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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여호수아 8:30-8:35
제 목 :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30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31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
32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33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34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35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1. 한국이 싫어서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인 1999년 6월 30일 참으로 안타까운 화재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수원에서 가까운 화성시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이라는 곳에서 화재가 일어났었습니다. 당시 5살에서 6살 난 유치원생들 열아홉 명과 인솔 교사 4명 등, 모두 스물 세 명이 목숨을 잃은 아주 참혹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큰 아들이 당시 다섯 살이었으니까 그 사고에서 살아난 아이들은 대학생이 되어있을 나이입니다. 그런데 그 어린 나이에 그 끔찍한 경험을 한 그 아이들이 과연 온전하게 성장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부디 아픈 기억 모두 잊고 잘 자라주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화재 사건 이후 얼마 안 있다가 또 하나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아이를 잃은 한 가족이 대한민국을 버리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정부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습니다. 정확한 원인을 밝히기보다는, 납득할만한 사고의 수습보다는, 졸지에 사랑하는 자녀를 잃은 유가족들의 한을 풀어주기 보다는 오로지 책임회피와 사건 축소로 일관하는 정부 당국자들의 모습에 배신감만을 느끼고 한 가족이 조국을 떠났던 것입니다.
이 나라에 대해 모든 정나미가 다 떨어졌다고 조국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가슴에 묻은 그 아빠, 엄마의 가슴에 또 다시 대못을 박은 이 나라를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조국을 떠났습니다. 더 이상 이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가기가 싫다고 절규하면서 화마로 죽어간 어린 생명을 가슴 한 구석에 묻은 채 한 아빠, 한 엄마가 타국 행 비행기에 쓸쓸히 몸을 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조국을 떠나간 어머니는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에 메달까지 안겨주었던 국가대표 운동선수였습니다.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조국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피땀을 흘려가며 정말로 열심히 운동했던 국가대표 필드하키 선수였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모든 메달과 국가로부터 받은 모든 상장, 모든 훈장을 반납하고, 심지어 연금까지 다 포기하고 조국을 뒤로 한 것입니다.
누가 이 어머니를 비난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느냐고 누가 이 어머니를 향해 큰 소리를 낼 수 있을까요? 과연 조국까지 등 질 필요가 무엇이냐고, 그렇게 해서 나아질 게 무엇이냐고 누가 그 어머니를 향해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그 어머니를 말릴 수 없었습니다. 저 역시 그 어머니의 심정과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고, 저 역시 당시 그분의 입장이었다면, 그분의 상황이었다면 충분히 그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예. 그분은 자신의 조국, 대한민국이 싫어져서,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16년이 흘렀습니다. 16년이 흐른 2015년 올해 5월에 ‘한국이 싫어서’라는 소설이 나와서 많은 사람들 사이에 읽히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인터넷을 통해 책에 관한 소개만 접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책 제목이 ‘한국이 싫어서’입니다. 얼핏 책 제목만 보면 무엇인가 불순한 의도가 깔려있고, 무엇인가 선동적이고, 무엇인가 도발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런 책이라기보다는 지금 우리 한국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소개를 드리자면 이 소설은 20대 후반의 직장 여성이 회사를 그만두고 호주로 이민 간 사정을 대화 형식으로 들려주는 소설입니다. 학벌, 재력, 외모를 비롯해 자아실현에 대한 의지, 출세에 대한 희망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서 평균 이하의 수준으로 살아가면서, 미래에 대한 비전이라고는 도저히 꿈꿀 수 없는 주인공이 이민이라는 모험을 통해서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 가는 과정을 담은 내용입니다. 소설 속 내용 몇 구절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무턱대고 욕하진 말아줘. 내가 태어난 나라라도 싫어할 수는 있는 거잖아.’ ‘나더러 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하던데, 조국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거든. 솔직히 나라는 존재에 무관심 했잖아. 나라가 나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지켜줬다고 하는데 나도 법 지키고, 교육받고, 세금 내고. 할 건 다 했어.’
‘높은데서 떨어지는 사람은 낙하산 하나가 안 펴지면 예비 낙하산을 펴면 되지만 낮은데서 떨어지는 사람한테는 그럴 시간도 없어. 낙하산 하나가 안 펴지면 그걸로 끝이야. 그러니까 낮은데서 사는 사람은 더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조심해야 돼. 낮은데서 추락하는 게 더 위험해.’ ‘애국가 가사 알지? 거기서 뭐라고 해? 하느님이 보우하는 건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야. 만세를 누리는 것도 내가 아니라 대한민국이고. 나는 그 나라를 길이 보전하기 위해 있는 사람일 뿐이야.’
‘몇 년 전에 처음 호주로 갈 때에는 그 이유가 “한국이 싫어서”였는데, 이제는 아니야. 이제 내가 호주로 가는 건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야. 아직 행복해지는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호주에서 더 쉽게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어.’ 여러분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에 대해서, 또 방금 읽어드린 몇몇 구절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공감을 하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 이 소설이 그렇게 많은 관심을 받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소재가 독특한 것도 아닙니다. 문체가 화려한 것도 아닙니다.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도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큰 감동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내용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처해있는 상황들로 인해 이 소설에 공감이 가는 부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우리나라를 큰 슬픔에 빠뜨렸던 세월호 사건이 있었습니다. 작년 연말에는 직장인들의 연말정산 사건이 있었고, 올해에는 메르스 사태로 우리나라가 큰 홍역을 앓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가가 보여준 것이 무엇입니까? 과연 ‘이 국가가 국민을 생각하는 국가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이 국가가 국민을 위한 국가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이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고 책임질 의사와 능력이 있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나라는 상위층 몇 퍼센트만을 위한 나라가 아니냐?’라는 것이었습니다. 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꼈습니다.
요즘 삼포세대(三抛世代)란 말이 있습니다.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한 20대에서 30대에 이르는 세대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많은 청년들이 치솟는 물가와 등록금과 취업난과 집값 등 경제적, 사회적 압박으로 인해 자기 자신조차도 건사하기 힘 든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연애, 결혼, 출산이 가당키나 한 일이냐는 것입니다. 연애, 사치일 뿐이고, 결혼, 꿈일 뿐이고, 출산, 태어날 자녀에게 죄 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삼포세대가 생기는 것, 어쩌면 너무나 당연합니다.
사실 일반 국민이 국가에 대해 거는 기대는 아주 소박합니다. 국가가 나를 부자로 만들어 줄 거라는 것, 국가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거라는 것, 국가가 나의 삶을 책임져 줄 거라는 것,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게 아닙니다. ‘아, 국가가 나를 잊지 않고 있구나. 아, 내가 국가로부터 보호는 받고 있구나. 아, 내가 그저 국가를 위한 소모품만은 아니구나. 아, 내가 세금을 낸 만큼 국가가 나를 위해 해주는 게 있구나.’ 예. 이것으로 족합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국가가 나를 버리지 않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 정당하게 대우해 주고 있고 있구나.’ 이런 최소한의 것만 국가가 해주어도 한국이 싫어서, 조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나는 사람은 사라질 것입니다.
2. 교회가 싫어서
그런데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습니다.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교회가 싫어서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리가 살아 숨 쉬고 있고, 이 땅의 유일한 빛이며 소금이어야 할 교회를 사람들이 떠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악 된 세상의 유일한 소망이고, 유일한 희망이어야 할 교회를 사람들이 떠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기독교 인구가 천만 명을 넘어섰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기독교 인구가 현저히 감소 추세에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주일 날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의 수가 사오백만 명을 넘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은 있습니다. 즉 20여년 사이 기독교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고작 국민의 10% 정도만이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많던 사람들 다 어디로 갔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죄로부터 구원을 받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물론 그 많은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떠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싫어서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대하고 하나님께 소망할 게 없어서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와 자비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만 나오지 않을 뿐이지 나름대로 하나님을 향한 견고한 신앙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많이 있습니다.
예.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 교회를 떠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왜 교회를 떠났습니까?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국가에 대해 최소한의 것을 바라고 있듯이 교회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기대라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최소한의 기대와 최소한의 소망을 교회가 그리고 목회자가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 최소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안식을 얻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이란 존재를 바르게 알고, 그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면 저절로 마음의 위로와 자유와 평안과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성도 스스로 깨달아 갈 수 있도록 하나님을 가르치고 선포하는 것, 그게 교회가 해야 할 최소한이자 최대한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어떻게 했습니까? 잘 하면 복주고 못 하면 벌주는 하나님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행한 대로 갚는 하나님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알아서 잘 하라고 협박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종교행위가 강조됩니다. 기도가 강조되고, 섬김이 강조되고, 헌금이 강조되고, 헌신이 강조됩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오로지 행위로 일관된 그릇된 종교생활만이 강조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열심히 했습니다. 복을 받기 위해 정말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벌을 받지 않기 위해 지극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겼고, 교회를 섬겼고, 목회자를 섬겼습니다. 그래서 조금 나아졌습니까? 아니요. 나아지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좀 더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도 나아지는 게 없습니다. 가만히 돌이켜보니 복을 받은 게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에 나가지 않는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잘못된 종교행위로 사람들이 실망하고, 낙담하고, 지쳐가기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성장합니다. 목회자는 부자가 되어 갑니다. 우리 아들과 딸들은 여기저기서 대출받아 겨우겨우 대학 졸업시켰는데, 목회자 아들과 딸들은 전부 유학 가 있습니다. 그리고 유학에서 돌아와 그 교회를 그대로 물려받습니다. 어느새 교회가 대물림하는 사유재산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때 가서야 성도는 깨닫는 것입니다. ‘아, 내가 이용만 당했구나. 아, 내가 바보짓만 했구나. 아, 내가 저들의 놀음에 놀아났구나.’ 당연히 교회로 향하던 발걸음을 서서히 끊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하나님을 몰랐고, 목회자도 하나님을 몰랐고, 성도도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교회도 성경을 몰랐고, 목회자도 성경을 몰랐고, 성도도 성경을 몰랐습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 성경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하니까 교회로부터 제공되어야 할 최소한의 것, 즉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의 평안, 하나님의 자유, 하나님의 안식을 깨닫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타종교적 방식의 종교행위에 의존하면서 그릇된 신앙생활을 기독교가 해왔던 것입니다.
3. 기독교의 제사 의미
그런데 이런 그릇된 종교행위가 오늘날 대한민국 교회만의 일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 역사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원래 기독교는 종교행위를 필요로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먼저 존재하셨고, 사람을 위해 먼저 일해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필요를 먼저 아시고, 그 필요를 먼저 채워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필요와 목적을 채우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행위는 원천적으로 기독교에는 해당될 수 없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죄인이 되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 종교행위는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 바로 죄인 된 사람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아니, 레위기에 보면 여러 가지 제사 규정이 있잖아요? 제사라는 게 다 종교행위이고, 그 제사 규정 다 하나님께서 주셨으니까 종교행위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 게 아니라는 주장은 말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이렇게 질문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예. 맞습니다. 그 제사 규정 다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는 하나님을 위한 제사가 아니라 바로 사람을 위한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위한 제사가 아니라 바로 사람을 살리기 위한 제사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죄를 저질렀습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하루도 마음 편히 살아가지 못합니다. 밤만 되면 환상에 시달려서 뜬 눈으로 밤을 보낼 때가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어떻게 하셔야 하겠습니까?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우선 그 사람을 살려놓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게 바로 제사입니다. 제사를 드려서 그가 죄 사함을 받도록 인도하시고, 이제부터는 그가 다시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원래 제사라는 게 필요한 것이 아니지만 그런 제사라도 드려서 사람이 마음 편해 질 수 있다면, 다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라고 하는 것, 그게 바로 레위기에서 말하는 제사, 성경에서 말하는 제사입니다. 예. 기독교의 제사는 하나님을 위한 종교 행위적 의미의 제사가 아니라 바로 사람을 살리는 사람을 위한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내용이 [여호수아 8:30],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여러분은 이 구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호수아가 신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무엇인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오늘 본문은 많은 학자들 사이에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본문입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의 첫 구절 ‘그 때에’ 때문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오늘 여호수아가 행한 제사 의식이 가나안 정복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된 때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 본문을 시간적 순서를 뛰어 넘은 삽입 구절 정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생각하는 이유는 가나안 정복 전쟁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갑작스럽게 드려지는 제사가 전후 상황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이로부터 20마일 이상 떨어진 세겜 땅 에발 산에서 당시 이러한 의식을 순조롭게 진행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란 가정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즉 여리고 성뿐만 아니라, 아이 성에서 여호수아는 무엇보다 백성의 성결과 하나님의 규례 준수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고, 그래서 여호수아가 아이 성을 정복한 후 그곳으로부터 이틀거리 정도에 있는 에발 산까지 곧장 진격해서 그곳에서 제사를 드렸다는 주장입니다. 그렇게 해서 남아 있는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보다 수월하게 치를 수 있을 것이라고 여호수아가 생각했다는 주장입니다.
어느 편의 주장이 옳은지는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논쟁에 휩싸이는 것 보다는 여호수아가 왜 제사를 드렸고, 과연 그 제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였느냐는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접근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고,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구약에 나타난 제사 규정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나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제사의 종류가 워낙 많아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생각보다 간단할 수도 있습니다. 우선 제사의 목적에 따라 제사를 나누면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속죄제는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사함 받기 위해드리는 제사이고, 속건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은 죄를 사함 받는 제사이고, 화목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 화목제에는 감사제, 낙헌제, 서원제, 자원제 등이 있습니다.
또 제사에 드려지는 제물에 따라서 제사를 나눌 수 있는데 그 경우가 번제, 소제, 전제입니다. 번제는 소, 양, 염소, 비둘기 등을 태워 올리는 제사이고, 소제는 밀가루와 기름, 유향을 불태우고 떡을 구워 바치는 제사이고, 전제는 포도주 4분의 1 힌을 부어드리는 제사입니다. 또 제물을 드리는 방법에 따라 제사를 나눌 수 있는데 제물을 태워서 드리는 화제, 제물을 높이 올렸다가 내리는 방식으로 드리는 거제, 제물을 흔들어 드리는 요제로 구분합니다. 예를 들어 대제사장이 자신의 성결을 위해서 흠 없는 암소를 태워서 제사를 드렸다면 그 제사는 속죄제인 동시에, 번제인 동시에, 화제가 되는 것입니다.
4. 여호수아의 종교행위
그런데 오늘 여호수아가 드린 제사는 화목제인 동시에 번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소, 양, 염소, 비둘기 등을 태워 올리는 제사를 드렸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이 성을 넘겨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리기 위해 제사를 드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라고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다 여기에서 오해를 합니다. ‘여호와를 위하여’라고 기록하고 있으니까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참으로 잘 아는 사람이었다, 여호수아는 참으로 신실한 사람이었다, 여호수아는 참으로 하나님을 잘 섬겼다, 여호수아는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여호수아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즐겨 받으셨을 것이다’라고 쉽게 생각을 해버립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도 여호수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를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드린 제사는 화목제인 동시에 번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제물을 태워 올리는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을 온전히 알고 있었다면, 하나님의 원리를 온전히 깨닫고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를 드리고 싶었다면 화목제에 앞서 드려야 하는 제사가 있습니다. 그 제사가 무엇입니까? 그 제사는 바로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사함 받기 위해 드리는 속죄제와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은 죄를 사함 받기 위해 드리는 속건제입니다.
지나간 설교를 잠깐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교만에 빠져서 아이 성 공격에 나섰던 적이 있었습니다. 여리고 성이 쉽게 무너지니까 아이 성쯤이야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전투에 나섰던 것입니다. 그때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은 아이 성의 반격에 무참히 패배했습니다. 삼십육 명이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화목제에 앞서 먼저 속죄제를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제 멋대로 행동한 자신들의 잘못을 먼저 인정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속죄제를 먼저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화목제에 앞서 먼저 속건제도 드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아간과 그의 가족들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회개하고 앞으로 나선 아간과 그의 가족들을 일벌백계 삼아 죽음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화목제에 앞서 먼저 속건제도 드려야 했습니다. 아간과 그의 가족들을 억울하게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신들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속건제를 먼저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속죄제 대신에 속건제 대신에 화목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왜 여호수아는 속죄제를 그리고 속건제를 드리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속죄제를 드린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무엇인가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속건제를 드린다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인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도 싫었고, 자신의 잘못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제와 속건제를 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대신에 그가 선택한 제사는 화목제였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드려지는 제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은혜가 임했을 때 감사의 표시로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호수아가 화목제를 드립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드리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돕고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까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인도, 하나님의 보호,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있는 사람이니 자신을 함부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예. 지금 여호수아는 정치적 쇼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종교행위를 빙자한 정치적 쇼를 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여호수아의 제사를 즐겨 받으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여호수아야, 지금 너 뭐하는 거냐? 네가 지금 정치 쇼를 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모르는 줄 아느냐? 네가 지금 쓸모없는 종교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모르는 줄 아느냐?’라고 꾸짖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록 여호수아가 그릇된 종교행위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호수아도 인격이 있고, 하나님은 그 인격을 존중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방식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성경이 얼마나 고상한 책인지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여호수아의 인격을 절대로 해치지 않으면서 아주 우회적으로 여호수아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시면서 여러분은 아주 재미있는 표현을 발견하셨어야 합니다. 그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지만 정작 하나님은 등장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8:31],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여호수아 8:32],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여호수아 8:33],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여호수아 8:35],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예. 하나님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는 오직 모세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딴청을 부리며 여호수아의 그릇된 종교행위를 외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의 방식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화목제를 드리지만 그 제사는 정작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가 아니라 단지 모세의 명령만을 충실히 따르는 종교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그 이유는 여호수아에게 모욕을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여호수아가 잘못을 하고 있더라도 그의 인격을 소중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배려를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5.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여호수아의 이 행위가 단순한 정치적 쇼라는 것, 그릇된 종교행위라는 것, 여호수아가 온전히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한 번 더 보여주는 게 [여호수아 8:34] 말씀입니다.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입니다.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있는 그대로 낭독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이 담겨져 있는 율법을 온전히 이해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 참 많이 있습니다. ‘나는 성경을 벌써 몇 십 독 했어. 나는 성경 필사를 벌써 몇 십 번이나 했어. 나는 성경을 항상 암송하며 다녀.’ 여러분 그런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몇 번을 읽었고, 몇 번을 필사했고, 성경 몇 구절을 외우고 있다는 것, 그런 것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자랑거리도 아닙니다. 얼마나 성경을 이해하고 있고, 얼마나 성경대로 살아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호수아가 인식하는 율법은 어떤 율법입니까? [여호수아 8:34],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예. 여호수아가 인식하는 율법은 축복의 율법이고, 저주의 율법입니다. 여러분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여러분 율법에 저주가 있습니까? 율법에는 저주가 없습니다. 율법은 사람이 온전히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원리만이 들어있을 뿐입니다.
물론 저주와 징계를 의미하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저주와 징계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저주와 징계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죄입니다. 사람이 온전히 살아갈 수 없도록 사람을 시험하고 사람을 미혹에 빠뜨리는 교활한 죄, 악랄한 죄, 집요한 죄입니다. 따라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율법에는 오로지 축복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축복으로만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율법을 축복의 율법과 저주의 율법으로 인식하고 있고, 그 율법을 있는 그대로 낭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죄적 원리에 사로잡혀 있는 여호수아를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 전 율법은 축복으로만 가득 차 있고 저주는 없다고 말씀드렸는데 그것만 확인하고 오늘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여호수아 8:33]에 보면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내용은 신명기에서 유래된 내용입니다. [신명기 27: 11-13], ‘모세가 그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여섯 지파는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이스라엘 나머지 여섯 지파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심 산에 선 여섯 지파는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입니다. 그런데 에발 산에 선 여섯 지파는 저주하기 위하여 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주의 대상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럼 이 저주의 대상은 과연 누구일까요? 그 저주의 대상이 [신명기 27:14-26]에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다 같이 한목소리로 합독해 보겠습니다.
14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15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말하되 아멘 할지니라
16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7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8 맹인에게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19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0 그의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하는 자는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1 짐승과 교합하는 모든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2 그의 자매 곧 그의 아버지의 딸이나 어머니의 딸과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3 장모와 동침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4 그의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5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26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많은 사람들이 어떤 잘못을 범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을 범하는 원인, 그 근본 원인은 무엇입니까? 바로 죄입니다. 예.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은 바로 죄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어느 누구 하나 다치지 않게 하시고, 예수님 스스로 세상 모든 죄를 떠안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어내고자 종교행위를 일삼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즉 죄의 문제가 예수님으로 인해 해결되었다는 것이고, 성경은 우리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깨달아 이제는 자유하게, 이제는 평안하게, 이제는 행복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시는 우리 다누림 성도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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