연불필양대몽) 참 연분은 반드시 양대의 꿈만은 아니리니
錦帶留看學士詩(금대유간학사시) 비단 띠에 있는 학사의 시를 보네
이렇게 임에 대한 상사로 시름하는 사랑의 비애는 능운(凌雲)의 〈대낭군(待郎君)〉에서 그 농도를 더하고 있다. 임이 떠나면서 달이 뜨면 온다고 했는데 달이 떠도 임은 오지 않고 있다. 임이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임을 기다리며 배회하는 가운데 그는 ‘아마도 임 계신 곳은 산이 높아 달이 더디 뜨는가 보다’고 하여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임으로부터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애써 마음의 평정을 찾으며 자신을 위로하려는 태도에서 상사의 비애가 배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待郎君(대낭군)
郞云月出來(랑운월출래) 임이 달 뜨면 온다하더니
月出郞不來(월출랑불래) 달이 떠도 임은 오지 않네
想應君在處(상응군재처) 생각건대 임 계신 곳은 으레
山高月上遲(산고월상지) 산이 높아 달이 더디 뜨는가 보다
또 『조선해어화사』에 활동 지역을 모르는 금홍(錦紅)의 〈기기옥화옥엽(寄妓玉花玉葉)〉 시가 전하는데 이 시는 동료로 보이는 기녀 옥화와 옥엽에게 주는 시로, 그는 이 시에서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자신의 비통한 마음을 절절이 토로하고 있다. 사랑하는 임과 운우의 정도 나누지 못하고, 만나자고 한 기약도 어긋났다. 세간에 사랑을 탐내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자신의 마음을 풀어줄 사람은 오직 그 임이라 하여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애달픈 정을 표출하고 있다. 임을 연모하고 그리워하는 가운데 재회를 소망하는 마음이 진솔하게 전해지는 작품이다.
寄妓玉花玉葉詩(기기옥화옥엽시)
數疊詞濃萬疊思(수첩사농만첩사) 할 말도 많고 생각도 많은데
吟詩知是斷腸詩(음시지시단장시) 시 읊으니 단장의 시뿐이네
怨如蜀魄空啼血(원여촉백공제혈) 원한은 두견새 피나게 우는 것 같고
情似春蠶謾吐絲(정사춘잠만토사) 정은 봄누에가 실을 토해내는 것 같네
巫峽雨雲曾不見(무협우운증불견) 무협의 운우의 정은 아직 보지 못했고
瑤臺星月又差期(요대성월우차기) 요대의 별과 달 또 기한을 어겼네
世間貪愛應無數(세간탐애응무수) 세간에 사랑을 탐내는 사람 응당 많지만
能解伊音復有誰(능해이음복유수) 그 마음 풀어줄 이 또 누가 있을까
5. 기녀, 예정된 이별
기녀에게 사랑은 처음부터 미래나 기약이 없는 일회적인 것이었다. 간혹 몇몇 기녀는 사대부의 눈에 들어 사대부가의 소실로 들어앉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 기녀의 사랑은 늘 이별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기녀의 사랑이 영원을 기약할 수 없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여인인지라 영원한 사랑을 희구하는 마음은 늘 있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기녀 한시에는 임을 떠나보내는 안타까운 마음과 이별 뒤 임 그리는 연모의 정을 읊은 작품이 아주 많다.
도화(桃花)는 〈읍별북헌(泣別北軒)〉에서 임과의 처음 만남을 회억하며 지금은 비록 임과 눈물로 헤어지지만 달 밝은 밤이면 언제나 임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임에 대한 사랑은 끝이 없을 것이라는 자신의 마음을 표명하고 있다. 이 시는 양주(楊洲) 전부(田婦) 혹은 권붕(權鵬) 가(家)의 여종 금가(琴哥)의 시라고 전하는 〈증인(贈人)〉과 시상이나 내용이 아주 유사한데, 이런 일련의 시는 모(母)가 되는 한 작품이 변주된 것으로 보여진다.
泣別北軒(읍별북헌)
洛東江上初逢君(낙동강상초봉군) 낙동강 위에서 처음으로 임을 만나
普濟院頭更別君(보제원두경별군) 보제원 머리에서 임과 다시 헤어지네
桃花落地紅無跡(도화낙지홍무적) 복사꽃 떨어져 붉은 빛 흔적 없지만
明月何時不憶君(명월하시불억군) 달 밝으면 어느 때인들 임 생각 않으리
부안 기녀인 복랑(福娘)은 학사 이득일(李得一)을 도성으로 보내면서 〈증이승지(贈李丞旨)〉란 시를 남겼다. 이 시에서 그는 꾀꼬리 울고 비 내리는 봄날, 이렇게 임과 헤어지면 한참 뒤에나 다시 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임과의 이별을 애석해하고 있다. 즉 지금은 갈대 싹이 푸르게 돋아나는 봄이지만 임이 돌아올 때는 갈대가 무성히 자라 말발굽이 갈대에 묻힐 것이라고 하여, 시간의 흐름을 갈대에 의탁해 형상화하고 있다. 『조선해어화사』에는 이름이 복개(福介)로, 작품명은 〈송이학사득일지경(送李學士得一之京)〉으로 수록되어 있다.
贈李丞旨(증이승지)
楊柳枝詞唱得低(양류지사창득저) 양류지사를 낮게 부르는데
離亭新雨早鶯啼(이정신우조앵제) 이별하는 정자에 봄비오고 일찍부터 꾀꼬리 우네
洲蘆短短江蘺綠(주로단단강리록) 물가에 갈대 싹 강에 궁궁이 싹 푸르른데
之子歸時沒馬蹄(지자귀시몰마제) 가신 임 돌아올 땐 말발굽이 묻히리
또 『조선해어화사』에 활동 지역과 이름을 모르는 기녀의 〈송별(送別)〉이란 작품이 실려 있는데, 이 시 역시 임과의 이별을 앞두고 이별의 서러운 마음을 표출하고 있다. 떠나야만 하는 임을 앞에 두고 비록 춤을 추지만 춤은 더디고, 임과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 찬 기운이 이불에 스며든다. 게다가 한밤중에 홀로 일어나 임의 버선을 새로 지으려니 바느질 소리에 부드러운 창자가 다 끊어진다고 하여 이별의 고통이 애끊는 고통과 같음을 토로하고 있다.
送別(송별)
一花飛落漢南城(일화비락한남성) 한 떨기 꽃 한남성에 떨어져
此去長安幾日程(차거장안기일정) 이대로 가면 장안까지 얼마나 걸리나
舞袖遲回春色晩(무수지회춘색만) 춤 소매 더디 돌고 봄빛 늦었는데
繡衾無奈曉寒生(수금무나효한생) 수놓은 이불 새벽 찬 기운 어쩔 수 없네
擡頭看月心相照(대두간월심상조) 머리 들어 달 보니 마음 서로 비추고
和成淚詩字不明(화성루시자불명) 화답하며 눈물로 쓴 시 글자 분명치 않네
起枕中宵新製襪(기침중소신제말) 한밤중에 일어나 버선 새로 지으니
軟腸斷盡紉絲聲(연장단진인사성) 바느질 소리에 부드러운 창자 다 끊어지네
위 시에서 이별의 한을 애끊는 고통에 견주고 있는데 비해 다음 평양 기녀인 난향(蘭香)은 〈동제(同題)〉에서 임과 이별을 하느니 차라리 사그라지는 등불과 같이 없어지고 싶다고 하여 별한의 강도를 한층 더 고조시키고 있다. 내일 아침이면 아무 일 없었던 듯 말에 올라 갈 길을 재촉하는 임의 모습을 보는 것이 죽음보다 더한 아픔으로 다가오기에 그는 차라리 저 깜박이는 등불과 같이 스러져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지독한 슬픔 속에 눈물로 임이 입을 수자리 옷을 마련하는 여인의 마음이 더욱 애처롭게 전해지는 작품이다.
『해동시선』에 소옥화(小玉花)의 〈송별(送別)〉 뒤에 실려 있으므로, 이 시의 제목 역시 〈송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同題(동제)
持子征衫下淚裁(지자정삼하루재) 그대의 수자리 옷 눈물 떨구며 마름질 하니
金刀隨手短長回(금도수수단장회) 금도가 손 따라 짧고 길게 돌아드네
此身寧與殘燈滅(차신령여잔등멸) 차라리 이 몸이 깜박이는 등불과 함께 스러질지언정
不見明朝上馬催(불견명조상마최) 내일 아침 서둘러 말에 오르는 모습 보지 못하겠네
양양(襄陽) 기녀 역시 〈송별(送別)〉에서 임과의 이별을 당하여 차라리 임과 함께 사랑을 나눈 개울가에서 넋을 잃고자 이별의 회포를 술에 부치고 있다. 아름다운 봄 경치도 끝없이 계속 머물게 할 수 없으니 꽃 덤불로 하여금 왕손을 원망케 하지는 못하리라고 하며 소혼단장(消魂斷腸)하는 이별의 아픔을 표출하고 있다. 『해동시선』에는 제목이 〈송무보궐(送武補闕)〉로 표기되어 있다.
送別(송별)
弄珠灘上欲消魂(농주탄상욕소혼) 농주탄 위에서 넋이 사그라지려 하는데
獨把離懷寄酒樽(독파이회기주준) 홀로 잔 들어 이별의 회포를 술동이에 부치네
無限煙花留不得(무한연화류부득) 무한한 봄 경치 머물게 할 수 없으니
忍敎芳草怨王孫(인교방초원왕손) 차마 방초로 왕손을 원망케 못하리
난향과 이름을 모르는 양양 기녀가 임을 보내는 슬픔을 죽음보다 더한 것에 비유하여 상심한 마음을 토로하고 있는데 반해 다음 이름을 모르는 의주(義州) 기녀는 〈별권판서상신(別權判書尙愼)〉에서 이별의 고통을 속으로 감내하며 홀로 슬픔을 삭이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남녀 간 애정관계에서 항상 약자의 위치에 놓이기 마련인 기녀의 애환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체념의 정서 속에 더 큰 아픔이 전해지는 작품이다.
다음은 『조선해어화사』에 실려 있는 것인데 『해동시선』에는 3구의 ‘강천(江天)’이 ‘소상(瀟湘)’으로 표기되어 있다. ‘강천(江天)’을 강 위 멀리 보이는 하늘로 볼 수도 있으나 다른 문헌에 ‘소상(瀟湘)’으로 대체된 것으로 보아 ‘강천’과 ‘소상’은 소상팔경(瀟湘八景)에 해당하는 강천모설(江天暮雪)과 소상야우(瀟湘夜雨)에서 따온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즉 자신이 있는 곳을 소상팔경의 아름다움에 빗대어 미화함으로써 이별의 부당함과 외로움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別權判書尙愼(별권판서상신)
去去平安去(거거평안거) 가세요 가세요 편안히 가세요
長長萬里多(장장만리다) 머나먼 만 리 길을
江天無月夜(강천무월야) 강천 달 없는 이 밤
孤叫鴈聲何(고규안성하) 외로이 우는 기러기 소리 어이하리오
이렇게 이별을 당하여 한탄과 체념의 정서 속에 주저앉는 시가 있는가하면 몇몇 작품은 이별 뒤 재회의 소망을 피력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거제 기녀인 소옥화(小玉花)는 〈별인(別人)〉에서 이별 뒤 임이 다시 돌아와 주기를 소망하고 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세모에 그는 임을 멀리 떠나보내야만 한다. 임을 멀리 떠나보내면서 그는 매년 봄이면 반복해서 지속적으로 푸르러오는 방초와 가고 오지 않는 인간사를 대비시켜 이별의 비애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왕유(王維)의 〈산중송별(山中送別)〉에 나오는 “봄풀은 해마다 푸르른데 / 왕손은 돌아올지 안 올지(春草年年綠 王孫歸不歸)”와 비슷한 시상으로 지금은 비록 어쩔 수 없이 임을 보내지만 자연이 순환하듯 임이 다시 돌아와 주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대동시선』에는 소옥화라는 이름 아래 “거제구천장 남촌여자(巨濟舊川場 南村女子)”라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해어화사』에는 이름이 ‘소옥(小玉)’으로 표기되어 있다.
別人(별인)
歲暮風寒又夕暉(세모풍한우석휘) 한 해 저무는 바람 찬 저녁에
送君千里淚沾衣(송군천리루첨의) 천리에 임 보내며 눈물로 옷을 적시네
春堤芳草年年綠(춘제방초년년록) 봄 둑 꽃다운 풀은 해마다 푸르리니
莫學王孫去不歸(막학왕손거불귀) 왕손은 가고 돌아오지 않음을 배우지 마시오
다음 나주 기녀인 옥섬(玉蟾)은 떠나는 임에게 곧 다시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시를 지어주었다. 이면항(李勉恒)이 금오랑(金吾郞)으로 명을 받들어 죄인을 압송하다 나주를 지나가게 되었다. 옥섬이 시를 지어 주었는데 면항이 전염병에 걸려 죽게 되자 사람들이 시의 동티라고 하였다고 한다. 기녀의 사랑은 미련 없이 일회적인 것으로 끝나야 한다. 떠나는 임에게 매달리거나 훗날의 기약을 요구하는 것은 세상의 비난과 조롱을 받을만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섬은 떠나는 임에게 다시 돌아와 달라는 시를 지어 주었다. 처음 보는 낯선 임이지만 첫눈에 반한 임이기에 남의 이목과 사회적 제약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임이 다시 돌아와 계속 사랑할 수 있기를 염원하고 있다. 체념하지 않고 사랑을 지속하려는 도전 속에 역시 비련이 싹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淸儀一見滌襟塵(청의일견척금진) 맑은 풍채 한 번 보고 옷깃의 먼지 닦아요
交契何論面目新(교계하론면목신) 사귐에 어찌 얼굴이 낯선 것을 논하겠어요
萬里滄波須早渡(만리창파수조도) 만리창파 부디 일찍 건너 오세요
錦城自有待歸人(금성자유대귀인) 금성에 돌아올 임 기다리는 사람 있어요
소옥화와 옥섬이 임과의 재회를 기원하되 임이 다시 돌아와 주기만을 당부하는 소극적 자세를 보인데 비해 성천 기녀인 연단(姸丹)은 〈별랑(別郞)〉에서 자신이 양대의 비가 되어 임의 옷자락을 적시고 싶다고 함으로써 재회를 위한 상당히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기녀라는 신분 상 임과의 영원한 사랑은 불가능하기에 이별은 잦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재회의 가능성 역시 극히 드물었기에 그는 자신이 먼저 임을 찾아가고 싶다고 하여 임과의 재회 의지를 더욱 강력하게 표명하고 있다.
別郞(별랑)
君垂送妾淚(군수송첩루) 임이 날 보내며 눈물 흘리고
妾亦淚含歸(첩역루함귀) 나 또한 눈물 머금고 돌아왔네
願作陽臺雨(원작양대우) 원하노니 내 양대의 비가 되어서
更灑郎君衣(갱쇄낭군의) 임의 옷자락에 다시 뿌리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