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5장 9절
화평하게 하는 자
지난 시간 우리는 마음의 청결에 대하여 살폈는데, 성화에 있어 외적인 행동만이 아니라 내적인 마음을 살피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고서는 결코 외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행위들이 깨끗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도가 이 땅에서 마음의 청결, 즉 그 마음이 점도 없고 흠도 없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있다면 이 땅에서는 결코 완전한 마음의 청결이란 경험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행위들은 결코 점도 없고 흠도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100% 순수한 선 자체를 내어놓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로 하여금 마음이 청결한 자라 말씀하시고 또한 마음의 청결을 위하여 돌아보도록 하시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죄에 머물 수 없는 것이고, 오히려 죄에 대하여 애통하면서 그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자가 성도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팔복 가운데 일곱 번째 내용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사실 이 화평이라는 말은 말 자체로서만 보면 분명 세상도 환영할 수 있는 그런 말입니다. 왜냐하면 크든 작든 사람들 안에는 죄로 말미암은 분쟁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가장 작은 단위로서 가정만 하더라도 오늘날 얼마나 많은 분쟁이 있는지 이혼율만 봐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부부만이 아니라 자녀들이 있으면 자녀들 역시 얼마나 많이 싸우는지 모릅니다. 가정만이 아니라 세계 역사를 보면 전쟁의 참혹함을 이루 말할 수 없고, 오늘날도 보면 여전히 무장 세력으로 인하여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특히 20세기에 들어 세계적으로 일어나 두 번의 전쟁은 그 참혹함에 있어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고, 그 결과 우리가 잘 아는 UN이라는 국제기구가 만들어졌을 정도이기 때문에 평화에 대한 관심은 이런 점에서 볼 때 세계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따라서 화평, 혹은 평화라는 이 말은 우리만이 아니라 세상도 환영할만한 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미 살펴본 긍휼이나 마음의 청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 때 그것을 싫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으며, 그런 자비함이 진실하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그것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말이 같고 단어가 같기 때문에 그 정신도 같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큰 착각입니다. 제가 지난번에 출처에 대한 말을 한 적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우리가 맺는 열매는 그 출처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지만 맺을 수 있는 열매들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긍휼을 베풀고, 또한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동기 또한 하나님께서 먼저 일하신 것을 근거로 합니다. 팔복 자체로서 보자면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긍휼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에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것이고, 또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보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마음이 청결할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지만, 화평하게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했을 때 성경은 먼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화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의 약속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화평을 나타내야 할 자, 그가 바로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근거로서 실제로 우리가 화평을 나타내고 있다면 그것 역시 그 출처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결과이지, 엄밀한 의미에서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전반적인 이해 속에서 화평에 대한 것을 좀 더 생각해 보자면, 일단 화평하게 하는 근거와 관련해서는 로마서 5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여기 화목(katallavssw)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만, 오늘 본문의 화평(eijrhnopoiov")이라는 말과는 헬라어 자체가 다른 단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상으로는 연결시켜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골로새서 1장 20절에서 화평과 화목을 병행하여 사용하는 구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eijrhnopoievw)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ajpokatallavssw)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따라서 왜 우리가 화평을 나타내야 하는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는 어떠한 관계였는가? 하나님과는 원수였습니다. 정확하게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원죄와 부패성이 하나님과 우리를 원수관계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즉 적대적인 관계요, 도저히 평화할 수 없는 그런 관계 가운데 있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에 의하면 전에는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골1:21) 지난주 말씀드렸던 것처럼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던(롬1:28) 것이 하나님과 화목하기 전, 하나님과 평화하기 전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뜻이 있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평화하게 하셨는데, 그 목적이 무엇이냐? 골로새서 1장 2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과 19절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자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 된 자로서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하는 자요, 나아가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은 자로서 사람들 앞에서 화목하게 하는 자, 오늘 본문으로 하자면 화평하게 하는 자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팔복에서 말하는 화평이 세상이 말하는 화평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아무리 화평, 평화를 외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평화를 전제하지 않는 평화를 외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하지 않았는데, 인간의 삶 가운데 화평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엄밀한 의미에서는 분명 없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목적이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위한 것이라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의 모든 틀은 거룩이라는 것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 거룩과 상관없는 화목, 거룩과 상관없는 화평, 거룩과 상관없는 평화란 성경이 말하는 내용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팔복의 순서가 긍휼과 마음의 청결 그리고 화평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경의 화평이 하나님과의 화평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한 화평의 틀이 거룩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팔복의 내용으로 말하자면 긍휼과 마음의 청결이 틀이 되지 않는 화평이란 참된 화평이라 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종종 거룩과 화평을 함께 말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야고보서 3장 1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그러면서 1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그러니까 화평이란 무엇이냐? 성결과 함께 나타나는 의의 열매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세계적인 평화 혹은 사회적인 평화, 좀 더 작은 단위로 가정의 평화와 같은 말들은 말 자체로는 분명 좋아보여도, 진정한 의미에서 실행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쉬운 예로 UN이 있다고 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평화란 거룩과 성결을 전제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말씀과 함께 이해하자면 인간의 마음이 근본적으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다시 말해 성령의 은밀한 역사로 말미암아 굳은 마음이 제거되고 부드러운 마음이 주어지지 않는 이상 결코 평화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오늘날 많은 가정들이 깨어지는가? 또 사회는 왜 이렇게 불안한가? 사람들은 교육이다, 환경이다 외부로부터 그 모든 이유를 찾으려고 합니다. 좀 나으면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하여 그 마음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 역시 성도들만이 맺을 수 있는 열매라는 것을 다시금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이사야 11장으로 가시면 화평, 평화가 성도들만이 맺을 수 있는 것임을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는데, 6절 이하 8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얼핏 보면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는다고 표현하니까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이사야 11장에 있는 이 말씀은 반드시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물론 지금 읽은 이 말씀과 동일한 내용이 이사야 65장에도 나옵니다. 비교를 위해 읽어드리면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65:25) 그리고 이사야 65장은 이 일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일임을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사65:17, cf.계21:1). 따라서 성경학자들 가운데서는 이사야 11장의 경우도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일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서 해석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이사야 11장 1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러니까 지금 이사야 1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관련하여 말씀하시면서 이리와 어린 양, 표범과 어린 염소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모습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에서 변화된 성도의 모습을 완성된 나라에 비춰서 설명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야가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백성에게 해나 횡포나 잔인한 짓을 하려는 성향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과거에는 “사자”나 “표범” 같았지만 이제는 양이나 “어린 양” 같이 되어 온갖 잔인하고 야만스러운 성격을 버리게 될 것이다. 그가 의도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표현방식을 통해서 과거에 야수 같던 자들이 온순하고 상냥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런 말씀이 그 성품이 완전히 변화되어 더 이상 성화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통치, 특별히 그 말씀으로 인한 통치가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그 말씀으로 인한 변화를 완성에 빗대어 말한다고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때문에 진정한 평화는 그리스도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지 않고서는 진정한 평화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인가? 이사야의 말씀으로 하자면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자,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자, 그래서 근본적으로 그 마음이 변화되고 성품이 변화된 자, 그래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 앞서 말한 대로 오직 성도만이 화평하게 할 수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 부분도 생각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4절 이하에 있는 말씀인데,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4-36)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자들,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다스림을 받는 자들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삶의 원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정신만 하더라도 만약 평화주의자 앞에서 이 땅에서 진정한 평화란 없다, 그리스도 밖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평화가 아닌, 불화를 일으키는 말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느냐? 다음 주 보게 되겠지만 핍박과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우리에게 명하는 것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에서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12:17)고 하면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12:18)고 말씀하시는데, 바로 이런 정신이 오늘 본문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화평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원론적인 것부터 말하자면 가장 먼저 하나님과 화평하지 않고는 이 화평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특히 죄는 하나님과 불화하게 하는 원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평하기 위해서는 죄를 멀리해야만 합니다. 도리어 죄와 반대인 의를 가까이 하고 거룩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화평 한다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통치를 하시는가? 그의 입의 말씀으로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을 떠난 화평은 진정한 화평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예로 구약에 보면 남유다 네 번째 왕인 여호사밧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역대하 17장에 있는 내용인데, “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으니 이는 그가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바알들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아버지의 하나님께 구하며 그의 계명을 행하고 이스라엘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라”(대하17:3-4) 그래서 어떤 일을 했느냐 하면 이방인의 예배양식을 폐지하고 우상들을 파괴했습니다. “그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어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도 유다에서 제거하였더라”(대하17:6)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는 방백들과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특별하게 조직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율법을 가르치도록 하기도 했습니다(대하17:7-9). 물론 이 모든 일의 유일한 원인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사밧이 다스리는 나라를 부강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그가 누구와 사귀었느냐 하면 북이스라엘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왕이라 할 수 있는 아합과 사귀었습니다. 역대하 18장 1절에 보면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고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인척 관계를 맺었더라”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그동안 주의 뜻만을 따르고자 했던 그런 마음이 나눠지고 말았습니다. 진리를 따라야 할 여호사밧이 진리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여호사밧은 선지자를 통하여 어떤 책망까지 듣게 되느냐? 역대하 19장 2절입니다.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이르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여러분, 우리나라도 지금은 남과 북이 나눠져 있지만 남북으로 갈라지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쩌면 여호사밧의 생각 가운데는 한 민족이라는 의식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아합과 교제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말씀과 상관없이, 말씀을 어겨가면서까지 평화를 유지해야 하는가? 거룩을 잃어버리면서까지 평화해도 좋은가?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6:14-16)
그러므로 화평의 열매와 관련해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반드시 말씀 안에서, 그리고 거룩이 보존되도록 하는 한에서 화평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말씀을 떠나게 만들고, 또한 거룩이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악으로 치닫게 되는 평화라면 그것은 선을 위장한 악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WCC 운동은 매우 주의해야 할 운동이요, 강하게 말하자면 사탄의 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름은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내걸고 있는 문구로서는 화합, 일치, 관용, 평화, 사랑이라는 것으로 연합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드러날 대로 드러난 것처럼 성경과 상관없는 집단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WCC는 예수 그리스도 밖의 타종교에도 하나님의 구원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요, 이미 이런 사상으로 말미암아 종교혼합주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WCC만이 아니라 오늘날 보면 어떤 한 지역에 있다는 이유로 교단과 상관없이 연합과 일치, 화평의 관계를 일삼는 일들도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것 역시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장로교와 감리교는 분명 다른 교리를 주장합니다. 같은 성경을 본다고 해서 동일한 교리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보면 같은 지역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는 이유로 장로교와 감리교가 손을 잡고, 또한 오순절 교단도 손을 잡고 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교제하고, 또한 서로의 강단을 내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옳은가? 저는 감히 말씀드리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진리와 상관없는 연합이요, 진리와 상관없는 화평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복음 안에서 하나를 외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복음은 어떠한 복음입니까?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그 복음의 내용일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단어가 같고, 언어가 같다고 해서 그 정신이 같은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말하는 믿음과 저들이 말하는 믿음이 같은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통해 알려진 것처럼 칼빈주의의 교리와 알미니안주의의 교리는 분명 다른 것입니다. 심지어 복음이라고 말할 때 예수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는가? 그 이상의 내용은 없는가? 더 근원적인 성격으로 말하는 바는 없는가? 여러분, 분명 성경은 더 높은 내용을 말합니다. 더 근원적인 성격을 말합니다. 신학적으로 이신칭의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정론까지 말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예정의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믿음을 말할지라도 인간론적인 믿음을 말하는 자들과 연합할 수 있고, 또한 화평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신학을 내려놓을 뿐만 아니라, 건전한 교단의 정체성을 내려놓게 됨으로 겉으로는 연합이다, 화평이다 말을 하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화평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실만한 화평인가?” 다시금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 화평을 위하여 우리가 말씀 안에서 살펴야 할 내용들은 무엇인가? 일단 팔복의 구조를 통해 생각해 보자면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서는 결코 화평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지만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자, 좀 더 간단히 말하면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자(고전15:10), 그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런데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겸손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고전4:7 참고) 무엇을 가지고 내세우겠습니까? 달리 말하면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겸손할 수밖에 없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과 반대인 교만은 언제나 다툼을 일으키기가 쉽습니다. 잠언 13장 10절에 보면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교만에서 나오는 것은 항상 다툼이요, 불화요, 싸움인 것입니다. 특히 잠연 13장은 교만에서 다툼이 일어난다고 하면서 그와 대조적인 말씀으로 권면을 듣는 자가 지혜가 있다고 하는데, 이런 면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겸손케 하고 또한 화평하게 하는 거룩의 방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팔복의 구조 속에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하자면 긍휼 혹은 자비를 베푸는 자는 화평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은 긍휼을 생각해 보십시오. 본래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였습니다. 결코 화평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엡2:4)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긍휼을 베풀고 자비를 베푸는데 다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번의 긍휼, 한번의 자비가 아니라 끝까지 긍휼을 베풀고 또한 자비를 베푸는데 다툼이 있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말씀도 기억해야 합니다. 잠언 12장 10절에 보면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의인의 긍휼은 그 미치는 범위가 어디까지냐 하면 단지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축의 생명까지도 돌보는 그런 긍휼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긍휼조차도 잔인하다고 말합니다. 매튜 헨리 주석을 보면 여기에 대하여 한 가지 예를 드는데, 빌라도가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눅23:16)고 말하였던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분명 무죄하기 때문에 그냥 놓아주어야 하지만, 백성들 때문에 때려서 놓아주겠다고 말하는 것, 이것이 악인의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인의 긍휼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긍휼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어떤 긍휼이었느냐 하면 자기 아들도 아끼지 아니하시고(롬8:32) 내어놓으신 긍휼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긍휼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긍휼은 언제나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긍휼입니다. 이런 긍휼 가운데 화평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이 숨겨져 있다면 어느 정도의 화평의 외형을 보일 수 있으나, 그러나 드러나기만 한다면 결코 그 화평은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화평은 지난주 살폈던 것처럼 외적인 긍휼만이 아니라 마음의 청결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숨겨진 어떤 의도가 없이 불쌍히 여겨 긍휼을 베푸는 것, 그저 저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긍휼을 베푸는 것, 이것이 화평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지만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시기심 혹은 질투, 비교의식과 같은 것은 결코 화평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골리앗이라는 거대한 장수를 물리친 일이 있습니다. 이후 다윗은 사울의 군대장관이 되고, 블레셋을 무찌르고 돌아올 때 여인들로부터 이런 환영을 받게 됩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 그때 사울에 대한 성경의 표현을 보면 불쾌하였다, 심히 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삼상18:8).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삼상18:9)
여러분, 사울이 다윗을 주목했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악한 의도를 가지고 본다는 의미입니다. 시기요, 질투의 마음으로 보게 되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비교의식도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느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다윗을 향한 사울의 마음 가운데 분노가 일어나게 되고, 또한 다윗을 죽이려고까지 하는 그런 모습으로까지 나타나게 됩니다. 다윗의 경우는 사울에 대하여 항상 선한 마음을 품었지만, 사울은 다윗을 향하여 시기와 질투 그리고 분노로 인하여 화평이 아닌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통해 증거 하는 모든 것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성경이 죄로 지적하는 모든 열매들은 다 우리로 하여금 불화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들(딤후3:2), 또한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들(딤후3:3), 나아가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 것들(딤후3:4)은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불화의 원인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안에서 맺을 수 있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다 죄이기 때문에(롬14:23) 우리는 믿음 안에서만 그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에(롬10:17) 우리의 모든 열매는 말씀에서 명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화평이라는 열매 또한 맺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화평 역시 이 지상에서는 완전히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평강의 왕으로서 오셨다는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사야 9장 6절에 의하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영존하시는 분, 바로 그분이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탄생하셨을 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는 찬송이 목자들에게 들려졌던 것입니다. 심지어 성경은 그의 죽음을 통하여 화목하게 되었다, 화평을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는데, 예를 들어 골로새서 1장 20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에베소서 2장 12절과 13절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리고 바로 이 일을 근거로 몸 된 교회에 대해 말할 때 하나됨과 자라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 이하를 보시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14-22)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 하는 자라 할 때 무엇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각 지체와의 화평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 개인으로 보자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먼저 화평한 자가 되는 것이고, 나아가 그런 지체들의 모임을 통해 하나됨이 나타나야 하고, 또한 그 안에서 자라남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자라나지 못한다면 그 관계는 결코 화평의 관계라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지상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로서 천상의 화평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씀하시는 것이 뭐냐 하면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바로 오늘 말씀인 것입니다. 에베소서에 있는 말씀처럼 더욱 하나가 되는 일에 힘써야 하고, 또한 하나가 되어 함께 자라나는 일에 선한 열심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같은 에베소서 4장에서는 이런 권면도 아끼지 않았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1-3)
그러나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하는 성도들과만 화평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도 할 수만 있다면 화평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8절 말씀을 언급했지만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는 말씀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5장 16절에 있는 것처럼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가진 바 그 복음을 저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받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 교회의 속성인 보편성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완성해 가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화평하게 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시는 바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인데, 서두에서도 잠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았기 때문에 화평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이유는 이미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고 있지만, 장차 그 사실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알려진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약속에 의해 더욱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단지 아들이 되었다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들다움이 우리에게 있는가를 이 땅에서 확인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서를 보십시오. 그렇게 많은 말씀을 하고 있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에게도 해당이 됩니다. 너희는 과연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녀다운 삶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마땅한 자리를 다시금 확인하시고, 평강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 된 교회라면 평강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 역시 성도와 성도 사이에서, 나아가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과 화목할 수 있도록 자신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