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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1 – 설교문 (김성희 목사, 우리 회 전임회장, 독립문교회)
성경 : 마가복음 5장 24~34절
제목 :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비접촉 비대면 언컨텍트 사회
코로나19가 가져온 가장 큰 환경은 비접촉, 비대면, 일명 언컨택트(UNCONTACT)사회입니다.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너무도 조심스러운 사회풍토가 되었습니다. 영상예배는 괜찮나요? 온라인헌금은 괜찮나요? 라는 물음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온라인을 통해서 하는 성찬은 어떤가요? 질문하는 때입니다.
우리사회는 무조건적 연결사회에서 ‘선택적 단절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택적 단절입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단절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우리사회는 이미 느슨한 연대, 언컨택트사회로 바뀌어 가는 중이었습니다. 현대사회는 끈끈한 연대라고 믿어왔던 가족, 직장, 인맥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독신, 동거, 비혼이 많아지고, 종신고용에서 수시채용으로 바뀌고, 수직관계 인맥을 넘어 온라인을 통한 새로운 관계망이 수시로 만들어 지고 있습니다. 쇼설네트워크에서 클릭 한번으로 친구가 되어 누구나 쉽게 말을 걸기도 하지만 또한 쉽게 단절되기도 합니다. 언컨택트를 통해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갈등과 스트레스를 회피하려는 욕망과 맞닿아 있습니다.1) 이미 진행중이던 언컨택트사회는 단지 코로나19로 더 심화되었을 뿐입니다. 젊은이들은 만나서 말하기보다는 카톡이나 문자 등 비대면으로 소통하는 것을 더 선호합니다. 스마트폰 앱을 통해 물건을 주문하고, 이제 문밖에 놓고 사진문자만 보내고 가니, 얼굴 볼 일도 없어서 관계스트레스도 줄어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언컨텍트 사회는 ‘끼리끼리’ 문화가 더 심화됩니다. 비슷한 수준과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폐쇄된 인간관계를 유지합니다. 공공교통수단 대신 자가용이, 특정집단을 위한 공간들이 각광을 받습니다. 연간 구입금액에 따라 전용엘리베이터, 소독, 안전관리가 철저한 vip공간이 따로 제공됩니다. 미술관도 vip를 대상으로 오픈 전시전에 프라이빗 전시를 합니다. 물론 가격은 비싸고 일반인들은 정보조차 제공받지 못합니다. 그들만의 리그가 더 공고해 지고 있습니다.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
열 두 해를 혈루병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습니다. ‘12년’ ‘혈루병’ ‘여자’ 이 세 단어만 들어도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셈에도 들지 못했던 여자, 불결하게 생각했던 피흘리는 병, 12년이라는 긴 시간, 이 여인은 힘들고 비참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 여인처럼 피 흘리는 고통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인은 병을 고치기 위해 여러 의사들을 찾았지만, 오히려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느라 온갖 수모를 겪었으며 가지고 있던 재산마저 잃은 것입니다. 병자의 아픔을 치유하고 고통을 덜어주어야 하는 사람이 의사입니다. 그런데 병자를 대상화하고, 갖은 오진으로 효험도 없이 괴로움만 더하게 만듭니다. 의사가 의사의 역할을 못할 때 환자는 가슴에 멍이 들고 더 비참해집니다.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일이 의사의 사명입니다. 죄악으로 힘들어 하는 이들은 누가 깨끗하게 하고 회복시켜야 할까요? 살리는 의사 역할을 해야 하는 직분, 교회에서는 목회자와 장로 등의 지도자들이 아닐까요? 지도자의 책임은 실로 막중하여 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병을 고쳐야 할 의사에게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의 상태에서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습니다. 여인의 관심이 새로운 치유자인 예수님께로 옮겨갑니다. 여인은 무리가운데 끼여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녀는 혈루병에서 고침 받는 것이 너무나 절실했기에 예수님 뒤로 다가가서 그의 옷에 손을 댑니다. 함부로 다른 남자를 만지면 안됩니다. 여자. 그것도 하혈하며, 피흘리는 사람이 아닙니까?
이스라엘 율법은 피흘리는 것을 부정하게 생각하여 정상적인 월경 때도 일주일간은 격리되어 성전에 갈 수도 없었고(레15:19), 심한 경우 마을에서 추방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혈하는 여자가 혼란을 틈타 예수님을 만진 것입니다. 뒤에서 살짝 옷에 손을 대면서 이 여인은 단지 손만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 믿음도 대단하지만, 그 많은 인파를 헤치고 예수님의 옷을 만진 그 용기도 놀랍습니다. 외친다는 것, 관습을 깨고 실천한다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녀는 할 수 있어서 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젖 먹던 힘까지 발휘했던 것입니다. 여인은 단순히 옷자락을 붙잡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뢰로 그 분의 비전과 능력을 붙잡은 것입니다.
여성목회자들인 우리도 조용히 있고 싶어도,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상황가운데 서게 됩니다. 주변부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일수록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야 하기에 더욱 힘을 내어 그 옷자락을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 길에 함께 할 사람들을 만들어 냅시다.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함부로 손을 대면 안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낯선 이들과의 만남이 두려움이 되고, 가까운 이들과도 얼굴 마주보고 밥 먹기가 부담스러운 이 시대에 우리는 누구와 어떻게 만나야 할까요?
혈루병 걸린 이 여인은 예수님을 살짝 만졌습니다. 만진다는 것은 그리움, 간절함, 사귐의 의미가 있습니다. 접촉하고 만질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때로는 댓가를 치루기도 하지요. 예수님은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5:31)고 소리칩니다. 바이러스나 전염병이 유행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예수님은 아셨기 때문입니다.(30절) 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이렇게 많은 무리가 에워싸서 떠밀려 가고 있는데, 누가 예수님께 손을 대었느냐를 물으십니까?” 그냥 누군가 스쳤다는 것입니다. 찾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큰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24, 31절)만 보았지만, 예수님은 자기 몸에서 능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직접 느끼며 “내 기를 빼가는 자가 누구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에워싼 많은 접촉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이 여인의 떨리는 손길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기운은 교감이 있어야 움직입니다. 여인의 간절한 손길과 예수님의 민감한 마음이 만나 공명(맞울림)을 일으킵니다.
만짐을 통해 관계가 변합니다. ‘부정의 자리’에 소외된 채 살고 있는 이웃들이 손을 내밉니다. 부정하다고 정죄하기 이전에, 그의 아픔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연민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그를 나처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의 자리에 함께 서는 것입니다. 그도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십니다.(32절) ‘이 일’은 무슨 일일까요? 여인이 예수님을 만진 일, 그 순간 혈루 근원이 마르고 병이 나은 일입니다.
여인은 이것을 온몸으로 느낍니다. ‘여자에게 이루어진 일’은 예수님의 능력에 힘입어 12년 동안이나 해결하지 못했던 병으로부터 치유된 일입니다.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29절) 제자들은 알지 못했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묻는지 알았습니다.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33절) 여인이 두려워 떤 것은 근심, 걱정, 무서움이 아닙니다. ‘깨달은 자로서의 두려움’입니다. ‘경외감. 놀라움. 신비로움’입니다. “내가 믿는 대로 이루어졌구나.” 놀라워하며 여인은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모든 사실을 털어놓습니다. 간절한 기대와 진솔한 고백은 공감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눈빛과 몸짓, 이야기 속에서 그 간절한 마음과 예수님을 향한 진실된 믿음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따뜻하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34절) 예수님은 이 여인을 “딸아”라고 부르심으로 -혈루병으로 12년간 소외
되고 부정하게 여겨지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딸’로서의 존엄성을 회복시킵니다. 만짐은 놀라운 변화를 가져옵니다.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냅니다.
따른다는 것
당시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치고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혈루병 걸린 여인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따릅니다. 모두들 저마다의 소원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사회 지도층인 회당장까지도 예수님께 나아와 그의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22-23절) 회당장 정도 되면 병든 사람들의 고통을 알고 함께 그 아픔을 치유하며 병든 사회를 고쳐가야 하는데, 자기 딸마저도 병들어 누워 있으니 총체적인 난국입니다. 예수님은 이 회당장 야이로의 간구에도 귀를 기울이며 그와 함께 가십니다.
병에서 치유받고 싶은 사람이 어찌 이 회당장뿐이겠습니까? ‘큰 무리가 따라가며 예수님을 에워싸 밀더라’(24절) 병든 사회,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밀며 따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온전히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24절) 우리들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떠밀고” 있습니다. 무리들은 자신들의 기대와 희망을 예수님이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며 자기의 욕망을 예수님께 투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따름이 아니라 단지 자기 욕망을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밀면서 따른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이 고통에서, 이 아픔에서 구해 달라고 예수님을 앞장세우고 있지만, 스스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이 내 문제를 해결해 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러다가 자신들의 욕망을 예수님이 충족시킬 수 없다고 느끼게 되면 예수님을 떠납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그 분을 십자가에 매어 답니다. ‘떠미는 믿음’, ‘그저 빌기만 하는 믿음’은 쉽게 변합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 예수님을 붙잡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만집니다. 예수님과의 접촉, 이것은 단순한 만짐이 아닙니다.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28절). 일반적으로 치료자가 병자에게 안수하여 병을 고칩니다. 그런데 병자인 여인이 치료자인 예수님을 만짐으로 병이 낫게 됩니다. ‘그의 혈루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29절) 그녀는 단순히 구하고 떠미는 것을 넘고, 의사에게 의존성을 넘어 스스로 자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나섰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만진 순간 여인은 그 능력으로 치유됨을 온몸으로 알았고, 예수님도 자신의 능력이 이 여인에게 전해짐을 아셨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런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닐까요?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고 나누는 삶
비접촉, 비대면 언컨택츠 시대라고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온라인 만남이 더 많아진 시대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만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우리는 만나며 관계합니다. 컨택트시대에는 공간, 지도자, 질서가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온라인 만남에서는 상호적 관계, 신뢰, 자발성이 중요해졌습니다. 많은 군중가운데 떠밀려가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참여가 아닙니다. 직접 클릭하고,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참여가 필요합니다.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삶은 우리를 풍성하게 합니다. 나의 소원과 나의 노력으로 이루어가는 일은 더 활력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그의 옷만 만져도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인은 의존성과 피해의식을 넘어 주체적인 한 인간으로 서서 실천합니다. 예수님의 옷을 만지며 그분의 인격을 접하고, 그 분의 능력을 공유합니다. 그 믿음이 자기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를 구원했다”고 하지 않으시고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원하다’는 동사는 헬라어로 ‘세소켄’입니다. 이 단어는 신체적 치유와 정신적 구원을 동시에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평안은 ‘에이레네’ 평화라는 말로 히브리어 ‘살롬’과 같은 의미입니다. 샬롬은 삶의 온전함과 충만함을 말합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34) 예수님과 능력을 나눈 여인은 단지 병고침을 넘어 몸과 마음에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의 딸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더 신명나게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 여교역자들이 섬기는 교회가 생명력으로 가득한 활기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만남이 두려움이 되는 사회에서도, 구원을 이루고 평화를 만드는 만남은 멈출 수 없습니다. 무리 가운데 에워싸여 밀고 따르던 소극적인 태도를 넘어, 주체적으로 손을 뻗어 능력의 옷자락을 만집시다. 연약하고 변방에 서 있을수록 더욱 간절함으로 접촉합시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능력이 나누어지는 그 공명의 순간을 계속 만들어 갑시다. 오늘 여러분이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뚝 서서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고 나누는 복된 삶을 만들어 가시길 축원합니다.