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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5월 15일 금요일 오후 3시경, 김구림 방거지 정찬승 등 세 명은 서울대 문리대 정문 앞에서 각자 기획하고 준비한 자신들의 해프닝을 시작했다. 김구림은 “1970년 5월 15일 오후 6시 40분 정각에 1번 봉투를 개복하시오”라 적힌 편지봉 투 201개를 준비한 뒤, 20개는 ‘국내의 저명한 평론가들’에게 발송하고 나머지 181개는 문리대 학생들에게 직접 배포했 다. 봉투 안에는 다시 세 개의 봉투가 들어 있었는데, 1번을 꺼내면 “이 가루를 20cc의 냉수에 타고 자기 이름을 3번 반 복하고 난 다음 가루를 탄 물 컵을 마시고 정신을 가다듬어 2번 봉투를 8시 50분 정각에 개봉하시오.”, 2번에는 “실버 텍스를 자기의 국부에 끼고 3번 봉투를 9시 정각에 개봉하시오.”, 3번에는 “여기 첨부된 종이의 구멍을 통해 심호흡을 4번하고 4초간 남산하늘 중심부를 향해서 보아주신 다음 4번 봉투를 9시 5분 정각에 개봉하시오.”라 적혀있다. 4번 봉투는 없고 새 봉투 하나가 있는데, 거기에는 “1970년 5월 15일 저녁 정각 9시에 목욕재계하고 냉수 한 컵에 이 약을 복용하되, 5분 뒤에 동쪽 방향을 향해 절하고 반대 방향에 서서 색종이 구멍을 통해 하늘을 보시오. 그리하면 이제까 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느끼게 될 것이요.”라 지시한다.
이 해프닝의 목적은 “미각을 중심으로 한 인간들의 정신 문제와 관념의 회통을 다뤄보았다는 것”인데, 겉도는 현실에 밀 려 이리저리 쏠리고 뒤흔들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의 ‘마음기둥’을 심고자 했던 것이 그의 본심이었을 터이다. 카바마 인은 인체에 무해한 가루일 뿐 어떠한 환각 작용도 발생시키지 않는다. 하늘을 보라,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느 끼게 될 것이라는 이 언명은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은유처럼 닿지 않는 하늘조차 바라보기 힘든 난장이들의 세계를 비유한다. 약보다 의사의 따듯한 말이 병을 낫게 하듯이 김구림의 지시어들은 ‘황당한 구라’가 아닌 ‘유쾌한 해프 닝’의 희망을 불어 넣기 위해 작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김차섭과 함께 기획한 [매스미디어의 유물] (1969)과 더불어 최초의 메일아트로 기록된다.
캔버스가 아닌 대지가 어떻게 미술이 될까
내가 경사진 둑에 빗금을 치고 있었다. 빗살무늬 토기 문양으로 사선을 그은 뒤 그는 면의 한쪽을 건너뛰며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위아래 경사면 폭 22m 길이 약 100m의 둑이 쥐불놀이에 그슬린 것처럼 활활 타 올랐다. 타지 않은 면과 타 오른 면이 삼각뿔을 형성하며 거대한 무늬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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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림(1936~ )
1958년 대구 공보관화랑에서 개인전을 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전통적인 회화작업에서 출발했으나 1969
년을 기점으로 그는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전위가 되었다. 그해 그는 “앵글 362”을 연출했고, 바디페인팅을 발표했
으며, 최초의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와 최초의 메일아트 [매스미디어의 유물]을 발표했다. 1970년에 결성한 제4
집단의 통령이었고 아방가르드협회 회원이었으며, 현재까지 쉬지 않고 실험적인 작업들을 보여주고 있다.
첫댓글 유익하게, 잘 읽었습니다 문성희 김유미 시인 수고 많으셔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항상 따듯한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