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비
오 덕 렬
어쩌다 재를 넘을 때는 한낮에도 뒤에서 다리를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뒤를 돌아볼 수도 없다. 초분(草墳)이 있는 산비탈에선 꾸무럭한* 날엔 도깨비가 논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재를 넘기 전에 도깨비가 산다는 도깨비새암도 지나야 했다. 새암* 가 고목, 버들가지는 도깨비가 당겨서 활[弓]이 되었다. 수심은 천야만야 아무도 모른다. 하늘같은 수면엔 몰*이 덮였다.
악동들은 메*를 감으면 도깨비가 두 다리 쑤욱 잡아당긴다는 말에 벌벌 떨었다. 손으로 두 눈을 가려도 손가락 새로 도깨비불만 번쩍거렸다. 봄비 내리는 해름참*이면 파르스름한 도깨비불이 날곤 했다. 하나인가 하면 둘로, 둘은 넷으로, 또 갈라지고 갈라져 순식간에 온 산이 도깨비불로 번졌다. 분산(墳山)에서 번쩍, 안산(案山)에서 번쩍, 재에서 번쩍번쩍, 도깨비불 세상이었다. 시공을 초월하는 것 같은 도깨비불….
도깨비새암 둘레의 걸창 말뚝엔 널장이 받쳐 있었다. 송장이 담겼던 널[柩]을 떠올린 아이들은 무섭기만 하였다. 도깨비가 두 눈을 부릅뜨고 두리번두리번 사방을 살피면서 외다리로 춤을 춘다는 생각을 했다. 봄비가 버들가지에 구슬방울로 맺히면 도깨비들은 불놀이 재주를 부리기 시작했다. ‘봄비와 도깨비불은 누가 이길까.’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두 정령이 두 손을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꿈에서 깨었다. 꿈이기에 다행이었다.
긴 봄날, 악동들의 불놀이도 시작되었다. “봄 불은 도깨비불, 봄 불은 여시*불!” 악동들은 노래를 부르며 학교 앞 들판으로 내달았다. 논둑에 불을 놓자 바람을 타고 도깨비불처럼 번졌다. 한 패는 불을 지르고, 다른 한 패는 불을 끄는 악동들의 하굣길 불놀이는 논둑에서 시작하여 장못재까지 이어졌다. 재에는 마른 띠풀이 많았다. 여기에 불을 놓으니 새빨간 불기둥이 솟아 도깨비불처럼 날았다. 겁이 났다. 눈썹을 태우며 생솔가지로 불길을 겨우 잡았다. 남은 불티는 연기를 따라 하늘로 오르고, 아지랑이는 고갯길에서 아롱아롱 피어났다. 도깨비불 같았다. 수극화(水剋火)라 하여, 결국에는 불은 물을 이기지 못한다는 할아버지 말씀이 떠올랐다.
밤새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자 개고, 또 며칠이 지났다. 산과 들에는 산뜻한 새싹들이 돋아났다. 봄날 악동들의 간식거리 삐비*도 새싹들과 함께 돋았다. 불을 놓았던 자리에서 새뜻하고 통통하게 솟아난 삐비들이 더 많았다, 악동들을 부르는 듯. 장못재 언덕의 띠밭도 그랬다. 나는 하굣길에 삐비를 뽑아 주머니가 빵빵하게 담았다. 봄비의 정령들이 도깨비불과 겨누다 지쳐서 땅속에 숨었다가 삐비로 돋아났다고 생각했다.
* 꾸럭하다 ‘끄무레하다’의 방언(전라).
* 새암 ‘샘’의 방언(전라).
* 몰 ‘모자반’의 방언(전라).
* 메 ‘목욕’의 방언(전라).
* 해름참 ‘해거름’의 방언(전라).
* 여시 ‘여우’의 방언(강원, 경남, 전라, 제주).
* 삐비 ‘삘기(띠의 애순)’의 방언(전라).
첫댓글 무섭던 도깨비불이 삐삐가 되었고요?
그리고 물이 불을 이겼다고요.^^^
글의 시점이 아이로 되어 있어서 "도깨비불이 비를 맞고 삐비가 되었구나 생각했다." 를 더 잘 살려주는 것 같습니다.
처음 듣는 방언들이 많네요.
방언들이 중간중간 별사탕처럼 튀어나와주어 문장들이 아름답습니다.
방언을 공부하게됩니다.
선명한 문장에 토속어가 켜켜이 직조되어 한층 감칠맛 나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