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리웃톡]한국계 할리우드 배우 오순택, 향년 85세를 일기로 별세](https://search4.kakaocdn.net/argon/0x200_85_hr/9kXHvhxgoqt)
<타일랜드 푸켓의 제임스 본드 섬!>
오순택! 한국 최초 헐리우드 진출 배우!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서 로저무어와 공연한 한국 배우. 그는 나의 광주고등학교 대선배이시다. 오순택 선배의 여동생은 해남 윤씨가의 전 대법원장 '윤 관' 형님의 형수님이기도 하다.
‘할리우드 동양인 배우 1호’의 시작은 단순했다.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 정외과에 입학한 그는 학교 대신 극장으로 등교하는 ‘영화광’이었다. 일본에서 들여온 잡지 ‘영화청년’을 보면서 보고싶은 영화가 개봉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장 콕토, 장 뤼크 고다르 등 유럽영화 감독들의 영화는 물론 개봉영화는 모조리 봤다.
1959년 졸업과 함께 미국으로 영화공부를 하러 가겠다는 그를 환영할 집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화 대신 국제사법을 공부하겠다고 약속하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 외교담당 비서관이었던 형 길영씨의 도움으로 미국행 팬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UCLA에서 영화전공을 하던 그는 배우를 해보라는 지도교수의 조언을 받아들여 뉴욕으로 향했다. 당시 폴 뉴먼, 그레고리 펙, 스티브 매퀸 등을 배출한 배우학교 ‘네이버훗 플레이 하우스’를 가기 위해서였다.
“버스를 타고 2박3일을 간 끝에 뉴욕에 내렸죠. 학교는 아직 학기가 시작되지 않았고 잘 데는 없고해서 난감했어요. 학교에 다니면서 식당종업원, 바텐터, 주차요원 등 안해본 일이 없어요.” 그는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너무 힘들어 학교를 포기하려 했는데 학교로부터 “10년 만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배우”라는 찬사와 함께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의를 받았다.
65년 다시 LA로 돌아와 UCLA 대학원에서 극작을 전공하고 있을 때 기회가 왔다. 브로드웨이에서 호평을 받았던 ‘라쇼몽’의 LA공연 무대에 섰다. 공연이 끝난 뒤 당시 ‘LA 타임스’에서는 ‘디스팅귀시드 액터(distinguished Actor)가 등장했다’고 호평했다. 그 덕분에 배우조합에 등록됐으며 많은 TV 드라마와 영화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배우는 실력도 필요하지만 운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돌이켜보면 저는 참 운이 좋았어요. 고비마다 저를 후원하는 은인들을 만났죠.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백인, 블론드(금발), 블루아이(파란 눈동자)가 필수요소인데 저는 아무것도 갖지 않고 살아 남았거든요.” 와이넌트 CBS 부사장이나 ‘에덴의 동쪽’ 제작자인 바니 스워제네거 등은 험한 ‘배우의 길’의 여정 속에서 조건 없이 도와준 은인들이었다. 모던댄스, 발레, 팬싱, 태권도, 유도, 쿵푸 등의 실력을 갖춘 만능배우였던 그는 순풍에 돛단듯이 스크린과 무대를 누볐다.
“자칫 연기를 그만둬야 할 위기도 있었어요. 70년 초인가. 당시에 젊은이들의 선망의 대상이던 스포츠카 머스텡을 샀어요. LA의 선셋로에서 포르쉐와 맞붙었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죠.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져서 11번에 걸친 대수술을 했죠.” 동양여인이든 서양여인이든 누구든 그를 한번 보면 수려한 용모에 반해 구애를 해오던 시절, 얼굴이 생명인 배우로서 생명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를 다시 일으켜준 것이 고향 목포였다. 요양을 하면서 다시 원기를 찾은 그는 할리우드에 재입성했다. 그때부터 조국을 가슴에 새기고 미주동포들을 위해 극단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77년 ‘코리안 어메리칸 씨어터 앙상블’을 만들어 영어와 한국말을 뒤섞은 연극을 만들어 부자지간에 손잡고 보러올 수 있게 했다. 끝내 ‘Soon-Tek Oh’를 고집하고, 한국인을 비하한 영화 ‘폴링 다운’의 출연제의를 거부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사실 영화공부를 하고 곧바로 귀국하려 했어요. 그런데 계속해서 일이 발목을 잡았죠. 또 어느 순간부턴가는 할리우드에서는 유명해도 한국에 오면 무명배우가 돼버린 거죠. 만약 한창 시절에 매니저를 거치지 않고 저에게 직접 출연제의를 해왔다면 언제든지 올 준비가 돼 있었는데….” 2001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초청으로 내한한 그는 요즘 학생을 가르치는 재미에 푹 빠졌다. 요즘엔 서울예대에서 연기실기 등을 가르친다. LA 버뱅크에 집이 있지만 아내와 함께 한국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더 많다.
“젊은 친구들 중에서 할리우드를 주름잡는 배우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먼저 연기를 했던 사람으로서 할 일은 가능성을 가르치고, 재능을 발견해주는 일이라 생각해요. 젊은 친구들은 신체조건이나 역량에서 조금도 손색이 없죠.” 평생 무대 위에서 산 사람이 갈구해왔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연기자와 관객이 만나 불꽃이 튀고 인생이 바뀌는 순간을 경험하기 위해서 무대에 선다”고 말한다. 연기자는 연기자대로 관객은 관객대로 단 한순간의 경험을 위해 끊임없이 무대에 서고 무대를 찾는거라 했다.
‘로버트 데 니로나 알 파치노는 되지 못했지만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배우였다’고 말하는 오순택 선배. 칠순을 넘어 무대 위에서 대사를 외우는 그에게서 여전히 청년같은 열정이 느껴진다. 그는 2018년 4월 별세하였다.
첫댓글 오순택 배우는 윤 관 (전 대법원장)형님과 광주고등학교 동기로 친구사이였다. 해남 출신, 목포 출신이 자연스럽게 의기투합,교감이 이루어져 친구사이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오순택 배우가 누이를 관이 형님께 소개하여 결혼이 이루어졌다. 관이 형님이 고등고시에 합격하고 얼마 후 서울에서 결혼식을 가졌다.
이 날 축의금을 나의 삼촌 윤재칠(작고) 님께서 맡으셨다. 내가 광주 수창초등학교 6학년 때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