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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말살 통치 | 배경 | * 상품시장의 포화(가득 참) 상태 → 다른 식민지 없음 → 노동자 해고와 실업(일자리를 잃음)으로 소비 감소 → 뉴욕 증시 폭락을 계기로, 세계경제 대공황(혼란상태) 발생(1929), 경제 악화 → 미국은 뉴딜정책으로, 러시아는 자본주의 폐기(공산주의)로, 일본과 독일은 군국화(군사력에 의해 국가체제 유지)로 문제 해결 시도함 → 일본은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을 일으켜 상품시장을 확대하려고 함. * 경제 대공황 타개책(해결책)으로 군국주의 등장 * 군국주의 : 전쟁(군사력)을 통한, 군수산업(전쟁 물자 생산)을 육성하고, 식민지 수탈(약탈)로써, 일본은 경제적 위기(대공황)를 극복하고자 함 → 식민지 확대(상품시장 확장) 전쟁에 한국인을 동원할 필요성이 커짐 |
목적 | * 한국인의 민족성(민족정신)을, 말살(抹殺. 없앰. 삭제)하여 일본인화(일본인의 명령에 순종케)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식민지 확대(상품시장 확장)에 효율적으로 동원하려고(잘 부려 먹음) → 인적 · 물적 자원의 효과적 약탈이 목적. → 우리 민족을 일본 국민으로 동화(同化)시켜 노예처럼 부리며 그들의 야욕을 달성하려 함. → 우리의 민족성과 민족 문화를 말살하여 일제의 영원한 노예로 만들기 위한 정책이다. | |
내용 | * 내선일체(內鮮一體) : 내지인(일본인)과 선인(조선인)은 한 몸이다. *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 한국과 일본의 조상이 같으므로 한 민족이다. *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 조선인은 황국(일본 = 일왕)의 충성스런 신하와 백성이 되어야 한다. * 우리말 사용금지, 우리역사 교육금지 : 일본어(일본어가 국어가 됨) 사용 강요. * 황국신민 서사(誓詞. 맹세하는) 암송 강요 * 궁성 요배(遙拜) 강요 : 일본의 국왕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는 의식이다. ‘궁성’이란, 일본 국왕이 사는 곳을 말한다. ‘요배’는 멀리 바라보고 하는 절을 말한다. 조선은 정오(낮 12시)가 되면 일본국왕이 사는 도쿄를 향해 머리를 깊이 숙이고 절을 해야 했다. * 신사 참배(神社參拜) 강요 : 일본에서 황실의 조상이나 또는 국가에 공이 큰 사람을 신으로서 모신 사당인, 신사에 절을 하도록 우리 민족에 강요함 → 신사참배 거부 운동 전개 * 창씨개명(創氏改名) 강요 : 일제는 1939년 우리 겨레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없애려고, 모든 한국인에게 고유의 성과 이름을 버리고 일본식 성(姓)과 이름을 사용하도록 강요하였다. *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변경함 : 일본 국민(일본 왕의 신민이 되는데 필요한 학생을 양성하는 학교)을 만드는 학교. 1996년 초등학교로 고침. *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한글신문과 한글잡지를 폐간함 |
병참 기지화 정책 | 목적 | * 식민지 확대 정책 실시(전쟁 확대) → 만주사변(1931) · 중일전쟁(1937) · 태평양전쟁(1941) → 전쟁 물자의 신속한 조달(공급) → 병참이 필요 →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만듦 * 병참(兵站) : 군사 작전에 필요한 인원과 물자를 관리, 보급, 지원하는 일을 말한다. * 기지 : 근거지. 터전. 기초. 캠프 * 병참기지 : 전쟁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공급하는 근거지. * 한반도를 대륙 침략(중국 점령)의 병참 기지(근거지)로 만듦(化) * 한반도를 침략 전쟁에 필요한 물자 공급 근거지로 이용하고자. * 한반도를 일본이 전쟁을 하는데 필요한 전쟁물자(군수품)을 공급하는 기지(근거지)로 이용하려던 정책이, 병참기지화 정책이다. * 민족말살통치 시기의 일제의 경제수탈 정책이, 병참기지화 정책이다. | |
내용 | * 대륙과 가깝고 지하자원이 많은, 한반도의 북부지역에, 군수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전쟁물자 생산 공장을 세움) → 금속· 기계· 화학 등 군수산업과 이와 관련된 중화학 공업을 집중적으로 키움(조선 공업화 정책). * 한반도의 북쪽은 중공업 중심으로, 남쪽은 경공업 중심으로. * 지하자원(철· 석탄 등) 약탈(지하자원의 생산 증대) 남면 북양 정책 : 공업 원료 증산 정책(남쪽에는 면화를 재배하고, 북족에는 양을 키우도록 함. 값싼 공업 원료 확보가 목적) → 공업 원료 수탈이 목적 | ||
결과 | * 한국이 군수산업 위주로 경제구조가 변화됨 * 중공업은 북쪽, 경공업은 남쪽에 편중됨(치우침) → 산업 불균형 심화로 광복(1945) 후, 남한은 한동안 경제적 어려움을 겪음(전력 부족 등) | ||
인적 물적 자원의 수탈 | 목적 | * 중일전쟁(1937) 이후, 국가총동원법 제정(1938)→ 일제가 전쟁 수행에 필요한 모든 것(총)을, 동원(모아서)하여 공급함 → 침략 전쟁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의 수탈(약탈) → 조선 땅에서 일본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져다 씀(물건과 물자는 물론이고 사람까지, 여성과 어린애까지) | |
내용 | 인적수탈 사람 | * 징병 : 강제적으로 징집(불러 모아)하여 일정 기간 병역에 복무시키는 일 → 징병· 지원병· 학도지원병 → 한국인을 전쟁터에 동원함 * 징용 : 강제로 노동(일)을 시키는 것을 말한다. → 공장이나 광산에, 건설현장에 강제로 동원하여 일을 시킴 * 여자 근로 정신대 : 일제에 강제 징용되어 군수 공장과 방직 공장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던 여성들을 이르는 말이다. * 일본군 위안부 : 일제에 강제 징용되어 일본군의 성욕 해결의 대상이 된 한국, 대만 및 일본 여성을 이르는 말이다. | |
물적수탈 물자 | * 공출(供出) : 국민이 국가의 수요에 따라 농업 생산물이나 기물(살림살이에 쓰는 그릇) 따위를 의무적으로 정부에 내어놓음.→ 놋그릇, 놋수저 등을 강제로 빼앗아 감(대포, 총알 등 무기 제조에 필요). 고철, 농기구 등 → 미곡(쌀, 곡식 등) 공출(군량미 확보를 위해) * 식량 배급제 실시(부족한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
(1) 민족 말살(抹殺) 정책
1) 목적
우리 민족을 일제의 영원한 노예로 만들려고
일제는 침략 전쟁을 확대하는(중일전쟁, 태평양전쟁, 필리핀 등 동아시아 침략) 과정에서, 우리 민족을 일본 국민으로 동화(同化)시켜 노예처럼 부리며 그들의 침략 야욕을 달성하려 함. → 우리의 민족성과 민족 문화를 말살하여 일제의 영원한 노예로 만들기 위한 정책이다.
2) 내용
①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한국과 일본의 조상이 같으므로 한 민족이다.
② 내선일체(內鮮一體)
내지인(일본인)과 선인(조선인)은 한 몸이다.
③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조선인은 황국(일본 = 일본황제)의 충성스런 신하와 백성이 되 어야 한다.
④ 우리말 사용 금지, 우리 역사 교육 금지
일본어(國語) 사용 강요
⑤ 황국신민 서사(誓詞) 암송 강요 - 내용
- 우리들은 황국의 신민이며 총성으로써 군국(君國)에 보답하자
- 우리 황국 신민은 서로 신애 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자
- 우리 황국 신민은 인고 단련의 힘을 양성하여 황도(皇道)를 선 양하자
⑥ 궁성 요배(遙拜) 강요
일본의 국왕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는 의식이다. ‘궁성’이란, 일본 국왕이 사는 곳을 말한다. ‘요배’는 멀리 바라보고 하는 절을 말한다. 조선은 정오(낮 12시)가 되면 일본국왕이 사는 도쿄를 향해 머리를 깊이 숙이고 절을 해야 했다.
⑦ 신사 참배(神社參拜) 강요
일본에서 황실의 조상이나 또는 국가에 공이 큰 사람을 신으로서 모신 사당인 신사에 절을 하도록 우리 민족에 강요함 → 신사참배 거부 운동 전개
⑧ 창씨개명(創氏改名) 강요
일제는 1939년 우리 겨레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없애려고, 모든 한국인에게 고유의 성과 이름을 버리고 일본식 성(姓)과 이름을 사용하도록 강요하였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학교입학 불가, 공문서 발급금지, 식량과 물자 배급에서 제외, 우편물 전달하지 않음, 일본인 교사의 구타와 질책, 우선적 징용 등의 불이익을 주어서,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창씨 개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약 20% 정도는 불이익과 죽음을 무렵 쓰고 항거함 - 죽음으로 항거하거나, 마지못해 창씨개명을 하면서 일제를 우롱한 경우도 있었다(犬子雄孫 - 개자식이 된 단군의 자손이라는 뜻)
♣ 소학교 → 국민학교(國民學校) : 국민학교령(1941)
일제(日帝, 일본제국주의)의 충성스러운 노예와 같은 국민(식민지 국민)을 양성하기 위해서 둔 학교가 국민학교였다.
' 국민학교 '라는 말은 일본의 우리나라 강점 시에 우리 백성에게 황국(皇國 일본이 황제의 나라라고 스스로를 높인 말)의 신민(臣民)으로서의 사관(史觀, 역사관)과 일제통치의 정당성을 교육하여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우리나라를 영구히 식민지화 하려는 의도로 세워진 학교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1996년 3월 1일부터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고쳐서 사용하고 있다. ‘국민학교’라는 말 자체는 좋은 의미이지만, 일제가 불순한 의도에서 사용한 말이기 때문에 초등학교로 고쳐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2) 물적· 인적 자원의 수탈
1) 병참기지화 정책 :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제는 전쟁을 확대해(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가는 과정에서 우리나라를 침략전쟁에 필요한 물자는 보급하는 병참기지(兵站基地)로 만듦.
♥ 사변(事變)
상대국에 선전포고 없이 일으키는 전쟁
♥ 병참(兵站)
군사작전에 필요한 물자를 관리․보급하는 일
♥ 야스쿠니 신사
- 일본의 신사는 8만 여 개나 된다. 신화 속의 신은 물론 역사 인물, 지역 위인, 신격화된 산이나 돌까지 신으로 모신다.
- 가장 큰 신사인 야스쿠니 신사는 메이지 유신 이후 태평양 전쟁까지 2,466,532명의 전몰자(戰歿)를 신으로 받들고 있다. 그 가운데 태평양 전쟁의 전몰자가 2,133,915명으로 87%를 차지하며, 여기엔 전쟁의 책임자인 A 급 전범 14명도 포함되어 있다.
-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 범죄인을 신으로 안치 해놓은 곳이다.
- 야스쿠니(靖國 = 나라를 편안케 한다는 뜻) 신사는 1867년 일왕의 명령으로 건립되었고, 1945년 패전 후 일반 종교 시설로 전환할 때까지 육군성과 해군성이 관할했다. 이곳은 정치와 종교가 한 몸으로 움직인 국가 신도(神道)의 중추부였다.
-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제국주의, 군국주의 정서를 상징한다.
♥ 일제의 침략 전쟁 강화 배경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대공황은 자본주의 국가들에 큰 타격을 주었다.
미국은 풍부한 자원과 광활한 영토를 바탕으로 정부가 생산에 적극 개입하여 과잉 생산을 조절하고, 대규모 실업자 구제를 위한 를 마련하여 갔고, 뉴딜정책 추진으로 공황 탈출의 돌파구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던 영국은 불록경제 강화를 통하여 공황 탈출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독일과 일본은 식민지가 별로 없었고 자국의 자원과 영토가 제한되었기에, 이들은 침략전쟁을 통해 공황 극복을 시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제의 침략 전쟁이 확대, 강화되었고 제 2차 세계 대전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어났다.
2) 물적(物的)자원의 수탈 - 중공업 중심정책
① 군수(軍需. 군사상 필요한 것) 공장 건설
금속, 기계, 화학 계통의 물자 생산
② 지하자원의 수탈
철, 석탄, 텅스텐 등
③ 식량과 물자의 수탈
일제는 1941년 금속 회수령을 공포하고, 쇠붙이를 약탈하여 전쟁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하였다.
- 공출(供出. 의무적으로 농산물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강제로 바치게 하던 일)이라는 이름 아래 식량은 물론이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고철(古鐵), 놋그릇, 수저, 송진 등 온갖 물자를 약탈하였다.
♣ 중공업(重工業)
제철· 기계· 조선· 차량 따위와 같이 용적에 비하여 무게가 큰 물건을 만드는 공업.
3) 인적 자원(人力)의 수탈
① 징용(徵用) : 공장, 광산
② 지원병, 징병(徵兵), 학도병(學徒兵) : 전쟁터
③ 근로 보국대, 여자 근로 정신대 : 공장
④ 군대 위안부(종군 위안부) : 전쟁터
♥ 인력 수탈(근로보국대)
중일전쟁 후 노동력 수탈을 목적으로 일제가 조선인을 강제연행하여 만든 조직. 1941년 <국민근로보국령>에 의해 편성된 것으로, 철도․도로․비행장뿐만 아니라 신사(神社)의 건립․확장공사에도 동원되었다. 각종 직장 보국대는 물론이고 초등학교 고등과에서 전문학교․중등학교 고학년에 이르는 학도보국대, 형무소 재소자들로 구성된 남방파견보국대 및 농민들로 구성된 강제노역보국대 등이 있었다. 근로보국대형식으로 강제 연행된 조선인 숫자는 1938~44년까지 약 762만 명 정도였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한반도를 비롯해 일제가 군수공장과 농장, 토목공사장, 광산 등을 운영하던 일본, 중국 하이난섬(해남도), 사할린, 남양군도 등으로 끌려갔다.
일제는 근로보국대, 근로정신대, 농촌근로보국대, 학생근로보국대의 형태로 조선인을 끌어 모아 국내와 국외를 가리지 않고 노동력이 필요한 곳으로 보냈다.
1938년부터 지원병 형식으로 군인을 모집하던 일제는 1944년부터 징병제를 실시해 만 20살 이상 젊은이들을 모두 징병 대상에 포함시켰다. 군인뿐 아니라 일본군에 필요한 노무 인력을 보충하려고 농경대, 근무대 등 형태로 조선인 군무원을 끌어 모으기도 했다. 학계와 조사단체에서는 군인과 군무원을 합해 61만여명이 징집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 성 동원= 여성 성 동원 피해자는 연인원 20여만명으로 추정된다. 현재 정부에 신고된 군 위안부 피해자는 200여명에 그치고 있고, 이 가운데 생존자는 147명이다. 여기에 일제가 조선인 노무자들의 생산성을 높이고 이탈을 막으려고 조선 여성들을 강제 징집한 산업 위안부의 존재도 뒤늦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 군대 위안부
군대 위안부란 한국, 중국, 필리핀 등 일본의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가, 병사들의 사기를 높인다는 이름아래 성 농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들을 말한다.
1930년대 초부터 자행되기 시작한 이러한 만행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가지 계속되었다.
일본군이 처음 군대 위안부를 창설한 것은 1932년 1월 중국 침략이 본격화하면서부터 이다. 당시 일본군들이 중국 여성들에 대한 강간 사건이 빈발하여 중국인의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고, 군대 내의 병력 유지에도 차질을 빚게 되면서 점령 정책에 지장을 받게 되자 군대 위안부가 도입되었다.
- 일제에 강제 징용되어 일본군의 성욕 해결의 대상이 된 한국․ 대만 및 일본 여성.
일제강점기 말에 일본의 노동력 부족을 메우려고 동원된 여성 노동력인 근로정신대(勤勞挺身隊) 중 일부는 성적 착취를 위하여 군위안부로 끌려가게 되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의 시작으로부터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일제가 징용령을 공포하여 한국 남성을 강제로 연행해 간 것이 수십만 명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여성들까지 끌고간 것은 전쟁이 확대되면서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정신대로 끌려간 이들은 12~40세의 미혼여성으로 일본과 한국 등의 군수공장에서 일하였으나, 군위안부로 몸을 바치는 치욕을 당하는 숫자가 점차로 늘어갔다. 1938~1942년 무렵에는 간호보조․군부대 잡역․여자 특수군속 등의 명목으로 동원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일본군이 주둔하는 곳에 배치되어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하였다.
1992년 정신대의 고용조건․동원권자․의무규정 등을 명시한 일왕 칙령 제519호 〈여자정신근로령(1944년 8월 22일 공포)〉이 발견되어, 한반도에서 일본 정부가 조직적으로 정신대(군위안부)를 징발한 증거가 포착되었다. 여기에는 대만․일본에 앞서 약 20만 명의 한국 여성이 '공출(供出)'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의 관리 ․ 감독은 일본군이 직접 담당하였으며, 패전 후에는 전선에 그대로 방치한 상태였다.
그러나 귀국한 대다수도 정신적․육체적 고통과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1993년 3월 정부 차원에서 구호와 아울러 일본 정부의 철저한 진상 규명과 해명을 요구하였으나, 해결되지 않고 있다.
♥ 나눔의 집 : http://www.nanum.org
<나눔의 집>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에 의해 성적 희생을 강요당했던 생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 살고 있는 삶의 터전입니다
증언(證言) : 문필기 할머니
나는 1925년에 경남 진양군 지수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구멍가게를 했다. 가게에서는 고구마, 생선, 감, 과자 등을 팔았다. 가게 일은 어머니가 주로 하고 아버지는 장에서 물건을 사들이거나 팔러 다니곤 했다. 그리고 우리 소유의 논밭도 있었다.
형제자매는 2남 9녀였다. 딸 아홉 중 셋은 어렸을 때 죽었다. 어머니가 아들을 못 낳는다고 작은 어머니 몸에서 아들을 낳아 여섯 살 때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그 후 어머니가 마흔한 살에 아들을 낳았다.
어렸을 때 내 이름은 미요코(美代子)였다. 나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내가 아홉 살 때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쌀 한 말을 팔아 보통학교에 넣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시나는 공부하면 여우가 된다고 입학한 지 5일 만에 학교를 찾아와 교실에서 나를 끌어내고 책을 모두 태워 버렸다.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 일로 나는 아버지에게 맞기도 많이 맞았고 결국은 집에서 쫓겨나 큰집에 가 있었다. 다시는 공부를 안 하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부모 안 보는 데서 공부해 똑똑한 사람이 되어 세상을 바로 살아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촌사람 만나 결혼하면 내 장래가 매양 그 꼴 일거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크게 가지려 하였다. 나는 정말 공부를 하고 싶었다. 내가 아들이었다면 공부를 원껏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 위로 언니들이 어려서 죽었으므로 내가 맏이 노릇을 했다. 나는 아홉 살 때부터 집에서 살림하고 밭일도 하고 목화도 따고 물레질과 길쌈도 했다. 그리고 구멍가게 일도 거들었다. 구멍가게에서 삶은 고구마도 팔았는데 그 고구마 삶는 것도 내 몫이었다. 농사일은 사람을 사서 하였으므로 끼니때가 되면 밥을 해서 내다주었다. 집안일은 매우 힘들었다. 큰딸 감으로 태어난 것이 죄라 그렇게 많은 일을 해야 했다.
- 하도 공부가 하고 싶어서
진양군의 우리 마을에는 일본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50대 정도의 아저씨가 살았다. 어느 날 그 아저씨가 나에게 말하기를 공부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으로 보내 주겠다고 했다. 나는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공부시켜 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승낙을 했다. 그러나 부모에게 그 사실을 말하면 호되게 매를 맞을 것 같아 숨겼다. 그때가 내가 열여덟 살 되던 해인 1943년 가을이었다. 그때 나는 집안일도 고되고, 아버지가 하고 싶은 공부도 못하게 하였으므로 집을 떠나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싶었다.
며칠 후 저녁 무렵에 그 아저씨가 찾아와 잠깐 다녀올 데가 있으니 나오라고 해서 부모 몰래 나갔다. 그랬더니 우리 집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에 짐 싣는 트럭을 세워 놓고 있었다. 거기에는 우리 동네 파출소에 근무하는 일본인 순사 다나카도 와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나를 트럭에 태워 부산으로 데려갔다. 집에서 입고 있던 검은 치마와 저고리를 그대로 입은 채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그들을 따라가게 되었다.
나를 데려간 곳은 부산의 어떤 미용실이었다. 미용실에서 내 긴머리를 자르려 해서 못 자르게 반항했으나 결국은 잘렸다. 그 후 우리 동네 아저씨는 나를 일본인 순사 다나카에게 넘겨주고 가면서 공부시켜 줄 테니 말 잘 들으라고 했다. 집에서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갔는데 자주색 원피스를 가져와 갈아입으라고 했다. 내가 입고 간 치마저고리는 더러워서 안 된다며 깨끗하고 예쁜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했다. 그곳에는 나 말고도 조선인 여자 네 명이 더 있었다. 그들 중에는 학생복을 입은 이도 있었다. 식당에서 아침을 먹은 후 같이 있던 조선인 여자 네 명과 함께 부산역을 출발하였다. 우리가 탄 기차는 민간인이 타는 칸도 있고 군인이 타는 칸도 있었는데 우리는 군인 칸에 탔다. 일본 군인이 우리를 인솔해갔는데 그들은 우리들을 따로따로 앉혀 서로 이야기도 못하게 하였다. 서울, 평양, 신의주를 거쳐 만주로 들어갔다. 가는 동안 두 차례에 걸쳐 대여섯 명의 우리 같은 조선인 처녀들을 또 태웠다.
- 반항하며, 맞으며, 당하며
기차에 같이 타고 갔던 우리들은 모두 만주에 있는 군위안소에 배치되었다. 위안소가 있었던 지명과 부대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곳의 겨울은 매우 길고 아주 추웠다. 여름은 짧았고 우리나라의 가을 날씨 같았다. 부대에 도착했을 때에도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할 것인지조차도 몰랐다.
위안소에는 30 명가량의 위안부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조선인 위안부들이었다. 주로 이북여자들이 많았고 그 외에도 부산 사람이 있었다. 위안부들은 대개 18˜19세 가량 되었다. 위안부들 중에는 학교 다니다가 끌려온 사람도 있었다. 내 이름이 미요코였기 때문에 위안소에서는 나를 미짱이라고 불렸다. 나는 기요코와 가장 친했다. 얼굴이 갸름하고 잘 생긴 기요코는 평양 기생이었는데 좋은 곳에 소개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서 위안부가 되었다고 했다. 위안소에 있는 조선인 남자가 여자를 데려오라는 일본 군인의 부탁을 받고 고향에 가서 기요코를 속여서 위안소로 데리고 왔다고 한다. 위안소에는 위안부들 외에 이북이 고향인 조선인 남자 두 명과 청소, 심부름 등을 하는 중국사람 한 명이 있었다. 한 조선인 남자의 부인은 이북에 사는데 가끔씩 위안소에 다니러 와서 밥과 김치 등을 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위안소에서 가까운 부대소속 군인들이 교대로 파견 나와 보초를 섰다.
위안소에서 우리를 감독하고 돈표를 모아서 계산하는 일을 하는 조선인 남자 두 명이 있었다. 그들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옷 색깔은 노랑에 풀색이 섞인 색이었고 가슴에는 배지를 달고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우리들을 괴롭히지는 않았으나, 키가 작은 또 다른 군속은 우리를 회초리로 때리고 지독하게 굴었다. 특히 위안부들이 일본인 군인들과 싸우거나 군인을 상대하지 않으려 하면 심하게 때렸다.
위안소는 일본식 집이었는데 위안소 주변에는 부대가 있었다. 위안소 건물은 ㄴ자 형태이고 2층집이었는데 1층과 2층을 모두 위안소로 사용했다. 위안소의 간판은 있었으나 글을 몰랐기 떄문에 뭐라고 씌어 있었는지 모른다. 위안소 건물 주위를 둘러싼 담도 있었다. 1층에는 우리를 감독하던 조선인 남자 두 명의 숙소와 식당이 있었다. 2층에는 위안부들의 방이 있었는데 다다미 한 장 반 정도의 크기였다. 난방은 밖에서 한쪽 벽으로 석탄을 때서 벽이 따뜻해지게 하는 페치카 방식이었다. 위안부 한 사람이 한 개의 방을 사용했다. 방안에는 이불과 옷걸이, 화장품 등이 있었다.
처음에 위안소에 도착하자 성병이 있는지 처녀인지 등을 검사했다. 그 후 군의는 나에게 몇 달 동안 간호부일을 시켰다. 그래서 부상병의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로 감는 일을 배워서 했다. 그리고 병원의 빨래도 했다. 낮에는 병원 일을 하고 밤에는 군의가 나에게 자러 왔다. 나는 그 군의에게 처음으로 정조를 빼앗겼다. 여자에게 정조가 중요하다고 듣고 자랐고 내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으므로 내 몸을 버렸다는 생각에 많이 울었다. 간호부 일을 하는 동안은 군의 외에 다른 군인들은 상대하지 않았으나, 몇달 후에는 간호부일을 그만두게 하고 위안부짓을 시켰다. 그러나 위안부짓을 하면서도 부상자들이 많을 때는 가끔씩 병원에 가서 간호부일을 해야 했다.
위안부들은 모두 똑같은 원피스를 입었다. 옷은 부족하지 않게 여러 벌을 주었다. 여름을 제외하고는 방안의 한쪽 벽을 따뜻하게 난방 해 주므로 내복을 입은 적은 없었다. 빨래는 우리들이 각자 했다. 머리는 단발머리를 했었다. 식사로는 조밥과 단무지, 양배추 김치를 주로 먹었다. 아침에는 된장국이 나왔다. 일본의 국경일에는 고기반찬이 나올 때도 있었다. 아침과 저녁으로 하루 두 끼의 식사만 주었다. 밥은 우리가 교대로 했다.
위안소에 있을 때 월경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가 병에 걸린 줄 알고 깜짝 놀랐으나, 기요코 언니가 가제로 생리대를 만들어 주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 군인들이 많은 토요일, 일요일에는 월경 중에도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그때는 참 괴로웠다.
평일 날 아침에 일어나면 함께 모여 조회를 하고 가끔 군인들이 나와서 방공연습을 시키기도 했다. 조회는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 했는데 위안소 마당에 모여 일본에 충성하자는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고 일본 군가도 불렀다. 그러나 일요일에는 장교들이 자고 가므로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대중없었다. 평일에는 군인들이 싸움터에 나가느라 낮에는 거의 오지 않고 저녁부터 왔다. 가끔 외출 나온 군인들이 낮에 왔다. 그래서 평일은 열 명 내외의 군인이 다녀갔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아침 여덟 시부터 군인들이 왔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점심밥도 주므로 하루 세 끼를 먹을 수 있었다. 밥 먹는 시간 외에는 계속 군인을 받아야 했다. 저녁 일곱 시 이후에는 장교들이 왔다. 장교들은 초저녁부터 와서 긴 밤을 자고 다음날 새벽이나 아침에 갔다. 군인들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조선인이 들어오면 붙잡고 실컷 울기라도 하겠는데 3년 동안 조선인 군인은 한번도 못 보았다. 다른 위안부들 중에는 조선인을 보았다는 이도 있었다.
군인들은 위안소에 왔다갈 때 손바닥 반 만한 크기의 누런 색 돈표를 내고 갔다. 장교는 사병보다 더 많은 액수의 돈표를 냈다. 어떤 군인은 돈표를 안 내려는 이도 있었다. 규정시간을 넘긴 사람에게는 돈표를 더 내놓으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불쌍해서 그냥 내보내기도 했다. 돈표를 받으면 우리가 갖지 않고 우리를 관리하던 조선인 남자에게 갖다 주었다. 그러면 그 개수를 세어서 위안부 각자가 하루 몇 명의 군인을 받았나를 막대그래프로 크게 그려 벽에 붙여놓았다. 나는 다른 위안부들보다 군인을 적게 받는 편이어서 자주 혼났다. 군인이 적은 평일은 열 명 내외를 상대했고, 토?일요일은 40˜50명을 상대해야 했다. 우리는 돈표를 갖다 주기만 했지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저금을 한 적도 없고 돈을 내놓으라고 항의한 적도 없다. 군인들이 와서 따로 돈을 주고 간 적도 없었다.
평일 낮에는 주로 내 옷을 빨거나 삿쿠를 씻었다. 군인들이 쓰고 간 삿쿠를 안팎으로 깨끗이 씻어서 소독하고 약을 발랐다가 다시 사용했다. 토`일요일에 군인들이 쓰고 간 삿쿠를 받아서 모았다가 씻어서 다시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삿쿠를 씻을 줄 몰라 한 달 가량 다른 여자들 하는 것을 보며 배웠다. 대개 위안부 1인당 삿쿠 40˜50개씩을 보관하고 있다가 군인들이 들어오면 끼워 주었다. 보통 세 번 사용하면 버리고 새 삿쿠(콘돔)로 바꾸어 주었다.
군인들 중에는 사면발이1) (사면발이(phthirus pubis)는 음모(陰毛)에 기생하는 이로, 물리면 음부에 양진증(痒疹症)을 일으킨다.)라는 이가 있는 사람이 많아 대부분의 위안부들이 이에 옮았다. 기요코 언니와 나는 서로 음부에 붙어 있는 이를 핀으로 떼 내 주었다.
군인들은 문 밖에 줄을 서 있다가 차례로 들어왔는데 서로 먼저 들어오려고 자기들끼리 싸우곤 했다. 그들은 각반을 벗고 기다렸다. 앞 사람이 위안소 안에 오래 있으면 빨리 나오라고 문을 두드리고 법석을 떨었다. 군인들은 위안소에 한번 들어오면 사병은 삼십 분, 장교는 한 시간 있을 수 있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5분 내외면 끝내고 나갔다.
군인들은 위안소에 들어와서 반드시 삿쿠를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군인들 대부분은 성병이 무서워 삿쿠를 사용했다. 군인들 중에는 자기가 직접 삿쿠를 가지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삿쿠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군인도 있었다. 나는 성병이 무서워 세상없어도 삿쿠를 해야 한다고 끝까지 버텼다. 삿쿠를 사용하지 않으면 상사에게 이른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고 성병이 옮으면 서로 좋지 않으니 삿쿠를 끼라고 타이르기도 했다. 부모형제를 떠나서 끌려온 것도 억울한데 병까지 옮으면 어떻게 하냐고 반항했다.
군인 한 사람을 상대하고 나면 1층에 있는 목욕탕에 내려가서 소독약을 넣은 물로 밑을 씻고 와서 다시 군인을 받았다. 소독약이 목욕탕에 있었다.
군인들 중에는 여자를 오래 못 봐서 그런지 들어오자마자 사정해 버리는 이도 많았다. 나를 괴롭히거나 못되게 구는 군인에게는 죽을힘을 다해 반항했다. 그래서 군인과 싸우고 있으면 밖에 줄서서 기다리던 군인들은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나오라고 욕했다. 또 군인과 싸우면 많이 맞기도 했다.
위안부 생활을 하면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어떤 군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받아 주지 않는다고 술을 먹고 와서 칼을 뽑아 들고 행패를 부렸다. 또 어떤 군인은 술 먹고 위안소에 들어와 칼을 다다미에 꽂아놓고 성행위를 하는 사람이 많아 방바닥에 칼자국이 많이 있었다. 이것은 자기 하고픈 대로 실컷하게 해달라는 위협이었다. 그러다 안되면 칼을 가지고 덤벼드는데 이럴 때는 빨리 피하거나 혹은 누가 찾는다고 거짓말을 시켜 내보내곤 했다. 그곳에 간 지 1년쯤 되었을 때 어떤 군인이 너무 괴롭히길래 나도 화가 나서 발로 찼더니 그는 내 옷을 다 찢고 발가벗겨 때리고 칼을 들이댔다. 그리고는 밖에 나가서 시벌겋게 달구어진 인두 모양의 불쑤시개를 가지고 들어와 내 겨드랑이를 지졌다. 그 상처로 석 달 동안 고생했다.
특히 긴밤 자는 장교들은 여러 번 접촉을 요구하며 아주 귀찮게 굴어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또 긴밤 자는 장교 중에는 술이 잔뜩 취해 들어와서는 밤새도록 다 토하고 잘 되지도 않으면서 접촉을 하려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비위가 상해 참을 수가 없었다.
군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왜 부모 말을 안 듣고 이 신세가 되었나 싶어 후회가 막심했다. 결국은 내 자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해만 지면 부모 생각에 가슴이 저미었다. 차라리 부모가 시집가라 했을 때 말을 들을 걸, 공부가 뭐길래 공부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 이곳에 와서 이 신세가 되었나 생각하며 절망하였다. 가족들이 미칠 듯이 그리워 매일 울고 남의 슬픈 소리를 조금만 들어도 울곤 했다. 나는 집 생각, 엄마 생각으로 마음에 병이 나서 몸져 눕기도 했었다. 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 나를 잘 봐주던 군의는 특별히 나에게 영양제와 안정제를 주기도 했다.
그 군의와 함께 마차를 타고 극장에 가서 쓰바키히메라는 제목의 일본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허락을 받아 주어서 위안소 주변을 구경한 적이 한 번 있었다. 그 외에는 외출해 본 적이 없다. 보초병들이 늘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도망갈 계획을 짤까 봐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도 못하게 했다. 그래서 위안부들끼리도 서로 잘 몰랐다.
우리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병원에 가서 성병검사를 받기 위해 소변 검사, 피 검사 등을 받았다. 위안소에 있을 때 나는 임질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606호 주사도 맞고 약도 발라 나았다. 성병이 걸렸을 때는 군인을 상대하지 않고 쉬었기 때문에 그래도 지내기가 좀 나았다. 그 외에 다른 병을 앓은 적은 없었다.
내가 글을 모르므로 평양에서 온 위안부 기요코가 우리집에 보내는 편지를 대신 써줘서 딱 한번 집에 편지를 했다. 내가 있는 곳의 주소는 쓰지 않고 집주소만 써서 보냈다. 편지는 위안소에서 일하는 중국인 보이에게 몰래 부탁하여 부쳤다. 나는 공부가 한이 되어 공부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 이런 곳에 왔기 때문에 동생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공부를 시키라고 편지에 썼다. 내가 위안부로 있다는 이야기는 쓰지 않고 그저 잘 있다고만 했다.
- 고향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내가 위안소에 간 지 3년째 되는 스무 살에 종전이 되었다. 갑자기 군인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위안소에 오질 않아 편안하게 잘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소련 군인들이 위안소에 들어와 총을 들이댔다.
그들은 우리의 옷을 벗기려 했다. 일본 군인들이 도망가고 나니까 이제 소련 군인들이 우리를 겁탈하려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를 관리하던 이북 출신의 조선인 남자가 큰일났으니 쓰던 물건 모두 팽개치고 어서 도망가자고 했다. 그래서 그와 그의 부인, 기요코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이 함께 얼굴에 시커멓게 칠을 하고 위안소 건물 뒤로 돌아나와 도망쳤다. 나머지 위안부들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는 중국에서 뚜껑도 없는 화차를 타고 압록강까지 와 걸어서 흥남에 도착했다. 기요코와 조선인 부부는 고향이 이북이므로 여기서 그들과 헤어졌다. 그후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밤낮으로 걸어서 평양과 개성을 거쳐서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역에 도착하여 주먹밥과 고향가는 기차표를 얻었다. 그 표를 받고는 이제 고향에 돌아가는구나 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고향집에 돌아가니 식구들은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왔다고 깜짝 놀래며 나더러 귀신이 아니냐고 했다.
- 방황의 세월
고향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이미 병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나를 시집보내려고 성화였으나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위안부였는데 누구와 결혼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내가 위안부였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공부도 하고 공장에도 취직했었다고 말했다. 나는 마음이 괴로워 더 이상 집에 있을 수가 없어 고향에 돌아온 지 1년 만에 온다간다 말도 없이 집을 나왔다. 나와서는 진주에 있는 사촌 이모집에 갔다. 이모는 여관을 하고 있었으므로 이모집에서 일을 거들어주며 지냈다. 그후 이모집을 나와 목포, 광주, 전주 등의 술집에 있다가 남자들이 하도 귀찮게 굴어 그만두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내가 위안부였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볼까 봐 두려워 자꾸 옮겨다녔다. 돈을 마련하여 신마산으로 나와 전세를 얻어 하숙집, 대폿집 등을 했다. 그때 주위 사람들은 젊은 여자가 대폿집하지 말고 시집을 가라고 했다.
마산에서 대폿집을 하다가 서른여섯 살에 철도의 선로꾼을 만나 서울로 와서 살림을 차렸다. 나와는 여덟 살 차이였는데 그와 별로 정분도 없었다. 서울 와서 그는 철도의 선로꾼일을 하고 나는 집안에서 살림을 했다. 그러다가 집안형편이 어려워 나도 따라다니며 노동일을 많이 했다. 그는 매일 술을 먹고 내 속을 썩였다. 그는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결혼을 해서 부인과 자식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나를 속인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몇 번을 헤어지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되었다. 혼인신고도 안하고 살았는데 결국 그는 병들어 빚만 남기고 죽었다. 현재는 동생의 손주를 데려다 자식처럼 키우고 있다. 내가 외로워서 네 살 때부터 데려다 키웠다. 그리고 새마을 취로사업을 나가 벌어 먹고 산다. 또 일거리가 있을 때는 밤에 이웃집에 가서 한 시간에 1,000원씩 받고 부업을 한다. 지금 사는 방은 반지하 방으로 보증금 150만원에 월 7만원씩 낸다.
- 하도 억울해서
동네 문방구에 가서 정신대에 관해 써 붙여 놓은 것을 보았고, 또 TV에서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증언을 들었다. 그래서 나도 신고해서 억울함을 면할까 싶어 1992년 6월에 신고했다. 처음에는 신고하는 것을 매우 망설였으나 지금까지 내 가슴속에만 넣고 있던 것을 다 털어놓고 나니 가슴이 후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